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빌쳇 회지 수록용

버섯숲 by 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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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나지막히 부르는 그 목소리는 사뭇 다정했다. 에르빈은 필사적으로 제 위에 있는 것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잔인했다.

 

“너는...”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

 

에르빈 그라나흐는 18살이 되었다. 그 말인 즉슨, 성인이라는 뜻이었다. 쿠르타는 법적으로 성인이 되자 마자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합법적으로 담배를 한 갑 사서, 포장을 뜯은 다음 한 개비 입에 물었다. 빨아들이고, 불이 붙는다. 워, 독하다. 늘 담배는 한 개비씩 얻어피우기만 했는데. 아카데미 불량생들이랑 어울리면서 말이지. 에르빈은 자신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나름 합당화했다. 인생 망한 거 뭐 별 거 있어. 폐암으로 일찍 뒈지는 거지... 이런 말을 들으면 실망할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빌어먹을, 나는 너 때문에 이걸 피우는 거라고! 적어도 지금 이 담배는 말이지. 담배를 신발 밑창에 비벼 끈 그는 제 긴 꽁지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매만졌다. 아, 진짜 싫다. 이런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는 자신이. 포기하지도 못하는 머저리가...

 

그래, 인정했다. 그는 퀴빌라 리즈크를 짝사랑했다. 언제부터? 14살, 아카데미 1학년 때부터. 에르빈 그라나흐의 짝사랑은 지독했다. 왜 지독한가 하니, 뭐 그냥 고백해서 사귀거나 차이면 되는 거 아니냐 하겠지만, 그 녀석의 고질적인 인간 불신과 애정결핍이 문제였다. 첫 번째로, 착한 양파가 되겠다는 약속은 내팽개친 채로 퀴빌라가 싫어하는 나쁜 짓이란 다 하는 불량학생 짓거리를 다 하고 다니는 녀석 스스로가 가장 문제였다. 그런 나쁜 놈에게는 기회가 없겠지, 뭐 그런 생각, 자격지심이 머릿속을 계속 휘저었다.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하달까. 그 다음으론, 퀴빌라가 친구 이상의 관계를 안만든다는 것이었다. 퀴빌라는 모두를 애정했다. 그 말인 즉슨, 한 사람을 특별히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편은 특별이 될 수 없다. 에르빈 그라나흐는 그 것을 아주 잘 알았다... 자신은 퀴빌라에게 특별하지 않았다. 그에게 퀴빌라는 특별했으나. 그래, 이 간격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정말로.

 

그렇다면 대충 포기를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하고 누군가가 물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사람 마음이 뜻대로 되나. 그렇다면 일찌감치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고 그를 편하게 친구로 대할 수 있었을테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그 애의 웃음만 봐도 살이 불에 덴 것처럼 고통스러워. 그리고 그 사랑스러움에 마치 중독된 것처럼...

 

그래서, 그 다음 소식에 지독하게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

아카데미에서 연애는 꽤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젊은이들을 잔뜩 모아두고 있으면 눈이 맞지 않겠는가? 에르빈은 누군가의 연애소식에 놀라거나 누군가를 놀리기에는 제 코가 석자였기에 별 반응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확실히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사귄다고?”

“응. 축하해줘~ 나 연애는 처음이니까~”

 

퀴빌라 리즈크의 연애 소식을, 그것도 퀴빌라 본인에게서 전해들은, 그러니까 짝사랑 상대에게서 전해들은 에르빈은 어, 그러니까... 급식실에서 제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전혀 모를 상태로 식사를 마쳤다. 어정쩡하게 축하해, 하고 답한 뒤에, 에르빈은 오후 수업을 전부 째고 담배를 열심히 피워댔다. 아지트에 짱박혀서, 담배 한 갑을 다 비운 후에야 멈췄다. 그 다음 현기증과 올라오는 욕지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한 바탕 점심 먹은 것을 다 게워내는 난리를 치고 만 것이다.

 

욕지거리가 입에서 새어나왔고, 오늘 치 훈련을 건강 핑계로 빼먹고는 에르빈은 제 기숙사 방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누워서 생각했다. 역시 나 따위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군.

 

누가 먼저 고백했어? 걔가 좋아? 걔랑 있으면 행복해? 이딴 생각이나 잔뜩 하다가, 에르빈은 다시 변기를 붙잡고 속을 비웠다. 울렁거렸다. 너무나도 지독하게 울렁거렸다. 에르빈, 에르빈 그라나흐. 포기할 때가 왔다, 그지? 우울감이 확 덮쳐왔다. 차라리 정신 없이 잠이나 자면 참 좋으련만. 그러나 에르빈이 오늘자 첫 담배를 입에 문 이유, 바로 그 꿈 때문에 그는 잠에 들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들지 않았다.

 

아, 어떤 꿈이냐고? 그는 그 꿈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있는 성격의 꿈이 아니었다. 에르빈, 에르빈. 그 다정한 목소리가 끔찍하게 에르빈의 뇌를 긁어내렸다. 다시 속이 안좋아지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했다... 그는 입을 물로 헹구고 지치고 아픈 몸을 침대에 뉘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 인생은 나에게 엿만 먹이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금세 잠에 들어버렸다.

