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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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숲 by 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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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그라나흐라는 이름을 “에스체트” 라는 말 그대로 한 글자의 이름으로 바꾸기까지 얼마나 질척이는 시간이 있었는가. 에르빈, 아니 에스체트는 옛 이름을 버리고 나서 묘하고도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다. 룩소르에서 단 3개월을 보낸 후, 에스체트는 베를린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정리’ 했다. 자신의 이름부터, 자신에게 이름을 준 일가까지. 독재자들이여! 지옥에나 떨어지라지...

 

에르빈, 아니 이제 에스체트에게 남은 혈연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심적으로 기댈 이 하나 없긴 했다만. 그는 이름을 바꾼 뒤로 전장에 수도 없이 뛰어들었다. 혈족과의 전투는 괴로웠다. 죽어나가는 사람들, 잡히지 않는 적들, 아무리 죽여도 수 많은 얼굴을, 상냥한 가면을 쓰고 다가오는 혼돈... 그 속에서 유일하게 바랄 수 있는 건, 돌아가서 나올 구내 식당의 식단이 그나마 괜찮길 바라는 것. 그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생존과 전투에 돌입할 때, 에스체트는 한 편지를 받았다. 퀴빌라가 룩소르를 떠났다는 소식. 흔적도 없이 룩소르를 떠났고, 세계 각지를 떠돌며 쉬고 있다고. 그 소식을 들은 즉시 웃음이 터졌다. 그래, 잘 됐다. 너를 너로 보지 않는 부모따위, 떠나버려.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 전장 따위에 돌아오지 말고.

 

나는 네가 안전할 수만 있다면 평생 영웅 따위 되지 않고 범부로 살아갈텐데. 그러나 세상은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난세고, 나는 세상을 사랑한다... 그리고 너는 드디어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갔구나. 고통 속에 자신을 밀어넣는 영웅이 아니라. 잘 된 일이다. 에스체트는 퀴빌라의 사람됨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리고 흑해로의 파병을 나섰다.

 

흑해로의 파병은 지독했다. 에스체트는 멀미를 하지 않는 체질이었지만, 멀미와는 상관 없었다.

 

“배를 타보신 적 있습니까, 에스체트님? 이 전투는 훈련 따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포가 탑재된 배를 띄우기에는 리스크가 있지. 그리고 살아있는 박격포가 여기 있지 않나. 이런 작전에 이 만큼 적합한 이능력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텐데, 자네도.”

“압니다. 그러나 해병 훈련을 받은 적 없는 사람이 타기엔...”

“상당한 어려움이 있겠죠. 저는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작전 수립은 그 뿐이네. 우리는 군사용 배가 아니라 어업용 배를 타고 나갈 것이고, 어업 지대의 혈족을 섬멸하는 게 주 목표야.”

“알겠습니다. 유서라도 써두시죠.”

 

끝까지 빈정대는군. 에스체트는 작전 브리핑이 끝난 후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직 신뢰를 받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지난 작전 성과가 그를 보여준다지만, 용병을 반겨주는 곳은 드물다. 그는 자신을 반기고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모든 인간들과 빈정대는 모든 인간들에 짜증을 느끼기 시작하다가, 그냥 그만두고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였다. 죽여주는군. 럭키 스트라이크로 바꾸길 잘 했어...

 

그 임무에서 저격을 피하기 위해 거의 초인적인 육감으로 바다에 빠졌을 때 흑해의 공포스러운 짙음을 맛봤다. 에스체트는 끊임없이 가라앉았다. 외안경을 손에 쥔 채로... 흑해는 그 무엇이라도 삼켜버릴 수 있을 만큼 짙고 어두웠다. 아마 하마터면 에스체트도 삼켜버렸겠지.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살아돌아왔다.

 

에스체트는 검은 바다에 잠겨 침잠했다. 그리고 분명히 태양을 목격했다. 검은 태양을. 그래, 퀴빌라 리즈크의 환상을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자유를 만끽한 채로, 그가 그 스스로인 채로. 영웅 따위가 아니라, 퀴빌라 리즈크, 그 개인인 채로.

 

그리고 건져진 에스체트는 다행히 작전이 성공했음을 고지받았다.

 

“죽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시오. 3일 간 아무데도 가지 말고 이 근처에 머무르시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녘이 찾아올 때, 에스체트는 잠이 오지 않아 부둣가를 찾았다. 열려있는 주점에서 보드카 한 병을 그대로 들고 나와 부둣가에 앉아 들이키면서, 떠오르는 해를 응시한다. 운이 좋았다. 언제간에 계속해서 운이 좋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살아있다. 살아서, 나는, 원한다.

 

무엇을?

 

그 직후에 에스체트를 찾아온 것은, 퀴빌라였다.

