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패] TMI_01
스파이패밀리, 어리석은 자들의 배 이후
2024/06/08 수정
여전히 날조 과다. 황혼 쪽 타임라인만.
—
0.
언젠가 아냐는 동쪽으로 돌아간다. 그 애의 소망은 그곳에 있었으므로.
나와 같은 아이가 없는 세상을 원해요.
그것은 언젠가의 자신의 소망과도 같아, 스파이인 남자는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딸의 바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원하겠다고?”
상관은 인상을 찌푸렸다. 웨스탈리스로 모든 조직이 철수하고 라인과 휴민트가 무너진 후, 당연히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오스타니아에의 복귀 계획들이었다.
“솔직히 네 능력은 스파이로서 우수한 거지 그 외의 부분이 우수한 건 아냐. 알고 있을텐데. 네게 압도적으로 뛰어난 어떤 부분은 없다는 걸.
우리가 다음 관리관에게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베이스가 완전히 무가 된거나 다름없는 적지에서, 팀원들을 관리하고 파이프를 재구축하며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능력이다. 당장 눈 앞의 임무 하나만을 쳐낼 수 있어서 되는 일은 아니지.
그리고 무엇보다, 황혼 정도 되는 인재를 노출해버린다는 건 본부로서도 뼈 아파.”
“손실 이상으로 해내겠습니다.”
남자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 자신이 갈고 닦아온 경력 전부를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했다.
“그리고 황혼의 대역은, 그 애가 해낼 겁니다.”
“……먼 이야기군.”
스파이가 되겠노라고 그 동국의 땅에서부터 함께온 소녀에 대해서라면 남자의 상관도 알고 있었다. 그 애가 성인이 되어, 조직의 일원이 되어, 이윽고 쓸만한 요원까지 되려면 대체 얼마의 세월이 필요할까. 5년? 10년? 그 이상?
하지만, 눈앞의 이 제자도 고작 18살의 청년이던 때가 있었다.
그래, 다시 생각하면 고작 10년인 셈이다. 남자가 웨스탈리스 최고의 스파이 ‘황혼’이 되는데까지 10년이 걸렸다. 오퍼레이션 올빼미가 끝나는데 까지는 7년이. WISE의 오스타니아 재진입이란 대업이, 일이년 사이에 가능한 일일리도 없다.
“알겠네. 위에 일단 제안은 올려보지. 만일 통과된다면…… 주된 업무의 내용이 바뀔거야. 지금부터는 ‘밖’에 보일만한 위조가 아닌 경력들을 쌓아나가야할 테니까. 누가 봐도 거기 존재하는 사람 말이지. 바라는 방향이 있나? 혹은 원하는 신분?”
“롤랜드 스푸피로 하겠습니다.”
“군인인 채로? 거참 하필 골라도도 험한 길을. 지금까지를 생각하면 외교관 쪽으로 적당한 신분을 만드는게 낫지않나? 하는 일도 익숙한 정보수집이고, 그렇게 몇개국 정도 외교관으로서 돌고오면 자연스럽게 완성될텐데. ……굳이 군경력을 쌓겠단 말이지.”
대사관으로 배속될 군인이라면 국방무관이다. 보통 정보국의 장교가 배속되며, 거의 저쪽도 이쪽도 인지하는 화이트 스파이 포지션이기 때문에 감시의 눈길도 가장 강하게 받는다. 의심을 피하는 것에 헛된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는만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도 가장 넓지만.
“역시 그 애 때문인가?”
소녀가 이제 쓰게된 이름이 앤 스푸피인 것을 떠올리며, 빨간머리의 상관은 쓰게 웃었다.
언젠가 그 소녀가 정말로 그곳에 스파이로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공식적인 창구에 있는, 틀림없이 고위급 인사임이 분명한 친부의 존재는…… 여벌목숨 하나 만큼의 가치는 가지게 될 테니까.
