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스클리프

나의 히스클리프 2화

Espre5S0 by 이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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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순이는 언제 학교에 가요?” 무심한 척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이었다.

“아마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영어도 배워야하고… 적응도 해야하니깐.” 아버지는 순이의 눈 앞에 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선 천천히 쓰다듬었다. 앨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지 않으려 노력해야했다.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면 안되니깐 계란을 입에 넣었다. 꾹 참았다. 이 집에서 늘 완벽해야하는 자신이다. 언니이자 동생으로서도 당연히 완벽해야 할 것이다. 힌들리여서는 안된다. 여기는 워더링 하이츠이고 히스클리프가 있었으며 자신은 힌들리여서는 안된다. 그는 완벽한 캐서린을 연기할 자신이 있었다.

학교는 언제나와 같았다. 어중이 떠중이 멍청한 아이들 뿐, 앨리스의 친한 아이들 몇이 너네 아빠 훈장 받았다며— 하고 부러움을 표하였다. 아직 아이들이 순이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도 완벽한 아이로 있을 수 있었다.

오후 태양빛에 앨리스의 금발도 반작일 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세삼스레 건반 위에 손이 맴돌았다. 시선이 느껴지었다. 나무바닥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역시 순이였다. 문 틈 사이로 얼굴만 내밀고서는.

“뭐야?”

순이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뒷걸음질이었다.

“들어와.”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는 직접 그의 손목을 잡고 피아노 앞으로 이끌었다. 피아노 옆에 선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양 임술을 떨고 있었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앨리스는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연주를 시작했다. 볼거면 보라는 마음이었다. 자신의 13번째 자작곡이었다. 피아노를 모르는 것을 넘어 피아노를 피아노라고 부른다는 것도 모를듯한 순이는 그 연주를 가만히 드고 마치 다른 세상을 탐미하는 듯한 반짝임을 느꼈다. 계속 죽은 생선과도 같던 그의 다크 초콜릿색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좋아— 를 말 못해서, 몸으로 표현하려해도 여기서는 혹여 불쾌할 표현일까 말 못하는 그는 방긋방긋 웃어주는 것으로,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어주는 것으로 감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 순간 앨리스는 알았다. 순이가 자신의 알 껍질을 건드리고 있지만, 세상에 멋대로 들어왔지만 그도 앨리스의 알 옆에 멋대로 놓여진 알이라는 것과 말도 통하지 않는 이상한 우주에서 헤메는 중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이 그를 덜 화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순이가 피아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동안, 앨리스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원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마치 음악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했다.

“넌… 이해해?” 앨리스는 피아노 건반 위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순이는 고개를 들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앨리스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은 왠지 모르게 똑똑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또렷하고 날카로운 눈매. 마치 말은 못해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거 같이.

그는 슬 고민하다가 피아노 의자 옆에 있던 악보를 집어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잘 치는 곡의 페이지를 열어 보여주었다.

“이거 알아? 이 곡?”

당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순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제스쳐가 저 나라에서도 모르겠다는 것임은 확실해졌다. 알아봐야 쓸모는 없었지만.

“넌 왜 여기 온거야?”

“….”

“아빠가 널 데리고 온 이유는 알겠어, 근데 왜 하필… 우리집이냐고.”

순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은 피아노 건반에 고정되어 있었다.

"넌… 음악 좋아해?" 앨리스가 물었다.

순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앨리스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가리켰다.

"이거, 좋아하냐고."

순이는 건반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하지만 확실히. 앨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뭔가 통했으니 다행이었다.

“쳐볼래?” 앨리스가 손짓으로 피아노를 가리켰다.

“처볼— 래애?”

순이가 그의 말을 따라했다. 망설이는 거 같았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앨리스의 시선이 계속 그녀를 향하고 있다는 걸 느끼자,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피아노 건반 위로 올렸다.

덜컥. 건반 하나를 누르자 낮고 단순한 소리가 울렸다. 순이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앨리스는 피식 웃었다.

“다시 해봐.”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반을 다시 가리켰다.

순이는 이번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다른 건반을 눌렀다. 소리가 이어지자 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앨리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벽이 조금씩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피아노를 처음 배웠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때도 자신은 이런 단순한 소리에서 기쁨을 느꼈다. 순이도 그렇겠지.

"좋아. 그만하면 됐어." 앨리스는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순이는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더 하고 싶다는 것이 분명했다. 앨리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내가 나중에 더 가르쳐줄게. 지금은… 안 돼.”

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문 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가기 직전에, 그는 갑자기 돌아섰다.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올리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앨리스는 그것이 감사 인사라는 걸 깨달았다. 순이는 말을 못 하지만, 그녀의 몸짓은 충분히 많은 것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앨리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순이가 방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앨리스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벽이 조금씩 무너지는 느낌이 싫었다. 이 낯선 소녀가 자신에게 침투해오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동시에 순이가 건반을 누르며 웃었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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