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학생이 과거에 빠진 이유

7. 번화가

강변을 산책하고 길을 따라 번화가로 돌아왔습니다. 사람이 많습니다. 곳곳에서 들리는 일본어가 낯설었습니다. 대도시에서는 안내방송으로 중국어와 일본어도 추가해두지만 이렇게 일상어 수준으로 들리지는 않아요. 관광객들이나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쓰는 정도?

 못 알아먹겠다. 전 일어를 모릅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외국어는 영어뿐입니다. 약간 배운 것까지 말하자면 한 가지 더 있기는 합니다. 수능 제2외국어와 학교 내신 제2외국어는 프랑스어였어요. 자의는 아닙니다. 난 중국어 배우고 싶었어요. 중국어반 지원자가 많아서 뽑기를 돌렸고 깔끔하게 떨어졌죠.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놓고 보니 정말 서양 언어와 친하군요. 어머니 조상 중에 외국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외숙모도 외국에서 온 교수님이시고요. 그래서 그럴... 리가 있나요? 외가만 해도 사람이 몇인데. 머리 좋은 사람들도 많겠다, 서양 언어와 친하게 지낼 운명이 있다면 그쪽에서 태어난 사람이 가지고 있겠지요. 

 지나가던 자리에 금은방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역사 수업 시간에 일제 강점기 한국에도 금을 통한 일확천금을 노린 시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금은 아닌 것 같군요.

 "이 일대에서 제일 큰 금은방입니다."

 "크네요. 장사가 잘되는 곳인가요?"

 "예. 금 외에도 해외에서 이런저런 보석을 들여와 팔더군요. 혹시 보석을 좋아하십니까?

 "예쁘게 커팅된 보석은 좋아합니다. 금만큼은 아니지만요."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습니까?"

 "금은 모든 화폐의 밑천이잖아요. 다른 모든 보석의 값은 요동쳐도 금은 인류사회가 무너질 때까지 그 가치를 잃지 않을겁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화폐 가치는 그 국가가 갖춘 금의 양과도 연관이 있다고 하니까요. 발행하는 화폐만큼 금을 보관해두던 시절도 있었고요.

 "개인적인 이유는 아니군요."

 "그렇죠. 어딜 가도 돈은 필요하잖아요? ... 아."

 잠깐만. 돈 될만한 것이 있네? 금이 있을지도 몰라요. 엄마가 약간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도 뭐라 해서 학교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남은 세뱃돈과 지난 추석 용돈을 바꿔뒀어요. 지갑에 넣어두는 미니 골드바 세 개 정도였는데. 나중에 방으로 돌아가면 지갑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혹시 금을 돈으로 바꾸실 생각이라면 이곳은 피하십시오."

 "매입 가격이 낮은가요?"

 "주인이 실제 금 무게보다 작게 책정할 때가 많습니다."

 "정보 고맙습니다."

 이런 정보는 현지인이 아니면 알기 어렵죠.

 돌고 돌아 처음 내린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사진관 문은 단단히 닫혀있습니다. 문 앞에 무언가 붙어있군요. 

[출장 중]

 아까 만난 사진사는 아직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나 봅니다.

 "책은 좋아하십니까?"

 "예."

 "이 옆에 서점이 있습니다."

 선우가 사진관 옆 건물을 가리켰습니다. 입구부터 책이 빼곡했습니다. 헌책방 같은 느낌이에요. 신기해라. 이 중에 내가 읽을 만한 한문 안 섞인 책은 없을까요?

 "정웅 아저씨. 저 왔어요."

 "선우구나."

 책방 주인과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선우의 차림새로 짐작해보면 좀 배운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곳도 자주 드나들었나 봅니다.

 "아침부터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내가 아니라 예화가 하지. 마음 같아서는 안 보내고 싶다만..."

 "이 일대에서는 그 학교로 가야 그나마 제대로 된 수업이 가능하니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이번 여름에 경성으로 올라가면 좀 괜찮아질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아침에 예화를 불렀던 목소리입니다. 아버지인가 봐요.

 "저 파란 눈... 아침에 예화가 말한 아가씨구먼?"

 "예. 그렇습니다."

 내 이야기가 나왔다. 고개를 돌려 꾸벅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책방 주인 아저씨가 머쓱한 듯 볼을 긁적였습니다.

 "예화가 아침부터 예쁜 언니를 만났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했습니다."

