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리는 세계에서

카나마후

https://youtu.be/ZEy36W1xX8c?si=HTq9hz3at10pBVGf

[멜티 랜드 나이트메어]를 들으며 작업했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읽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세카이에 대한 독자적인 설정이 약간 들어갑니다.


#0. 

마후유는 모르는 곳에서 눈을 뜬다. 세카이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곳. 철골이 드러난 황량한 구조는 여전하지만 어쩐지 따뜻한 느낌이 든다. 익숙한 적막함과 낯선 분홍빛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어우러진다.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공간이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궁금해하며 일어서려는 순간,

“잘 다녀왔어?”

작은 손이 눈 앞에 내밀어진다.

#1.

손의 주인은 어디에선가 본 적 있는 듯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마후유가 생각하는 현실의 그 사람과 조금은 달랐다. 얇은 몸 위에는 익숙한 남색 져지 대신 가벼운 파자마 원피스가 걸쳐져 있다. 나이트코드를 통해 대화하는 것처럼, 목소리에 노이즈가 섞인다. 조금 서툰 솜씨로 다듬어진 새하얀 앞머리가 바람에 흩날린다. 당황한 표정의 마후유를 보고 그 애는 말갛게 웃는다. 이거, 전에 마후유가 잘라 줬어. 그 익숙한 웃음을 보고서야 마후유는 눈 앞의 존재가 카나데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여기, 꿈 속이야?”

카나데가 고개를 끄덕인다.

“꽤 진짜 같네.”

마후유는 꿈을 자주 꾸지 않는다. 꾼다고 해도 악몽뿐이었다. 알지 못하는 날것의 감정들이 증폭되고, 낮 동안 알지 못하던 것들이 여전히 알 수 없는 형태로 마후유를 덮쳤다. 끔찍했다. 그런 면에서 이 꿈은 특이했다. 꿈을 꾸는데도 괴롭지 않았다.

“이건 마후유가 고른 꿈이니까.”

마후유는 처음으로 꿈이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 그것은 마후유에게 익숙한 몇 안되는 감정이었다. 가슴이 차갑게 뒤틀리며 아픈 기분. 마후유는 꿈을 꾸는 것이 두려웠다. 서둘러 낮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마후유, 지금 뭐가 하고 싶어?”

마후유는 카나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잘 모르겠어. 언제나와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 뒤에 한 문장이 더 붙었다. 그러니까 일단 가 볼래.

파자마 원피스 차림의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아무 데나 걸터 앉아 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봤다. 적막 속에서 시간을 한참 흘려보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서로의 생각을 몰라도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눈을 살짝 감고 흥얼거리는 카나데의 노래가 들려왔다. 마후유는 자기도 모르게 그 노래를 따라불렀다. 모르는 노래지만 어쩐지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띄엄띄엄 끊기고 흔들리는 음이 빈 공간을 서서히 채워나갔다. 카나데가 놀란 표정으로 마후유를 바라봤다.

“이 노래를 어떻게…”

”모르는 노래야. 그런데 불러보고 싶었어.“

따뜻했다. 처음 듣는 노래를 따라 불렀으니 당연하게도 어설프고 불안정했다. 하지만 계속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이 순간 속에 녹아 사라질 수 있기를 바라며 마후유는 계속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슴 속 깊은 곳이 조금씩 따끔거렸다.

”…그렇구나.“

카나데는 기쁘게 웃었다. 마후유가 잘 아는 웃음이었다. 카나데는 옆에 둔 오선지를 집어들고 음표들을 적어 내려갔다. 마후유는 오선지 위에서 춤추는 카나데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색색의 빛깔이 가슴 안에서 터지는 것 같이 따끔했다. 조금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마후유는 카나데에게 오선지를 건네받아 음표를 하나씩 옮겨 적어 보았다. 가만히 흥얼거리다 그 밑에 가사를 써 보기도 했다.

”신곡 준비하는 거야?“

”그, 그건 아냐.”

마후유한테 들려주려고 만들었거든. 카나데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아직 완성도 못 했어. 또 만나게 될 때까지 완성시켜 놓을게. 마후유가 완성시켜 줘. 지금처럼.

또 만나게 된다면. 그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또 만나게 될 때까지?“

”…응, 또 만나게 될 때까지.”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카나데의 목소리에서는 엷은 확신이 느껴졌다. 마후유는 그 미묘한 기색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가슴이 따끔했다. 아까와는 다른, 차갑고 빠르게 지나가는 감각이었다. 꿈이라면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확신해? 내가 눈을 뜨면 그대로 사라질 거면서 왜 그렇게 좋을 대로 말해?

