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들.

평행선상의 광시곡狂詩曲.

일리아스 애덤스 / 시지프스 보엠

죽음의 무도.

평행平行은 평면 또는 입체에서 두 개 이상의 선들이 아무리 늘여도 만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등호(=)의 모양은 두 평행선에서 비롯되었다. 

여기 일리아스Ίλιάς와 시지프스Σίσυφος 가 있다.  

하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대서사시이며, 하나는 아직 재해석되지 못한 타르타로스의 죄인인 것을 알아 두라. 이들은 평행선상을 달린다. 그저 선이 앞으로 이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격렬한 전투이며, 동시에 서로 절대 일치할 일 없는 두 삶의 진력 나는 절규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둘의 모습은 곧 같음을 나타내는 기호가 되어 나타나기까지 한다. 모순과 모순. 절대 만나지 않을 것들의 같음. 두 평행선상이 마주할 때는 오직 한 경우다. 결투를 위한 때.

"이젠 여기서도 당신의 글을 받는다고 하덥니까?" 

런던의 날씨가 우중충한 날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가장 잔혹한 일들은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벌어진다. 템스 강 남쪽의 신문사 앞에서. 일리아스와 시지프스는 마주했다. 서사시의 인간이 먼저 무기를 들어 올린다. 그는 여상하게 예의의 탈을 쓴다. 잿빛 머리칼 아래 감추어진 푸른 눈은 런던과도 같다. 그는 이 도시의 전형을 담은 자다. 신사와 살인자가 같은 인물인 공간. 그러나 일리아스 애덤스는 훈련된 사람이다. 적어도 해가 떠 있는 순간에는 뒤집어쓴 껍데기로 열두 배는 더 강력해지는 기사 가웨인처럼. 이 작가이자 -사전적 의미의- 신사는 손에 든 수첩을 접어 코트 안쪽에 넣고, 자신을 흐릿하게 바라보는 검은 눈과 마주한다.  

"먼저 제안해 주었다면야 얼마나 좋았을까요. 달링. 왜, 제 글이 이 신문에 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나요?" 

타르타로스의 죄인은 저열하다. 그는 비꼰다. 동시에 말하면, 반항한다. 그는 작가이나 영원한 이방인이다. 서사시 사이에 죄인의 자리는 없는 법이다. 일순간, 그 검은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인류는 한때 전쟁 중독자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많은 서사시와 죄인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지프스 보엠은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손에 들린 원고 뭉치는 신경질적으로 손바닥에 탁, 탁, 두들겨진다. 런던의 흐린 공기가 그 종잇장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고, 일리아스는 보엠을 보며 미간을 일그러뜨린다. 불쾌감. 이 도시에 항상 들어찬 그 불쾌감이 그를 지배한다. 그는 특별한 종류의 것들에만 불쾌해했다. 예를 들면, 이 죄인처럼, 당당하게 서사시와 계급의 질서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 날뛰는 낯설음 같은 것들. 

"그 가치는 제가 알아보는 게 아닙니다. 신사분."

"보엠이라고 부르시지요. 애덤스 씨."

"당신 이름을 제가 알아서 어디다 쓰겠습니까? 제 기억력은 더 중요한 이름들을 기억하는 데 써야 해서."

"저런, 기억력이 상당히 좋지 않으신가봐요. 달링." 

이제 두 작가는 마주한다. 한 차례 부딪힌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탐색한다 일리아스는 미소를 짓고 있다. 보엠은 그 위압감에 눌린다. 서사시가 가진 후광이 있는 법이다. 이것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죄인에게는 그 자체로 위압감이다. 형식과 운율에 맞추어 써낸 서사시는 이미 틀에 올바르게 들어맞기 때문에. 런던의 안개 속에서도 명확한 것들이 있다. 일리아스의 구두 같은 것, 어깨선과 팔 길이가 정확히 들어맞는 외투 같은 것. 손에 들린 신문사의 말끔한 공문과 다음 주 차의 연재분이 담길 형식에 맞는 봉투 같은 것. 그것들은 보엠의 손에 들린 흐트러진 원고 뭉치와 외투 없는 옷차림과 대비된다. 보엠은 몸을 움츠린다. 일리아스는 삶을 살고 있는 자다. 런던에서, 이 도시의 전형처럼. 서사시처럼. 그것은 핏줄로부터 이어져내려온 토대다. 

"그래요. 굳이 평가를 바라신다면야. 제가 기꺼이 말씀드릴 용의는 있습니다."

"제 글을 읽기는 하셨나봐요."

"근래 화이트채플과 소호 거리에서 찾아 볼 수 있더군요. 공짜로 말입니다. 다들 아침에 나온 신문을 사서 전부 읽고 쓰레기통에 버리더군요." 

