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가점수가 필요해
예성이란 이름의 도시는 세워진 지 10년이 채 되지 않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예성시의 제1도서관은 백년이 넘는 세월을 견딘 책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도시의 이름을 이 도서관이 소장한 책 이름에서 따왔다는 말도 있을까요.
도서관에 잠든 고서들은 일제강점기에 야학에서 수집해 수탈의 역사와 독재정권의 역사를 거쳐 지금의 장소에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귀한 사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만큼 예성시의 1도서관도 만만치 않은 이력을 자랑합니다. 막강한 양의 장서와 막강한 양의 자료를 소장하여 어지간한 대학 도서관이 한 수 접고 가는 것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손꼽힐만한 규모를 자랑하는 곳. 예성의 제1도서관은 오늘도 많은 장서를 사들이며 운영 중입니다.
도시의 자랑이고 시간을 보내기에도 참 좋은 곳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여기에 가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저는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교수의 등쌀 때문에 여길 찾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니까요.
'오늘 예성도서관에서 100주년 기념식이 있다. 보고 와서 인증샷이랑 짧은 후기 가져오면 가산점 2점.'
오늘은 도서관 설립 100주년. 명목 상 100년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를 기념하여 오늘부터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던 고서 일부를 공개한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학자들에게만 연구목적으로 제공하던 독립운동 기록도 있고, 처음으로 공개하는 도서관과 관련된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도서관의 모체가 된 야학의 운영기록이라고 했던가?
학교 도서관 열람실이 가득 차서 이곳으로 공부하러 올 때도 참 많았지만, 수업 때문에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장학금이 꼭 필요하지만 않았으면. 아니면 중간고사만 망치지 않았어도. 굳이 올 필요는 없었을겁니다. 전공도 아니고, 교양수업에 시간을 많이 뺏기는 건 좋은 일이 아닌데 말이에요.
"... 하. 다 왔다."
어찌 되었건 왔습니다. 길게 이어진 계단을 전부 올라왔어요. 본관의 모습이 보입니다. 중앙현관으로 들어가면 도서관 홀이 나옵니다. 홀 중앙에 서 있는 큰 시계는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사람들은 분주해 보였습니다.
시계 뒤로 보이는 열람실과 도서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오늘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군요. 오른쪽 벽을 보면 늘 닫혀있던 문이 열려있습니다. 오래된 자료들을 보관하곤 하던 고서실이라 문이 잘 열리지 않는 곳이었는데 말이에요. 벽에 붙어있는 A4 용지에는 오늘부터 여기서 고서들을 전시한다고 적혀있습니다. 고서실은 별관 3층으로 옮겼다는 내용도 있군요.
시선을 위로 올렸습니다. 2층에 선 사람들이 플랜카드를 걸고 있었습니다.
[설립 100주년 기념 기록실 신설.]
기록실. 도서관과 소장한 도서에 얽힌 이야기가 많으니 기념할만한 공간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참 많았죠. 결국 여는군요.
"휘!"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겁니다. 아는 목소리입니다.
"중간고사도 이미 끝났는데 공부하러 왔어?"
같은 동아리 소속이었다며 학기 초 동아리 행사에서 밥값을 긁고 나간 졸업생 선배님입니다. 예화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출신 사서 최화진씨. 오늘도 머리를 단단히 묶어서 올림머리를 하고 있네요.
"겸사겸사 왔어요."
"아하. 박재윤 교수님이 가산점으로 낚았구나?"
"네..."
하여튼 무서운 사람. 박재윤 교수님의 수업을 들어본 사람은 다들 압니다. 얼굴도 잘 생겼고, 수업도 잘 하고, 성적도 잘 주시지만 예성도서관 행사에 학생들을 자주 참석시키려 한다는 사실을요. 강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나처럼 성적에 목메는 학부생들은 도서관에 오곤 합니다. 저 언니도 한때는 그랬다는군요.
"오늘 행사는 뭐한데요?"
"고서실 기록실로 리모델링해서 공개하는 거야. 그리고 얼마 전에 찾은 소장 도서 리스트도 공개하기로 했어."
