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
완결 후 1
솜사탕을 불어 넣은 것처럼 푸른 하늘에 그림처럼 구름이 휘날린다. 단풍의 향을 품은 바람의 온도마저 완벽한 날의 연속이었다. 마르니카르타의 시간은 로제로카르타보다 빠르다. 세계의 시간도 마르니들의 시간도. 신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곳은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에 모든 것이 변한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세상의 지혜를 가진 생명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 세상을 자유롭게 누빈다.
“체르타~ 오면서 들었는데 오늘부터 마을 축제래. 알고 있었어?”
“응. 며칠 전부터 떠들썩했으니까.”
책을 읽고 있던 건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체르타는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엘을 말에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몸을 돌렸다.
“뭐하다가 왔어?”
“일… 좀 하다가 왔지. 보고 싶었어?”
“2주씩이나?”
“어…… 그런 편이지.”
체르타의 추궁이 길어질수록 엘 또한 말 사이에 공백이 길어졌다. 마르니카르타와 로제로카르타를 오고 다니면서 지낸 것도 벌써 10년. 마르니들에게나 벌써 10년이지, 신들에게는 고작 10년이다. 아직도 10년. 엘에게는 고작인 시간이라 아직도 두 시공간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 어디야? 노동법 위반으로 신고…….”
“에이. 괜찮아. 이번 축제 기간 동안 애기랑 딱 붙어 있을게. 어때?”
대답 없는 체르타였지만 엘은 그것이 긍정의 대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몸이 된 체르타는 감정을 보여 주는 것도, 생각을 뱉는 것도, 표현하는 횟수도 많이 늘었다. 이런 아이를 사형 집행 인형으로 만들고, 프누르의 저주 속에서 400년이나 보내게 하다니. 엘은 여전히 테쎄라를 용서할 수 없었다. 창조주 역시도.
“근데 너, 오늘따라 안색이 안 좋아. 괜찮은 거야?”
“나? 완전 괜찮지.”
체계는 잡혀 있지만 기존과 바뀐 운영으로 명예의 트럼프의 업무도 많이 바뀐 상태였다. 부패한 테쎄라였지만 그 이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안정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신들의 내면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테쎄라가 무너지니 사회의 조화가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균형이 무너지자 여하단과 명예의 트럼프가 나서야 하는 일들이 사방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이 역시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안정되겠지만 현재로써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틈을 메꾸는 것이 전부였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거라며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중에서도 엘은 스스로 여하단장의 몫까지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여하단과 명예의 트럼프, 두 곳의 업무 모두 처리하고 있었다. 그 선택으로 인해 그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르니카르타에 있는 건 엘에게는 휴식 같은 시간이었다. 체르타를 보는 게 자신에게 휴식이라고. 엘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나 말고 체르타 안색이 안 좋…… 헉.”
익숙한 통증이다. 그림자가 폭주하기 전에 느껴지는 전조 증상. 아니, 그보다 극심한 통증이었다. 어째서? 엘을 바라보는 체르타의 얼굴이 점점 희게 변한다. 울컥, 하는 기분 나쁜 느낌과 함께 엘의 입에서 붉은 피들이 뿜어져 나왔다.
“텐, 텐에게 연락을………”
인간의 몸에서 영혼이 빠진 것처럼 엘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체르타는 그대로 엘에게 달려가 엘을 불렀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사락. 약한 빛과 함께 엘의 모습이 변했다. 체르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10년 전의 모습으로. 모습이야 어쨌든 엘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체르타는 연락처 목록에서 텐을 찾기 위해 잘게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집었다. 깨끗했던 액정이 붉은 색으로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 단장?
“텐! 나 좀 도와줘. 엘이 쓰러졌어… 바닥에 피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처치술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숨이 옅어지고 몸이 차가워지는 엘을 안고 있는 것이 체르타가 할 수 있는 고작의 일이었다.
온몸이 깨질 것처럼 아파. 왜 이러지. 눈을 뜬 것 같은데 여전히 암흑이었다. 뭐지?
“얘 일어났다. 프시히. 그거 치워.”
눈이 시릴 정도로 환한 빛에 엘은 다시 눈을 감았다. 빛에 눈이 적응할 때까지 작게 눈을 뜨고 있던 엘은 들리는 소음들에 작아진 시야로 주변을 둘러봤다.
“나 아파.”
“아픈 게 당연하지. 이 미련한 자식아! 너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범죄자가 왜 여기있어? 나 혹시 수감됐나?”
눈 앞에 프시히를 보며 엘은 얼굴을 찡그렸다. 평소라면 맞장구를 쳐줄 카신이나 란 마저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엘은 생각에 잠겼다. 아, 머리가 안 돌아가는 느낌인데. 그러고 보니 나 체르타 만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엘이 텐을 바라보자 폭발하려는 텐을 세나가 말리기 시작했다.
“선배.”
“쥬우비도 왔네. 너희 여기서 잔치하니?”
“선배 죽을 뻔했어요. 누가 란 선배 친구 아니랄까 봐 이런 것도 닮는 거예요?”
“아, 그래서 내 머리가 지금….”
“장난칠 게 아니라 진짜 죽을 뻔했다고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죽었어요. 선배는 엔피스테 폭주가 번번하게 일어났던 사람이라 그나마 내성이 생겨서 버틴 거예요.”