사람들이란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일리아스가 덧붙인다. 작가는 잠시간 숨을 멈춘다. 그리고 웃음처럼, 막힌 숨을 흘려보낸다. 그것은 승기를 잡고자 하는 자의 공격이었으며, 오만이었으나. 여전히 서사시처럼 예의와 틀을 유지한 채였다. 영리한 자의 악의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이것은 또한 두 작가의 부딪힘이다. 언어와 언어, 그들의 가장 잘 다듬어진 껍데기들이 부딪히는 결투다. 펜과 종이의 싸움은 때로 갑옷과 무기의 부딪힘보다 잔인하다. 어째서냐 묻느냐면, 작가들은 그것을 장수처럼 잘 다루기 때문이라 답하겠다. 그들은 서로의 껍데기를 들추고 피부를 쑤셔 댈 준비를 갖추었다. 

"재미야 있었습니다만.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아는 작가들은 있으십니까? 하긴, 런던에 오시기 전까지 당신이 무얼 했는지도 모르는군요. 통속적임을 흉내내려 애쓴 그 적극적 시도에... 허무하게 늘어지는 문장들까지. 미안하지만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싫어합니다."

"쓰레기 같다는 말입니까?" 

"그 안에 담긴 조소까지. 전부."

일리아스 애덤스가 앞으로 한 발을 내딛는다. 하나 알려 드릴까요, 작가 양반. 그 투가 마치 은밀한 작당모의를 하는 것처럼 낮게 울린다.

"당신의 가벼움은 좋아요. 좋단 말입니다... 허나 명확히 짚겠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넣어 복잡해진 글은 오히려 비었어요. 허무를 향해 가는 문장도 그렇고. 작가는 바라지 않는 것을 쓸 수 없다더군요. 왜, 허무하게 사는 것을 즐기십니까? 적어도 '우리'가 쳐주는 가치는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리고 그는 못박는다. 푸른 눈이 그 작가를 쏘아본다. 완연한 적대감 속에서, 보엠은 몸을 떤다. 그제서야 일리아스는 자신의 공격이 그를 온전히 찔렀음을 알아차린다. 물론 그가 시지프스 보엠의 비밀을 알 리 없다. 그러나 그의 어떤 저열함들, 비집고 나온 악의들이 작가를 찌르고 들어갔다. 영원히 머물 수 없는 자. '우리'안에 포함될 수 없는, 늘 낯설고, 늘 거부당할 위험을 안은 사람. '우리'라는 단어 안에서 그는 이 이방인을 바깥으로 몰아낸다. 일리아스 애덤스의 미소는 이제 비틀린다. 그는 구둣발로 가구나 도자기를 부술 때의 쾌감을 느낀다. 그것들은 무생물인 주제에 고통에 찬 신음과 비슷한 소리를 낸다. 삐걱이며, 조각을 남기는 비참한 꼴로 깨어진다. 그가 내쉬는 숨은 전투의 열기와 흥분감에 가까운 것이다. 그가 기대한 것은 이 이방인을 완전히 깨어내는 것이기에. 그래서 그는 멈출 생각 없이, 마치 관중들에게 자신의 움직임이 보여지고 있는 양 연극적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세련된 작법을 더 배우시던가, 온전히 통속적인 소설류를 쓰시던가. 하나만 고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글은 그저 텅 빈 무언가로 남을 뿐일텐데... 이건 친절한 충고입니다." 

시지프스 보엠의 검은 눈은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뜨여진다. 무감한 눈동자가, 마치 불꽃처럼 번득이는 푸른 눈으로 향한다. 얼음장 같은 마비와 억눌린 공격성의 대면. 이제 보엠은 그의 글처럼 조소한다. 반격할 태세가 순식간에 갖춰진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싫어하신다고 했지요."

"당신의 글이라고 고쳐 말하지요."

"그래요. 나는 흉내내려 애쓰고 있어요. 달링. 그게 제 글입니다. 흉내와 흉내가 섞인 것 말이에요. 정확히 짚으셨네요."

"설마 제가 주제넘었습니까?"

보엠은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어딘가 불편한 움직임으로. 그 손바닥이 온전히 내려가 웃는 얼굴이 드러났을 때, 일리아스는 불쾌감에 미소를 얼굴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는 당신도 나와 같다고 여기는데."

"주제넘은 짓이냐고 물었더니, 대답 대신 주제넘은 짓으로 되돌려 주는군요."

"오, 달링."

우리는 같아요. 시지프스가 말한다. 

"당신도 나도, 이것도 저것도 아니에요. 달링. 나는 통속적이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인간이며. 여기도, 저기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지요. 그래요. 인정합니다. 나의 글이 떠돌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상처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든다. 그 말인 즉슨, 말에 찔린 작가는 무엇이든 물어뜯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특별히 시지프스는 고통에서 활기를 찾을 줄 아는 이였다. 죄인들이 그렇듯 말이다. 그는 무감함 속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고통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 죄인은 단단한 서사시를 무너뜨리고자 안달하게 되었다. 물어뜯어서라도. 자신을 물어뜯어서라도 말이다. 처절하고 천박한 자는 예의바른 가면을 쓴 자 앞에서 무너진다. 