이 카나데는 실재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만든 허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카나데의 말은 마후유를 찔렀다. 내가 꼭 구할게. 그렇게 고집을 부려대며 바보같은 말을 하는 현실의 카나데처럼. 희망을 준다. 반짝거리며 터지는 색들을 보여 준다. 그리고는 이미 포기할 준비를 마친 미후유에게 손을 내민다. 다음을 입에 담는다. 말이 목 안쪽에서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마후유는 카나데를 붙잡고 화를 내려다, 어차피 이곳은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후유, 지금 뭐가 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카나데와 자신 단 둘뿐인 세계. 어차피 깨면 잊어버릴 세계. 그 카나데조차 자신의 망상이니 이곳은 오롯이 혼자만의 공간이다.

마후유는 카나데를 끌어안는다. 목에 얼굴을 묻는다.

“…어떻게 확신해?”

웅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등을 단단히 끌어안는 작은 손이 느껴졌다. 시원했다.

”어차피 나는 계속 이곳에 있을 거니까. 나는 사라지지 않아. 여기서 계속 마후유를 기다릴 거야.“

부글거리던 말들이 천천히 식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영원히 기다리겠다니. 바보같은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다. 카나데가 기다린다고 꼭 마후유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후유는 아마 매일 밤 카나데를 기다리다, 결국은 악몽이나 꾸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믿고 싶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전에도 그랬듯 바보처럼 믿어 버리고 싶었다.

”곡, 기다릴게.“

서서히 아득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마후유는 말했다. 카나데의 대답을 듣지 못한 채, 마후유는 깨어난다.

단정한 면 파자마를 입은 마후유는 방 침대에서 눈을 뜬다. 회색빛 커튼이 천천히 나부낀다. 아무 의미 없이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시원하다. 머릿속에 분홍색, 흰색, 하늘색, 다채로운 파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좋은 꿈을 꿨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용은 떠오르지 않지만, 속이 울렁거리지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2. 

“곡, 기다릴게.”

마후유는 늘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말하고는 녹아 없어진다. 마후유가 원래 있어야 할 세계로 돌아간다. 마후유가 사라진 시간 동안, 카나데의 곡은 휘발된다. 이곳의 모든 곡은 마후유를 위해 만들어진다. 곡의 완성도, 멜로디의 아름다움. 그런 것들은 이곳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직 구원만이 곡을 완성시킨다. 

그렇기에 주인을 잃은 곡은 사라진다. 처음 몇 번은 절망했었다. 다음 몇 번은 다시 기억해내려 했다. 하지만 이제 카나데는 방황하지 않는다. 곡이 그 의도를 다해 마후유를 구원할 수 있도록, 사라지지 않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써나간다. 몇 번이고 사라져도 계속 만들어 나간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건 알고 있어.‘

다음에 만난다면. 마후유는 그 말에 언제나 동요한다. 카나데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세 번째 꿈에서는 바보같다는 말을 했었다. 여섯 번째 꿈에서는 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꿈에서는 카나데를 껴안고, 힘겨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몇 번째 꿈이든 모두 고통스러운 반응이었다.

꿈 속의 마후유는 평소보다 조금 더 솔직했다. 현실에서는 꺼낼 수 없는 말들을 마구 꺼냈다. 그렇기에 그 반응은 현실보다 더더욱 아팠다.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만큼. 그 고통마저도 자신의 업보인 걸 알았기에 카나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붙잡지조차 않았다. 기다릴게. 그 말을 하고서 자신의 세계로 녹아 사라지는 마후유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의미 없는 약속이라는 것도 알아.’

카나데는 자신이 꿈 속의 존재라는 것을 안다. 진짜 카나데는 마후유의 세상에 존재한다. 마후유를 구원하는 것 또한 아마 그 카나데의 몫일 것이다. 그럼에도 카나데는 계속 곡을 만들었다. 

카나데는 자신이 나타나던 때를 기억한다. 모르는 공간에 지지직거리며 울려퍼지는 소녀의 목소리.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에, 세카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공간에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다 몇 단어만 겨우 알아들었다.

카나데… 사라지, 고 싶… 영, 원히, 곡을…

카나데와 같이 있고 싶어. 사라지고 싶지 않아. 영원히 곡을 만들고 싶어. 알아들은 몇 개의 단어로 카나데가 재구성한 문장이었다. 그 순간, 카나데는 만들어질 때만큼이나 갑자기 깨달았다. 이곳은 마후유의 꿈 속이다. 제대로 된 마음조차 되지 못한 마후유의 소망. 현실을 살아가는 순간순간, 잠시 품게 되고 마는 마음들. 세카이가 되지 못한 채 잊혀져 가는 세계.

