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게토] 무단침입

게토는 고죠의 물음에 대답해주는 대신 그마저 몽땅 삼켰다.

3470 by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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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초인종이 울렸다. 미미코도 나나코도 돌아올 시간이 아닌데 누가 이시간에 찾아오나 싶다. 게토가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문 바깥을 살폈다. 작은 렌즈 너머로 새하얀 머리통이 보였다. …사토루? 입을 틀어막기도 전에 고죠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네가 찾아올 리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게토가 고개를 저었다. 

"스구루, 나 이대로 문전박대 할 생각?"

렌즈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고죠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입가에는 낯익은 미소가 걸렸다. 마치 지난 몇 달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둘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게토가 몸을 물렸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당장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주력의 잔향이 제집 현관문 앞에서 죽치고 서 있는 남자가 그 '고죠 사토루' 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게토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오하아사 운은 확인해보지 않아도 텄다, 텄어. 

게토는 고죠를 제법 잘 알았다. 고죠는 자잘한 일에 대해서는 인내심이 바닥을 쳤지만 해내야 하는 임무에 관해서는 지독하리만치 끈질기게 굴었다. 가령, 먹고 싶었던 파르페 가게의 웨이팅이 다섯을 넘어간다 하면 곧장 다른 가게로 가겠다며 발길을 돌리지만 임무랍시고 숨어있는 주령 하나를 잡겠다고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며 강행군을 일삼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고죠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게토가 확신했다. 

잠시 후에도 고죠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토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언 쓸 시간이라도 달라고 해볼까. 어떻게든 시간을 벌면 이곳에 남은 가족들의 흔적은 지울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의 가능성을 그렸다. 그러나 눈 앞의 상대는 그 고죠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그라고 생각하지 못할 리 없었다. 유언 그거, 문 열어주고 나서 기다려줄게 라고 답할 놈이란 소리다. 고죠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 언제 저 문을 박살내고 들어올지 모르겠다면…… 결단을 내린 게토가 현관문을 열었다.  

"들어와."

"이야, 집 좋네."

고죠가 자연스럽게 거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공교롭게도 방금 전까지 게토가 앉아있던 자리다. 졸지에 자리를 뺏긴 게토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부엌으로 가 물 한 잔을 따라왔다. 마셔. 손님 대접을 해주듯 굴었다. 고죠가 얌전히 물컵을 받았다. 마실 생각은 없는 지 받아서 들고 있기만 했다. 게토가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이상한 거 안 넣었어. 

"보면 알아."

이 몸이 그런 것도 모를 리가 있겠어? 고죠가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게토에게 과장되게 손짓했다. 스구루도 앉아. 익숙한 명령조다. 게토가 소파 앞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3인용 소파니까 고죠 옆에 앉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가까이 다가서니 자리 잡은 구도가 영 이상했다. 너무 가깝지 않나? 답지 않게 망설이다가 곧장 딱딱한 식탁 의자를 거실까지 끌고 왔다. 다행스럽게도 고죠는 게토의 태도에 대해 아무런 첨언도 하지 않았다. 

고죠가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사이, 게토는 그런 그를 곁눈질로 살폈다. 겉으로는 변한 게 없었다. 굳이 달라진 걸 따지자면 고죠 자신을 감싼 술식이 보다 견고해졌다는 것 정도. 자동으로 돌아가는 반전술식과 전신을 감싼 무하한만으로도 경이로웠지만, 고죠는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술식을 강화한 모양이었다. 사토루는 정말 혼자서도 최강이 되었구나. 게토가 혼잣말을 삼켰다. 

스구루 혼자 살아? 고죠가 먼저 침묵을 깼다. 딱히 꼭꼭 숨길 생각은 없었던지라 게토가 고개를 저었다. 가족들이랑 살아. 그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 대답에 고죠가 선글라스를 들어 올렸다. 새파란 시선이 게토에게로 향했다. 취조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새로 만든 가족들?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하기 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의 모든 순간이 게토 혼자 살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인용 식탁, 커다란 소파, 가지각색의 외투, 그리고 신발장 위 빼곡한 신발들까지도.

"그 가족 말인데, 한 자리 더 비어?" 

고죠가 불쑥 게토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부쩍 거리감이 좁혀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게토가 반문하며 몸을 물렸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고죠가 순순히 팔을 풀어주는 대신 게토의 어깨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정돈되지 않은 하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았다. 게토가 애꿎은 입술만 씹었다.

