[그드십] WELCOME, NORMAL END
그 드라마의 15화 / 서원+해준+오늘, 원작과는 다른 분기의 엔딩으로 재회 날조.
작성: 2020
공개: 2024/05/20
원작 에필로그하고는 달라서. 그냥 노멀엔드 IF 라는 것으로.
“해영아, 티비에 니 새끼 나왔다.”
채널을 돌리다말고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해준은 이 역시 익숙하게 해영을 불렀다. 최애가 나오는 걸 봤는데 안 말해줘서 방송 놓친 걸 나중에라도 안다면 뒤끝이 무섭다.
“니 새끼라고 부르지 말랬지!”
“니 새끼를 니 새끼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르냐. 맨날 내 새끼 내 새끼 하더니.”
“내가 하는 거랑 오빠가 하는 거랑 같아?”
꼭 욕 같잖아 하고 해영은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도 뻔뻔스럽게도 냉큼 소파에 주저앉았다. 찌푸린 얼굴은 얼마 가지 않았다. 이 집안 유전자에는 어머니에게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얼빠의 혼이 흐르고 있었고 해영이는 그 모친의 판박이와도 같은 자식이었으며 해준더러 니 새끼라고 하지 말라던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습관과도 같은 감탄사와 함께 오늘도 내 새끼 잘생겼다고 탄식을 뱉으며 헤벌쭉 표정이 펴졌으므로.
2번쯤 정주행한 드라마에서 보아 익숙해진 주연급 탤런트는 예능에 나와 갯벌에 구르면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러나 그 익숙한 얼굴이 참으로 낯설어서, 해준은 역시 그를 박서원이라고는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정말 이상한 드라마였다. 우주의 기운 내지는 악의가 모여야 가능했던 드라마였어요라고 몇 년 후 누군가가 말했다. 특수효과가 난무할 설정의 B급 소재 케이블 드라마인데 캐스팅은 공중파급. 다들 스케줄이 어떻게 맞아서 그리 되었다고 하긴 했는데, 공백 따윈 있을리 없는 그 사람들의 스케줄이 맞는다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한 기적이다.
그리고 여기 그게 진짜로 기적이랄지, 다른 세상이 만들어낸 이적임을 아는 사람이 한 명.
“오빠! 시즌2 날짜 나왔대!”
“……방송국 돌았대냐?”
“뭐야 재주행 같이 보길래 재밌었나 했더니만”
“재밌긴 뭐가 재밌냐 한 화에 다 털어먹은 망작 너도 욕했잖아.”
“시즌2 나온다잖아. 수습하겠지. 내 새끼 이번에도 주역일까.”
“걔가 무슨 주역이야 빌런이지.”
“오빠 진짜 내 새끼 왜 그렇게 싫어해? 설마… 질투해? 그 얼굴로?”
어디다 비빌 걸 비비냐고 거울보고 반성 좀 하고 오라며 해영이가 우우 하고 비난했다.
글쎄 왜 그렇게 싫을까. 박서원 자체에 대해서라면… 사실 이제는 그렇게 싫을 것도 좋을 것도 없다. 그 세계의 나는 박서원 이상으로 돌아있는 놈이었고 해영이 있고 가족이 있는 이 현실로 돌아오고 싶어 누구보다 간절했던 나는 상실에 대한 그 절절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니까.
아마도 나는, 박서원의 얼굴을 한 누군가가 연예인이고 그에게 있어 그 처절한 인생은 그저 연기일 뿐인 채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게 배알이 꼴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경우에 맞지않는 화풀이다.
박서원이 대체 뭐라고.
정말 뭐라고.
깨어진 여의주, 박살난 희망, 한 세계의 끝.
자신이 한 것도 아닌 배반의 무게는 지금도 여전히 손 끝에 걸려있다.
티비 광고에서는 한때 같은 회사 동료였던 걸그룹 멤버가 치킨을 광고한다. 히트한 노래를 적당히 가사만 바꾼 후크가 귀를 파고든다.
그리고 모두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참으로 동화같은 이야기 아닌가. 내 현실에서 그들은 연예인이고, 성공했고, 행복하며, 삶에 구김은 없고, 망작 드라마 하나 성공하든 망하든 사는데 별 영향도 없고. 이 곳은 세계 하나가 무너져내리는 비극을 끝난 이야기로 마무리한 채로도 마치 커튼콜의 뒤에 모든 출연자들이 웃으며 인사하는 것 같은 편의주의적인 천국이어서.
그것이 ‘내’ 현실이고, 현실이라 다행인데도.