아마 마후유의 소망 속 카나데는 현실의 카나데일 것이다. 마후유가 사라지고 싶지 않다면,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그곳의 카나데와 함께 곡을 만들고 싶다면 스스로 일어서야 했다. 이곳의 카나데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처음 만난 마후유가 너무 지쳐 보여서. 

마후유가 사라져버리지 않을 만큼. 깨어난 순간, 함께 보낸 몇 시간의 기억도 작별도 모두 잊고 좋은 꿈을 꾸었다고만 생각할 만큼. 이 세계에 미련을 갖지도, 이 노래를 다시 떠올리지도 않을 만큼. 딱 그만큼의 희망과 따뜻함만을 담아 곡을 쓰기로 했다. 카나데는 구원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허상 속에서조차 계속 만들어내야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결코 구원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이곳의 카나데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카나데는 계속 곡을 썼다. 그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3. 

‘사라지고 싶어.’

마후유는 여전히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노래에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은 마후유의 삶에 비해 너무나도 미약했다. 한 가지 변화한 것은 소실의 형태였다. 마후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떠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마후유에게도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함께 사라지고 싶어.’

감정도 감각도 알지 못하는 마후유에게 현실이란 상당히 피상적인 무언가였다. 마후유는 이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지 못했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버리고 갈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음악. 자신이 써낸 가사. 나이트코드의 멤버들. 그것들이 없는 현실은 꿈보다도 못했다. 얼마든지 사라져도 상관 없는 곳이었다.

물론 이 생각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마후유는 이 삶을 받아들였다. 주어진 삶을 감내하며 자신을 찾아 보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아주 잠깐, 이것이 자신의 진정한 생각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잠깐은 바라고 만다.

‘영원히 곡을 만들면서, 함께…’

평소보다도 그런 생각이 오래 머무른 날에는 꿈을 꾼다. 언제부터 그래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꿈의 내용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다만 좋은 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깨고 나면 녹아내리는 색색의 풍경과 기분 좋은 노랫소리가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그 소망을 한번 더 곱씹게 되었다. 사라지고 싶어. 소중한 것들만 있는 세계로 녹아내리고 싶어.

요즘은 평소보다도 꿈을 자주 꾸게 된 것 같았다. 꿈을 꾸었다는 사실도, 꿈의 내용도 더 오래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때마다 마후유는 알지 못하는 세계를 그리워했다.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곳으로 사라지고 싶어.‘

마후유는 그날도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 헤드셋 안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유키, 들려?”

카나데의 목소리다. 마후유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다시 손을 마우스에 가져다 댔다. 신곡 준비가 한창이었고, 마후유는 편곡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집중을 하기가 어려웠다. 자꾸 정신이 흐트러졌다.

“유키 요새 자꾸 멍때린다니까~ 많이 피곤해?”

미즈키의 말처럼 피곤한 걸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잘 자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꾸 머릿속에 모르는 멜로디가 들리는 이유는. 정신을 차려보면 신곡을 자꾸 그 모르는 멜로디처럼 편곡하고 있는 자신은.

“피곤하진 않아. 그냥 자꾸 다른 생각이 들어서.“

“유키가? 별일이네. 꿈이라도 꿨어?”

그래, 꿈. 그 꿈 때문일 터였다. 녹아 없어지고 싶은 세계. 영원히 머물고 싶은 멜로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꿈 속 세계에 노래가 존재한다면 그런 노래일 것 같았다.

편곡은 평상시보다 느리게 끝났다. 메일로 K에게 파일을 보내자 금방 답신이 왔다. 이번 곡 피드백은 세카이에서 하고 싶어. 괜찮을까? 마후유는 흘긋 시계를 확인했다. 어머니가 방에 들어올 것 같진 않았다. Untitled를 틀자 익숙한 회색 세계가 눈 앞에 펼쳐졌다.

“먼저 와 있었네, 미안.”

곧 카나데가 도착했다. 둘은 잿빛 바닥에 앉아 박자와 화성과 화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드백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세카이로 불렀나 싶었다. 하지만 카나데는 수정 사항을 다 이야기하고도 일어서지 않았다. 할 말이 있다는 듯 움찔거리며 마후유를 바라봤다. 

“더 하고 싶은 말 있어?”

