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삶의 궤도가 결정된 순간
누구에게나 삶의 궤도를 결정하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원하는 길이 될지, 생각도 못한 길이 될지, 원하지 않는 길을 선택할지. 때가 될 때까지 당사자를 포함한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저, 이 휘는 열여덟에 그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합격하고 싶은 대학을 전부 둘러보고, 마지막에 외사촌이 지내는 예성시로 내려왔습니다. 이곳에는 '예화대학교'라는 비교적 신생인 대학이 있습니다. 30년도 채 되지 않는 역사와 달리, 이 대학은 지금 인서울 상위권 대학과 붙어도 꿇리지 않을 이력과 이름값을 자랑합니다.
저는 서울의 여러 의과대학에 더해 이곳의 의대에도 수시 원서를 넣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삶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이제는 제발 떠나고 싶을 지경이었지요. 제가 지원한 대학 중 가장 높은 연세대와 어딜 가더라도 크게 눈치볼 필요가 없는 이화여대가 아니라면 차라리 예화대학교에 합격하기만 빌었습니다.
합격발표 하루 전날, 12월의 유성우가 새벽에 떨어졌습니다. 유명한 속설이 있지요? 유성우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저와 동갑내기인 외사촌도 연세대에 지원했습니다. 기왕이면 가고 싶은 곳으로 합격시켜주세요. 마침 예화대학교 천문학과에서 야산 위에 세워둔 작은 천문대에서 천문 행사를 여는 날이었습니다.
"너 내일 결과만 보고 서울 올라가?"
"응."
"좀 위험해도 산에 내려갈 생각 있어?"
듣자하니, 예성의 고등학생들 사이에 도는 소문이 있다는군요. 별이 쏟아지는 날, 산에서 시간이 엉켜 과거를 볼 수 있다. 이 모습을 보는 자는 소원을 이룬다.
"지금 뭘 가릴때야? 가!"
그리하여 합격에 눈이 돌아간, 졸업도 안 한 고딩 둘은 한밤중에 산에 들어가는 기행을 저질렀습니다.
본래 예성에 살았던 학생들은 그 현장을 보고자 앞뒤 안 가리고 산을 돌아다녔다는군요. 내 외사촌, 서유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장소를 미리 찾아둔 센스에 박수를 치며 산을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는 길의 나무가 유독 울창했습니다.
"우리 지금 제대로 가고 있어? 풀숲이잖아."
"지난번에 와본 방향이랑 GPS에 잡히는 길은 맞는데... 이상하네. 여기 길 잘 정비해뒀는데."
휴대폰 플래시가 안개에 가린 듯 유독 약했습니다. 호신용으로 산 플래시를 켜 앞을 밝혔습니다. 야산, 하면 생각나는 풍경이 안개에 가린 모습이었습니다.
"귀신 나오기 딱이다."
"이래서 과거든 별이든 볼 수나 있으려나."
다행히 헤매는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안개가 걷히고 원래 있어야 할 등산로를 찾았습니다. 그 뒤는 쉬웠습니다.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나무 숲 끝자락에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 옆에 돌무더기가 잔뜩 쌓여있었습니다.
"거의 다 왔어. 물 한 모금만 마시고 가자."
"이건 또 뭐야? 나무는 그렇다 쳐도, 돌무더기는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은데."
"아주 오래 전에 세현 입구에 있었던 것을 옮겼다고 들었어. 무속신앙과 관련있는 곳이 아닐까?"
둘이 각자 가져온 생수를 비우고, 가방에 빈 페트병을 집어넣었습니다.
"아마 여기도 보통의 서낭당처럼 돌 세 개 얹고 큰절 세 번 하고 침 뱉으면 재수 좋다는 이야기가 있었을거야."
"역시 역덕이야. 많이 아네. 할 거야?"
"하고싶은데 집에 돌아갈 체력이나 있을지 모르겠어..."
"내가 그러게 운동 좀 하랬지?"
"책 볼 시간도 아까웠는데 어떡해. 너야말로 절하는 법은 알아?"
"... ... 헷갈리는데?"
"그럴 줄 알았다."
서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너나할 것 없이 돌을 쌓았습니다. 절을 하며 싹싹 빌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후손이 빡대가리라 절하는 법도 헷갈립니다. 틀려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십시오.
"그런데 유진이 네가 웬일로 이런데 어울려? 아는 것과 별개로 안 믿잖아."
"너는 평소같았으면 밤중에 산에 내려왔어?"