그런데도 이 현실이 가끔 부당할 정도로 비겁하다고 느끼는 내가 있다. 나 자신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현실로 돌아오기를 가장 바랐을 것이면서도……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마치 기만처럼 느끼고 만다.
안다. 비틀린 방식의 자괴감이다.
나는 돌아왔다. 그 세계도 무한히 반복되던 순환에서 마침내 벗어나 제 미래을 향해 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잃은 것은 돌아오지 않고, 한 번 갈린 인생은 더는 같은 사람일 수도 없어.
그 ‘해준’이 내가 아니듯이 이 현실은 그저 그들에게 있어서는 타인들의 생일 뿐이며 거기서 아는 이의 그림자를 연상하는 것은 그저 그들에게 무엇도 해주지 못한 채 떠나온 이의 부채감일 뿐이다. 하물며 그것이 화라면 번지수 어긋난 화풀이지.
그런데도.
“뭐야 해준이 요새 문자 늘었다? 여자?”
“뭐래 정해영. 발랑 까져선.”
문자를 보낸 것은 ‘오늘’이었다. 돌아온 내게 낯선 번호로 전화를 걸었줬던 사람. 그 모든 것이 망상이 아니라고 공감해준 사람. 그리고, 그러나.
“만약에 말야.”
나는 여전히 시선은 문자에 향한 채로 건성처럼 덧붙였다.
“니 새끼보다, 그러니까 ‘진짜로’ 말야.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얘기해라.”
“……?”
“데이트비 할 용돈 정도는 이 오라버니가 내주마.”
“오빠 진짜 연애해?! 아니 어디 아파? 병원 갈래…?”
“아 싫음 말고!”
“미쳤나봐…….”
와 나 순간 엄마 아들이 진짜로 어디 크게 아프단 소리라도 듣고온 줄 알고 소름 돋았어 같은 소릴 중얼거리면서 해영은 절래절래 고개를 젓고 부엌으로 향했다. 걍 평소처럼 돌은 거였네하고 지 혼자 쳐납득하면서.
내가 진짜 잠깐 돌았지.
그냥. 나는 여동생이 저딴 걸 좋아한다고 티비 앞에서 헬렐레하고 있는 꼬라지가 짜증나지만, 하물며 남친이랍시고 어디서 생기다 만걸 데리고 오면 틀림없이 복장이 뒤집어질 테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이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찰나의 기적이며, 때를 놓쳐 보낼 곳을 잃은 마음은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그리고, ……누이동생의 그 꼴을 보는 것 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영혼조차 팔아넘길 수 있을 만큼 기껍고 간절한 소망이었으리란 것을 그만 기억해냈을 뿐이다.
스마트폰의 화면에는 ‘전화드렸던 오늘입니다. 빌더쓰 시즌2의 일로 만나 뵐 수 있을까요’라는 단정하고 사무적인 문장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난 오늘은 알고있던 오늘처럼 말을 더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말하는 것보다 문자 쪽을 익숙해 했다. 여기서 ‘여전’이란 단어가 성립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나와 대화한 기억 역시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다른 사람이니까.
다르지않게 대하셔도 괜찮아요 하고 오늘은 말했지만 여전히 티비에 나오는 해영이의 내 새끼를 ‘박서원’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는 나는, 자신이 오늘임을 말하고 내가 아는 그 세계가 망상이 아니었음을 지지하는 그녀의 말에 의지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결단할 수 없었다.
한번 통화를 하고 한번 만나 대화를 했다. 그리고는 가끔 문자를 주고받았다. 빌더쓰의 이야기는 없었다. 잘지내는지. 괜찮은지. ……힘들진 않은지.
덕인지 업인지 깊게 얽혀 있어서, 이 세계에서 연락해온 오늘은 빌더쓰의 보조작가였다는 듯 하다.
그래서 그 쪽 세상에 자신의 배역은 존재하지 않지만 흐름에 개입할 수 있던게 아닌가 싶다고. 각본을 직접 쓰지도 드라마에 출연하지도 않았지만 거기 나오는 모든 요소에 조금씩 얽혀 있었을 것이므로. 장소, 설화, 설정 이야기에 쓰이고 쓰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에.
그리고 그녀가 그쪽을 기억하는 사람인 것은, 아마 그녀가 무당의 피를 이은 것과 관계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오늘은 그렇게 조심스런 분석을 덧붙였다.
두드러지게 말을 더듬지 않아도, 하는 일은 전혀 달라졌어도, 그 표정이, 말투가, 조심스러운 태도가 저쪽 세계에서 설화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연구원 그대로여서, 그 모습에서 해준은 그녀가 오늘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더랬다.