 

오늘은 그 꿈을 꾸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퀴빌라는 들떠보였다. 아마 연애때문이겠지. 그리고 에르빈은 몸이 계속 안좋다는 핑계로 퀴빌라를 피해다녔다. 그건 악수였다. 몸이 안좋다는 이유로 양호실 침대에 처박혀 누워있던 에르빈에게 퀴빌라가 찾아왔다. 그의 두 살 어린, 한 기수 후배인 연인과 함께 말이다.

 

“많이 안좋아?”

 

응, 너 덕분에.

 

“아니, 그냥 어지럽네.”

“이능력 부작용 괜찮아졌다고 하지 않았어? 걱정된다. 에르빈, 누가 너 간호해줘야 하는 거 아냐?”

 

에르빈의 목구멍 끝에 ‘신경 끄고 네 옆의 애인이랑 데이트나 하러 가.’ 라는 말이 걸렸다. 그러나 그 말을 뱉을 정도로 그는 용기있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면 퀴빌라가 분명 실망하겠지. 항상 퀴빌라에게만 착하고 얌전하게 군 그였으니까. 그 대신 에르빈은 평소대로 친절하게 굴기로 했다.

 

“이미 양호실이잖아? 나 약도 잘 먹고 쉬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 마. 괜찮아지겠지 뭐.”

 

“그래도. 친구로서 걱정되는 거 당연한 거 알잖아~ 내 걱정, 받아줄거지?”

 

물론 받아주지. 네 걱정, 나를 위한 감정, 그런 거 하나하나가 나한테는 너무나 달콤하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독이나 다름 없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내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라도 달란 말이야.

 

라고 하기 전에 양호 선생이 와서, 대화는 뚝 끊겼다. 안그래도 애가 아픈데 쌍으로 와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며 양호 선생이 둘을 쫓아낸 다음, 에르빈은 몇 가지 약을 더 먹고 꾸벅 잠에 들었다.

 

꿈인가? 에르빈은 저번의 그 꿈을 또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문 모를 곳에 자신이 누워있고, 그 위에는...

 

그 위에는 퀴빌라 리즈크가 앉아있었다.

 

“차라리 짜증이라도 내지 그랬어 에르빈.”

 

에르빈은 필사적으로 제 위의 퀴빌라, 아니, 퀴빌라 형상을 한 악몽을 외면했다. 그러나 그것은 집요했다.

 

“왜, 나한테 화를 내고 싶었잖아. 그딴 애송이 말고 너를 선택해달라고 하고 싶었잖아. 아니면 썩 꺼져버리라고 하고 싶었지?”

 

악몽의 손길이 에르빈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는 속수무책 없이 악몽과 눈을 마주했다. 악몽은 눈을 접어 웃었다. 퀴빌라가 늘상 그러는 것처럼.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에르빈은 손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이거, 악몽으로 부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기에, 심지어 혀 조차도 움직이지 않았기에, 속수무책으로 제 몸 위에 걸터앉은 악몽이 후후, 하고 웃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넌 겁쟁이야.”

 

그리고 악몽은 몸을 숙였다. 제발, 이러고 싶지 않아. 저리 가. 혀를 움직여 말을 뱉고 싶었지만 온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 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에르빈은 자신의 몸이 흘러내린 땀 때문에 찝찝할 정도로 젖어있는 것을 알아챘다. 빌어먹을. 머저리같은 자신에 화가 났다. 어차피 가망 없을 거 포기하면 안되는 거냐고. 나 따위에게 기회가 있을 리 없다고... 이미 누군가가 채가지 않았냐며 자신을 질책했다. 그리고 양호실을 나와서 비틀비틀 제 기숙사 방으로 향했다. 잠을 자고 싶지 않았기에 커피를 잔뜩 마시고, 밤을 지새우며 밀린 공부나 해댔다.

 

그런 짜증나는 일들과 노력이 무색하고 어이없게도, 다음 날 점심시간에 퀴빌라는 연애를 끝냈다는 말이나 했다.

 

“뭐?”

“나는 영웅이 되어야 하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 한 명에게 붙들리는 건 좋은 일이 아닌 거 같아서~!”

 

에르빈은 잠시 벙쪘다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시작했다. 약간의 잔소리.

 

“그럼 애초에 받아주질 말던가. 걔는 그럼 뭐가 돼. 차라리 시작을 안하는게 나았을 걸.”

 

“그런 거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때는 괜찮아보였어서. 그리고 뭐, 오래 끄는 것 보다 지금 끝내는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그러고보니까 에르빈은 연애 안하네? 너한테 고백하는 애들 꽤 있었잖아.”

 

“난 걔들 관심 없어. 관심 없는데 받아주고 사귀는건 최악이야.”

 

퀴빌라는 그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딴 대화나 하면서 에르빈이 생각한 건 두가지. 첫 번째로, 정말 나에게 가망이 없단 것과 두 번째, 누구에게도 차라리 가망이 없다는거. 그리고 세 번째는...

 

그게 정말 안좋은 일이라는 거. 자신이 아니라, 퀴빌라에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에르빈은 식사를 마쳤다. 급식실을 나서면서 에르빈은 담배 한 갑을 더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던힐이 좋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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