"나도 여기서 살아도 되냐고."

"뭐?"

당황한 게토의 입이 벌어지자, 고죠가 그 사이로 집들이 선물이랍시고 사온 과자를 쑥 밀어 넣었다. 과자는 고죠의 취향답게 지독하게 달았다. 

"맛있지?"

"…달아."

게토가 인상을 찌푸리자, 고죠가 그 미간을 툭툭 건드리며 경쾌하게 웃었다. 대답해준 거로 칠게. 

"누구세요?"

"금방 갈 사람이란다, 나나코."

"안 갈 건데?"

"게토님이 금방 가야 한다고 하면 가셔야 해요." 

"이 몸은 스구루랑 친구라 괜찮아."

"친구세요?"

"친구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지."

"사토루, 애들한테 이상한 얘기 하지 마."

미미코와 나나코를 방으로 돌려보낸 뒤 게토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죠의 발을 밟았다. 빌어먹을 술식 탓에 밟힐 지 안 밟힐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기분이라도 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고죠가 기다렸다는 듯이 무하한을 풀고 실실 웃었다. 개자식. 게토가 얼굴을 구겼다. 

"라루, 고생했어."

"이분이 그 고죠 씨입니까? 미남이십니다." 

"라루도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사토루, 여긴 라루. 라루, 여긴 고죠."

며칠 전, 고죠의 고집을 꺾는 대신, 게토는 라루에게 연락을 했다. 일주일만 애들을 데리고 잠깐 여행 좀 가줄 수 없겠냐고. 어디 멀리 주령이라도 잡으러 가는 거냐는 물음에, 게토가 그런 게 아니라 손님이 왔다고만 전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고죠도 손님이기는 했다. 그냥 데리고 있기엔 리스크가 너무 커서 그렇지. 

처음엔 며칠만 데리고 있다가 안되면 힘으로라도 내쫓을 생각이었다. 몰래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꾸기를 네 번, 앉혀두고 돌아가라 설득하기를 여덟 번, 억지로 현관문 밖으로 내보내기를 여섯 번. 고죠는 예상대로 죽어도 안 돌아간다며 고집을 부렸고, 게토는 짐작한대로 고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고죠의 말에 게토가 혀를 내둘렀다. 대수롭지 않게 표정관리를 하고, 가벼운 인삿말 하듯 툭 내뱉었다. 적당히 지내다가 알아서 돌아가라고. 

게토는 제 머릿속에 찌꺼기처럼 남은 불안함을 꾹꾹 억눌렀다. 고죠가 언제 어떤 식으로 마음을 바꿔서 자신을 죽일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외면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게토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기껏 제 속에서 끄집어낸 대의가 있었다. 그렇다고 고죠에게 툭 까놓고 당분간 나 죽이지 마, 알겠지? 하고 확답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 지장이라도 찍어버려? 자연스럽게 게토의 침대 절반을 차지한 고죠를 두고 거실로 나온 게토가 머리를 싸맸다. 어쩌자고 지금 찾아와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 삼류 이별 노래 가사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게토가 손끝에서 몇 달 전에 삼켰던 투명 주령 몇 마리를 끄집어냈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처럼 미니 드론 용도로, 그러니까 감시 용도로 쓰면 제격이겠다 싶기는 했는데 이걸 고죠에게 가장 먼저 테스트해볼 줄은 미처 몰랐다. 고죠 정도면 순식간에 알아채고도 남겠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내버려 둘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예상대로 고죠는 게토의 주령을 건드리지도 않고, 그의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며칠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갓 태어난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를 보고 따라다니듯, 게토가 가는 곳마다 줄기차게 쫓아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 성가셨다. 

"너 계속 이대로 지낼 건 아니지?"

라루가 아이들과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 아침이었다. 게토가 습관적으로 아침 차리는 걸 돕던 고죠의 어깨를 충동적으로 붙잡았다. 

"지낼 건데?"

"있잖아 사토루─," 

게토가 습관처럼 일장 연설을 쏟아내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어지는 고죠의 말 때문이었다. 

"나 상층부가 시켜서 온 거 아니야."

