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스클리프 1화
1953년, 테네시 주의 여름은 훅훅 볶아서 언제나 뜨겁고 묵직하다. 앨리스는 그 날에도 아버지— 아버지만을 기다리었다.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있었다. 앨리스의 몸은 피아노를 치며 가볍게 흔들리었다. 파아란 헤어밴드로 장식한 머리칼이 살랑거리었다.
아침이면 햇살이 한 점 비추는 오래된 이층집은 군인인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그리고 골든차일드 외동딸인 앨리스, 셋이 살기에 넓고 남아돌아 곤란인 방이 있었으나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아버지가 전쟁에서 아무 일 없이 돌아오기만을 기도하면서 매일을 보내었다. 그러한 연못에 피아노가 가라앉은 듯한 8월 초였다. 앨리스의 피아노 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졌다. 아버지가 한 작은 나라의 전쟁에 나갔을 때에는 아직 미숙이었던 그의 실력은 이제는 스스로 곡을 만들어내 연주해낼 정도로 성장해있었다.
집안의 분위기는 여느 여름이나 다름이 없었다. 라디오 소리는 지지직 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아, 그리고— 그리고, 드디어 소리가 들리었다. 그리웠던— 무게가 있는, 아버지가 오른손으로 노크를 똑똑— 똑— 똑- 이 리듬.
“아빠!”
앨리스가 환희에 차 문을 열었다. 아버지, 아버지— 그리웠던 아버지— 몸 다친 곳 없이 성해 보이셨다. 가슴에는 빛나는 훈장까지—! 와, 어찌 이리 완벽할 수가 있을까. 앨리스는 더 하나 궁금한 것이 있었다. 자신이 철 없이 한 어린애 같이 한 부탁인 그 곳의 인형을 사올 수 있냐는 말, 그리고 아버지의 끄덕임. 약속이 지켜졌을련지.
앨리스는 아버지를 맞이하며 내내 꿈꾸듯 설렜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며 가지고 온 짧은 먼지 묻은 여행가방, 그 안에는 약속한 인형이 들어 있을지, 그걸 확인하려는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아버지는 그저 웃으며 입구를 지나 마루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서 무언가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다. 앨리스는 그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저 하나였다.
“아빠, 그 인형….”
아버지는 잠시 주저하더니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앨리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기대감에 가슴을 부풀렸다. 하지만 아버지가 던진 말에 순간 몸이 굳어졌다.
“이 아이도 데려왔다. …여간 불쌍한 것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 말에 하늘에서 애가 뚝 떨어진 것과도 같았다.
“앨리스, 인사해야지. 이 아이가 순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단순히 누군가를 소개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그 말 뒤에 무언가 더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앨리스는 고개를 들어 보았다. 까만 머리카락에 까무잡잡한 피부, 체구가 작은 소녀가 문 옆에 서 있었다.
순이. sun이? 햇님? 이름 참 예쁘다.
앨리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소녀의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가리어진 커다란 눈이었다. 생기 없이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눈은 방금 문을 통과한 햇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소녀는 말이 없었다. 대신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아빠, 이게 무슨…?” 앨리스는 결국 물었다.
“이 아이는 앞으로 우리 가족이 될 거란다.”
앨리스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짧은 키스를 하고서는 순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전쟁 고아라고. 불쌍한 것. 안쓰러운 것. 쓰다듬으려고 손을 올리자 맞는 줄 알고 몸을 움찔거렸어, 사랑을 알려주고 싶어. 아버지의 그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안절부절하지 못하였다. 순이는 정작 아무런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이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앨리스의 푸른 눈동자는 다급히 순이에게 향하였다.
순이의 눈은 새까만- 다크 초콜릿과도 같아서 아름다웠다. 그 눈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지었다. 아름답다. 사이 사이로 자신이 비치는 것을 보았을 때 빠졌을는지도 모른다.
아무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는 순이의 눈동자에 미간을 찌푸리는 앨리스가 비치었다.
“순이도 이제 이 집 아이란다. 앨리스–?”
“네? 네…!”
“둘이 동갑이니 잘 지내고. 순이는 생일을 모른다던데, 그래도 12월생인 너보단 생일이 빠르겠구나. 네가 동생이지만 언니처럼 잘 챙겨줘야한다. 알았지?”