“일단, 시간은 좀 걸릴테니 그 동안 롤랜드 스푸피로 양성소 교관으로 들어가있도록 해. 거기까진 내 권한으로 가능한 일이니까. 황혼을 보내려고 했던 일들은… 밤의 장막하고 이야기 좀 해봐야겠군. 골치아프게 됐어.”
“감사합니다.”
남자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인사했다.
그렇게 그의 일상은 이제는 롤랜드 스푸피의 것이 되었다.
그의 경력 역시 군사 작전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요원을 현지에 파견하고, 요청에 따라 강습하며, 다른 사람을 가장하는 일 없이 명백히 적으로 지정된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총구를 향하는 나날.
스파이와는 아주 다른, 군인으로서의 시간.
롤랜드 스푸피로서 10년을 살고난 이제와서는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롤랜드 스푸피 대령’이 원래의 그 ‘롤랜드 스푸피 중사’와 연장선상에 있는 인물이냐고하면 그것은 미묘하다. 롤랜드일 때의 그는, 아직 가장하는 법을 알지 못했으며 그저 날 것의 자신이었을 뿐이니까.
입대하기 위해서만 죽은 사람의 신분조차 훔쳤던 그때의 ‘롤랜드’은 어쩌면 본명인 자신보다도 더 바라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확고한 존재였지 않았을까 그는 종종 생각한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존재는 현재에만 충실하므로.
아이에게도 부모는 있어야지. 그 말에 수 많은 위장 신분 중 굳이 그것을 고른 것은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거짓이었지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는 ‘있던’ 사람이었다. 어느 마을에서, 어느 연대에서.
그것은 어느 쪽도 지금의 자신은 아니었지만.
과거의 롤랜드 스푸피를 아는 사람들은 이제 군의 현역에는 그다지 남아있지 않았고, 정보국 같은 곳에는 더더욱 있지않았으며, 설령 남아있어 마주쳤더라도 이 스푸피 대령을 그 중사와 겹쳐 보는 이는 없었다.
동시에 스푸피 대령은 황혼 역시 아니었다.
가끔 스푸피 대위, 소령, 중령과 함께 작전을 하는 이가 있어도 그들은 그를 ‘스파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민감한 정보와 아슬아슬한 작전에도 정보부가 신뢰를 가지고 파견할 수 있는 군인. 롤랜드 스푸피는 그런 남자였다.
앤 스푸피 소위의 아버지는.
로이드 포저와는 아주 다른, 그렇지만 다른 방향에서 단단하게 실존하는 존재.
그 안에 이토록 흐린 ‘자신’따위는 없어도 되지않을까 싶어질 정도로.
그리고 10년이 지난 오늘, 마침내 롤랜드 스푸피 대령은 정식으로 오스타니아의 땅을 밟았다. 외교관 여권으로, 공항을 통해서. 국가보안국의 감시의 시선 앞에 조금도 숨지 않으며.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으나 황혼의 귀환이었다.
1.
사람의 신장은 어깨로 가늠하는 거라고, 보안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배웠다.
눈은 그다지 믿을만한게 못되니까 말이야.
지금 갑자기 왜 그것이 생각났을까.
우연을 가장해 스쳐 지나간, 그들의 타겟인 장교와 익숙해진 습관대로 어깨 높이를 비교하고는 그는 그런 것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키가 큰 남자를, 전에도 보지 않았나?하는 그런 데자뷰.
“너무 프로라 기분나빠요.”
클로에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오늘 그 남자의 미행조에 들어있었다.
“누구? 대령?”
“따라오는 건 알지만 감출 것 없으니 보여주겠다. 딱 그런 태도라고요.”
“그 자가 역시 ‘참모’일까.”
“글쎄요. 공식 루트로 들어온 사람 중에 저 사람 이상으로 거물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긴 해요. 아예 블랙으로 들여보냈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핵심 간부를 잃어도 말할 수 없는 위치에다 박지는 않으니까요. 적어도 외교관 신분으로 입국한 정보장교는 발각되더라도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추방이니까.”
