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방식
시노노메 남매
시노노메 아키토는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 시노노메 신에이의 성을 물려받았음에도 그랬다. 아키토는 아버지와 에나가 삐그덕거리고 틀어지다 결국은 언성을 높이는, 그 지겨운 갈등을 한 번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둘의 세계였고 아키토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에나의 방문을 두드리는 것 뿐이었다.
전시회장에 불이 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키토가 할 수 있는 것은 빈소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1. 화가의 장례식
아키토는 23살에 상주가 되었다. 전신 화상을 입은 아버지 대신 물감 냄새가 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대체로 아버지의 지인이었으나 그 중 몇몇은 에나와도 연이 있었다. 사람들은 울었고 슬퍼했으며 시노노메 에나가 얼마나 멋진 화가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쩐지 에나, 보다는 시노노메, 에 강조점이 꾹꾹 찍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에나의 전시회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사람 같았다. 미술을 알지 못하는 아키토조차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림이 에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말들을 듣고 있자니 대답할 말이 마땅치가 않았다. 너무 무난해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시간이 느리게 지나갔다.
가끔씩 에나의 죽음을, 에나가 남기고 간 것보다 에나의 공백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키야마는 꽤나 침착하게 절을 하고는, 일어서자마자 덜덜 떨며 쓰러지듯 아키토의 손을 붙잡았다.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지.“
아키야마는 자신이 더 빠른 비행기를 잡지 못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처럼 굴었다. 이벤트가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던 아키토가 그랬던 것처럼. 아키토는 괜찮다고, 제가 뭐라도 되는 양 대답했다. 아키야마의 추위는 삽시간에 모두에게 옮겨 붙은 듯 했다. 창백한 얼굴의 요이사키 씨가 가시나무처럼 떨었다. 아사히나 씨마저, 뭐랄까, 알던 것과 다른 느낌으로 울었다. 그녀가 손수건을 건넨 걸 보니 자신 역시 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늦은 밤에는 검은 마스크를 쓴 모모이 씨가 찾아왔다. 그녀는 비틀비틀 쓰러질 듯 걸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아키토, 어떡해? 모모이 씨는 아키토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다. 그렇지만 낮 동안 들었던 질문들보다는 그게 훨씬 나아 아키토는 그 말에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러게요."
그러자 모모이 씨는 아키토의 어깨에 조심히 손을 얹었다. 그것 또한 무언의 질문 같았다. 잘 견딜 수 있지, 하는. 이번에는 아키토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했다. 그 물음이 모모이 씨가 아니라 에나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날은 모모이 씨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조문객이 오지 않았다. 아키토는 라이터를 들고 빈소 밖으로 나갔다. 비흡연자인 아키토의 주머니에는 담배가 있었다. 아주아주 힘든 날,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에 가져다 대려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비벼 끄고는 했다. 그렇게 서랍 속에 쳐박힌 담배는 보통 에나가 가져가서 폈다. 평소에는 딸기향 액상만 피는 주제에 형편없는 평론을 받은 날에는 기침을 하면서도 아키토의 연초를 가져갔다. 필터를 입에 물며 아키토는 꼴사납게 기침을 했다. 옆에서 익숙하게 담배를 피던 아키야마가 이상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다 목 상한다.“
”남 말한다.“
”나 이제 노래 부를 일 없어. 이제 니고도 더 안 하고. 가끔 모여서 곡 만들기는 하는데… 이제는, 뭐.“
”…그러냐.“
할 말이 없어진 아키토는 담배를 손에 든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도 에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사람이 있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의 조문객은 에나의 죽음보다 아버지의 부상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런 종류의 마음은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았다.
“그림은 어떻게 할 거야?”
“응?”
“둘이 같이 살잖아. 에나 방에 그림 많던데.“
“에나가 얘기 안 해줬냐? 2년 전에 독립했어. 애초에 월세 아끼려고 같이 살았던 거고…”
두 명이 방 두 개짜리 집을 쓰는 주제에 에나는 작업실이 필요하다고 고집을 부려댔다. 그리고 정말로 작은 방 하나에 캔버스며 물감이며 하는 것들을 쌓아 놓고는 구석에 침대 하나를 박아 두었다. 에나의 향수나 옷 같은 것들은 아키토의 방으로 밀려났다. 그것들은 에나가 보증금을 구해 이사를 간 후에도 아키토의 방에 남아 있었다.