“오, 앨리스….”
아버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압박감이 강하였다. 일테면 책임을 덧씌우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데려와놓고 키우는 것은 정작 앨리스와 어머니의 몫인 것은 4살 때에 집을 나간 골든리트리버 조이로도 충분했다. 어머니는 작은 탄식이었다. 그의 마음을 꿔뚫어 본 것 처럼. 안돼, 부모님을 실망시키면 안돼. 미소짓자. 웃자. 해바라기와도 같이—
“안녕, 난 앨리스.”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순이는 꼬질한 옷자락을 만적거리기만 하다가 손을 같이 내밀었다. 조금 더러웠다. 전쟁 막 끝난 최빈국 애니깐 어쩔 수 없어, 내가 이해해야지. 그 생각으로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안녕?”
“아녕?”
순이가 어설프게 앨리스의 말을 따라하며 입을 오물거렸다. 씁쓸한 냄새가 몇 달— 아니, 몇 년간 못 씻은 것만 같았다.
“순, 씻는 것이 좋겠구나.”
어머니의 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등을 미는 어머니를 따라 걸었다. 작은 발자국 다 떨어진 신발로 한걸음씩 혹여 소리라도 날까 두려워하는 듯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앨리스는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가죽 가방을 열어보니 인형은 없었다. 처음 느껴본 기분이다. 아니— 익숙할지도 모른다.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앨리스는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악보는 있지도 않는 바람에 책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집안에 퍼졌다. 이 행동을 한 이유는 내심 자신이 피아노를 잘 치게 되었음을 아버지가 눈치채어주길 바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윗 층으로 올라가 두 번째 창고로 쓰던 빈 방에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피아노의 음이 강하게 눌렸다.
순이의 욕실에서의 비명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아름다운 합주를 만들어냈다. 앨리스는 결국 제 방으로 돌아가 학교 공부를 하였다. 피아노 따위 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전혀 잠들지 못하였다. 자신보다도 훨씬 가벼울, 제 2년전 옷도 헐렁한 아이의 무게가 그렇게 공기 에서는 무거웠다. 폭풍의 언덕, 그래. 그 책이 떠올랐다. 힌들리, 그는 외부인이던 히스클리프를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가 처음부터 그랬을 것은 아니잖아. 앨리스는 문득 자신이 힌들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담 순이는 히스클리프인가? 낮선 누군가가 자신의 세상을 침법하려고 하고 있다. 빼앗아가려한다. 자신의 알은 직접 깨어야지 외부에서 깨고 들어올 것이 아니다.
침대에서 뒤척이던 앨리스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그는 순이를 기다렸다. 자면서 이불을 적셔서 다시 씻겼다고 어머니의 말과 함께, 그는 1950년의 그 날에 아버지를 배웅할 때 입었던 그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은 약간 작은지 불편해하고 있었다. 작은 손이 무릎 위에서 계속 꼼지락거렸다.
“많이 먹으렴, 더 이상 굶지 않아도 된단다.”
“dlrj wprk ek ajrdjeh ehlsms… rj… dlsrkdy….”
낮선 언어로 순이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 나중에는 거의 들리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신문을 내려놓으며, “불쌍한 것….” 중얼거렸다. 식탁은 언제나와 같았으나 히스클리프가 거기 있었다. 순이는 포크가 낮선지 이리저리 탐구하다가 그만 바닥에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시건이 집중되는 가운데 어머니가 손을 뻗자 다시 몸을 움츠리고 머리를 가리려고 하였다.
“아가, 괜찮아. 포크는 이렇게 쓰는거야. 이렇게, 이렇게.”
어머니는 포크를 쓰는 시범까지 보이며 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서야 그는 미소였다. 음식을 칠칠맞게 흘리고 먹는 그를 아무도 혼내지 않았다. 앨리스가 3살일 적이 생각났다. 손 힘을 잘 조절하지 못해 스푼을 떨어트리자, “어머니는 조심 좀 하지!“ 라고 잔소리였다. 그러나 지금 순이에게는 모든 것이 친절했다. 마치 갓난 아이 보는 것처럼 깨지기 쉬운 도자기 인형 다루듯— 그저 ”괜찮아. 다시 해보자.“ 하며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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