 

“어머, 에스체트라고 이름도 바꿨다면서~! 드디어 벗어난거지, 그렇지? 룩소르에서 갑자기 떠나겠다고 선언한 건 좀 슬펐지만.”

 

“너도 떠났잖아, 룩소르는... 그리고 나에게는 할 일이 있었으니까.”

 

독재자를 감옥에 넣어버리는 일 말이지. 에스체트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자연스럽게 퀴빌라는 에스체트의 손을 잡았다.

 

“보고싶었어, 에르빈... 아니, 이제는 에스체트지, 참.”

“나도 보고싶었어.”

 

그리고 에스체트는 몰려오는 의뢰를 잠시 접어두고, 퀴빌라와 남쪽 바다의 작은 휴양지로 떠났다. 자신이 기억하는 룩소르의 퀴빌라보다, 지금 만난 그는 수척해진 것 같았다. 이곳 저곳 잘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나 쓸데없는 것을 물어보는 것 보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이와 짧고 달콤한 휴식을 즐기는 것이 더 좋았다.

 

“이곳 저곳, 친구들도 조금 만나고. 모랫바람은 이제 지긋지긋하단 말이야.”

“그럴 만 하지.”

 

파인애플 주스를 한 모금 씩 마시면서 따뜻한 남쪽 바다의 태양볕에 몸을 데운다. 이 시간은 짧고, 곧 지나가겠지만, 너무나 달고 또 소중한 시간인지라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에스체트, 너는 계속 험지로 돌아다니는 거 같던데.”

“나야, 뭐... 워낙 부르는 사람이 많으니...”

 

그렇구나. 정말 훌쩍 커버렸네~ 하며 짧게 웃는 퀴빌라가 눈부셨다. 아직은 그와 같이 함께 할 세상을 만들지 못했기에, 에스체트는 그저 마주 웃었다. 자신이 흑해 밑에서 본 그의 잔상은 이야기 하지 않고.

 

그 잔상의 이름은 사랑이었다.

 

-

 

...그리고 인공 BBP에서 모든 일이 끝났다. 정말로, 정말로 모든 일이 끝나버렸다. 에스체트는 입에서 비릿하게 올라오는 피를 뱉었다. 복귀할 시간이었고, 모든 걸 추슬러야 하는 시간이었다. 혼돈은 근원에 닿지 못한 채로 사라졌다... 그리고 적절한 치료를 받고 남극에서 다시 출발한 항구로 귀환해야 하는 때가 왔다.

 

남극은 여름이 한창이었다. 이 말인 즉슨 펭귄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얼음 가에 앉아서 흔히 보지 못하는 인간들을 구경한다는 뜻이었다.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이었다. 적어도 펭귄들에게는 말이다...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 소네트 18번이었나, 에스체트는 돌아갈 채비를 하는 와중 펭귄들을 보면서 웃었다. 녀석들, 추운 겨울을 피해 여름날에 번식을 하는 거겠지.

 

“여기서 뭐해?”

“아, 펭귄들을 보고 있었어. 얘네는 여기서만 산다더라. 신기한 생물이잖아. 구경 차.”

 

퀴빌라는 에스체트를 보고 웃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웃음이었다. 여름의 태양. 그런 생각이 들어 에스체트는 고개를 다시 펭귄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보니 말이야 에스체트.”

“응?”

“구덩이 속에서,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다 끝나면.”

“아.”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퀴빌라의 눈망울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약간의 의아함으로 변해간다. 에스체트는 감히 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정말 모든 것이 끝나버린 이 시점에서, 나는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하지? 더는 뒤로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이제 참을 수 있는 시점은 지난건지.

 

“그러니까, 나... 나는, 퀴빌라. 나는... 네가, 네가 너무, 그러니까...”

“응, 에스체트.”

“난... 너를, 좋아해. 아니, 사랑하고 있어. 줄곧... 그랬어.”

 

어느새 더듬더리며 말하는 그의 곁에 펭귄들이 모여들어 있는 것은 까맣게 모르는 채로 에스체트는 어버버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이... 이런 내 마음이 부담이라는 건 알아... 하, 하지만 ... 너에게 더는 숨길 수가 없어... 그러니까, 미안.”

 

그 말에 퀴빌라는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에스체트의 눈에는 말이다. 그리고 가볍게 다가오는 손, 얼굴을 끌어당겼다가, 와닿는 입술.

 

에스체트의 어벙벙한 표정을 보며 웃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언제 해줄까, 줄곧 기다리고 있었어.”

 

여기가 얼음바닥이 아니었으면 아마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지고 말았을게다. 벙쪄서 볼은 볼대로 달아올라있는 에스체트와 마냥 미소짓는 퀴빌라 옆에 펭귄들이 한껏 모여들었다. 울음 소리를 내면서, 한참 그대로 서있는 둘과 함께 펭귄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둘을 축복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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