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학생이 과거에 빠진 이유

2. 발을 들인 곳 (1)

문 너머에는 당연히 도서관의 홀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새까만 어둠에 잠겼던 기록실은 어디로 갔느냐는 듯 사라졌습니다. 쭉 뻗어있는 좁은 길과 양옆의 논. 그리고 모를 심고 있는 사람들만 보여요. 지금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요. 눈을 꾹 감았다 떠도 보이는 것들은 그대로였습니다. 아주 옛날의 모습을 찍은 사진에 색을 입힌다면 이런 풍경이 아닐까요?

 “거 좀 비켜주쇼!!”

 얼마나 얼어있었을까요. 뒤에서 누군가 외쳤습니다. 시선을 돌리자 수레를 끌고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복식입니다. 지식이 빈약해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옛날 농사꾼 하면 생각나는 옷. 딱 그런 옷입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주변에서 보내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아가씨, 입은 옷이 참 특이한데. 경성에서 왔어?" 

"어... 네! 그렇습니다."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경성이라. 서울을 부르는 명칭은 여럿이었고 경성이라는 명칭 또한 여러 시대에 걸처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특정 시기를 지칭할 때 많이 쓰입니다. 칠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상흔을 남긴 일제강점기를요.

 "현씨 집안 아가씨도 그렇게는 안 입는데."

 내 옷차림이 이상한... 가요? 봄에 캠퍼스를 돌아다니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패션입니다. 나야말로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이해되질 않습니다. 아니 지금 상황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모습만 보면 과거로 떨어진 것 같은데. 속사포처럼 떠오르는 의문을 겨우 머리 한 구석으로 밀어두고 겨우 한 마디를 꺼냈습니다.

 "저... 길을 잃었는데 여기는 어딜까요?"

 "바쁘니까 가면서 이야기 해."

 수레를 끌고 가는 농부를 따라 걸음을 옮겼습니다. 

 "여긴 항구도시 세현. 요즘은 경성에서도 좀 유명해졌다지?"

 세현이라 하면... 예성의 일부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대학교가 있는 곳이 세현동인데... 한참 기억을 뒤적이고 나서야 박재윤 교수님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지금 학교가 있는 세현동은 옛날에는 꽤 잘 나가는 구역이었어요. 명칭 자체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현 세현동 지역과 바다가 있는 해미동이 묶여 행정구역 군을 구성했습니다. 10년 전, 행정구역이 개편되며 세현군이 옆의 화성군과 통합해서 이 지역 전체를 예성이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이야기와 내 짐작을 끼워맞추면... 여기는 일제강점기의 예성시인걸까요? 

 "여기까지 잘못 오는 사람들은 기차역에서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이던데. 아가씨도 그런가?"

 "어쩌다 보니... 그렇습니다. 하하."

 "혼자 다니는 아가씨가 그렇게 허둥거리면 위험해."

 "그러게나 말입니다."

 혼자 다니는 경우 자체가 특이한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옛날이니까요. 그래서 그냥 얼버무리듯 대답했습니다. 사실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납득이 안 됩니다. 점수 따러 왔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얼마나 걸었을까요.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시내... 아이고. 현 씨 도련님!"

 갈색 머리에 훤칠한 키의 청년이 맞은편에서 나타났습니다. 순간 연예인을 눈앞에서 본 기분이 들었습니다. 방금까지 이야기를 나눴던 농민과 달리 서양식에 가까운 복식을 입고 있었습니다. 멀리서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외모부터 입고 있는 옷까지. 도련님이라는 호칭이 참 잘 어울리는 분위기입니다. 복식이 마구 섞인 이 기묘한 풍경은 개항 이후 같네요. 기차가 있다고 했으니 일제 강점기일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6.25 전쟁으로 다 없어지기 전, 한반도의 철도는 일본의 필요에 의해 깔리기 시작했으니까요.

 "외부인 아가씨는 모르겠구먼. 유학까지 다녀온 이 지역 지주집안 아들이여. 혹시 들어봤나. 세현 현 씨라고."

 얼떨떨하게 서 있자 농민이 앞에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주었습니다.

 세현 현 씨. 지역학 수업 시간에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세현에 꽤 유명한 지주집안이 있었다고 하지요. 현 씨 집안이 이 지역에서 세를 크게 떨쳤다는 이야기가 박교수님의 첫 수업시간에 나왔습니다. 교수님이 잡담을 꽤 길게 하셨던 주제였죠.

 하나씩 생각해보면... 지금 예성시를 먹여 살리는 건 대기업 예화. 하지만 오래 전에는 세현 현 씨 집안이 예화그룹과 같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화그룹 못지않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집안이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예화그룹은 현씨 집안이랑 친분이 있던 서적상에서 시작한 회사였어요. 서적상과 현 씨 집안의 당시 관계를 바탕으로 예화그룹은 현 씨 집안의 후계임을 표방하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섰습니다. 여기 혹시 세현 현 씨인 사람 있어요? 거기. 손 든 학생 이름이?'

 '현 선우입니다.'