그런 그녀에게 굳이 빌더쓰란 이름으로 연락이 왔다면 해준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소환장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데, 오늘의 ‘오늘’의 용무는 정말로 빌더쓰 시즌2의 일이었다.
“혹시 조연 배우 하실 생각 있으신가요. 아니 생각이 없으셔도 하세요.”
문자의 마무리에 찍어준 주소는 알고보니 빌더쓰 제작사의 사무실이었다. 연예계에도 드라마에도 관심없던 해준은 그것을 목적지에 도착하고 목에 출입증을 걸고있던 오늘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까지 들어온 다음에야 말았다.
“저 직장인이거든요…?”
“이 글 보신 적 있나요?”
‘ㅂㄷㅆ 흑막 정체’
오늘은 그 말과 함께 인터넷 게시글 링크를 태블릿 화면에 띄웠다. 글은 잠깐 지나간 엑스트라 하나를 가지고 거의 창의적으로 착즙하고 있었다.
몇개의 스샷에 빨간색 화살표로 인물의 동선을 표시하고, 그 인물이 언제 나타나고 언제 사라졌는지를 지적하며 화면 밖에서 어떤 일들이 가능했는지를 줄줄 늘어놓고 있다. 추론이랄지, 근거보다 추측의 비율이 높아 거의 망상의 영역이긴 했는데.
근데 그렇게 나온 선동질의 결과물은 문외한인 내가 봐도 좀 그럴 듯 하긴 했다. 빌더쓰의 넝마같은 스토리 라인 꼬라지를 생각하면 거꾸로 그 제작진에겐 이런 정교한 복선 설정과 회수가 가능할리 없다는 것만이 글의 신뢰도를 낮추는 가장 큰 부분이란 것을 제외한다면 이야기지만.
“이거 진짜에요?”
오늘은 애매모호하게 웃었다. 아니란 뜻이다.
“대체 그 막나가는 스토리 쓴 거 누구에요?”
“메인 작가분은… 해준씨는 모르시는 분일 거에요. ‘그쪽’에선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
“돌아가신 분이요?”
“죽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업으로 엮여있는 셈이니까요.”
그 말을 하는 순간의 오늘은 보조작가라기보다는 무당이었다.
나는 그 순간 해영을 생각했다. 부모님을 생각했다. 그리고 저쪽의 나를 생각했다. 죽은 사람이야말로 불변의 업이다. 확실히 하나의 세계를 드라마에 담아 이 세계에 강림시키는 존재라면, 저쪽에선 신이라도 되어야할 것이다. …죽은 신이.
나는 어쩐지 그 작가를 내가 이미 만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오늘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대로 대화가 끊기고,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오늘은 초조하게 스크린샷을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다 먼저 말을 꺼냈다.
“눈에 익지 않으세요?”
“배우에요? 아이돌이긴 좀 겉늙었는데…”
“그거 해준씨에요.”
……네?
“내가 여기 왜 나오는데요!”
“저도 저게 누군가 찾아보다 해준씨 이름이 나와서 놀랐다고요. 해준씨 이전엔 빌더쓰 본적도 없다고 하셨잖아요.”
“진짜 저에요? 닮은 사람 아니고?”
“진짜 정해준씨에요. 출연계약서도 있었어요.”
출연계약서. 그말에 갑자기 기억나는게 있기는 했다. 분명 작년이었지, 하루 어슬렁어슬렁 촬영장 배경에 있기만 하면 보수 받는다며 친구 녀석 손에 끌려갔던게.
근데 살며 엑스트라 알바를 딱 한 번 해봤는데 그게 하필 빌더쓰 15화였다고?
그게 말이 돼… 된다.
빌더쓰니까.
우주의 악의로 만들어진 드라마니까.
저쪽의 내가 흑막이었으니까.
빌더쓰가 엮인 일이라면 오히려 내게 출연한 기억조차 없어도 보조출연자로 나갔다는 역사가 이쪽에 날조되어 있었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취업 전에 친구따라 한번 나간 엑스트라 알바가 마침 그거였다 정도면 아주 있을 법한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녀석은 치킨광고 걸그룹—이유나네 그룹말이다—의 팬이었고 최애가 출연한다며 거기 지원한 거 아니었나. 개연성이 차고 넘친다.
빌더쓰를 닳고마르게 봤던 해영이가 왜 내 얼굴을 못알아봤는가만이 의문이다만 그거야말로 우주의 섭리 덕이라고 해두자. 지 새끼 안나오는 장면은 전부 빨리감기한 탓일거라고는 생각하지만.