쥬우비의 얼굴에서 심각성을 읽은 엘은 그제서야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무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평범한 체르타 앞에서 엘 또한 평범한 인간이 되기 위해 주기적으로 마법을 걸었다. 란이 4년이나 머리색을 바꾸는 마법을 유지했던 것처럼 엘 역시 외형을 바꾸는 마법과 동공의 모양을 바꾸는 마법을 주기적으로 걸고 있었다. 자그마치 10년이나. 기간이 길긴 하지만 로제로카르타로 돌아와 지낼 때면 마법을 풀고 편하게 지넀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엔피스테가 회복할 시간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충분할 거라고.
“엔피스테 소용돌이예요.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엔피스테 내에 작은 소용돌이들이 생겨서 엔피스테 분자들이 서로 공격해요. 면역 세포도 공격 대상이 되고요. 작은 소용돌이들이 하나로 뭉쳐 커다란 소용돌이가 되면 폭주가 일어나는데, 선배는 그림자 능력으로 폭주가 자주 일어났었죠? 그래서 면역 세포가 버틴 거예요. 그 마저도 거의 소멸에 가까운 상태지만.”
“그래서?”
“지금은 마나협회장… 아니, 프시히 씨가 강제로 선배의 엔피스테를 재워 뒀어요. 계속 강제로 재워서 소용돌이의 활성화를 죽여야 해요. 선배, 당분간 마법 못 써요. 이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프시히는 쳐다보자 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알을 아무리 굴려봐도 다 비슷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엘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안 쓸게. 마법만 안 쓰면 돼?”
“꾸준히 약 드시고, 검사도 매일 받아야 해요. 그리고 시공간 넘어가지 마세요. 그 시계가 있다고 한들, 지금은 몸이 못 버텨요. 미아가 아니라 몸이 터져버릴 거예요.”
“넵.”
의식이 깨어난 상태에서 진행할 검사가 더 있는지 프시히가 여러 장치를 가지고 돌아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엘의 상태가 너무 위독했고, 쥬우비의 치료술로는 한계가 있어서 마지막 방법으로 프시히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관계가 틀어졌더라도 프시히에게 엘은 자식처럼 키운 아이였기 때문에 프시히는 일말의 고민 없이 수감실에서 나와 엘을 살폈다고 한다.
“고마워.”
“철이 좀 들었나 보다. 예전에는 죽어도 고맙다 소리는 안 하더니.”
프시히는 모니터에서 눈을 뗴지 않고 엘의 말에 대답했다. 그의 눈과 손가락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고마운 적 없었는데.”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다 이 모양인지 원.”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잖아. 너 닮은 거지.”
“패륜을 정말 자연스럽게 하네. 이 자식이.”
검사가 끝나고 결과지를 확인했을 때 그야말로 처참 그 자체였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 할 정도로 내부가 엉망이었다.
“너 당분간 움직이지도 마. 그냥 누워 있어. 엔피스테가 숙면에 들어가서 자기 재생이 불가해. 시간마다 면역 세포를 강제로 활성화 시켜야 하고… 당분간은 마르니 속도로 회복할 거다.”
“언제 움직일 수 있어?”
“적어도 한달은 안 돼. 몸이 괜찮아지면 그때 엔피스테를 깨울 거야. 엔피스테의 회복에도 시간이 걸릴 테니까…… 6개월은 안 돼.”
“와, 진짜 잔인하다.”
“니 상태가 더 잔인해!”
그 말을 끝으로 프시히가 병실을 나갔다. 이렇게 누워 있는 것도 오랜만이네. 여하단과 명예의 트럼프 일이 끝나면 마르니카르타로 넘어가 체르타를 만났다. 체르타가 잠이 들면 그의 주변을 점검하고 안전을 확인했다. 그렇게 10년……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 좀 무리하긴 했다. 인정한다. 이건.
“저기요. 이 양반아. 단장이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익숙한 회색 머리와 분홍 머리가 들어왔다. 아마 자신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사람.
“텐.”
“단장은 세나가 도와줬어. 주변 치우는 것도. 세나한테 고마워해.”
“세나, 고마워.”
“이 인간은 단장 관련된 일이면 인형처럼 사과하더라.”
“시비 걸거면 나가. 너 보니까 엔피스테 깨우고 싶어.”
“또 싸우네! 텐, 그만해! 이거 주러 왔어. 떨어져 있었거든.”
세나가 건넨 건 엘의 휴대전화였다. 마르니카르타에서 사용하는, 체르타와 연락하려고 만든 휴대전화. 비록 통신 연결은 되지 않지만 쓰러져 있는 동안 체르타가 보내뒀던 메시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아 있는 거지?]
[세나가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걱정돼.]
[일어나면 연락 줘.]
아이고. 우리 애기 걱정하겠다. 여기서는 답장을 보낼 수도 없는데. 말없이 텐을 쳐다보자 텐은 귀찮다는 얼굴로 귀를 후비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어? 텐의 모습을 본 세나가 텐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숨만 붙어 있다고 해야지.”
“까불지 말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텐은 단장이 안심할 수 있게끔 말할 게 뻔했다. 그 역시 체르타의 안전과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기에. 텐과 세나가 병실에서 나가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란과 히아센의 방문을 반겼던 것 같기도 하다. 언뜻 카신을 본 것 같기도 하고, 반과 프시히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말을 걸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 수면제에 절여진 엘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마냥 잠만 잤다.
“나 그만 잘래…….”
“뭐야. 깼는데? 이거 누르면 돼?”
가까이서 들리는 란의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잠에 빠진 엘이었다. 이 배신자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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