“…정리해야지. 내가 제일 근처 사는데.“
에나는 본인 물건은 그렇게 버리고 간 주제에 그림은 구석에 굴러다니던 습작까지 하나도 안 빼먹고 전부 새 집으로 가져갔다. 그래서인지 에나의 새 집을 생각할 때면 유화물감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키토는 그 냄새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다. 어릴 때도 싫어했고, 같이 살 때에도 작업실 환기 문제 때문에 매번 싸우곤 했다. 지금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 그 냄새를 떠올려서인지, 아니면 에나를 떠올려서인지 아키토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아키토는 에나가 더는 뿌리지 않는 향수보다는 유화 물감 냄새로 에나를 기억했으므로.
“정리하고 나면… 그림 몇 장만 보내줄 수 있어?”
“어떤 그림?”
“상관없어. 스케치도 괜찮고 미완성작도 괜찮고. 나, 에나 그림이 종이로는 거의 없더라. 컴퓨터에 일러스트는 많아도.“
아키야마가 멋쩍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럴 거면 미리미리 그림 좀 받아 둘걸, 하고.
”…세 명이던가?”
“응, 나까지 해서. 근데 정말로 줘도 괜찮아?”
“어차피 갤러리에 내놓으려고 했어. 그렇게 기를 쓰고 독립했는데 이제 와서 본가에 걸어 두기도 그렇고.“
사실은 하나의 가능성이 더 있었다. 벽에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고, 에나가 제집처럼 드나들었으며, 단촐한 짐으로 혼자 살기에는 조금 넓은 감이 있는 공간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아키토도 아키야마도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아키야마는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작은 USB가 보였다.
“이것도 필요하면 가져가. 에나가 그린 거야. 고등학생 때니까 꽤 예전 그림이기는 하지만.“
아키토는 USB를 받아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열어 볼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받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고맙다.“
“꽤 잘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쪽 작업물은 한 번도 자기 SNS에 업로드 안 하더라. 이건 완전한 자기 작품이 아니라 그랬대. 시노노메 에나가 아니라 에나낭 그림이라고.“
아키야마가 이상한 표정으로 빙글 웃었다. 눈가가 빨갰다. 아키토는 자기 역시 그런 표정일지 궁금했다.
”에나답지.“
…그러게. 그 녀석답네. 그 말을 내뱉자마자 시야가 조금 흐려졌다. 눈가가 따끔거렸다. 이상한 표정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울기에는 너무 별 것 아닌 말이었는데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아키야마가 천천히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키토는 고개를 들었다. 다 타들어간 담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2. 꿈이 겹치는 곳
에나의 집까지는 차를 타고 7분 정도가 걸렸다. 늦었으니까 데려다 달라느니, 짐을 옮겨 달라느니 하는 부탁을 하도 많이 받아 가는 길은 익숙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유화와 먼지가 뒤섞인 냄새가 훅 끼쳤다. 전시회에 참가한다고 방도 안 치우고 산 모양이었다. 아키토는 얼굴을 찡그렸다. 속이 메스꺼웠다.
작업실에는 그림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에나가 가장 잘 자랑스러워 할 만한 그림들은 이미 전시회에서 불타 사라졌을 것이다. 남은 것은 대부분 미완성작이거나 습작이었다. 아키토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탁자 위에는 포스터 여러 장이 쌓여 있었다. 색이 영 애매하게 인쇄된 에나의 대표작 위로 시노노메 에나 첫 개인전, 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키토는 포스터와 팜플렛을 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에나는 결코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키토는 그 점이 오히려 기꺼웠다. 아키토는 쉽게 감상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 방에서는 평정을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눈으로, 코로, 손끝으로 밀려오는 정보값이 너무 많았다. 몸이 힘들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려진 스케치를 집어 들며 아키토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정보값이 과하다고. 아키토는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 말은 곧 에나의 세계의 가장자리에밖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유화물감 냄새가 나는 이 집에서 전시회 팜플렛과 스케치와 공책 따위를 치울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시노노메 에나가 어떤 마음으로 시노노메 신에이를 그렸을지 그는 평생 알 수 없음에도, 오직 그가 에나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방 좀 치우고 살지 그랬냐.“
정말 그랬다면 훨씬 괴로워했을 주제에 그렇게 내뱉었다. 그러나 투정을 부리는 것은 단 한 번도 아키토의 역할이 아니었고 뱉은 말은 허망하게 집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노을이 질 때 쯤에는 큰 그림 몇 점만이 남아 있었다. 아키토는 그것들을 찬찬히 바라보다 박스에 담아 분류했다. 이건 아키야마에게, 이건 갤러리에, 이건 반도 안 그려진 미완성작이니 처분. 그렇게 한참 그림을 옮기다 마지막으로 남은 그림에는 불꽃놀이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색색의 불꽃이 밤하늘 위로 피어올랐다가 떨어졌다. 축제의 한 장면처럼 노점상이 즐비한 거리 위를 불꽃이 비추었다. 한쪽 구석이 찢어져 있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그림이었다. 마음처럼 그려지지 않아 성질을 부린 것일까. 에나답다는 생각이 들어 탄식처럼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아키토는 그림이 찢긴 자리를 가만히 손으로 만져 보았다. 내놓지도 줘 버리지도 못할 미완성작이었다. 처음 세운 분류 기준대로라면 버리는 게 맞았다. 캔버스를 수선하면 어딘가에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에나가 그걸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에나는 한참 전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공모전에 낼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구겨 버리고는 밤을 새며 새 그림을 그리는 그런 사람.