"소장 도서 리스트요? 도서관이 이미 만들지 않았나요?"
"옛날에 써둔 목록이야. 책 소개도 적어뒀더라."
예성도서관의 장서 목록은 기록하는데만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오래된 사료들이 많고, 읽기 쉽지 않은 사료들도 많아서 그 목록과 내용을 확인하는데 드는 시간만 해도 무시하기 어렵다더군요. 덕분에 온라인 홈페이지에는 소개가 생략된 고서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잘 되었네요. 할 일이 줄어들었겠어요?"
"나는 둘째치고, 너희 학교 사학과 교수들이 신났지."
최화진 사서님이 픽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하긴. 예성도서관에 있는 고서들은 우리 학교 교수님들 담당이죠.
"행사 시작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네."
"그러니까요. 책 좀 보기도 애매한 시간이고..."
"그럼 기록실 구경이라도 할래?"
"아직 오픈 안 한 거 아니에요?"
"들어가도 괜찮아. 설명문은 업로드 중이라 준비가 덜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는 동안 할 일도 없겠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마이크 테스트 하러 간다. 시끄러운 소리 나도 놀라지 말고?"
"네."
선배의 걸음이 평소보다 느릿느릿 합니다. 일하기 싫구나. 음향기기를 조작하러 가는 모습을 시선으로 쫓다, 기록실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늘 닫혀있던 문이 열려있는걸 보니 기분이 묘합니다.
기록실 안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박물관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막 공사가 끝난 공간 특유의 냄새도 나는군요. 아직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듯 유리와 바닥에서는 광이 납니다.
유리 벽 안에 놓여 있는 것은 대부분 오래되어 보이는 책입니다. 유리 벽 옆에는 전자패드 같은 것이 붙어있습니다. 전자패드는 책의 이름과 간단한 설명을 띄우고 있었습니다. 걸어 다니면서 훑어보면, 전시품들은 예성시의 일을 기록해둔 오래된 기록이 대부분입니다. 옛날 기록부터 점점 현대로 오는 순서로 정리되어 있네요.
뚜벅뚜벅 걸으며 구경하다 전시실 중간에 세워진 유리 방어막 안에 놓인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낡아 보이는 책 중에서도 비교적 상태가 좋아 보이는 책입니다. 유리막 옆에는 전자패드가 놓여있습니다. 이것도 안내문 대신 사용할 패드인가 봅니다.
패드는 '업데이트 예정'이라는 문구만 띄우고 있었습니다. 설명문은 업로드 중이라고 했죠? 나중에 행사가 끝나고 보러 와야겠습니다.
행사는 한 시 즈음 시작합니다. 거의 다 둘러보았으니 슬슬 나가서 자리를 잡아야겠습니다. 도서관 홀의 의자에 자리가 있으면 좋을 텐데요. 기왕이면 앉아서 보고 싶어요. 가방의 지퍼를 열었습니다. 태블릿과 두꺼운 책들 사이에 끼어 있는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가방 지퍼를 닫으며 전시실 밖으로 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때였을까요.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린 건.
'걸리지 않겠지요?"
'모를 일이지... 그래도 살아남는다면 귀중한 물건들이 될거야.'
무심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벽에 걸린 원형 시계가 보입니다. 현재 시간은 12시 50분. 사람은 아무도 없네요. 잘못 들었을까요?
다시 나가려던 차에, 깜빡거리는 소리가 천장에서 들립니다. 그리고 금방 불이 꺼져버립니다. 도서관 건물이 좀 오래되어서 가끔 이럴 때가 있긴 하죠. 그런데 10분 뒤면 행사를 시작할 시간인데 음향기기는 무사할까요? 화진 선배가 불만을 터트리며 배선실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입니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나서야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록실에서 나가는 문은 닫혀있습니다. 투명 유리문인데 너머가 새까맣게 보입니다. 밖은 그래도 밝을텐데...
뭔가 이상하지만 문을 열었습니다. 나가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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