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5화. 균열 (2)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다. 덕분에 여름인데도 조금은 싸한 공기 체온을 얼리고 있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미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기분 나쁘게 내리는 비 때문에 차도 운전을 조심스럽게 하는 터라 귀가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참이다.

──오래지 않아 지나갈 환상통이라 했다. 아니, 헛소리였다. 나는 사랑에 관한 명언이라며 지껄이던 어느 방구석 폐인의 댓글을 저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곧 지나갈 통증이라면 빨리 없어지기나 할 것이지, 어느새 상처가 되어 곪는 중이었다. 운전석 쪽에서 매니저가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작게 욕설을 짓씹었다.

콜록거리는 기침과 함께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였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버렸다. 그 개만도 못한 놈이, 채주현 자신이었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가 이어졌다. 여루는 책상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가 자리의 특권을 잔뜩 누리는 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하염없이 창문을 쏘아보았다. 정확히는 유리창에 부딪혀 아래로 끊임없이 내달리는 빗방울들을.

이상하게도 다음 계절이 이르게 찾아왔다. 그러나 여름이 몰고 온 것은 습도가 아닌 한줄기 싸늘한 바람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 잃어버렸다. 식도에 존재했던 한계령을 어렴풋이 기억할 뿐. 여루는 텅 비어버린 마음 한 자락에 유실된 것을 되새기듯 한기를 제 영혼에 묻혔다.

그날을 기억했다. 학교 운동장에 위치한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마치 당연한 사실을 읊던 양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너를. 여름이라는 계절이 자신에게서 일상을 앗아간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루는 또 한 번 잘 익은 과실의 파과를 겪는 중이다. 그녀는 조회 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권지윤, 교통사고 당해서 당분간 학교 못 나온대.’

‘진짜? 어떡해…’

‘전학 오자마자 사고나 당하고, 운수 지지리도 없네.’

‘야, 너는 친구한테 말이 그게 뭐냐. 근데 그럼 걘 언제 오는 거임?’

‘쌤들 말 엿들은 걸로는 길면 2주 걸린다던데.’

‘미친. 전치 2주?’

지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뺑소니였다. 귀가하던 그를 검은색 벤츠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치고 달아났다고. 그리고 여루는 지금, 그 차의 주인일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루.”

“...”

“──권여루!”

“아, 깜짝이야. 왜?”

갑자기 책상을 쾅, 치며 제 이름을 부른 탓에 여루가 어깨를 들썩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소연이었다. 유소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루야. 지윤이 어떡하냐...”

“...그러게.”

“너 지윤이랑 친한 거 아니었어? 우리 이따 학교 끝나고 병문안이라도 같이 갈까?”

“아니, 그건 좀...”

저도 모르게 바로 거절의 말이 튀어나올 뻔해서. 여루는 그런 자기 행동에 깜짝 놀랐다. 권지윤의 병문안을 가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친구의 병문안을 가는 것이 뭐가 그리──

“─권여루!”

“아… 오늘은 참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네.”

“에휴, 그러게나 말이다.”

이름이 불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교실 문가에 한 여학생이 자신에게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주현이 서 있었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돌면서 싸한 느낌이 온몸으로 번졌다. 여루는 본능적으로 주현의 표정을 읽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엷은 미소를 띤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정말 그 무엇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콜록, 콜록… 얕은 기침 소리가 기억 속에서 번져나갔다.

*

감정은 모든 걸 집어삼킨다. 그것이 찰나이든 영원함이든. 그런 감정 중 사랑은 한순간의 아스라함도 영원히 지속될 아득함도 모두 제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은 위대하다.

채주현은 사랑이란 감정이 낯선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했다. 모두의 사랑을 받는 일에,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나눠주는 일에.

그런데도 처음이었다. 권여루라는 존재가 가져다주는 모든 환희는 여태껏 겪어본 사랑 가운데 처음 겪는 결의 감정인 동시에 무척 안온하고, 아름다웠다.

- 여루야. 우리 하나만 약속하자.

- 우리가 멀리 떨어지게 되더라도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서로를 기억하자.

- 지금 이렇게 얽힌 그림자처럼, 그림자를 보면 지금 한 약속을 떠올릴 수 있게.

- 친구는 서로의 그림자를 나란히 하고 가는 존재라잖아. 내가 너를 기억할게.

최초의 사람이었다. 제가 먼저 ‘친구’로서 기억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연습생이나 재벌가라는 타이틀은 무시하기 힘든 것들이다. 그런데 권여루는 그런 이름들을 짓밟고 다가와 제게서 친구라는 타이틀을 얻어냈다.

친구란 서로의 그림자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그림자를 보면서 서로를 떠올리자고, 서로가 친구임을 기억하자고 17살의 소년 소녀는 약속했다. 여루는 알겠다고 했다. 네가 원한다면. 네가 원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친구로 남을 거야. 영원히.

──그래서 채주현은 제게 찾아온 이 존재를 가져야 했다. 제가 처음으로 가져야 했다. 자신만이 가져야 했다. 그렇기에 감히 가졌다. 그러기 위해선 방해되는 요소를 하나씩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였다.

“저기. 부탁할게 하나 있는데.”

입가에 건 미소를 유지한 채, 소년이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채주현은 비극을 사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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