서쪽에서 보내진 표면적인 약력을 훑어보며 그는 남자의 경력을 확인한다. 내근, 내근, 교관. 종종 외부작전의 이력도 있기는 했으나 스파이라기보단 군인으로서의 일이다. 침투 작전, 테러 진압. 전공과 군공으로 쌓아올려진 이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위압감도 그가 계속 그런 분야의 일을 해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다. 이상하지 않지만…….
그 서늘하게 갈아진 듯한 인상에서, 묘하게 뭔가 어긋나 있다는 기분을 느낀다.
“옷가게는 왜 들린 거야?”
“젊은 여자애나 입을 만한 옷을 사더군요.”
“허, 벌써 애인?”
단신 부임한 남자들이 현지에서 여자를 만나는 일은 너무 흔해서 이야기거리도 안된다. 솔직히 그들의 주된 임무중 하나가 그렇게 만나는 여자를 찾아내 포섭하거나, 반대로 그럴듯한 ‘요원’을 애인으로서 접근시키는 것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서늘할 정도로 차가워서, 어딘가 금욕적으로도 보이는 남자였던터라 의외였다.
인상이 모든 것이 아님은 알지만.
“말은 딸에게의 선물이라고 하던데.”
“저치한테 가족이 있어?”
서류를 훑어내리다 그는 고개를 들어 클로에를 보았다. 40대 후반의 남자다. 줄곧 육군에서 근무했고, 보통이라면 가족이 있는게 당연한 배경이었음에도 남자와 가정이라는 단어가 아무래도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매우 놀랍게도 따님이 있으시답니다.”
“아니 하루종일 얼굴 근육 미동도 안하던 인간이던데 용케 결혼을. 어, 딸도 정보국이군.”
훑어내리던 서류뭉치의 뒤쪽에 클립으로 끼워져있는 첨부서류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냥 ‘가족’일 뿐이라면 본인 항목에 추가로 기입될 뿐이지 굳이 별도로 서류가 따라오지는 않을테니까.
“잠깐, 이 여자 몇 살이야?”
“스물셋이요.”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적은 기록이었다. 그리고 이 업계에서 공백은 곧 말할 수 없는 수준의 임무에 연관되어있다는 의미였다. 18살에 정보국에 채용되어 일선에서 5년 간 근무한 어린 여자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그 서류는 얄팍했다.
“그 아버지의 그 딸이죠. 정확성은 떨어지는데, 블랙으로 파견되었을 거란 이야기가 있어요.”
“부녀를 같이? 위험성이 높지 않나.”
“대령은 보안국에 마크되는 것이 기정사실이니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딸 쪽이 메인이겠죠. 일단 경력부터가 말이 안되잖아요. 전후라면 모를까, 요즘 요원들은 우리 쪽만해도 거의 대졸이 기본이라구요.”
“유리는 19이었지만 말이지.”
“그래도 대학은 졸업한 다음이고, 외무성 통해서 차출한 거였잖아요.”
지금은 다른 업무를 위해 자리를 비운 다른 ‘부하’를 생각한다. 한때는 그에게 있어 어리고 혈기넘치는 녀석의 대명사였으나, 어느 순간 잘 갈아진 보안국의 비밀경찰 그 자체가 되어버린 청년을. 겪은 일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긴 한데.
“확실한 건 아니긴 한데… 4과에서, A국의 작전에서 웨스탈리스쪽하고 부딪쳤을 때, ‘황혼의 제자’가 굉장히 어린 여자란 이야길 들은 적이 있어요. 뭐, 그 얼굴조차 변장일 수도 있겠지만.”
황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10년 전, 아직 웨스탈리스가 오스타니아에 적극적인 간섭을 포기하지 않았던 첩보전의 시대.
웨스탈리스 대사를 상대로 한 테러와 뒤 이어진 도노반 데스몬드 피살 등의 흐름 속에서 웨스탈리스는 벌집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듯이 두 손을 들고 물러나, WISE란 이름도 더는 잠입요원들이 아니라 웨스탈리스에서 오스타니아에 대한 정보수집만을 지휘하고 있는 ‘본부’만을 지칭하는 것이 되었지만.