그림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키토는 불현듯 억울해졌다. 에나의 세계에서 유화물감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아키토의 집에 남아 있는 것들이라고는 향수와 옷가지와 인형뿐이고 이제 더 이상 그것들로는 에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아키토가 단 하나 아는 것이 이 물감덩어리 집의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라는 사실이. 이곳에는 아키토의 것이 없다. 아키토는 자신에게 억울할 권리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키토는 찢어진 미완성작을 가져가고 싶었다.
에나가 새운 밤과 집어던진 붓과 구겨 버린 그림들에는 아키토의 지분이 있었다. 편의점 치즈케이크와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볼의 상처와 한밤중 노크 소리만큼의 지분이 있었다. 아키토가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것은 에나의 대표작이 아니라 미완성작일 것이다.
박스에 담긴 그림들과 따로 포장된 불꽃놀이 그림은 아키토의 차 트렁크에 실렸다. 짐의 무게 때문에 차는 느릿느릿 나아갔다. 아키토는 라디오를 틀었다. 예술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들과는 별 관계 없는 이야기가 나와 운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상자를 열어 보낼 짐을 다 보내고 나서야 따로 가져온 그림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아키토는 찢어진 캔버스를 수리할지 고민하다가, 역시 그대로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그 그림을 그대로 액자에 넣고 걸었다. 이벤트 포스터 몇 개만이 붙은 깔끔한 벽에 커다란 불꽃놀이 그림이 걸린 모양새가 꽤나 이질적이었다. 아키토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하루가 길었다. 졸음으로 흐려지는 시야에 그림이 맺혔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꿈 속에서 아키토는 에나의 그림 안에 있었다. 덩어리진 물감 같은 질감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아키토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귀를 강타하는 음악 소리에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어딘가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비트였다. 천천히, 깊은 곳에서부터 기억이 끄집어 올려졌다.
“저기, 아키토.”
에나가 말을 걸어왔다. 에나는 유카타 대신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저런 걸 해 보면 어때?”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분명 자신이 에나를 챙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오히려 에나에게 의지하고 있던 순간들이. 이 말도 그 중 하나였다. 이 말 하나로 음악을 하기로 결정한 건 아니었지만, 고민할 때마다 종종 꿈에 나왔던 걸로 봐서 꽤나 오래 남을 기억인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이제는 소용 없는데. 아키토는 그냥 응, 하고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너 노래 꽤 잘 하잖아.”
아키토는 고개를 돌려 에나를 바라봤다. 기억 속에 이 대사는 없었는데. 다시 앞을 돌아보니 무대 위에 서 있는 인영이 어쩐지 익숙했다. 저 정도 키에, 주황색 머리, 마이크를 잡는 방식… 아키토는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비비드 배드 스쿼드의 네 명이 모두 그곳에 서 있었다.
“왜, 보러 올 줄 몰랐어? 무슨 이벤트 한다고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길래, 궁금해서 와 봤어.“
아, 기억났다.
이날 에나는 아키토의 공연을 보러 왔었다. 토우야한테 표를 받았다고 했었나. 왜 왔냐고 짜증을 냈지만, 에나가 평소처럼 놀리기는커녕 웃고만 있어 당황했던 기억이 났다. 대단하네, 아키토. 그렇게 말하는 에나는 제법 누나 같았고, 또 한번 그 날을 떠올리게 했다. 아키토는 에나가 아직도 여름 축제의 그 날을 기억할지가 궁금했다.
저, 에나.