 '내세워도 좋아요. 자랑스러운 조상님들을 두고 있으니까.'

 '제가 그 조상님들의 직계는 아닐 거에요.'

 '많이 알고 있네? 이유도 알아요?'

 '일제강점기에 본가가 몰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학생은 나중에 나한테 간식 하나 받아 가요.'

 그 이후에 했던 이야기는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독립운동에 준하는 일을 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하더군요. 그 집안이 가지고 있던 도서가 현재 예성도서관에 있는 엄청난 양의 장서에 한몫을 했다던가요? 고서의 80%를 차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일단 나를 도서관으로 보낸 박재윤 교수님의 연구팀에서 죽어라 연구하고 있는 자료가 이 집안이 수집한 물건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확실히 기억납니다.

이 일을 어떻게 기억하냐고요? 저 학생이, 합격 전날 밤 산에서 만난 얼굴과 아주아주 똑같이 생겼으니까요. 본인은 아니었습니다. 넌지시 물어봤지만 전혀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으니까요. 본인이었으면 당장 김윤재 교수님께 끌고갔었을겁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 환자가 어찌 되었는지 여쭤보시더라고요? 나타나질 않았다면서요! 제정신이야? 총상을 입고?!

 "이 아가씨, 다른 동네에서 온 것 같은데 보신 적 있으십니까?"

 청년이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머쓱한 표정으로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어둡지만 별을 담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내 삶에서 가장 큰 일탈을 저질렀던 날 만났던 얼굴입니다. 조금 미묘한 기색입니다. 위협? 아니요. 부정적이진 않아보이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놀라움인가?

 "경성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니군요."

 "한때 유행한 스타일이라 하여 입어보았습니다만..."

 개항기라면 시대를 엄청나게 앞서간 패션이 될 수 밖에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히 이곳 사람은 아니시군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아까도 겨우 대답했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요. 솔직하게 말해? 아냐. 미친놈 취급 받을 생각이야? 거짓말을 쥐어짜느라 머리를 팽팽 돌렸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대충 떠오르는 대로 얼버무려야겠어요.

 "미국... 아니. 미리견에서 왔습니다. 유학 생활이 길었어요."

 미심쩍은 시선이 대답 대신 돌아왔습니다. 뼈아프네요. 난 역시 거짓말에는 재주가 없는 모양입니다.

 "세현에는 처음이시겠군요."

 "그렇습니다. 아직 숙소도 못 잡았어요."

 "그럼 시내로 먼저 가셔야겠군요. 옷은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차림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예요."

 "역시 그렇죠?"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입 안에 가두었습니다. 섣불리 뭔가를 말해봐야 좋을 것은 없어 보이니 말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는 감사하지요."

 옆에 있던 농부가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그럼 이 노인네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직 창창하세요 어르신. 무리하지 마세요!"

 "예에~"

 농민과 헤어져 청년을 따라 걸었습니다.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대충 알겠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이 의심에 못을 박아주는군요. 예성시 곳곳에 있어야 할 아파트나 잘 깔린 아스팔트 도로, 신호등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요. 정말로 과거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한참 이어진 침묵을 청년이 먼저 깼습니다. 

 "이 휘. 휘 입니다. 당신은요?"

 "아까 들으셨지요? 현 선우라고 합니다."

 기묘하네요. 지역학 수업에서 봤던 학생과 이름이 겹칩니다. 그 학생도 만만찮은 미남이었는데. 청년이 헛기침을 합니다. 너무 빤히 바라봤어요. 급히 시선을 돌렸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아는 사람과 이름이 같아서 그만."

 "아닙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한참을 걸었을까요. 드디어 건물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많습니다. 번화가에 도착한 것 같네요.

 "짐은 다 가지고 있으신 건가요?"

 가지고 있지만 도움 되는 건 없다는 게 문제려나. 한숨이 나오려는걸 겨우 참았습니다. 미뤄둔 불안이 한순간에 몰려왔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 옷을 사거나 숙소를 잡으려면 일단 돈이 필요한데 이 시대의 돈을 내가 가지고 있을리가요.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깨어나서 기억이 없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앞날이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어디로 가셔야 하나요?"

 "그게..."

 갈 곳이 있었던가요? 이 시절에는 뭐가 있었더라? 지역학 수업 시간에 들은 기억은 있는데 정작 필요할 때 생각이 안 나는군요. 막막하네요.

  어쩌다 여기로 떨어졌지. 집에 갈 방법은 있나? 문제가 산더미입니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고 하면 내 눈앞에 있는 남자는 날 미친놈 취급할게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고는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쓸 책과 학용품 뿐. 스마트폰은 또 어쩌고요. 인터넷이 통하는 시대가 아닐텐데 정보 수집에 쓸모가 있을까? 머리가 복잡합니다.

 "... 머물 곳이 없으시다면. 저희 집 방 한켠이라도 쓰시겠습니까?"

 "그,"

 "제가 남자라서 불안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넓은 곳인데다 누님도 계시니 너무 불안해 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을까요?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습니다.

 "죄송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찝찝해도 어쩌겠어요. 서글프게도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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