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5화. 균열 (3)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변화하는 계절은 사람을 잡아먹는다. 여루는 비로소 그것을 체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여름이란 곧 한 소년을 의미했고, 그 더운 공기가 누군가의 안위를 위협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던 하늘 아래 네가 서 있었다. 너는 그렇게 네 존재만으로 내게서 인연을 앗아갔다. 너는 그저 서 있었을 뿐이겠지만, 그것이 내게는 세상이 가려지는 순간이었다.

“심증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하아.”

주현이 사람을 사주해 지윤을 다치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긴 했었다. 그러나 너무 무섭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 잊으려 애썼다. 하나 그의 힘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고, 요즘 들어 집착과도 같은 단속이 심해지고 있었다.

‘핸드폰 이리 줘.’

‘왜?’

‘확인하게.’

‘뭘 확인하는데.’

대답하지도 않고 폰을 가져가 자연스럽게 잠금 패턴을 해제하던 모습.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가.’

‘나 오늘 소연이랑 지하상가에서 놀기로 했는데...’

‘안 돼. 거긴 사람이 너무 많아.’

저녁은 위험하다며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외출을 막던 모습.

‘항상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있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

‘나 어디 안 가. 왜…’

‘내가 없는 곳에서 다른 놈들이랑 어울리지 마.’

‘이유가 뭐야.’

‘내가 싫으니까.’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이성 친구들과의 사이까지 통제하려 들었다.

‘사귀는 사이에서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아. 너 대체 뭐가 문제야.’

‘...’

순간 특유의 붉은 빛이 감도는 눈동자에 차가운 한기가 머문 것 같았다. 여루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고, 그 반응을 따라가던 시선이 이내 안심시키듯 눈웃음치던 모습도. 모든 것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채주현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란 거다. 대단하신 집안의 아드님이시니 어련하실까. 예전, 아무도 없던 교실에 둘만 남았을 때. 말려 올라간 블라우스 속 제 허리를 만지던 손길의 온도를 아직도 기억했다… 그때 이후로,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바라마지 않던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틈을 메꿀 수는 없어도, 무언가 시도라도 해봐야 했다. 여루는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결심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곧 허물 예정이라던 구 교사─예전에 급식실로 쓰던 건물─의 뒤편으로 주현을 불러냈다. 무섭다고 언제까지 외면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과 관련된 일이었고, ‘나’를 또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삶에서 실패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이었다.

*

“싫어.”

“......”

“네가 나한테 이러는 거, 정말 싫어...”

갈색 장발을 흐트러트리며 소녀가 울던 낯을 들어 올렸다.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눈물범벅이었다. 하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똑바로 눈앞의 소년을 올려다봤다. 늦은 점심시간, 구교사의 건물 뒤편. 울지 않으려 했는데, 화가 난 감정이 마음속의 비를 불렀다.

소년은 무표정이었다. 여루는 그런 주현에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지근거리까지 다가서자 가늘게 떨리는 두 팔을 뻗어 그의 셔츠 자락을 꼭 붙잡는다. 툭. 숙인 고개가 그의 흉부에 닿았다.

“미안해, 주현아. 그치만 우리 진짜 아닌 것 같아. 인제 그만 하자.”

“뭘 그만하는데.”

“...”

봄은 사랑의 계절이라 했다. 여름은 청춘의 계절이라 했다. 가을은 순정의 계절이라 했다. 겨울은 추억의 계절이라 했다. 다 틀렸다. 모든 계절은 어쩜 지옥과도 같고, 사랑을 앗아가야 비로소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는 차안(此岸)이다.

계절 속 피안(彼岸)에 핀 꽃 따위는 원하지도 않던 선물과 같은 것. 사랑이라. 여루에게 사랑이란 지독하게 가슴을 태워 녹여버린 그런 것이었다. 흉터조차 남기지 못하고 다 불태워버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모두 재로 화한 그림자.

아버지는 실패한 사랑을 했다. 권여루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채주현의 감정 또한 믿을 수가 없었다. 아, 그래. 이제 깨달았다. 나는 사랑을 하고 싶지 않은 거다. 내 세상에 겪어보지 않은 감정을 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것이 두려웠다. 변하지 않음에 안존했다. 그래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여루야. 있잖아… 나는 너 하나 때문에 나는 모든 게 뒤틀렸어. 모든 계획이 틀어졌는데.”

“뭐…?”

여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눈물이 턱을 타고 흐르다 이내 그쳐 버렸다. 왜 나 때문이지...?

“...아니지. 안 되겠다. 너 좀 아픈 것 같아. 쉬어야겠어. 조퇴서 쓰자. 담임한테는 내가 말할게.”

“나 안 아파. ...왜 이래? 이거 놔.”

“너 아픈 거 맞아.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대체 우리가, 뭘 그만해야 하는데.”

“아니...!”

소녀가 자기 양 팔을 붙잡은 소년의 손을 뿌리치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주현은 여루의 팔을 억세게 쥐었다. 윽...!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소년의 눈은 그런 반응과 상관없이 선뜩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한 행동들이 너를 구속하는 것 같았어? 우리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할 수 있는 건데 왜 그렇게 자꾸 예민하게 반응해?”

“진짜 질린다. 너 진짜 질려. 채주현... 그만하자. 내가 미쳤지. 이런 애를 두고 무슨 말을 하겠다고...──!!”

소년이 소녀의 입을 틀어막고 팔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뒷문 쪽으로 끌고 갔다. 곧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듯한 검은색 벤이 갑작스레 나타났고, 차는 두 명을 태운 후 조용히 사라졌다. 그 누군가의 말이 옳았다. 계절은 사람을 잡아먹고, 사랑은 그런 계절을 비웃는다.

─네가

내 여름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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