내가 왜 그 새끼들 좋은 짓을 해줘? 식탁 위에 컵을 내려놓은 고죠가 코웃음을 쳤다. 설탕은 어딨냐는 물음에 게토가 멍한 표정으로 찬장을 가리켰다. 상층부가 시켜서 온 게 아니면 어째서? 각설탕이 따로 구비되어 있었다. 고죠가 제 몫의 커피에만 각설탕 다섯 개를 집어넣었다. 담임이 시킨 것도 아니야. 고죠가 덧붙였다. 그 즈음부터 부엌에서 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고죠가 확인해보니 게토의 손이 굳어있었다. 오믈렛이 되다 만 것이 가장자리부터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고죠가 게토의 손에서 후라이팬을 뺏어다가 싱크대에 던져넣었다. 물 틀어놔야 해. 게토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고죠는 게토가 시킨 대로 찬물을 세게 틀었다.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환기 스위치를 누른 고죠가 게토를 거실 소파로 데려갔다. 냄새 좀 빼자. 게토가 잠자코 입만 벙긋거렸다. 

"어떻게 말해줄까. 짧게? 아니면 길게?"

고민할 필요가 있나? 굳이 이런 이야기를 길게 들어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에 전자를 택했다. 

"요약해봐." 

"쫓겨났어."

……아냐, 길게 말해봐. 게토가 이마를 짚었다. 

게토의 반응을 본 고죠가 가볍게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층부에서 게토의 사형 집행인으로 고죠를 임명했단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과 동등한, 어쩌면 보다 강한 주술사는 고죠 혹은 츠쿠모뿐이니 고죠가 지목될 법도 했다. 게토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니 뭐라고 말을 얹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그들을 죽여버린 것에 대해 미안합니다, 라고 할 수는 없었다. 원숭이들은 죽어 마땅했으니까. 하여간 그 뒤로 고죠가 염병할 상층부 놈들을 죄다 썰어버리려다가, 야가 학장의 만류로 겨우 참았다고 했다. 자기 선에서 내가 너를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하더니 그 결과 명령 불복종 및 임무 불이행으로 1년간 고전 정학과 자택에서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고. 

"근신 처분이라며."

"그렇지?" 고죠가 싱글벙글 웃었다. 

"근데 왜 여기 있는데?"

"스구루 보러?" 

나 죽이려는 게 아니고? 또다. 입을 틀어막기도 전에 그간 꾹꾹 참아두었던 물음이 튀어나왔다. 고죠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못하겠다고 때려치고 쫓겨난 건데, 여기서 널 죽이면 내가 뭐가 돼.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게토는 순간 마음을 놓았다. 아주, 아주 조금. 

"역시 이 편이 더 의미 있지?"

고개를 돌린 고죠가 여느 때처럼 웃었다. 무언가를 억누른 것 같은 웃음이다. 게토는 고죠의 물음에 대답해주는 대신 그마저 몽땅 삼켰다. 입이 썼다. 

02. 

"따라오지 마."

"따라갈래."

"시간 낭비야."

"시간 낭비 아니야."

내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게토가 미간을 찌푸렸다.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애초에 한 번 들통난 이상 두 번 들통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도망 같은 거 갈 생각이 없다고 구구절절 설명을 해줬지만 고죠는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응수했다. 심심해, 외로워, 지루해. 고죠가 만세합창을 했다. 그날 저녁엔 고죠의 밥그릇이 빠졌다. (스구루, 밥 갖고 사람 차별하는 게 어딨어!) 애초에 고죠가 굳이 따라와야 할 필요가 없었다. 잠들기 전에 (고죠는 게토의 옆에서 잤다.) 삼일, 딱 삼일만 나 혼자 내버려 두면 안되냐 물었더니 삼일씩이나 자리를 비우는 게 말이 되냐는 헛소리가 돌아왔다. 아주 그냥 결혼하자고 해, 라고 내뱉었더니 사토루 대꾸하시길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라 했다. 게토는 고죠랑 대화할 바에 기르는 토마토와 만담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날 밤에는 소파에서 잤다.   

모든 일의 발단은 어젯밤 주저사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글에서 시작되었다. 후쿠오카 교외에 생겨난 주령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 그 수가 아주 많아 보여서 최소 1급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정보는 덤. 게토가 곧바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저사 커뮤니티가 시끌벅적하다는 얘기는, 달리 해석하자면 창의 움직임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하급 주령들은 하라주쿠 한 바퀴만 돌고 나와도 차고 넘쳤지만 1급 이상의 주령을 거둬들이는 건, 게토의 입장에서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여차하면 고전의 주술사들이 달려들어 제령해버리는 건 물론이고, 게토가 냅다 달려가서 내것이오 하고 삼키자니 수배중인 자신의 신분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너 들키면 안 되잖아."