"그래서요? 달링, 당신의 글을 읽었어요. 내가 다른 이들의 글을 읽지 않을 것 같나요? 나는 모든 것을 삼키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에요. 텅 비었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에요. 나는 허기에 가득찬 짐승이랍니다. 저열하지요. 그런데, 당신은 무얼까요?"

"이봐요."

"내가 달링의 글 속에서 무얼 읽어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보엠의 말이 마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톡, 하고 일리아스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니, 그것은 일그러지는 것이 아니다. 그 위에 덮어씌워졌던 가면이 마침내 깨지는 것과도 같다. 마침내 덮어씌워진 것이 무너진다. 그리고 얼굴이 드러난다. 아니, 드러내진 것인가? 알 수 없다. 일리아스 애덤스는 주먹을 쥔 채로 자신의 결투 상대에게 다가간다. 그의 진정한 얼굴은 분노로서 드러났다. 아니, 공포감인 것인가? 겁 먹은 자는 분노한다. 그러니 같은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글 속에서 저열함을 읽었어요."

일리아스는 눈을 치뜨고서 보엠을 노려보고 있다. 그는 기이한 충동성을 느낀다. 이 인간을 자신의 눈 앞에서 당장 치워 버리고픈, 영원히 없애 버리고픈 충동. 그러나 그는 장갑 쥔 손을 쥐었다 펼 뿐이었다. 보엠은 그 움직임에 시선을 둔 채로, 손에 든 원고지 뭉치를 삿대질처럼 흔들어댄다.

"우리는 똑같이 텅 빈 인간들이에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족속들이란 말입니다. 당신도 나도 마찬가지에요. 바라는 것은 있으나 닿을 수가 없어서 텅 빈 인간들. 당신의 글이 사람의 악의를 논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향하고 있는 강렬한 욕망을 읽는데."

"거기까지 하시지요."

"바라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작가는 없을 거에요. 달링."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허무를 향해 갑니다. 인정해요! 그런데 당신은 무얼 향해 가길래,"

"그만!"

두 언성이 맞부딪혀 파열음으로 깨어진다. 시지프스는 완전히 지친 채 미소짓는다. 그것은 항복도, 승리도 아닌 무기력함을 담고 있다. 일리아스는 일순 그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헛웃음 소리를 낸다. 

"계속 그렇게 허무를 향해 가시지요."

"그럴 거에요, 달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영원히 싸구려 글이나 쓰면서 살란 말입니다."

일리아스가 그 말을 짓씹어 내뱉었다. 보엠의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다시 눈동자가 흐려진다. 그것은 자신의 신세를 알아차린 거지의 태도와도 같다. 

"당신과 나는 같지 않습니다. 같았다면... 내가 적어도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해 줬을 테니.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릅니다. 나는 유지하고 있는 것들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신과는 다르게."

그리고 서사시는 앞으로 나아간다. 숨결에서 런던의 안개처럼 적의가 뿜어져 나온다. 그는 보엠의 어깨에 손을 얹고 속삭인다. 이런 신문사에 올 때는 옷차림을 갖추어 입고 오는 겁니다.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가, 당신과 나의 다른 점을 알려 주는 겁니다."

"..."

"저열한 건 당신의 꼬락서니지 제가 아닙니다."

보엠이 눈을 슬며시 돌린다. 시선이 마주할 때, 일리아스는 그 눈에 담긴 비참함과 웃음조의 동정을 발견했다. 

"충고 고마워요. 달링."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으면 하지만요."

"걱정 마세요."

그리고, 보엠은 손을 들어 제 어깨에 얹어진 일리아스의 손을 집어낸다. 양 손가락으로. 마치 불쾌한 것을 대하듯이 그렇게 툭, 떨어뜨려 놓고서 대꾸했다.

"이 신문사 앞에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런던 브릿지의 방향으로 사라지는 그 걸음걸이가 기이하게도 비틀거리는 것 같아 일리아스는 역겨움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두 평행선의 결투가 끝이 났을 때, 막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므로. 그 또한 신문사로 들어가 몸을 피해야만 했다. 시지프스 보엠이 장담한 대로 그들은 다시는 그 신문사 앞에서 마주치지 않았다. 다만, 일리아스 애덤스가 몰랐던 것은. 그들이 소호 거리의 어느 술집 앞에서 마주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평행선상의 두 삶은 등호를 그리기 위해 달려나간다. 그들이 부딪힘은 오직 한 순간에만 이루어진다. 결투를 위한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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