놀림거리 안되서 다행이다란 기분과 해영이 녀석이 먼저 눈치챘더라면 날 놀릴 마음으로라도 불러냈을 테니 최소한 저쪽으로 끌려가기 전엔 내가 빌더쓰를 봤을 텐데 사이의 양가감정으로 괴로워졌다가 어차피 다 지난 일이란 현실자각타임을 갖고 냉정해졌다.
“그리고… ‘저쪽’을 생각해서라도 저는 해준씨가 나와주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톤을 낮춘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여진 것은 이제 이 세계에서는 우리 둘만이 아는 현실. 그리고 내가 이 ‘오늘’을 알지 못하는 이로서 정리할 수도 없게하는 대화.
“‘해준’은 더는 없을텐데요.”
“해준씨는 있었으니까요.”
결자해지에요 하고 오늘은 말했다.
시즌1과 엮기 위한 연결 파트에서 적당히 몇 번 얼굴만 비추면 되니까요 하고 오늘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나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앞으로 쓰일 대본 2화 정도 분량에는 행인1 대신 해준이란 인물이 추가되게 되었다.
정말로 수십억원이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가 이따위 주먹구구로 돌아간다고?하고 어이없어질 만큼 날림인 진행이었다.
……이 또한 우주의 섭리일 것이다.
엑스트라1이 아닌 단역으로서 방문한 촬영장은 낯설고도 익숙했다. 낯선 것은 환경이고 익숙한 것은 거기 있는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눈앞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의 상판 같은 것.
“전에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습니까.”
“시즌1때 엑스트라 알바였어서가 아닐까요.”
이성에게 듣는다면 낡아빠진 플러팅 문구고 동성에게 듣는다면 사이비종교 전도를 위한 포석이겠지만 유명 연예인에게 듣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끄러미 쳐다보는 유명 배우의 시선에서 나는 있을리 없는 기시감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박서원이도 웃겼을 것이다. 알고지낸 세월이 몇년인지도 모를 옛 친구의 낯짝과 이름을 한 놈이 생판 처음보는 양 사인해주세요 했으니.
……그리고 그건 이 사람은 아니다.
한층 식어버린 시선으로 나는 배우를 바라보았다. 같은 얼굴 같은 체격, 분장 덕에 복장마저도 동일한, 그렇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고 그렇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는 우리 세계의, 해영이의 내 새끼.
“오빠, 왜 오늘 첫 출연인 조연 배우 상대로 시비걸고 그래?”
“오늘이 왔냐?”
“피디님이 오빠 분장 끝났음 좀 보재요.”
출연배우와 보조작가가 나눠야할 것보다 조금 더 가까운 거리감의 격없는 대화가 둘 사이를 오갔다. 연과 업은 세계가 달라도 이어지는 것이라 여기서도 오늘은 서원과 아는 사이인 듯 하다.
투덜거리며 대배우님께서 자리를 비우자, 오늘은 그대로 돌아가는 대신 해준 옆에 잠깐 서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잔 건네고 그대로 자신의 몫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친하네요.”
“부모님이 아는 사이에요. 거의 친척?”
“그런 건 별로 안다른가요.”
“……해준씨가 저 오빠하고 아무 접점이 없는게 이상한 일이었는 걸요.”
그건 그렇다. 저쪽의 해준은 서원과 친구였으니까.
“접점이 없진 않죠.”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대화를 끝냈다. 오늘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고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나는 오늘과 나 사이의 이 차이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오늘씨 식으로 말하자면 박서원과 연과 업이 엮인 것은 해영의 쪽인거다. 그리고 죽음은 무엇보다도 큰 업인지라. 그래서 그 애가 없는 세상에서는 그 애를 돌려내기 위해 발악했던 내 모든 업이 박서원과 엮였고, 그 애가 있는 세상에선 나는 철저히 그와 무관하고.
그리고 이제와 생긴 이 미미한 연은…….
나는 문득 박서원을 떠올린다. 비틀리고 외롭고 부서지고 배신당한 남자를.
그리고 촬영개시 한 시간 후, 나는 또 다시 박서원을 떠올렸다.
시발 왜 멀쩡히 고운 환경에서 하는 일 다 대박히트 치며 승승장구해온 주제에 성질머리가 저 꼬라지세요? 걍 영혼이 인성부터 망했었음? 그 쪽 성깔 딱히 환경 탓도 아니었음? 박서원의 상판을 가지면 저래야한다는 차원의 법칙이라도 있음?