웨스탈리스는 기어코 그 시대를 다시 불러오려 하는가.
“오랜만에 듣는데, 아직 안 죽었나?”
“그때에는 본국으로 철수한 거 같긴 했는데…… 뭐 몇 년 전부터 이름 자체가 안들리고 있기는 하네요. 그런 경우는 보통 사망이거나 부상으로 인한 은퇴긴 하죠. 은퇴 후 교관이 되는 것도 흔히 있는 코스고.”
“뭐 현장요원의 마지막이란게 그렇지.”
‘잡는 쪽’에 해당했던 그들에게는 조금 실감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황혼이라, 정말 힘든 시절이었다.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귀국하던 이중간첩을 결국 눈앞에서 놓쳐버렸던 일이라거나. 이제는 모두 과거고, 웨스탈리스도 오스타니아도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평형상태가 유지된지도 10년이 되었지만…….
아니다, 지난 일따위는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찜찜함이 뇌리 한구석에 달라붙는 듯한 감각을 남긴 채, 그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배 좀 피우고 오지. 다음 감시조 귀환하면 나한테 오라고 해. 그리고, 대서 분과에 앤 스푸피에 대한 자료 좀 더 조사해달라고 해. 넘어왔다는 것이 루머라 하더라도, 적어도 스푸피 대령을 분석하는데는 도움이 되겠지.”
“네, 팀장님.”
2.
그리고 이주가 지났다.
놀랍게도, 혹은 그의 첫날의 동선으로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놀랍지 않게도. 대령이 오스타니아에 도착해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연애사업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과 파티등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외교관으로서의 평범한 백색 정보수집이라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그 대상이 결과적으로 특정 성별에만 치우치고 있으면 아무래도 그렇게밖에는 보이지 않게 되는 법이다.
“…저 사람 첫 인상하곤 정말 다르네요. 어딜봐도 강직한 군인이란 얼굴이었는데.”
뭐 강직한… 군인이 아니게되는 건 아니긴 하지. 군대는 남초고, 그쪽 녀석들의 여성 관념은 꽤 마초적이다. 영웅은 호색이니 하는 낡아빠진 변명을 차지하고라도, 유능하고 미남인데다 독신인 대령이라면 본국에서도 애인이 손가락 수만큼 있다고 해도 놀랄 것 없다.
지금까지도 파견된 장교 중 그런 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자들의 틈을 노려 거꾸로 이쪽에서 허니트랩을 시도한 것도 항상 있는 일이고.
그런데도 그에게서만큼은 어딘가 그것이 단순히 연애사업이 아니란 느낌이 드는 건. 틀림없이 눈이 식어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쪽에서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리 느껴질 만큼.
저 지나치게 멀끔한 얼굴 탓일까.
“여자가 계속 바뀌고 있는데. 전부 스파이 혐의는 없는게 맞나?”
“일반적인 정보수집 차원인 것 같습니다.”
“와중에 남편 있는 여자의 권유는 깨끗하게 피하고 있는게, 처신이 능숙한 건지 목적이 있는건지.”
“그래서 가장 최근의 데이트 상대가 저…….”
“포저 부인입니다.”
침묵이 방안 가득 내려앉았다.
그렇다, 지금 여기엔 그 ‘포저 부인’의 친동생이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유리가 사진너머의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웨스탈리스 군복 차림의 남자의 사진 옆에, 같은 남자가 네이비색의 핀 스프라이트 더블 슈트를 입고 검은 머리의 여자의 팔짱을 끼고 오페라극장에서 나오는 사진이 꽂혀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노려보는 남자를 꼭 닮아있었다. 누가봐도 혈연임을 당연히 깨달을 만큼.
“포저 부인은, 음… 취향이 꽤 일관됐군.”
이제는 팀장이 된, 한때 그의 맞선임이기도 했던 남자는 지금의 부하 앞에서 그러고 말실수를 했다.
“어디가요.”
유리가 지옥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금발이? 벽안이? 170나 되는 여자가 하이힐을 신어도 깨끗하게 균형이 맞는 신장이? 능숙한 에스코트가?