누가 누굴 숨겨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근신 처분 받은 거 맞아? 고죠가 게토의 가방을 깔고 누워 꿈쩍도 안하자 게토가 새벽부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주술사들의 눈을 피해서 숨은 건 자신인데, 정작 최강의 주술사라는 놈은 자신의 그늘 아래 태연하게 숨어있다. 적어도 게토가 보기엔 그랬다. 들키면 안된다는 말에 고죠는 짐짓 고민하는 척 고개를 슬쩍 기울이다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주력 그거 안 쓰면 되잖아? 게토가 기가 차서 숨을 내뱉었다. 그러면 왜 따라오는 거냐 물었더니 혼자 가면 네가 외롭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누가 누굴 외롭다고 해? 기가 차서 게토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고죠와 실랑이할 시간도 없었다. 며칠 자리를 비운다며 미미코와 나나코에게 연락을 넣어두고, 가장 빠른 기차표를 끊었다. 

"…몰라, 너 알아서 해."

난 15분 뒤에 나갈 거야. 게토가 일정을 통보했다. 

"스구루. 후쿠오카에 가면 하카타 토리몬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알지."

알겠냐고 그딴 거. 고죠가 비장한 말투로 헛소리를 내뱉자 게토가 이를 악물었다. 학창 시절부터 우수수 빠지던 머리카락이 고죠가 이곳에 쳐들어온 이후 또다시 바람 한 가닥에도 맥없이 흩날렸다. 탈모 오면 책임질거냐고 묻고 싶은데 책임져줄까? 라 대답할까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르겠고 짐이나 챙겨."

"필요한 건 가서 사면 되잖아."

"아, 예. 그러세요."

고죠는 그 와중에 후쿠오카 디저트 리스트를 적겠다며 핸드폰 화면에 코를 박았다. 주령만 잡고 바로 올라올 건데 디저트는 무슨. 게토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 부질없는 리스트 적을 시간에 너 입을 옷이나 챙겨보라 하려다 말았다. 자고로 짐이랍시고 빈 가방 챙겨두고 가서 사자고 할 놈한테 많은 걸 바라서는 안되는 법이다. 고죠가 소파에 가로로 널브러진 동안, 게토는 가방에 두 사람 몫의 옷가지를 챙겼다. 

"스구루, 소바 집도 갈 거야?"

그럴 시간이 있겠냐고 따지기도 전에 고죠가 다시 핸드폰 화면에 코를 박았다. 디저트는 지 입맛대로 실컷 골라놓고 나름 양보한답시고 끼니만 저 좋아하는 걸로 고르려는 꼴이 조금 우스웠다. 역으로 가기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잠깐의 여유가 남아있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이러고 있으니까?" 고죠가 두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걷어 차주고 싶어, 사토루."

게토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제게도 염치라는 게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예전에 같이 임무 나갔을 때 같다고, 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염치. 

 

고죠나 게토가 맡는 대부분의 임무는 준1급 이상이었다. 특히 고죠의 경우, 무하한을 미세하게 컨트롤 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그의 임무에는 반드시 보조감독이 동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사전에 장막을 쳐두지 않으면 고죠의 술식으로 인해 초토화된 주변을 비주술사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로 내색한 적은 없었지만, 게토는 보조감독의 동행을 썩 반기는 편이었다. 굳이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구질구질하게 이동할 필요도 없고, 사람들 사이에 얼기설기 자리잡은 하급주령들을 죄다 거둬들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반면 고죠는 보조감독의 동행을 불쾌하게 여기곤 했는데 그 이유는, 

차타고 가면 중간에 못 내리잖아. 간식도 못 사고. 

우리 놀러가는 게 아니라 임무하러 가는 거야, 사토루. 

