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기적

요이사키 카나데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축복이 오가는 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날, 따뜻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날. 슬슬 찾아오는 두통에 헤드셋을 벗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온 거리가 반짝이고 캐롤이 범람하는 이 계절에는 늘 곡이 써지지 않았다. 

이제 카나데는 예전처럼 조급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사람들이 있었다. 선물을 받고 나서는 활짝 웃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늘 어딘가 겉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나데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백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이미 수십 번은 고쳐 쓴 것 같은 멜로디가 금새 사라졌다.

어쩐지 조금 추운 듯한 기분이 들어 옷깃을 여몄다. 어떤 과거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사랑은 영원히 대체될 수 없다. 이제 카나데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어떤 밤은 한없이 길게 느껴지곤 했다. 

달칵, 책상 위의 등을 켜자 천장에 별이 수놓아졌다. 창 밖 풍경에 비하면 어둡지만 이 정도면 카나데에겐 충분했다.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오랜만에 넷 모두 시간이 된다. 만나기 전에 곡을 어느 정도는 완성해 두고 싶었다. 크리스마스가 어색한 것은 카나데만이 아닐 것이므로.


"미즈키, 늦었네?"

"미안 미안, 생각보다 줄이 길었어~"

하? 나보고는 낮잠 자다 지각하지 말라더니. 에나가 투덜거리다, 미즈키 손에 들린 유명 제과점 케이크를 보고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이.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에 카나데가 가볍게 웃었다.

"케이크 먹기 전에, 먼저!"

미즈키가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 세 개를 내려놓았다. 선물 교환을 하자는 건 당연하게도 미즈키의 아이디어였다. 시간이 지나며 니고 활동은 점차 뜸해졌고, 일년에 한두 번씩 짧은 곡을 내거나 이런 휴일마다 같이 저녁을 먹는 게 고작이었다.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심심하기까지 하면 안되지 않겠냐며 미즈키는 매년 이벤트 계획을 세웠고, 그 중 선물 교환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의 정규 이벤트가 되었다.

카나데는 미즈키가 내민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상자를 열자 귀여운 패턴의 츄리닝 세트가 보였다. 에나의 상자에는 복슬복슬한 겨울 원피스가, 마후유의 상자에는 독특한 색의 가디건이 들어 있었다. 패션 공부를 하겠다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더니, 직접 만든 걸까. 카나데의 놀란 표정을 본 미즈키가 즐거운 듯 후후 웃었다.

"이거 미즈키가 직접 만든 거야?"

"완전히 새로 만든 건 아니고, 리폼했어. 마음에 들어?"

"응, 잘 입고 다닐게."

미즈키가 만든 옷은 언제나 미즈키 같았다. 옷은 미즈키가 말하는 방식이기도 했으니까. 자주 쓰이지 않는 색 조합, 리본 모양의 지퍼 손잡이, 져지 소매 끝부분에 수놓아진 흰 카네이션. 옷의 모든 부분이 미즈키다워 카나데는 작게 웃었다. 좋은 선물이었다. 옷소매를 꼭 쥐자 크리스마스가 조금은 덜 어색해진 것 같았다. 카나데는 오랜만에 옷장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옷장의 90% 가량이 져지와 반바지로 채워져 있긴 하지만.

마후유의 선물은 디퓨저 여러 개였다. 최대한 수면에 도움이 되는 향으로 샀어. 지난번에 말한 대로 하루에 6시간 이상 자고 있지 않을 것 같아서. 포근한 향에 마음이 평온해지기도 잠시, 이어지는 마후유의 말에 카나데는 열심히 시선을 피해야 했다. 

