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발을 들인 곳(2)
조금 걸었습니다.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나왔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기와집이 있었다니. 예성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은 건물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런 곳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군요.
마침 밖으로 나오던 사람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누님은 계십니까?“
"급한 환자가 있어 오늘은 못 들어오신다고 합니다."
얼굴은 안 닮았습니다. 분위기도 가족은 아닌 것 같고. 하인일까요?
“이런... 괜찮으시겠습니까?”
“찬밥 더운 밥 가릴 상황이 아니라서요.”
쓰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에도 사람이 좀 있었습니다.
"손님방 하나를 정리해주십시오. 이분이 쓰실 겁니다."
"예."
마당을 쓸던 하인이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음.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 정도로 부유하다니.
"조선어는 익숙하지만 조선에는 익숙하지 않으신가 봅니다."
“네?”
“오는 내내 얼굴에 쓰여있었습니다. 신기하다고.”
당연합니다. 민속촌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고, 영화나 매체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니까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쓴웃음만 지었습니다. 이 사람 눈치 빠르네. 모른 척 좀 해주세요...
"당분간 머무실 곳 구경이라도 하시렵니까?"
"부탁드립니다."
선우의 안내를 따라 집을 둘러보았습니다. 방이 많아 한참을 돌아다녔습니다. 집 주인인 선우와 누님이 쓰는 방 위치를 안내받고, 창고로 쓰이는 곳이 많아 새삼 놀라고, 집 한 쪽에 사용인이 아닌 사람이 많아 조금 놀랐습니다.
"여기는 무얼 하는 곳인가요?"
"낮에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쓰이고, 밤에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학교인가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냥 공부방이라 생각해주십시오. 저쪽에는 도서관... 이라고 부르기에는 부끄럽군요. 서재가 있습니다."
선우가 야학 건물 옆에 있는 서재로 안내해주었습니다. 부끄럽다는 표현과는 달리 제법 그럴 듯 해 보였습니다. 아파트에 달린 작은 도서관 정도의 규모는 되는군요.
쉬워 보이는 책은 전부 아이들이 읽을만한 책이었고 조금 어려워 보이는 책에는 한문이 섞여 있었습니다. 한문은 읽을 수 있을 리가... 내신 공부를 위해 외운 것이 전부인데. 한참 책 표지만 들여다보다 본 적 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개벽. 교과서에서 이름과 표지를 봤습니다. 천도교의 잡지라고 했어요. 책 표지에는 1925년이라 적혀있었습니다.
1920년대는 문화통치기라 알고 있습니다. 탄압이 거세진 건 1920년대 후반기라고 들었고... 치안유지법이 25년에 제정되었죠. 큰일이에요. 순사들 앞에서는 검은 머리 외국인인 척 영어만 써야 하나?
잡지는 집어넣고 아이용 동화책을 한 권 꺼냈습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이 정도는 손쉽게 읽으시는군요."
"그럼요. 적당히 뜻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예성 현씨 집안의 야학이 도서관의 모체라고 들었습니다. 여기 있는 자료들이 예성도서관에 있을까요?
"한문도 읽으실 수 있습니까?"
"정말 간단한 것만 읽을 수 있습니다."
슬프지만 제가 아는 한자는 학교 내신 준비하느라 본 교과서에 나오는 글자가 전부에요. 그마저도 반은 잊었습니다. 잡지를 책장에 도로 넣었습니다. 선우를 따라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푸르고... 날이 참 좋습니다.
"도련님. 정리가 끝났습니다."
어디선가 하인이 나타났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하인을 따라 내가 쓸 방까지 갔습니다. 방바닥에 잘 생각이었는데 침대가 있어요! 다행입니다. 아침마다 허리가 배겨서 고생하는 일은 없겠어요.
"감사합니다. 당분간 신세 지겠습니다."
"예. 쉬십시오."
방까지 안내해 준 하인과 집주인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긴장이 쭉 풀렸습니다. 그대로 손 하나 까딱 못하고 한참 늘어져 있었습니다.