너도 이걸 기억해?
미술을 알지 못하는 내가 에나에게서 무언가를 떼어 가지고 싶어한다면, 스트리트 음악을 알지 못하는 에나 역시 그럴까. 내 꿈에 지분을 가졌던 순간들을 기억할까. 꽤나 어린애 같은 질문이라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괜찮지 않을까.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어도 묻는 것 정도는.
에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에나는 아키토의 꿈 속에서 재조합된 것이었다. 아키토가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나의 답을 대신하는 것처럼 한 번 더 그림 불꽃이 터졌고 사방으로 물감이 날아올랐다.
아키토는 눈을 떴다. 새벽의 어스름한 빛 사이로 벽에 어색하게 매달린 불꽃놀이 그림이 보였다. 아키토는 일어나서 조깅을 하려다,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다시 누웠다. 꽤나 피곤했다. 답해줄 사람도 없는 기억을 혼자서 떠올리고 있는 것은.
3. 일러스트, 시노노메 에나.
아키토는 24살에 첫 솔로 앨범을 냈다. 에나의 장례식 이전부터 기획하던 앨범이었다. 아키토의 노래에 에나의 존재감이 조금도 섞여들어가지 않기까지는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아키토 본인만이 느낄 수 있는 미미한 변화였지만 아키토는 마음 정리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야 녹음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멤버들은 기다려 주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물어볼 게 뭐야?“
앨범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앨범을 내놓기 전 마지막으로 고집을 부리고 싶은 게 딱 한 가지 있었다. 허락을 받는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일이지만, 앨범이 완성되기 전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한다면 그건 시라이시 안이라고 아키토는 생각했다.
”앨범 커버 한번 봐 줘.“
”그런 건 우리 아빠나 너희 아버지께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아? 왜, 그건 좀 부끄러워?“
안은 아키로를 놀리듯 깔깔 웃으면서도 사뭇 진지한 눈으로 태블릿을 바라봤다. 그건 불꽃놀이 그림이었다. 물감 같은 질감의 불꽃들이 밤하늘 위로 피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꽤나 평범한 그림이었는데, 다시 보니 그림의 한 구석이 찢겨 있었다.
”이거, 에나 그림이야.“
”…너희 누나?“
아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가족 일이랑 노래는 별개인 거 알아. 나한테 준 그림도 아니고. 그냥 주제넘게 고른 거야.“
안은 고개를 푹 숙인 아키토를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파일 하나를 열었다. 가사지 파일이었다. 읽어 봐. 그렇게 말하며 안은 살짝 웃었다.
“이 노래, 사실 나기 씨 얘기다?”
“나기 씨라면…”
“나기 씨는 내가 꿈을 이루는 걸 보고 싶어 했거든. 그러니까 꿈을 이루기 위한 앨범이라면, 멋대로 가사에 집어넣어도 이해해 줄 것 같아서... 그렇지 않을까?”
아키토는 알았다. 안과 자신은 다르고 자신은 에나의 몫까지 가지고 앨범을 만들 수 없다. 아키토는 미술을 알지 못한다. 에나가 어떤 꿈을 가졌는지, 무엇을 원했는지 아키토는 평생 동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그림을 넣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굳이 말하자면 전하고 싶어서였다. 불꽃놀이를 하던 그 밤은 분명 이 꿈의 한 조각을 이루고 있다고. 두 꿈의 아주 살짝 겹치는 곳에서 둘은 서로에게 빚진 것이 있다고. 그러므로 아키토의 몫이 아주 조금 담겨 있을 뿐인 그림을 멋대로 빌려가겠다고.
“…뭐, 그렇지.”
“그럼 됐네.”
안이 밝게 웃었다. 아키토도 하는 수 없이 조금 웃고 말았다. 노래하는 목소리에서 에나를 다 떼어 내고 나서야 그림을 빌릴 용기가 생긴다는 게 조금 웃긴 것도 같았다.
작사, 시노노메 아키토. 작곡, 시노노메 아키토. 편곡, 시노노메 아키토. 그리고 일러스트, 시노노메 에나. 이것이 아키토의 애도의 방식이었다. 제멋대로였다. 제멋대로 구는 것은 단 한 번도 아키토의 역할이 아니었지만 이번 한 번만은 괜찮을 것 같았다.
댓글 1
더워하는 염소
문장마다 담긴 감정에 가슴이 저미는 글이에요. 우연히 너무 좋은 글을 만나서 오밤중에 눈물 찔끔 흘렸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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