"6시간 이상... 노력해볼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디퓨저를 든 에나와 미즈키가 작게 웃었다. 수면 문제에 있어서는 마후유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마후유는 간호대에 진학한 이후로 잔소리가 늘었고, 나쁜 꿈을 꿨다거나 밤을 새고 작업을 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종종 티백 몇 개를 카나데의 집으로 보냈다. 잘 자, 카나데. 편지지에 적힌 짧은 문장은 질책인 동시에 애정이었다. 카나데는 그게 싫지 않았다. 누군가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삶을 견디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에나의 선물은 로션과 크림 세트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로션 바른 게 언제였더라. 더 이상 모든 시간을 작곡에 쏟아붇지 않는대도 생활 감각을 되찾는 것은 어려웠다. 히키코모리 생활의 관성이 남아 버린 탓에 카나데는 몸이 건조해지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나 바닥을 주기적으로 쓸어야 한다는 것 따위를 쉽게 잊어버리곤 했다. 동봉된 핸드크림을 손등에 바르자 금새 손이 부드러워져 카나데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상자 안에는 엽서 하나가 같이 들어 있었다. 앞면에는 에나의 그림이 들어가 있고, 뒷면에는 편지가 쓰여 있었다. 따뜻한 벽난로, 트리에 매달린 채 반짝이는 오너먼트와 벽을 밝히는 촛불. 에나의 그림에는 언제나 조금 따뜻하고 단단한 구석이 있었다. 카나데의 것이 아닌 풍경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K에게. 잘 지내고 있어?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짧은 편지는 그런 말로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곡을 만드는 만큼 카나데를 위한 시간도 보냈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게 있으면 꼭 얘기해 줘. 카나데는 우리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니까.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 에나가. 

편지를 다 읽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편지는 에나의 그림처럼 따뜻하고 단단했다. 언제라도 기댈 수 있을 것처럼.

"마후유, 엽서는 집에 가서 읽어!"

"잘 보이게 들어 있길래 바로 읽었으면 하는 줄 알았어."

"그러니까 읽지 말란 얘기가 아니고...!"

눈 덮인 호숫가가 그려진 엽서를 든 마후유와 에나가 또 투닥대고 있었다. 에휴, 됐다, 너 읽고 싶을 때 읽어. 고등학생 때부터 이어져 온 이 불협화음에 에나는 이제 꽤 잘 적응한 듯 했다. 에나, 고마워. 그 말에 에나가 뿌듯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고마워, 에나."

카나데는 웃으며 말했다. 에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카나데의 미소가 옮겨붙기라도 한 듯 밝게 웃었다. 엽서, 읽었어? 에나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카나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나의 볼이 다시 조금 붉어졌다. 에나, 또 카나데만 편애한다!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는 미즈키도 산타 모자를 쓴 고양이가 그려진 엽서를 들고 있었다. 

이제 카나데의 차례였다. 어쩐지 카나데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오늘 받은 만큼 좋은 선물이 될까? 카나데는 손재주도, 생활에 신경을 써 주는 꼼꼼함도, 그림 솜씨나 글재주도 없었다. 카나데의 표현 수단은 언제나 음악이었다. 전해지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카나데는 작은 나무상자 세 개를 내밀었다.

달칵. 나무상자 안에는 간단한 기계 장치가 들어 있었다. 작게 튀어나온 손잡이를 돌리자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오르골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카나데는 노래 세 곡을 만들었다. 고등학생 때 선물해 주었던 노래를 조금 편곡해서 넣으려다가, 결국 새로운 곡을 만들었다. 그때의 카나데와 지금의 카나데는 꽤나 다른 사람이니까.

"나는 할 줄 아는 게 작곡뿐이니까... 조금 부끄럽네."

카나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즈키가 고개를 저으며 턱짓으로 마후유를 가리켰다. 오르골을 든 마후유는 작게 웃고 있었다. 투박한 나무상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러웠다. 부끄럽다니, 다들 감동 받았는데. 미즈키의 말을 듣고 둘러보니 에나 역시 반짝이는 눈으로 웃고 있었다. 어렸을 때 오르골을 바라보던 카나데와 같은 표정으로.

아, 이래서 곡을 만들고 싶었구나. 곡이 써지지 않는 12월에 컴퓨터를 붙들고 있었던 것은 이걸 위해서였구나. 어떤 과거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흐르는 시간 속에 못박혀 죽는다. 그러나 과거는 사라질지라도, 그 때의 감정은. 크리스마스의 불빛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그 생소한 감각은. 웃음이 옮겨 붙은 듯 카나데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받은 선물에 제대로 된 보답을 한 기분이었다. 

꼬르륵. 긴장이 풀리자 점심을 먹은 지 꽤 되었다는 게 생각났다. 카나데, 배고파? 마후유의 물음에 카나데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미즈키가 큭큭 웃으며 가져온 케이크를 꺼냈다. 예쁘게 장식된 생크림 케이크에서는 은은하게 딸기 냄새가 났다. 