전에 SNS에서 봤습니다. 분노에는 다섯 단계가 있다고. 내가 그걸 겪고 있나 봐요. 조금 전에는 안도했는데 지금은 짜증이 납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왜 나만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지? 안 그래도 말 장황하게 하는 전공 교수님 수업 듣고 도서관으로 달려와서 지쳐있었다고요. 할 일도 산더미입니다. 필기 정리할 수업이 두 개나 되고 과외도 하러 가야하고...
"... 몰라. 제발 집에 보내줘..."
기력을 다 썼는지 소리 지를 기운도 없습니다. 야구잠바만 벗고 그대로 방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여긴 내가 아니라 역덕들이 와야 하는데. 의대 새내기가 일제강점기에 떨어져 봐야 뭘 하겠어요. 이제 겨우 예과 과정 시작해서 제대로 된 의학 지식도 없어.
"똑똑한 선배들 많잖아. 역덕도 많고. 그런데 왜 하필 나야..."
꿍얼꿍얼 불만을 내뱉다 잠들었습니다.
* * *
정신을 차리자 주변이 온통 노을빛이었습니다. 창문을 통해 빛이 흘러들어오는군요.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었습니다. 왜 푹신하지? 어느새 침대 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자면서 움직였을... 리가. 내 잠버릇은 얌전하다고요.
아무래도 이 집 사람들은 방에 드나들 수 있는 모양입니다. 위험한 일은 없었던 것 같지만... 조금은 경계해야겠어요.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세요?"
"일어나셨습니까?"
선우의 목소리입니다. 급하게 눈가의 이물감만 닦아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습니다.
"저녁 시간입니다. 같이 식사하시렵니까?"
"저야 감사하지요."
방에서 나왔습니다. 저녁이라 그런지 바깥 공기가 차갑습니다. 선우가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덮어주었습니다.
"춥지 않으십니까..."
"... 감사합니다."
오프숄더가... 하긴. 처음 한국에 등장했을 때도 난리였죠. 이쪽 사람 기준에서는 더 파격적이겠지. 잘못했습니다. 다음에는 겉옷 챙겨 입고 나올게요.
"세현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제가 다니는 대학이 여기 있어서요... 라고 대답하면 안 되겠지. 핑계가 될만한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요즘 개강했다고 술 마시러 학교 뒷산 주막에 많이들 가죠?'
아. 지역학 시간에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과거를 엿볼 수 있다고."
'주막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세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어요. 한밤중에 그곳으로 올라가면 과거의 세현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들었을 때는 무슨 헛소리냐며 흘려 넘겼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진짜로 봤다며 패닉에 빠진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진짜인지 아닌지 나도 보러 가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 기담 스팟에 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걸 알고 계시다니..."
선우가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유명한 이야기는 아닌가 봅니다."
"예. 이곳에 오래 산 사람들 사이에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선우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쉽지만 당분간은 못 봅니다."
"볼 수 있는 기간이나 시기가 있나요?"
"예. 별이 쏟아질 때만 볼 수 있습니다."
유성우를 말하는 걸까요? 시기가... 맞다. 내가 알 리가 없지. 천문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딱 하고 떠오를 리가 있나요? 인터넷이 터지면 금방 알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 될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있어야 할까요? 너무 길면 이곳에 계속 있기도 미안해지는데...
"보고 가실 겁니까?"
"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 당장은 떠오르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집에 갈겁니다. 언제까지 여기서 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너무 늦게 떨어지면 곤란한데...
"유성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머물다 가셔도 좋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던 참에 반가운 제안이었습니다.
"제가 폐를 끼치는 건..."
"괜찮습니다. 먼 길을 오셨는데 못 보고 가시면 아쉽지 않습니까."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식당으로 쓰이는 듯한 건물 문을 열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과분한 대접이 아닌지..."
"아닙니다. 손님은 후하게 대접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선우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습니다.
"오래된 이야기를 쫓아 오신 손님이시니... 더 신경 써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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