물론, 저 대령과 그들이 기억하는 ‘전 남편’과 가진 공통점은 거기까지다. 남자의 용모에는 어딜 봐도 군인임이 감춰지지 않는 날선 부분이 있었고, 여자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저 무표정한 시선으로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정이나, 사랑이나 그 어떤 진정성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먼 과거의 어느 애처가와는 겹쳐보기도 힘든 남자였다.
한층 무겁고 음울해진 공기 속에서 다른 부하들이 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그, 멜린다 데스몬드가 타겟일 수도 있겠죠. 포저 부인은 지금도 애국부인회의 멤버니까요.”
“같이 다닌 곳은, 확실히 데스몬드 부인과 행동반경이 겹칩니다. 오페라, 미술전시회.”
팀장은 머리를 한번 긁적이고는 느릿한 말투로 긴장감을 흐트러트렸다.
“일단 대령의 의도가 어떻든 좀더 지켜보도록 하지. 어차피 지금까지의 패턴대로라면 며칠 안에 상대는 바뀔거고, 아니라 한들 지금 개입해도 별로 할 수 있는 말도 없어. 뭔가 저지른 것도 아니고 둘다 독신이라. 성인남녀의 문제일 뿐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어지는 거지. 유리 너도 좀 머리 식히고.”
“어디 가세요?”
“담배.”
한손을 들고 그는 오피스를 빠져나왔다.
클로에는 담배도 피우지 않으며 흡연장까지 따라와서 그의 옆에 서있었다. 마치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이, 혹은 무슨 말이라도 들으려는 듯이.
“의외로 그냥 연애일 수도 있지. 저 남자 쪽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들이쉬고, 한숨과 함께 뱉었다.
“포저 부인의 남자를 보는 건 사실 처음이 아니라서.”
“네?”
“취향이 매번 똑같았거든.”
도노반 데스몬드의 피살의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로, 한 시기 그녀는 보안국의 감시하에 있었다. 동생인 유리는 당연히 그 건에서는 배제되었지만 그 ‘유리 브라이어’의 가장 가까운데 있었기에 포저 부인과도 안면이 있던 그에게 감시역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비밀을 알게된 것이다.
정숙한 미망인으로 알려져있는 여자가 극히 부정기 적으로 집에 남자를 끌어들이는 습관이 있음을.
키가 크고, 어딘가 단단한 인상의 남자. 금발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고. 복장도 직업도 제각각인. 사실 얼굴을 구분할 만큼 제대로 본 건 아니었지만. 단 한번도 밝은 낮을 함께 거니는 적도 없고, 유리에게 소개한 적도 없는, 틀림없이 잠깐의 상대들.
한밤 중에, 그 집의 문을 빠져나오는 남자를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유리에게 말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으므로 그저 못본 것으로 해뒀지만.
“이번 남자는 집이 아니라 밖에서 데이트를 하고있으니 차라리 양반인가.”
완벽하게 에스코트 하면서도 그 어떤 온기도 없던 대령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만난지 반나절도 되지않았을 남자의 팔에 마치 언젠가의 남편에게 기대듯 무방비하게 기대있는 여자를 떠올린다. 둘 사이의, 그 기묘하게 멀고도 가까운 거리감을.
틀림없이 그녀에게 그 남자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새로운 연애 따위가 아니라 기억하고 있는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살과 피와 온기를 가진 대체품에 불과했을 것이므로.
어느 쪽도 사랑이 아닌 관계는 과연 연애인 걸까.
3.
“이게 전부인가.”
앤 스푸피에 대한 새 서류도 이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먹칠되어있는 글자 몇개가 좀더 보이게 되었을 뿐 두께는 큰 차이도 없다. 아예 기록에 남길 수도 없는 일을 했거나. 그들의 억측과는 달리 나이가 나이였던 만큼 그리 대단한 일은 하지 않았거나.
