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스클리프

나의 히스클리프 3화

Espre5S0 by 이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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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흘렀다. 앨리스는 피아노를 치며 평소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순이는 여전히 조용히 집안에 머물렀다. 어머니는 순이의 새 옷을 준비하고, 아이로서 지내는 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순이는 항상 앨리스를 따라다니며 그를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넌 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구나.” 앨리스가 어느 날 무심코 말했다.

물론 순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앨리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앨리스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넌 내 피아노 치는 게 좋지?”

알아듣지 못하지만 앨리스의 손끝이 피아노에 가있는 것을 본 순이는 맑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는 순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또 피아노만 쳐주는 건 지루해하지 않겠냐는 어머니의 지나가는 소리에 앨리스는 영향이었다. 그는 책장 한 구석에서 먼지 풀풀 쌓인 장난감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빨간 비행기 장난감이 있었다. 그가 한 때에 가장 좋아하던 것.

“순이, 넌 어떻게 노는지도 모르지?”

“…?”

“이것 봐, 부우우우우….” 앨리스는 입으로 엔진 소리를 흉내 내며 비행기를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투두두 하는 소리도 따라했다. 그 순간을 앨리스는 아직까지도 후회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순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동년배— 비슷한 나이 또래 아이들은 그의 앞에선 한번도 짓지 않았던 표정. 커다란 눈에 커다란 감정이 떠오른다. 뒷걸음질, 아니. 얼마 못 가서 엉덩방아를 찧고 카페트를 적셨다.

“순아?”

순이는 두 귀를 막았다 몸을 움츠렸다. 어깨는 떨리고 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질려 벌어진 채 알 수 없는 소리만 내뱉었다. 눈가에 맺힌 이슬에 눈이 밝게 빛났다. 호흡도 어려워하고 있었다.

순이에게는 앨리스가 지금 괜찮냐고 묻는 모든 말이 들리지 않았다. 어른 시체의 무게가 자신에게 얹힌 느낌이— 그는 파드드 몸을 떨었다.

공간이 일그러진다. 여기가 서울이든 아니든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피난길에 올랐고— 폭격이 떨어졌으며 부모님은 이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몸이 힘없이 스러진다. 어머니의 몸이 순이의 몸 위에 무겁게 얹힌다. 여름이었다. 한국의 더위는 훅훅 볶아서 살끼리 닿을 때 여간 끈적한 것이 아니었는데 피가 거기 땀보다도 진하였다. 눈물이 고이다가 흘렀다. 구토감을 참을 수 없었다.

“엄마! 엄마! 빨리와요!”

앨리스가 소리지르자 아버지도 어머니도 한순간에 방으로 달려왔다. 순이는 파드득 떨며 경련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을 한 것은 의외로 아버지였다. 순이를 제 품안에 넣고 단단히 안았다.

“순이… 순이가… 왜….”

“앨리스.” 아버지의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우리 딸, 순이는 전쟁을 알아. …네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것은 알지만 네 행동의 무언가가 그의 끔찍한 기억을 자극한 것 같구나.” —말에 앨리스는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순이가 겪은 세계는 자신이 알던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하나의 세계가 깨어졌다. 그날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기억은 없다.

다음 날, 앨리스는 평소보다도 더 조용히 무언가의 침천물과도 같이 가라앉아 있었다. 식탁에 앉아있는 순이가 전날보다 작아보였다. 아무리 봐도 하늘색은 안 어울려 하는 현실에서 분리가 된 듯한 감상만이 들었다.

언제나의 아침식사였다. 아버지는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어머니는 순이의 접시에 베이컨을 더 담아주었다. 어머니가 순이에게 더 먹어야 키가 커진다던가 달걀과 우유를 많이 먹으면 피부가 희어질거라는 등의 소리를 하였으나 닿지가 않는 거 같았다. 그는 순이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어제의 그 기억이 그 충격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종종 하시던 말, “전쟁은 애들 장난이 아니야.”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한다. 빵빵 하고 총 쏘는 흉내를 낸다. 실제로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다니고 팔 다리를 잃고 목숨도 잃는다. 그렇게 죽어나간다.

비행기 폭격— 그 장난,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인걸까. 그 중에 순이의 부모도 포함이 된 것일까. 빵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저 톱밥을 씹어 삼키는 느낌이었다. 그 날 이후 그는 영원히 전쟁놀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톱밥같은 빵과 질기기만 한 베이컨을 씹어 삼켜서 입에 넣었다. 학교 숙제를 하러 방에 가서야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따뜻하다. 바깥과는 다르다. 그러나 흠뻑 젖어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테네시의 하늘은 낮부터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다시 피아노를 치고자 내려갔다. 비는 내내 쏟아졌고, 집 안 곳곳에는 빗소리가 스며들었다. 순이는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고마한 손바닥 위에 남은 상차자국은 금방 사라졌으나 전쟁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의 여름과도 같이 끈적해지고 흡해진 공기에 친모의 마지막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익숙한 피아노 소리다. 피아노 소리에 순이는 이끌리듯 계단을 내려갔다. 통통 튀는 가벼운 음에서 시작을 해서 무겁게 내려간다. 이내 어두워져서 어딘가 가라앉은 거 같다. 그 음에 어릴 적 가족과 함께였던 여름을 회상한다. 빗소리와 겹쳐지며 그 어느때보다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순이에게도 부르고 싶은 것— 소리 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앨리스는 건반 위 손가락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피아노를 치는 동안에도 계속 느껴지던 시선, 문 틈 사이로 살짝 비치는 까만 눈동자를 마주쳤다. 순이가 또 거기 있었다. 언제나처럼 조용히, 아무 말 없이.

"뭐야?" 앨리스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순이는 움찔했지만,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작은 손이 문 틀을 잡고 있었다.

"들어오라고 했잖아." 앨리스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녀는 피아노 뚜껑을 닫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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