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당신
호명
그날은 비가 억수처럼 내렸더랬다. 끊일 줄 모르고 부어대는 빗줄기가 제 억장과도 같았더랬다.
“ … 내 돌려줄 수 없는 것을. ”
뱉어지는 말은 더욱 잔혹했다. 적어도 명에게 있어서는. 질식할 듯한 감정의 파도에 그저 휩쓸리는 명은 무력했다. 바다 위 한 마리 미물이 된 것 마냥.
“ 어찌 이리도 베풀어 주는 게야… ”
차디찬 빗물이 명의 볼을 따라 흘렀고, 백색의 머리칼은 이미 푹 젖어 그의 몸을 따라 엉겨붙었다. 미묘한 온기가 그의 볼가를 따라 흐를 적에는 이 비가 조금 감사하기도 했을 터였다. 언젠가, 떠나지 않겠다 당부했던가. 박힐 듯이 가슴을 짓쳐드는 그 말이, 고작 한 마디 말이 명에게는 더없이 무거웠다. 제 만년의 아픔을 단숨에 앗아가 버릴 것 만 같아서. 더없이 무서웠다. 또 한 순간에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만 같아서.
“ -너는, … 나를. ”
제대로 이어지지도, 끝맺지도 못한 단어의 나열들이 힘없이 뱉어진다. 그 힘 없는 단어들이 혜의 귓가에 맴돌았을 것이다.
“ 돌려받기 위해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리… ”
살풋 웃는 혜의 눈가로도 빗줄기가 따라 흘렀다. 명의 그것과 같이, 미묘한 온기를 품은 채로.
“ 어찌 제가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저, 소인은. ”
무너져 내리는 명을 꼭 붙든 채로, 혜는 그저 웃었다. 속도 모르고 퍼부어대는 빗줄기 속에서. 하염없이 웃었다.
“ -나리가 행복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
제게 언젠가 이런 말들을 해 주었던 이들이 있더랬나. 적어도 명의 기억 속에는 남지 못했다. 그가 받아들일 리 만무했으며, 애시당초 그의 아픔은 드러낼 만 한 것도 아니었으니.
속절없이 흘러대는 빗물이 잠시나마 고마웠더랬다. 적어도- 둘의 눈가를 따라 흐르는 것이 무엇인지. 빗물인지, 그도 아니면 눈물일지.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늘 원망스럽던 하늘이나, 오늘만큼은 썩 마음에 든다는 생각이나 주워 삼키던 와중이었고.
소리 없이 흐느끼는 명의 이마께가 보였던 것은 습관이었을까. 어떤 운명이었을까. 으레 그가 해 주었던 것 처럼.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겨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은… 비단 관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명과 혜에게 있어 어떤 약속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마에 닿는 입술은 마냥 따스하지만은 않았다. 빗물에 조금 식은- 역시나 미묘한 온기만이 전해지던 보드라운 감촉이었다. 다만 차디찬 빗물 사이로 전해진 그 미묘한 온기란, 생명의 열기였으리라. 그저 무의미한 생을 이어가던 명에게 있어 하나의 신호였다. 싸늘하게 식어가던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온기가 되었으리라.
“ … ”
이마에 말캉한 감촉이 느껴지기도 잠시였을까. 다시 멀어지는 혜의 눈가에서 빗물 하나가 똑. 떨어졌다. 또한 예의 그 미묘한 온기를 품은 채로. 떨어진 빗물은 명의 눈가에 닿고, 눈썹에, 눈꼬리에 닿아… 결국 제 볼가를 따라 흘러내렸다.
온 몸에 닿는 차디찬 빗줄기와는 아주 다른, 따스하기 그지없는 단 한 줄기의 물방울이었다. 생이 이어져, 또 다른 생으로 전해지기까지. 혹자의 고통을 씻어내고, 또 서로 나누기까지. 얼어붙은 강에도 언젠가는 이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다시 세차게 흐를 때 까지.
그렇게 둘은 빗속에서 천천히 녹아들었다. 명은 혜에게, 혜는 명에게. 스며들듯이.
그날은- 비가 억수처럼 내렸다.
끊어질 줄 모르고 흐르는 물방울이,
제 눈물과도 같았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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