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자루미] 지금부터 절대 뒤돌아보지 마세요
원작이라고는 한톨도 없는 날조망상
루미에는 마을사람들의 자신을 향한 악의와 분노를 처음 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꽤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으나 신수의 수호자라는 신분은 신수의 전설을 믿는 마을 사람들에게 맹목적인 호의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것들이 하룻밤사이 뒤집혔을 때의 기분은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문레이크는 정말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였다. 거대한 호수라든가 북쪽 바다의 피오르드라든가 겨울의 오로라라든가 문레이크만의 자연지형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순박한 성정이 문레이크를 아름답게 만든다고 루미에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문레이크에는 이방인이 방문하는 일이 드물었다. 어쩌다 외부인이 마을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과 경계어린 눈빛을 보내곤 했다. 대부분의 외부인들은 그런 눈빛에 떠밀려 자신들의 목적을 빠르게 완수하고 마을을 떠났다.
이번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화롭게 일상을 이어가던 한낮에 낯선 이가 찾아왔고, 사람들은 그를 반기면서도 호기심과 경계를 숨기지 않았다. 다만, 그 이방인은 그런 눈빛을 읽지 못한 건지 꽤나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어째서인지 그는 곧바로 신전으로 향했다. 낯선 외부인이 신전으로 향하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마을 사람 하나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으로 가면 신전밖에 없는데, 어디 가려고 하세요?”
자신에게 말을 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본 이방인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신전에 가요. 루미에님을 뵙고 싶어서요.”
처음 이방인의 서늘한 눈빛에 약간 긴장했던 남자는 여자의 웃음에도 긴장을 쉽게 풀지 못했다. 왜인지 위험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이대로 신전으로 가도록 두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동시에 그와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찰나의 고민 끝에 뒤돌아 걸음을 옮기려는 이방인의 손목을 잡으려 손을 들었다.
”어머, 저를 찾으신다구요?”
경쾌한 목소리에 둘 다 움직임을 멈췄다.
”처음 뵙는 분인데 저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실까요?”
루미에를 본 이방인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가 금방 펴졌다. 그 자리의 누구도 그의 표정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루미에와 이방인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남자는 루미에에게 대충 인사하고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디서 왔는지 정체모를 이방인과 단 둘 뿐인 티타임은 신수의 수호자로서의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이었다. 꽤 오랜시간 이 나라를 지켜온 루미에는 그 어떤 누구와 독대하더라도 당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래, 지금 자신의 앞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체자렛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것이 없더라도 루미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꽤나 좋아했다.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보는 외부인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루미에를 들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오랜 친구와의 티타임도 루미에에게는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고립되고 정체된 문레이크에서 새로운 사람과의 티타임은 꽤나 좋은 자극이었다. 낯선 사람의 신선한 말하기 방식, 그 사람의 살아온 궤적들, 새로운 대화 소재, 자신의 말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 차나 디저트 취향, 차를 마시는 자세와 습관들까지. 루미에에게 낯선 사람과의 티타임이 인생의 소소한 재미가 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체자렛은 루미에에게 꽤나 괜찮은 대화상대였다.
”동부대륙에서 오셨다구요?”
”네.”
”우와. 종종 문레이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중부대륙 사람들이거든요. 아, 물론 동부대륙 출신인 분들이 방문하셨을 수도 있지만 저와 이렇게 같이 앉아서 이야기 하신 분들 중에서는 처음이예요.”
”그렇군요.”
체자렛은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루미에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짧게 대답한 체자렛이 찻잔을 들어 차를 한모금 마셨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차향을 음미하는 모습이 정말 우아했다. 루미에가 그 모습을 홀린듯이 쳐다봤다.
“체자렛님은…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후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체자렛은 아무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아마도 비슷한 말을 많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긴 갈색 머리카락과 같은 색깔의 눈동자, 붉고 통통한 입술이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손가락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갈해서 그의 아름다움에 품위를 더했다.
