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달라진 것
예화가 가져다 준 보따리에는 옷이 있었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현 선우를 만난 덕분에 의식주를 전부 해결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지...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방법이 생길까요?
예화가 말한 유성우는 거문고자리 유성우일겁니다. 이 주 정도는 과거의 세현에 머물러야 하니 일단 길부터 익혀둬야겠습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과거 지도는 없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보여줬을 때 잘 봐둘걸.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챙기려다 멈췄습니다. 작은 카메라는 이 시대에는 없겠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휴대폰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선우가 대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발 닿는대로 돌아다니려고요."
"마침 꽃놀이를 가려 했습니다. 같이 가시렵니까?"
눈가가 둥글게 휘었습니다. 눈웃음이 참 잘 어울리네요. 동기 중에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봤으면 정말 좋아했을 겁니다.
"좋아요."
선우를 따라 밖으로 나왔습니다. 대문 앞에 차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에나 나올법한 차량입니다. 이런 물건을 내 눈으로 보다니. 선우가 차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통 기사가 열어주지 않나? 뭐. 저야 감사하지만요. 우리가 탄 차는 한적한 길을 달려 번화가에 도착했습니다. 가끔 인력거가 옆을 지나갔습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잘 빼입은 사람들도 보이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로 서슬 퍼런 기세를 내뿜으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순사들이구나. 서늘한 공기가 몸 안쪽까지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야 체감이 됩니다. 서양의 문화가 밀려들어오며 기묘한 문화를 꽃피웠지만 우리의 땅이 아니었던 세상이구나.
차량은 어느 건물 앞에 멈췄습니다. 사진관 앞이었습니다. 밖으로 나오던 사진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뻘쭘하게 인사했습니다.
"기영이형. 어디 가?"
"어어. 꽃이 한창이잖아. 출장 사진 찍어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사진사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습니다. 어? 이 시절에도 소형 카메라가 있었네요? 얼핏 본 외형으로는 내가 쓰는거랑 구조가 다른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우리 집 손님."
"외국인이야? 나중에 사진 찍고 싶으면 찾아와요. 싸게 해드릴게."
사진사가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습니다. 하지만 바쁜 모양입니다. 급하게 길을 따라 사라지는군요. 소형 카메라가 있구나. 나중에 좀 더 찾아봐야겠어요. 외형이 비슷하다 싶으면 내 디카 들고 다녀야지.
"방금 저분이 간 길을 따라 쭉 걸으면 강이 나옵니다."
뛰어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앞에 다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강이 육안으로 보이는 거리입니다. 어쩐지 익숙한 거리감인데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의식적으로 무시하며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여기는 내가 매일 오갔던 장소일지도 모른다고.
의대캠퍼스 후문에서 강변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위치가 비슷합니다.
'의대 캠퍼스 자리 있죠? 1900년대에는 저기가 번화가였어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논밭으로 쓰였습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어제 처음 떨어졌던 장소부터 오늘 차를 타고 달린 한적한 길이 예화 대학교 메인 캠퍼스일지도 모릅니다. 여기는 의과 캠퍼스 부지이고... 나중에 지도를 켜보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겠죠. 시간의 흐름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다니...
"미리견에서 오셨다고 하여 걱정했습니다. 괜한 짓이었군요."
"네? 음. 왜요?"
"미리견의 화려함과 비교하면 세현은 볼 것이 없지요."
선우가 기분 좋게 웃었습니다.
"헌데 아가씨의 얼굴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다고 쓰여있습니다."
전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이 사람, 눈치가 빠릅니다. 아니면 너무 대놓고 티를 냈을까요?
어느새 강변에 도착했습니다. 강을 따라 심어진 벚나무가 절경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세현 사람들은 복 받았군요. 이런 곳이 있다니."
"예. 풍경을 즐기러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다 똑같구나. 수십 년이 지나 이곳을 오가는 의과대 선배들과 메인 캠퍼스 학생들도 그렇습니다. 꽃이 화려하게 필 즈음이 되면 학생들은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꽃을 즐기러 나갑니다.
"자주 나오시나요?"
"예. 저는 자주 돌아다닙니다."