 "좋게 봐줘서 고마울 따름이에요."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말입니다."

 책방 주인이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선우가 책을 찾으러 온 김에 아가씨도 데려오셨나 봅니다. 마음에 들었냐?"

 "실례될지도 모르는 소리는 하지도 마십시오."

 아저씨는 씩 웃기만 하고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원래 외출 목적은 여기였군요?"

 "예. 그래도 강이 근처라 좀 놀다 올 생각이었습니다."

 책방 주인이 책을 다섯 권 넘게 들고나왔습니다.

 "선교사들이랑 여기 들어오는 외지인들에게 전부 물어보고 다녔어. 구하느라 엄청 고생했다."

 "아저씨 아니면 어떤 사람에게 이런 책을 구해달라 하겠어요."

 "조선에서도 공부하려고 샀지? 미리견으로는 언제 돌아갈 생각이냐."

 "내년에 갈 생각입니다. 일 년 정도는 누님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우가 다섯 권이 넘는 책을 한 번에 들었습니다. 어우. 내 허리가 다 아프네. 난 저거 들고싶어도 못 들어요.

 "두 권만 저 주세요. 거들게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아저씨."

 "젊음이 좋긴 좋아. 조심해서 가라!"

 가게 앞에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어 탑승했습니다.

 "무슨 책인가요?"

 "법률에 관한 책입니다. 국제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더군요."

 "미리견에서 법을 공부하셨습니까?"

 "예. 내지의 법도 결국 양인들에게서 배워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지. 일본 열도를 칭하는 말이겠지요? 불현듯 역사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유감스럽지만 현대의 모든 법행정 체계는 일제강점기에서 이어졌다고.

 "멋지네요. 해외로 눈을 돌려도 좋겠습니다."

 선우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아가씨는 미리견에서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막 의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지식을 요구하지는 말아주세요. 한 달, 아니. 한 달 하고 반 만에 여기로 날려와서 머리에 든 것이 없습니다.

 "의학 말입니까?"

 "예. 사람 사는 곳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이 아닙니까."

선우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나. 경성에서 의학을 배우실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어..."

 경성이 아니라 서울은 가고 싶었어요. 예화대 의대에 진학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아쉽지도 않고요. 하지만 저의 1지망 대학은 연세대였습니다. 하지만 의대 자체가 상위권 아이들끼리도 박 터지게 싸워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 아닙니까. 저 지방에 있는 곳까지도 말입니다. 의대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도 불확실했던 상황에서 2지망이었던 예화대에 최초 입학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실례되는 질문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뭐... 사실 일어나 한문보다 미국인들의 언어가 더 쉽기도 하고요."

 여기서 의대 다니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나는 모두가 한글을 쓰는 시대에서 왔습니다. 한문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는 세상이었지요. 일본어도 배우는 사람들만 배우는 언어로 취급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던 사람이 한자 섞인 글을 읽을 수 있겠어요? 아니. 못 읽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자만 외우면 되는데 하기 싫다고 난리 피운 사람이 읽을 수 있을 리가요.

 이 시대까지 오지 않더라도,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신문에 한자가 섞여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한문 독해 능력을 갖췄겠지요. 어라... 기본 교양보다 더 쉽다고 너무 쉽게 말했나... 안 그래도 난 이상해 보일텐데 더 이상하게 보겠네요. 그냥 침묵할걸 그랬습니다. 입만 다물어도 반은 가는데...

 "아가씨의 재능은 양인들의 언어였나 봅니다."

 선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미리견에서 친구는 많이 사귀셨겠습니다."

 "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웃긴 사람들이 많았지요. 사고방식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요."

 거짓말이라 죄송합니다. 사실 제 친구들 이야기입니다. 친하게 지내는 동기 중에 웃긴 사람이 좀 많죠. 유학생과 엮일만한 수업은 못 들은 지라 외국인 친구는 없습니다.

 "도련님도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하셨지요? 어떠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새로운 것이 어찌나 많은지. 책만 들여다보아도 즐거웠습니다."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습니다.

 "아가씨가 그러하듯 저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다른 점이 많아 적응하느라 시간은 걸렸습니다만..."

 "그건 어쩔 수 없지요."

 외국어만 써서 대화해도 기운이 쪽쪽 빠집니다. 그런데 가서 살기까지 하면... 여긴 그래도 말이라도 통하지.

 그래도 겨우 두 달 즐긴 내 대학 생활은 빨리 돌려받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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