게토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고작 간식 좀 사먹고 싶다는 이유로 비주술사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지 않냐는 말은 속으로 삼키면서 머릿속으로 참을 인 자를 한 번 새겼다. 고죠가 그 모습을 보더니 정론 대신 눈썹 주령이라도 집어 삼킨 거냐고 놀렸다. 게토가 잠자코 웃으며 참을 인 두 번을 새겼다. 그러자 고죠가 스구루가 제일 좋아하는 포지션─토크는요─ 하고 말꼬리를 질질 끌다가 우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아주 정점을 찍었다. 저 자식 죽이고 천국 갈게요. 게토는 참을 인 자를 세 번 새길 시간에 일단 주먹을 꽂았다. 이어서 날아오는 고죠의 주먹을 피한답시고 몸을 돌리자 타고왔던 차의 보닛이 게토 대신 반으로 접혔다. 어차피 망가졌겠다, 게토가 무 뽑듯 자동차 타이어를 뽑았다. 예전에는 고전의 기물을 파손할 때마다 이걸 어떻게 배상해야하나 따위의 자잘한 고민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고죠가 잘난 도련님이 알아서 하시겠거니 했다. 게토가 고죠에게 타이어를 야구공 던지듯 집어던졌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타이어가 술식에 맞아 보기 좋게 쪼그라들었다. 그날 두 사람은 한바탕 싸운 후 홍룡을 타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고전에 복귀했고, 이후 자초지종을 알게 된 야가가 불그죽죽한 얼굴로 고전이 떠나가라 호통을 쳤었는데. 

그랬던 자신이 지금은 구질구질한 방식을 써먹고 있었다. 도쿄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중간 중간 버스를 갈아타는 방식으로. 주령을 꺼내는 방법도 있기는 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종종 써먹었다. 하지만 도쿄 한복판에서 장막도 없이 가오리라도 꺼냈다가는 창의 눈에 포착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최악의 주저사, 드디어 모두에게 선전포고하나? 뉴스 헤드라인이라도 뜨면 저런 식일 텐데, 지금으로선 어림도 없었다. 

탈취제, 세정제, 마스크, 여분의 옷가지를 꼼꼼히 챙긴 게토가 복면도 챙길까 하다가 내려놨다. 이걸 쓰고 고죠 앞에 나타나는 순간, 천년의 놀림감이 될 게 눈에 선했다. 게토가 이번에는 고속버스 대신 가장 빠른 신칸센을 끊었다. 신칸센? 고죠가 이유를 묻자 게토가 가볍게 대꾸했다. 그게 더 빨라. 속으로는 다른 이유를 들었다. 고죠에게 구질구질하게 버스를 바꿔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어차피 원숭이들은 어디에나 차고 넘치니까, 괴로운 건 피차 일반이기도 했다.  

"스구루, 표정이 안 좋아."

"아닌데."

너 3초 뒤에 토할 것 같은 얼굴인데. 고죠가 게토의 입가에 멀미 봉투를 가져다 댔다. 하나, 둘, 셋, 안하네? 배려랍시고 하는 행동인지, 놀리려고 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게토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젖혔다. 역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펄럭거리는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자 고죠가 대신 쓰라며 자기 손수건을 건넸다. 그걸로 코와 입을 틀어막자 한결 나았다. 고죠가 이것도 쓰고 좀 자두라며 안대를 건넸다. 새것처럼 뻣뻣한 재질이었다. 옷 챙길 생각은 안하면서 이런 건 챙겼냐고 따지고 자시고 할 여력도 없어서 게토는 고죠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원숭이들이 드글거리는 곳은 역시 싫었다. 전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꿈에 학창시절이 나왔다. 모처럼 임무도 없고 날씨도 좋아서, 다같이 우에노 공원에 갔던 날. 이 나이를 먹고도 선생님과 함께 다니는 건 좀 아니지 않냐고 빡빡 우겼지만 어림도 없어서 야가도 동행했던 날이기도 했다. 물론 곱게 말을 들어줄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판다 감상에 푹 빠진 야가를 뒤로 하고 셋이서 줄행랑을 쳤다. 선배 셋이서 달리기 시작하니까 1학년 둘도 나란히 뛰었다. 졸지에 다섯이 되었다.  

쟤 스구루 닮았어. 

왜 하필 여우야? 그러는 너는…… 아냐, 됐어.  

게토가 반박삼아 새하얀 북극여우를 가리키려다 관뒀다. 닮았다고 하면 더 좋아할 것 같았다. 고죠가 툭하면 저거 너 닮았다, 하며 놀리던 것만 빼면 다함께 둘러본 동물원은 썩 재밌었다. 실컷 간식을 사먹고 넘치게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야 도로 야가를 찾았다. 밥은 사달라고 해야 하니까. 하이바라가 당당하게 고깃집에 가고 싶다고 외쳐서 그날의 마지막 코스는 고깃집이 되었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느즈막히 벚꽃 구경을 하다가 돌아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랬는데.

"스구루."

고죠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게토가 눈을 떴다. 여전히 세상이 어둡다. 다시 눈을 감으면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리 들킨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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