인터넷 이슈 좀 끌어먹을 생각인지 그냥 우주의 섭리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몇 컷 안나올 아마추어 연기자인 조연에게 주어진 장면에서 현재 주연배우님께서 절찬 NG란 이름의 꼬장을 부리고 계시는 중이셨다.
아 그 조연하고 주연사이엔 아무 대사도 없다. 내 위치는 배경 어디쯤인지라.
“컷! 서원씨 잠깐 쉬었다 들어가지. 아까부터 연기가 좀 쎄.”
배우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석에 서서 물병을 기울였다. 하필 내 쪽이다.
주변의 어수선함에 적당히 말소리가 묻힐 무렵, 그는 들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를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짜증나지?”
근데 이 상황에서 그게 내게 하는 말이 아닐리 있냐. 내가 박서원이 성질머리를 아는데.
“그건… 제가 배우님을 싫어하는게 티나서 그런거 아닐까요?”
“언제 봤다고?”
세상 사람이 날 그냥 싫어할리가 없는데란 말은 오만할 정도로 자신에 차 있다. 하긴 니 인생에 대놓고 시비거는 인간을 몇이나 봤겠냐. 아무튼 싫어하는 티가 나서 기분이 나쁘다는 건 납득갈만한 이유임과 동시에 빡치게 만들기에도 충분한 이유다. 박서원의 기분은 내 알바 아닌지라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여동생이 그쪽 팬이라서.”
그래도 굳이 명분을 말하자면 역시 그거지. 오빠가 낯선 남자를 싫어하기엔 차고 넘치는 이유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으나. 그 어느 것도 그가 굳이 알아야할 이유는 아니다. 해준은 이 순간 결정했다. 나는 그를 앞으로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얼굴을 볼 때마다 기분이 상할 것이며 불쾌한 감각이 치솟아오름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결코 그가 ‘박서원’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줄곧 사이에 있는 것은 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확히 너머에서 맺은 연만큼의 무게가 그를 굳이 이 남자와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 세계의 자신이 지워버린 연과 업이 아니라, 자신과 그 사이에서 원래는 있을리 없던 것이 쌓여 만들어진 연이. 가장 박서원을 부정하는 것 같았던 존재이던 이 남자가, 박서원이 정해준의 인생에, 혹은 박서원의 인생에 정해준이 의미있게 존재했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가 져야할 연과 업은 여기서부터다.
“어이없네.”
해영이의 내 새끼, 아니 ‘박서원’의 역할을 맡은 연예인씨는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로 허허로이 웃었다. 해준도 시비걸 듯 마주 웃어보였다.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제 몫의 모순을 눈앞에 마주하고야, 마침내 현실에서 살아가도 될 것 같았다.
드라마 촬영에 내가 나올 장면은 그리 길지 않다. 촬영 스케줄은 철저하게 주연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내가 배경과 등장한 몇 장면은 아마 작품의 초반과 중반쯤에 듬섬등성 들어갈 것인 듯 했다. 주연 등장 장면이 끝나고 조연들끼리 장면까지 마무리 짓자 새벽에 왔던 촬영장은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어있었다.
“오늘 촬영 수고하셨어요. 갑작스런 제안인데 협조해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오늘씨 부탁인데요.”
“저 조금 있으면 들어가니까 괜찮으시면 댁까지 모셔드릴께요. 자동차 가져와서.”
“…잠깐 오늘아. 너 정해준씨 집을 어떻게 알아. 아니 애초 어쩌고 아는 사이야? 이거 뭐하는 새낀데?”
그러니까. 여동생이 호감을 보이는 상대란 것은 오빠로 하여금 안 친한 남자를 싫어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이유란 건, 반대 방향으로도 성립하는 이야기인 것으로.
“해준씨 가요.”
일부러가 분명한 태도로 오늘은 그를 무시하고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등판이 홧홧하다. 여전히 초능력이 있는 세상이었다면 시선만으로 타오르고도 남을 것 같았다.
“…저 지금 확고하게 미운살 박혔죠? 완전 찍힌거 맞죠?”
“업의 해소치고는 평화로운 결론이네요.”
하고 오늘은 원흉인 주제에 남의 일처럼 사뿐 웃었다.
내키는대로 쓴 것까지는 좋았는데 원작 에필로그와 설정이 맞지않게 되었기 때문에 분리수거 되었습니다.
일단 원작 엔딩과도 감정선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지라, 이 흐름 자체가 별도 엔딩의 IF분기 노선인 취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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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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