남자는 딱 한 장 첨부되어 있는 몇번이고 복사해서 흐려진 남자와 그 딸의 사진을 별 생각없이 내려다보았다. 이제 본격적인 블랙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앤 스푸피의 얼굴이 비추고 있을 단 한 장. 10대 후반의 모습이라 역시 이 사진이 지금의 그녀를 찾는데에 대단한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유원지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라니.
물론 이때의 그녀는 아직 자신이 정보국의 에이스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시절이었겠지만…… 딸아이를 바라보는 어딘가 온기가 있는 시선의 남자도, 장난스런 인형귀의 머리띠를 한 소녀도 지금의 그들의 위치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평범한 부녀의 모습이라서 그는 기묘한 기분으로 사진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아니 그게 아니다. 평범함이 아니라. 무언가, 의식의 바닥에서 걸릴 것 같은 감각이.
키가 큰 금발의 남자, 그의 외동딸.
사람의 신장은 어깨로 가늠하는 거라고, 보안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배웠다.
고개는 움직이고 눈높이는 주관적이다. 기준이 될 사물이 옆에 있다면 좋겠지만, 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라면 가장 즉각적이면서도 확실한 비교대상은 자신의 신장이다. 180대 후반에 이르는 남자에게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저보다 낮았습니다여서 큰 의미는 없었지만.
갑자기, 또다시 그것이 생각났다.
그래 분명 본적이 있다. 지금은 아니고. 저런 모습도 아니고. 아주 예전. 아주 다른.
유리의 동료를 가장해 그를 만났을 때 어깨 높이에 차이가 나지않는 것을 깨닫고, 생각보다 키가 크다고 생각하고 흠칫 놀랐었다. 가까이서 부딪치고 생각보다 체격이 좋네 하고 의아하게 느꼈다. 온화한 인상과 단정한 차림 덕에, 남자는 언듯 보아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이는 인상과 실제가 주는 위화감에, 무해한 인간인 것을 알면서도 줄곧 어딘가 거슬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도 그의 사망으로 잊고 있었지만…….
지독히도 다른 인상이었기 때문에, 맨 얼굴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떠올리지 못했다.
10년 만에 사람은 여기까지 바뀔 수 있는 건가?
“젠장, 유리를 불러와. 확인해봐야겠어.”
“뭐, 뭘요?”
“로이드 포저와 롤랜드 스푸피 대령이 동일인물일 확률.”
“……포저요?”
“딸 말이지, 한두살 차이는 나겠지만 지금쯤 딱 저 나이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상할 정도로 험한 일에 자주 얽히고, 핵심적인 상황에서 잘 튀어나오는 아이였다. 예를 들자면 버스에서, 그래. 그 뒤의 많은 사건 사고에서도. 그때마다 유리가 날뛰지 않게 만들기 위해 진땀을 빼야했던 것을 기억한다.
오한이 들었다.
“아니, 아니야. 유리는 부르지 마.”
아버지와 딸이 스파이라면, 그 아내는?
정말 그녀는 ‘모르고’ 있었을까. 유리의, 가장 사랑하는 누나인 포저 부인은?
도노반 데스몬드의 사망현장에서, 그녀는 다미안 데스몬드를 감싸고 다쳤다. 다미안 데스몬드를 ‘감쌀 수 있을 만큼’ 데스몬드 일가의 바로 근처에 있었던… 유일한 외부인이다.
우연같은 것은 아니었다. 멜린다 데스몬드의 애국부인회의 멤버이기도 했던 그녀의 남편과 아이가 테러에 의해 희생되었고, 도노반 데스몬드는 그것을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으로 선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과부인 여자가 그 자리에 있게 되었던 것이기에.
순서가 전부 반대라면?
그녀는 다미안 데스몬드를 감싸고, 다쳤다. 피가 튀었고, 상처를 입었고, 그것은 도노반 데스몬드에게서 튄 피와…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그 연단에 세운 것은 남편과 딸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국장님께 보고하고 오겠네. 일단 포저 가가 엮인 모든 자료를 모아 놔. 사진, 기록, 기사, 뭐든 좋네.”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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