”동부대륙에서는 홍차를 많이 드신다고 들은 것 같은데 문레이크에서는 차가 잘 나지 않아서 홍차 종류가 그리 많지 않네요.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음… 뭐…”
”어머, 별로라면 다른 차로 다시 내올까요? 어떤 차가 취향이시려나?”
”아뇨, 별로 나쁘지 않아요.”
벌떡 일어나는 루미에를 체자렛이 말로 제지했다.
”아마… 이후에도 가끔씩 생각날 것 같은 맛이예요.”
”어머- 정말요? 다행이네요.“
체자렛이 낮게 웃으며 차를 한모금 더 마셨다. 웃으며 자리에 앉는 루미에를 바라보는 눈빛이 서늘했다.
점심때 쯤 시작한 티타임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러나 해는 이미 저버려 하늘은 어두웠다. 원래도 해가 짧은 문레이크의 겨울에는 제대로 된 저녁 식사를 하기도 전에 해가 지곤 했다. 집집마다 따뜻한 색의 불이 켜져 마을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해가 떨어졌음에도 사람들은 꽤나 많이 밖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혹시 다음에 중요한 일정이 있으신가요?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기로 했어요? 저랑 같이 하실래요?”
체자렛보다 앞서 걸어가던 루미에가 빙글- 뒤돌아보며 말했다. 무표정하던 체자렛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체자렛의 대답에 루미에의 표정이 급하게 밝아졌다. 활짝 웃은 루미에가 팔랑팔랑 앞서서 걸어갔다. 그를 바라보는 체자렛의 표정이 언제 웃었냐는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녁식사 후 체자렛은 자연스럽게 루미에의 집으로 들어왔다. 마을의 고지대에 위치한 신전 근처의 작은 건물이었다. 거실의 커다란 창문은 온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신들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마을 곳곳의 불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나요? 체자렛님처럼 이곳 저곳 여행하시는 분이시라면 세계 곳곳에 여러가지 맛있는 음식들을 먹어보셨겠죠? 문레이크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만 음식은 조금 소박한 편이라 체자렛님 마음에 드셨을지 모르겠네요.”
”네.. 뭐… 소박한 맛이 있는 음식이더군요.”
루미에는 체자렛의 답을 긍정적인 의미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춥진 않으신가요? 여기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벽난로 앞에서 몸 좀 녹이시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음… 좀 더 마을을 보고 싶네요.”
”어머 눈이 오네요.”
루미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창가에 걸터앉아 밖을 내려다보는 체자렛 옆에서 하나둘씩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보았다. 꽤나 큰 것이 두껍게 쌓일 정도로 많이 올지도 몰랐다. 마을에는 불빛이 몇개 남아있지 않았다. 눈까지 내리는 마을은 더욱 고요했다. 루미에는 체자렛을 곁눈질했다. 태양 아래 보다 은은한 달빛을 받고 있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올해 첫눈이 꽤 빠르네요. 제가 아까 문레이크의 거대한 호수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나요? 원래도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만 눈이 오면 정말 배는 아름다워진답니다. 푸른 호수와 하얀 눈의 조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 더 추워져서 언 호수 위에 눈이 쌓이면 하얀 설원이 생겨서 그것도 그것대로 정말 엄청난 장관이예요.”
말을 마치고 체자렛을 향해 돌아본 루미에는 자신에게 훌쩍 가까이 다가온 체자렛에 흠칫 놀랐다. 같이 지내는 내내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하던 사람이었는데 오늘 하루 중 가장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아, 어…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제 친구들 말고는 외부인을 대접하는건 꽤 오랜만이라 즐거우셨을지 모르겠어요.”
체자렛이 거리를 점점 좁혀오자 루미에는 조금씩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결국엔 창에 가로막혀 창틀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뭐… 아주 즐거웠다고는 못하겠지만…”
체자렛이 몸을 아주 밀착해왔다. 눈앞에서 오물거리며 움직이는 도톰한 입술에 루미에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저어… 체자렛님? 너무 가까운게 아닌가 싶은데…”
”아마 이후에 아주 즐거워질 것 같네요.”