카나데는 제 앞에 놓인 조각을 조금 잘라 입에 넣었다. 무지하게 달았다. 부드러운 시트와 생크림 사이로 달콤한 딸기 조각이 씹혔다. 오랜만에 먹는 단 음식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역시 케이크가 있어야지. 사진을 찍느라 바쁜 에나가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달 전부터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마후유 역시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후유, 어때?"

"엄청 달아. 과일 맛도 조금 나는 것 같고."

뚱한 표정으로 당연한 말을 하는 게 어쩐지 코믹했다. 잠시 후 마후유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좋은지 별로인지 중에 고르자면, 좋은 쪽인 것 같아. 그 말에 미즈키가 뿌듯하게 후후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먹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 카나데 역시 작게 후후 웃었다. 당연했던 것을 되찾는 감각은 언제나 생경했고 동시에 즐거웠다.

"우리 영화 보자!"

"파티룸 대여 시간까지 다 볼 수 있어?"

"그렇게 안 길걸? 1시간 40분짜리야."

벽에 걸린 스크린에서 신작 크리스마스 영화가 재생되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그저 그런 제목이었지만 일 년에 한 번쯤은 이런 진부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카나데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편안했다.


"영화 어땠어?"

"스토리가 뻔해서 그닥... 아, 그래도 주인공이 가족과 재회하는 씬 연출은 꽤 좋았어."

"그치? 그 부분은 뮤비에 참고하고 싶을 정도였다니까. 카나데는 어땠어?"

"미안, 난 중간에 잠들어버려서 제대로 못 봤어..."

"뭐, 소파가 너무 푹신하긴 했어."

미즈키가 파티룸 문을 젖혀 열었다. 그래도 자버린 건 좀 너무했어. 장난스러운 미즈키의 웃음 소리 사이로 카나데의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먼저 가도 괜찮아. 카나데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여보세요? 네, 요이사키 카나데입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아직 병문안 날짜는 조금 남았는데. 지긋지긋한 불안이 엄습했다. 애써 침착한 척을 하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네... 아, 아버지가요?"

요이사키 씨가 방금 깨어나셨어요. 그 이후로도 여러 안내가 흘러나왔지만 카나데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몸이 바보처럼 덜덜 떨렸다. 네, 바로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답하는 목소리도 아마 형편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깨어나셨대. 정신을 겨우 붙들고 셋에게 소식을 전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카나데를 에나와 미즈키가 붙잡았다.

데려다 줄게. 카나데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마후유의 차를 탔다. 창밖을 보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꼭 껴안아 버리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인데도 두려웠다. 창밖으로 거리를 수놓은 크리스마스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한없이 어색했다. 차창으로 새어들어오는 냉기가 카나데를 휘감았다.

"도착했어."

차가 병원 정문에 도착했다. 병원 안으로 향하는 한발 한발이 무거웠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아버지가 다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가 꼬여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차에서 내린 마후유가 카나데의 어깨를 붙집았다.

카나데.

잘 다녀와.

마후유의 눈은 언제나처럼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카나데는 마후유가 작게 웃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언젠가 돌아올 가족을 배웅하고 있는 사람처럼. 많은 것이 변해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장소처럼.

"...그래, 다녀올게."

시간이 늦어 병실 복도에는 카나데뿐이었다. 텅 빈 복도에 카나데의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분명 멀지 않은 곳에 병실이 있었는데 십 분은 넘게 걸은 것 같았다. 병실 문 손잡이를 잡은 손이 땀으로 미끌거렸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빠."

"...카나데."

아버지의 목소리는 작았고, 조금 떨렸다. 그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카나데. 그토록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다. 카나데는 입을 떼는 것도 잊은 채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설렜다. 동시에 두려웠다. 이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까? 나를 걱정할까? 책망할까? 아니면 원했던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고 잘했다고 말해 줄까? 

그러나 어떤 말을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떤 과거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 그러나 카나데는 이제 그때의 기억을 짊어진 채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카나데에게는 등을 기댈 곳이 아직 남아 있으므로.

시계 초침이 똑딱거렸다. 11시 59분, 12시. 크리스마스 자정에 찾아온 기적. 이제 카나데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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