그림 같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지금처럼 사월에는 벚꽃이 핍니다. 가을에는 노랗게 물든 단풍이, 겨울에는 길에 쌓인 눈이 운치를 더하지요."
옛날에는 이곳이 이런 모습이었군요. 이맘때의 예화 의대 주변에서는 푸릇푸릇한 싹을 틔운 나무만을 볼 수 있습니다. 예화 의대 옆 강변 조경수는 벚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화대학교의 조경수는 대부분 동백이거나 흰 매화입니다. 재단에서 유독 좋아하는 나무라고 하지요. 의대 캠퍼스 경계선에는 전부 매화만 심어두었습니다. 그래서 시에서 강변 조경수도 매화로 맞췄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올해는 벚꽃이 이르게 폈죠? 강변에서 꽃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물줄기 따라 쭉 내려가세요. 예화 재단이 소유한 부지 주변에는 벚꽃이 없습니다.'
덕분에 벚꽃이 한창일 시간에 꽃놀이를 즐길 생각도 못 했습니다.
'왜 없어요?'
'벚꽃의 꽃말은 시험 기간이라면서요? 공부하세요.'
학과 교수님은 공부 하라고 재단이 꽃을 다 치웠다는 농담까지 했습니다. 그 덕분에 시험공부는 열심히 했으나... 다 잘했는데 딱 한 과목을 말아먹었습니다. 지역학 딱 하나만. 박재윤 교수님. 왜 b+를 주셨나요! 나는 최소 A0는 나올 줄 알았는데! 열심히 공부해 갔는데 대체 왜!!
그래도 학기 초에 매화를 즐겼으니까요. 진짜 예쁘기는 했어요. 그래... 입학 직후에는 즐거웠지...
"혹시 이 근처에 매화나무도 있습니까?"
"매화는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르는 풍경을 우리가 즐겼나 봅니다. 아쉽네요. 벚꽃과 다른 매력이 있는데.
"좋아하십니까?"
"예. 붉은 매화는 본 적 없지만 흰 매화는 아름답지 않나요?"
"같은 생각입니다. 참 아름답지요. 혹시 매화의 꽃말을 아십니까?"
음. 뭐였더라. 문학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등장할 때가 많았는데...
"기품... 인가요?"
"맞습니다. 고결한 마음과 결백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선우가 옅게 웃었습니다.
"의외군요. 요즘은 벚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취향이 생각보다는 수수..."
뭐가 있더라? 되짚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뭘 말해도 이 시대 기준으로는 부유하다고 오해를 살만한 것 뿐이네? 빵도 안 흔하고, 겨울이면 굴러다니는 귤도 지금만큼 흔하지 않을 겁니다. 요즘은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사진을 찍으러 다닐 수 있지만 이 시절에는 카메라가 저렴한 물건이 아니잖아요.
"취소할게요."
선우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뭘 좋아하십니까?"
"말 못해요. 말하면 절 이상하게 보실거에요."
"제가 그렇게 매정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체면의 문제라서요. 눈만 데굴 굴렸습니다. 아침 햇볕을 반사하며 반짝이던 강물이 어느새 고요해졌습니다.
"모르는 척 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제 질문에 대답해주십시오."
선우가 몇 걸음 앞서 나갔습니다.
"무슨 질문인가요?"
"만약 제가 당신을 본 적 있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럴 리가요. 불가능해요."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답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세현의 괴담을 고려해도 불가능합니다.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괴담은 과거만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난 미래에서 왔는데 당신이 날 어떻게 봤을까요?
"당신도 미리견에 있던 조선 사람이니, 유학 경험이 있는 내가 당신을 봤을 수도 있지요."
그럴싸한 이유군요. 변명이 될만한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아. 적당한 것이 있군요.
"당신 같은 미남이 제가 있는 곳에 있었다면 동네가 떠들썩했을 겁니다. 그런 소문이 제 귀에 안 들어왔을 리 없어요."
선우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휘 아가씨. 전부터 하려던 말입니다만... 대범하다고 해야할지 엉뚱하다고 해야할지."
"그런가요?"
"예. 정말 여러 면에서 큰일날 사람이네요. 아무에게나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주제 파악은 똑바로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제가 이런 말 대놓고 할 수 있는 외모를 가진 사람도 별로 없어요."
선우가 또 한 번 폭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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