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발을 들인 곳(3)
"도련님 오셨어요?"
"식사 차려뒀습니다. 드셔요."
식당 안에는 긴 테이블이 있었습니다. 그중 두 자리만 비어있었습니다.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낮에 마당을 쓸고 계시던 분도 계시는군요. 이 집의 시종들일까요? 의외의 풍경입니다. 보통 영화 보면 다들 옆에서 대기하며 시중을 들었던가...? 영화도 본지 오래 되어서 가물가물하네요. 그래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일이 늦게 끝나셨나 봅니다."
"예에. 누가 창고 안에 있는 물건을 몽땅 떨어뜨려서 말입니다."
"누가 떨어뜨리고 싶어서 떨어뜨렸답니까?"
"네가 칠칠하지 못하게 굴었잖아?"
선우가 쓰게 웃으며 빈 식탁 의자에 앉았습니다.
"낮에 뵈었던 아가씨도 오셨군요."
"네. 덕분에 방 잘 쉬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아닙니다. 방이야 도련님께서 내어주셨고 청소야 저쪽에서 밥 먹는 아들이 다 했지요."
반응하듯 밥을 먹던 여성들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고개를 꾸벅여 인사를 건넸습니다.
선우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습니다. 우리 앞에는 나물과 생선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한 밥상'이라는 표현이 참 잘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몇 번 먹자마자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습니다. 맛있어!
"맛은 괜찮습니까?"
"그럼요!"
기숙사 음식 맛이 없다는 이유로 외식을 즐긴지라 이런 밥상은 오랜만입니다. 아니, 급식이랑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입니다. 고급 한정식집 음식을 먹는 기분이에요.
"식당이 복작복작하군요."
"보통 손님들이 오면 쓰는 곳입니다. 그런 일이 많지 않은지라, 평소에는 일과를 마친 시종들이 이곳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합니다."
"주방이 가까운가 봅니다."
"예. 저쪽 문만 열면 나옵니다. 저와 누님도 보통 여섯 시에는 여기서 식사하는데, 늦으면 이렇게 북적거리는 곳에서 먹어야 합니다. 혹시 불편하시다면,
"아니에요. 그냥 신기해서요."
싫을 이유가 없죠. 위생 상태가 엉망인 것도 아니고.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상매체에서도 겸상 장면이 나오는 경우를 많이 못 본지라. 옛날에는 이 집안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였다는 이야기가 조금은 실감이 납니다.
"한 그릇 더 드릴까요?"
아차. 언제 이렇게 많이 먹었지. 너무 맛있어서 그만. 머쓱하게 웃었습니다.
"네."
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가던 여종들이 후다닥 밥공기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미안해지네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멀어지는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 진짜 요리 솜씨 좋다. 저 아가씨, 얼굴에 맛있다고 행복하다고 쓰여있어."
"저렇게 잘 먹어주면 요리할 맛이 나지. 어휴. 이번 손님은 까탈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야."
현대로 와서 가게 내보세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을 맛입니다. 저런 이야기는 앞에서 해주시지... 맛있다고 호응해드릴 수 있는데.
"잘 먹었습니다."
두 번째 밥그릇까지 깔끔하게 비웠습니다. 그제야 생각이 났습니다. 나 오늘 점심 못 먹었구나. 어쩐지, 낮에 짜증이 나더라니.
"엄청 맛있어요."
"손맛이 참 좋지요. 방금 돌아간 아이가 한 요리입니다. 저희 집 요리는 저 아이가 전담합니다."
옛날 부자들은 이런 요리 솜씨를 가진 사람을 집에 두고 부렸단 말이지. 부럽습니다. 우리 집도 무던하게 살지만 가사 도우미를 부를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집은 아닌데...
"도련님. 오늘 수업에는 이 아가씨도 오신답니까?"
옆에 있던 어느 하인이 질문을 건넸습니다. 수업이라... 공부방으로 쓰이는 건물이 있었지요.
"야학... 이 열린다고 하셨죠?
"예."