"아니? 미쳤어?"
"너나 나나 도긴개긴이야."
바로 옆 공간이 탁 트여있었습니다. 서로 극딜을 퍼부으며 몇 걸음 앞으로 걸었습니다.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소문났다고 하지 않았어? 아무도 없는데?"
"그러게. 나도 오늘 여기 사람으로 터질 줄 알았어."
진짜 지쳤는지 유진이가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하여간 약골이라니까요. 외삼촌은 문무겸비의 천재신데, 이녀석은 머리만 물려받은 모양입니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 저 멀리 산 아래에는 드문드문 불이 켜져있었습니다.
"저 건물 불이 안 꺼지네."
"저기 미리내잖아. 원래는 열 시면 불 꺼지는데, 곧 국정감사 들어간다고 뒤집어졌을걸?"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포털사이트 회사 본사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이 모습이 말해주는 사실은 하나 뿐입니다.
"우리 실패한 것 같은데?"
"그러게. 재미없게."
유진이가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습니다. 저도 바닥에 앉았습니다. 속설이 사실이 아닌 건 아쉽지만, 그래도 명당에 왔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이 참 잘 보였으니까요. 위에 작은 천문대보다 사람도 없고요.
"별만 보다 가게 생겼네."
"음악이라도 틀어?"
"내가 틀래."
우리 둘 말고 아무도 없는 장소는 고요했습니다. 둘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말하는 소리만 들리던 곳에 불규칙적인 발소리가 끼어들었습니다. 바닥에 발을 끄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저희 둘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왼쪽 어깨를 손으로 꾹 누르고 비틀거리며 걸었습니다. 피비린내가 훅 풍겼습니다. 유진이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자 옷에 묻은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호신용 라이트를 상대에게 겨누기 전에 남자가 쓰러졌습니다. 일 초 가량 굳어있다, 휴대폰을 꺼내 119를 눌렀습니다. [서비스 지역을 이탈하셨습니다]. 뭐가 어쩌고 저째?
유진이가 남자에게 뛰어가 맥박을 쟀습니다.
"살아있어!"
"야산에 서비스 이탈지역이 있어?"
"그럴 리가 있어? 어디서 전화해도 긴급전화는 터져!"
가방을 꺼내 낮에 세탁한 담요를 꺼내 남자의 상처에 꽉 눌렀습니다. 옅은 신음이 새어나왔습니다. 가물가물해 보이는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습니다. 유독 새까만 눈동자가 가슴에 박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정신차려요. 괜찮아요?"
유진이가 휴대폰을 몇 번 두들기더니 주머니에 쑤셔넣었습니다.
"천문대에 의료진 있었어. 데려올게.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내가 힘은 너보다 세. 빨리 갔다오기나 해!"
유진이가 산 위쪽으로 뛰어갔습니다.
"말할 수 있어요?"
"... 예."
"정신 잡아요. 방금 봤죠? 제 사촌이 십 분 내로 의료진을 데리고 올거에요."
"..."
말 사이에 신음이 섞여 나왔습니다. 가방을 마구 뒤적여 진통제를 꺼냈습니다. 생리통 때문에 맨날 먹던 타이레놀을 이런 상황에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약 한 알을 남자의 입에 넣고 물을 흘려넣었습니다.
"어쩌다 다치셨어요?"
"아가씨가... 알만한 일은... 아닙니다."
"어떻게 다쳤는지 알아야 의료진에게 설명을 하죠! 혈액형은요?"
"... B... 일겁니다..."
"성함은 어떻게 되나요?"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남자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한참 뒤에야 가물가물한 목소리로 말이 나왔습니다.
"별천지... 같군요."
"도시는 밤이 가장 아름답죠. 졸려요?"
"약간 그렇습니다..."
"자면 안 돼요. 지금 자면 죽어요."
어떻게 해야하지? 유진이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만 해요. 상처를 꽉 압박했습니다. 신음이 한 번 더 새어나왔습니다. 신경을 분산시킬 것이 더 필요해요.
"세현에는 처음이에요?"
"그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잘 되었네요. 말할 내용이 생겼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한 마디 끝날 때마다 대답해주셔야해요."
"그러... 지요..."
"저기 가장 밝은 건물 보이죠? 저기가 미리내에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회사 중 하나."
"... 유명하다... 하셨습니까."
"그렇죠. 인터넷부터 서적까지. 정보와 관련된 사업에서는 따라갈 곳이 없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저기,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 건축물 보여요? 대답해줘요."