”네?”
체자렛의 얼굴이 더 가까워지자 루미에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루미에의 몸이 흔들렸다. 아니, 이 마을 전체가 흔들렸다. 놀란 루미에의 눈을 체자렛이 두 손으로 덮어 가렸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부터 절대 뒤돌아보지 마세요.”
바닥이 계속해서 진동했다. 루미에는 체자렛의 품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쉬이- 체자렛이 아이를 진정시키듯이 루미에를 달랬다.
”체자렛님? 왜 이러세요. 놔주세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가 가봐야 해요.”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어요. 이건 오늘 루미에님이 제게 베푼 호의에 대한 보답이랍니다. 뒤돌아보지 않으시는게 루미에님께 더 좋을 거예요.”
”이거 놔!!! 당신 누구야!!!”
자신의 눈 위에 올려진 손등을 긁었지만 장갑 탓에 체자렛에게 어떤 흠집도 내지 못했다. 아무리 버둥거리고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겨도 루미에는 체자렛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내 루미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체자렛은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장갑을 느끼곤 혀를 찼다.
“정말 마음에 들려해도…”
루미에의 작은 입술을 도톰한 체자렛의 입술이 덮었다. 눈을 가렸던 손은 루미에의 턱을 잡고 눌러 입을 벌리게 했다. 기다란 혀가 입 안으로 침범했다. 루미에는 자신의 눈을 덮었던 것이 사라지자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다 자신을 서늘하게 바라보는 갈색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루미에는 이 눈빛이 체자렛의 본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 하루 자신의 행동을 후회해도 이제와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으음…”
새어나온 소리에 체자렛의 눈이 비웃듯 휘었다. 루미에는 부끄러웠지만 마주하고 있는 눈을 돌릴 수도, 감을 수도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마주쳐 오는 눈을 바라봤다. 체자렛이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루미에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점점 달리는 호흡에 루미에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체자렛은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루미에의 침실로 들어가 루미에를 침대에 눕혔다. 그제서야 떨어진 입술에 루미에는 모자란 호흡을 빠르게 채웠다. 달린 호흡때문에 멍한 눈동자라던가 눈물과 칠칠치 못하게 흐른 타액에 푹 젖은 얼굴, 그리고 거기에 흐트러져 잔뜩 붙은 머리카락까지... 체자렛은 이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어느새 호흡이 안정된 루미에가 체자렛을 노려봤다. 빙긋 웃은 체자렛이 루미에의 목을 쥐었다.
”컥-“
”자고 일어나면 모든게 다 끝나 있을 거예요.”
점점 힘이 들어오는 손을 떼어내기 위해 루미에가 발버둥쳤다.
”그럼, 잘자요.”
체자렛이 자신을 노려보는 루미에의 눈을 남은 한 손으로 가려내자 루미에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다 멈췄다. 얌전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루미에에게 친절히 이불까지 덮어준 체자렛이 루미에의 목에 남은 손자국을 손가락으로 슬쩍 쓸어보았다. 꽤나 만족한 듯한 체자렛이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루미에는 자신의 집 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고 잠들었단 사실에 어제 그렇게 바빴던가 하고 떠올리려 했지만 찌르는 듯한 두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재촉하듯이 점점 커지는 노크소리에 루미에는 급하게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마을 사람들 몇명이 있었으나, 그들의 표정은 루미에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제가 한게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그럼 그날 밤에 무엇을 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그건… 윽-“
그날의 일을 기억하려 하면 여전히 두통이 일었다.
”아무런 말씀도 못하시잖아요. 여기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분은 루미에님 뿐입니다.”
”그런…”
”저희 마을을… 떠나주세요…”
달이 밝은 어느 밤, 누군가 문레이크의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가 달을 온전히 비쳤다. 두 개의 달을 보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눈물에 젖어 빛나던 붉은 빛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아아- 한 번 더 보고 싶다-
어느새 호수에는 누군가 있던 흔적도 없이 고요함만이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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