선우가 곰곰 생각에 빠졌습니다. 구경시켜달라고 말하려 순간, 왼쪽 눈이 따가워 반사적으로 감고 말았습니다. 왜... 가 아니네요. 내가 미쳤구나. 컬러렌즈를 안 빼고 잤지! 인공눈물까지 안 넣어줬으니 당연히 눈이 비명을 지르죠. 용케도 렌즈가 눈 뒤로 안 넘어갔네!
"괜찮으십니까?"
"네.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봐요. 죄송하지만..."
"물 가져다주세요."
선우가 놀란 얼굴로 시종에게 물을 가져오라 지시했습니다.
"눈이 충혈되었습니다."
"마음 쓰지 마세요. 자주 있는 일입니다."
시종이 물이 든 컵을 가져왔습니다. 눈을 살짝 씻어내고, 컵을 든 채 방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선우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같이 걸었습니다. 왜 그렇게 걱정하세요. 정말 별거 아닌데. 인공 눈물 넣고 한숨 자면 괜찮아지는 일이에요.
"야학은 내일도 열리나요?"
"그렇습니다."
"내일은 참관하고 싶어요."
사실은 오늘 바로 보러 가고 싶었습니다. 옆 사람이 저렇게 걱정하니 쉬는 시늉이라도 해야겠지요. 방에 도착했습니다. 선우에게 꾸벅 인사했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예. 푹 주무십시오."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 컵을 내려놓고 휴대폰 플래시를 켰습니다. 방에 화장대가 있어서 거울은 찾을 필요 없고. 렌즈통과 인공눈물을 꺼냈습니다. 컵에 남은 물로 손끝을 씻어내고 인공눈물을 잔뜩 눈에 떨어뜨렸습니다.
거울에 비친 눈이 빨갛게 변해있었습니다. 진작 관리를 해줘야 했는데... 과거에 떨어졌다고 잘 버티다 한계라고 반응을 보인 모양입니다.
왼쪽 눈에서 컬러렌즈를 빼냈습니다. 매번 보는 푸른색 눈동자가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습니다.
'홍채 이색증 있구나? 눈 다친 적 있어?'
'아니요. 전 선천이에요.'
'진짜 보게 될 줄이야..."
덕분에 학기 초 학과에서는 꽤 유명했습니다. 그래도 학생 시절에 비하면 조용하게 넘어갔습니다. 나보다 먼저 화제가 된 사람이 있었거든요.
'오드아이는 아니지만 문헌정보학과에도 유명한 사람 있어.'
'그쪽에도 저 같은 사람이 있어요?'
'응. 걔는 양쪽 눈이 다 파란색이야. 혼혈이라 그랬던가?'
외국인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듣는 최화진 선배님 이야기입니다. 이분도 참 사연이 많은 분이셨어요. 원래라면 연결점도 없었을 사람이지만 눈 이야기가 알음알음 퍼졌는지 선배님이 저를 먼저 찾아왔습니다.
'학교는 계속 다녀야 하는 곳이니 어쩔 수 없지만... 불필요한 주목이 싫다면 한 번 가고 말 자리에는 렌즈를 끼고 다녀도 괜찮아.'
렌즈를 끼는 것도 사서님의 조언이었습니다. 오늘 도서관 행사는 크게 열리는 행사라 사람도 많고 카메라도 많을거라 검은색 컬러렌즈를 꼈어요.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조언이 나를 살렸습니다. 갑자기 과거에 떨어져서 눈에 확 띄었는데 눈까지 보였으면...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방 안에 여벌의 옷이 있었습니다. 대충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을 만난 덕에 과거에 떨어진 것치고 평온했습니다. 눈이 파업을 선언하며 소란스러워졌지만, 이정도야 뭐. 맛있는 음식으로 하루를 잘 마무리했으니 오케이입니다.
돌아갈 때까지 이렇게 평온하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 주인공 외형 때문에 고민을 했지만 편의를 위해... 신분증 없는 동안만이라도 검문은 피하게 하려 설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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