"예.. 보입니다..."
"저기서부터 빛이 끝나는 곳까지가 대학이에요."
"... 대학이라 하셨습니까?"
"예화대학교에요. 지금 한국에서 서연고 다음가는 라인에 들어간 학교죠."
"..."
"듣고있어요?"
"예..."
"지금 불이 엄청 밝은데, 다들 공부한다고 밤을 새려나봐요."
"시험... 기간입니까?"
"네. 다들 커피 하나씩 물고 열심히 볼펜 굴리고 노트북 두들기고 있을거에요."
금방이라도 눈을 감을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그래도 의식의 끈을 잡으려는 듯, 계속 제 말에 맞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계속 대답을 재촉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차에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휘! 의대 교수님 모셔왔어!"
"정신 잡아요. 선생님 왔어요!"
유진이가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묵직한 가방을 들고 온 선생님이 제 반대쪽에 앉으며 주사기를 꺼냈습니다.
"약 먹인 것 있나?"
"타이레놀 하나 먹였어요."
"혈액형 정보는 들었어?"
"b형이라 하셨어요."
선생님이 바로 수액팩을 남자의 팔에 꽂았습니다. 조금 희미해져가던 남자의 의식이 천천히 돌아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습니다.
"제 목소리 들립니까?"
"... 예."
"과다출혈입니다. 수액은 임시 처치에요. 수혈팩을 조금만 써도 훨 나아지실거에요."
선생님이 마스크를 쓰고 지혈하던 담요를 떼어냈습니다. 남자가 신음을 흘렸습니다.
"망할. 이걸 웃어야 해 울어야 해."
"치료 못해요?"
"아니. 내 전문분야라서 그런다."
의사선생님이 표정을 구겼습니다.
"총상이야."
저와 유진이가 합창하듯 기겁했습니다.
"총이라고요?"
"한국에서? 군부대도 없는 세현에서요?"
의사선생님이 조용히 하라는 듯 쉿, 하는 소리를 내셨습니다.
"어. 총기 데이터베이스를 봐야 확실해지겠다만, 경찰이나 군부대에서 쓰는 종류는 아니야."
"사제총기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건 구식 총기 같아 보이는데?"
질문에 설명을 이어가면서도 손을 움직이는 솜씨가 능숙했습니다. 탄환을 빼내고, 그 자리에 이런저런 처치를 한 뒤 붕대를 동여맸습니다.
"총을 맞고 이정도라니. 운이 정말 좋으셨습니다."
빼낸 탄환을 핀셋으로 들어 돌려본 선생님이 표정을 구겼습니다. 휴대전화를 두들겼지만 여전히 먹통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한숨을 푹 내쉬고, 명함을 꺼내 남자의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예화대학교 의과대학 외상외과 김윤재입니다. 급한 처치는 했지만 수혈과 정밀검진이 필요합니다. 바로 병원으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만, 제 발로 가겠습니다."
움직일 힘이 약간은 돌아왔는지 남자가 비틀거리며 일어났습니다. 밤하늘을 담은 눈동자가 저를 마주보았습니다.
"도와주신 두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뛰어갔다 온 얘는 서유진, 저는 이 휘에요."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모자를 고쳐쓰는 남자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결려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정신이 없어 신경에 담아두지도 않은 외모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두운 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검은 눈동자는 별이 박힌 듯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내 옆에 있는 유진이도 미인으로 꽤 소문났지만, 서구적인 외모가 섞인 우리와는 궤를 달리하는 느낌이네요.
"꼭! 병원 가셔야 해요."
그 남자는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남겨진 저희는 천문대로 돌아갔습니다. 왜 응급치료사가 아니라 의대 교수님이 오셨나 했더니, 이분이 오늘 행사의 의료진이였다는군요.
그래서 이 순간이 왜 제 삶의 궤도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냐고요? 멋있잖아요! 보자마자 무슨 총인지 알아보는 능력도, 그대로 두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람에게 숨을 붙여놓는 능력도! 이과의 꽃이라는 이름에 매달려 결정했던 진로였지만, 그 순간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번에 수시에 다 떨어져도, 재수삼수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의대에 가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리고 다음날, 저는 예화대학교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 실제로는 수액이 아니라 수혈팩을 때려넣으면서 어깨 총알 빼야겠지만, 창작물적 허용으로 봐주세요... 작가가 의학 지식이 좀 모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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