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스클리프

나의 히스클리프 -10화

Espre5S0 by 이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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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을 뿐일까, 아니면 순이와 함께 이해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 

순이와 교감하고 싶었다. 닿고 싶었다. 동시에 두려웠다. 알은 세계이다. 이미 알을 깨고 나왔나? 그리고 흰자와 노른자를 쪼아먹으려고 하는 것일까?

문득 순이가 고향 노래를 부르며 울던 모습이 생각이 났다. 낯선 발음과 알 수 없던 언어들.

skdml tkfejs rhgiddmls Rhcvlsms tkfrhf—. qhrtnddkRhc tkfrnRhc—.

앨리스는 거기서 반복되는 Rhc이라는 단어를 찾는다. 무슨 뜻일까. 앨리스는 영어와 간단한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어는 못한다. 최소한 그 반복되는 알 수 없던 그 뜻은 알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악보를 펼친 채 멍하니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순이의 까맣고 깊은 눈동자에 흐트러진 자신이 비치고 있었다. 새까맣다. 낮에는 다크초콜릿과 같이도 보이는데 이 캄캄한 밤에는 그냥 새까만 심연과도 같아서 자신을 다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왜 자기도 못 치는 악보를 보여줬지? 치게 하고 망신을 주려고? 이건 힌들리도 아니야, 삼류 악당이잖아. 악보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이거, 너 잘 칠 수 있을 거 같은데."

"틀린. 그것은 매우 복잡해 보여."

순이의 어색한 말에 피식 웃으며 미숙하게나마 다시 연주를 하려 하였다. 이 밤에 부모님께 폐일 것은 안다. 그러나... 하고 싶었다. 그러니깐 해야만 했다. 부모님은 앨리스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면 거의 언제나 황홀한 얼굴을 하셨다. 잘 들어주실 거야. 괜찮을거야. 그는 건반으로 손을 옮겼다. 

한쪽 손이 바삐 움직인다. 음을 만들어내고 순이는 작게 감탄 소리를 내었다. 약간 틀렸다. 실수가 있었다. 순이는 그런데 겨우 두달짜리 초보자니깐 이런 거 몰라. 그냥 쳤다.

"앨리스."

아버지의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이 시간에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좋은 생각 같지 않구나."

앨리스는 깜짝 놀라 손을 건반에서 뗐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방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아버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에는 깊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미안해요, 아빠. 그냥... 멜로디 하나를 떠올리다가요, 그게. 이게. 순이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는데, 영감이랄지, 그게... 지금 해야 잘 칠 수 있을 거같아서..." 앨리스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없었다. 아버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지만, 늦은 밤에는 좀 더 조용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단다. 네 연주는 아름답지만, 지금은 모두가 쉬어야 할 시간이지 않겠니?"

그 말에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아노 뚜껑을 천천히 닫았다. "다시는 이런 실수하지 않을게요, "라고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가 방을 나가자, 순이는 조심스럽게 앨리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빛에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순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짧았지만, 앨리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순이는 방 한쪽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앨리스 옆에 앉았다. 그는 손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멈추지 마. 음악... 좋아."

앨리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피아노 뚜껑을 열고 이번에는 더 조용히, 그리고 더 부드럽게 연주를 시작했다. 순이는 옆에서 조용히 그 소리를 들으며, 그의 손이 건반 위를 미끄러지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들꽃 같은 미소가 핀다. 햇살의 이름을 가진 그 애에게 어울린다. 순이라는 이름이 한국에서 무슨 뜻이었을까? 분명 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을 거야.

"네 이름 무슨 뜻이야? 한국에서."

"착하다. 착해."

"그리고?"

"말썽을 피우지 않아."

"그게 다야?"

"응."

햇살이라던가, 강인한 희망이라던가 그런 뜻이 담긴 이름일 줄 알았다고 앨리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순이, 네 노래 또 불러줄래?" 조심스레 물었다. 단서를 더 찾고 싶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편지로 이어지는 것처럼 둘이서 음악으로 이어지길 원하였다.

"아버지, 공포입니다."

"⋯넌 괜찮잖아. 엄마도 아빠도 너한테는 화 안 내고."

솔솔미파솔 라라솔—. 순이가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다. 왜 즐겁지 않은 눈빛인 걸까. 너에게만 허락이 된 잘못이잖아. 앨리스가 밤늦게 건반을 누르고 건반을 누르고 연주를 하면 아까처럼 아버지의 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순이가 아까 건반을 더 세게 누르고 전처럼 울면서 노래를 불렀어도 부모님은 그저 가만히 침대에서 참아주었거나 거실로 내려와도 그 이유는 안아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노래는 무슨 뜻이야?"

"그리운⋯ 예전 집. 생각하는."

"⋯너는 할 말이 없으면 늘 그 소리이더라."

"아니, 노래⋯ 의미야. 예전 집 생각하는."

순이는 피아노 건반을 다시 누르면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 위축된 듯 소리가 갇혀있다. 그러나 슬픔이 느껴졌다. 예전 집– 고향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노래라면 여기서 순이만큼 그 노래를 더 잘 부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앨리스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건반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순이의 멜로디는 단순하지만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 그리운 곳의 이야기라면 나도 한 번 느껴보고 싶다고 앨리스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는 자신이 순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세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싶었다.

"다른 음 더하면 더 좋아질 거 같은데…."

​ "응 그럴래. 원래 음이 한번에 여러 개. 그런데 나는 한번에 한 개. 그런데 너는 할 수 있어."

​순이의 말에 앨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아노 위에 손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새로운 음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멜로디는 점점 더 풍부해졌고, 순이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완성된 곡으로 다듬어졌다.

"이거 어때?" 앨리스가 물었다.

순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피아노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그도 두 손을 사용하려 애쓰며 앨리스가 만든 화음을 따라 연주하려고 했다. 실수도 있었지만, 그의 노력은 음악에 생기를 더했다. 순이는 치는 재능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듣는 귀가 좋았다. 앨리스의 편곡을 그가 조금씩 건든 부분에서는 더욱 더 좋았다. 그는 앨리스가 의도한 감정을 빠르게 파악하고, 자신의 스타일로 그것을 표현하려 애썼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려오지 않았다. 역시 순이에게만 물러. 그렇다는 건 내게 아직 기대를 하고 있다는 거 맞지? 그래, 순이에게 아직 자리를 빼앗긴 것이 아니다. 빼앗겨서는 안된다. 외동 아이에 대한 편견이 진짜일까, 진짜라면 그렇게 자란 시간이 너무 길어서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닐지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둘의 합주는 밤 늦게 끝났다. 파자마를 입고 연주하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앨리스가 잠을 자러갈 때에 순이가 배게를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자고 있어?"

"아직."

"같이 자자. 나 못 자고 있어."

"그래."

앨리스의 침대는 순이의 침대처럼 평범한 싱글사이즈 침대였다. 인형을 바닥에 전부 두면 두명이서 자기 충분했다. 몸이 밀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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