“그게, 음…”

마후유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편곡을 했어?

어떤 생각이든 그건 소중한 마후유의 감정이니까, 마후유는 원하는 대로 편곡하면 돼. 그렇지만… 이번 곡은 평소와 달라서. 물어보고 싶었어.

”잘 모르겠어. 요새 꿈을 자주 꿔. 일어났을 때 가슴이 답답하진 않으니까 좋은 꿈일 거라고 생각해. 그러고 나면 멜로디가 아주 흐릿하게 떠올라. 편곡할 때 자꾸 그 생각이 들어서, 영향을 받는 것 같아.“

”그렇구나.“

카나데는 또 잠시 머뭇거리다, 질문을 이어 갔다.

”그 꿈 내용, 기억 나?“

”아니. 좋은 꿈이었다는 것만.“

”…좋은 꿈.“

카나데의 표정이 어딘가 어두워졌다. 카나데, 문제 있어? 다시 수정할까? 그렇게 묻자 금새 카나데의 표정이 풀렸다. 아냐, 괜찮아. 편곡 고마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후유가 알던 말간 웃음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 어색한 미소가 신경쓰였다. 더 물어보려던 찰나, 카나데가 Untitled를 끄고 사라졌다. 역시 이상했다. 뭐가 문제였던 거지.

노래를 끄며 마후유는 카나데의 반응을 곱씹었다. 꿈. 잠에서 깨면 떠오르는, 어쩐지 카나데의 것 같은 멜로디. 눈치채지 못한 새 한 곳으로 흘러가 버리고 마는 편곡과 방금 전 세카이에서의 만남.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채울 뿐이었다.

나는 무슨 곡을 원했던 걸까.

그리고 카나데는, 나에게서 어떤 곡을 바라는 걸까.

#4.

카나데는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벌써 30분은 족히 들었을 노래가 흘러나왔다. 평소의 마후유답지 않은 편곡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하지만 마냥 포근하지만은 않았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것들 특유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는 듯이.

카나데는 노래를 끄고 헤드셋을 내렸다. 몇 번을 들어봐도 결론은 같다. 마후유는 사라지고 싶어한다. 멜로디는 따스했지만 알 수 있었다. 마치 OWN이 마후유라는 것을 알아챘을 때처럼,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마후유가 사라진다면.‘

마후유의 실종은 니고의 전원에게 좋지 못한 사건일 것이다. 그렇지만 카나데에게는 특히 의미가 컸다. 두 사람의 삶은 엉켜 있다. 마후유는 카나데의 곡을 기다리며 삶을 견뎌낸다. 카나데는 마후유를 위한 곡을 쓰며 삶을 견뎌낸다. 이 위태로운 관계에서 한 명만이 사라진다면.

카나데는 책상을 꽉 잡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자신의 잘못으로 가까운 사람을 잃는 건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았나 보다.

아마 카나데는 그 이후로도 살아갈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실패한 카나데에게는 미후유와 같은 곳으로 갈 자격이 없다. 자신은 마후유의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 마후유가 없는 삶을 견뎌내야 한다.

카나데는 책상을 잡은 손을 놓았다. 힘을 너무 주었는지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카나데는 마후유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노래로 수많은 사람을 구원해 왔지만, 그중에서도 마후유는 특별했다. 카나데는 마후유의 고통을 알았고 동시에 옷깃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를 알았다. 마후유의 가사를 알았고 동시에 자신과 대화할 때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알았다. 마후유는 카나데의 삶에 지나치게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하나가 사라지면 그대로 붕괴할 수 밖에 없게끔.

카나데는 잠시 내려놓았던 헤드셋을 다시 썼다. 굳은 표정으로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전하고 싶은 말이라면 곡으로 해야 한다. 고통스러울지라도 함께 살아가자고.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있자고. 어느 하나 행복을 장담할 수 없는 설득력 없는 말들을 노래로 만들어야 했다.

‘마후유가 사라지는 건 싫어.’

카나데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컴퓨터에 음표 하나하나를 찍으며, 카나데는 자신이 이 짓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을 떠올렸다. 마후유가 살아가기로 결정한 삶의 무게. 자신은 그 삶에 책임이 있었다. 죽음은 도피였기에 카나데는 아주 많은 것을 짊어지고 살았다. 이 곡 또한 또 하나의 짐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결론은 하나였다. 이번에도 곡을 써야 했다.

설득력 없는 노래는 금방 써지지 않았다. 모니터를 너무 오래 바라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곡이 막힐 때마다 카나데는 마후유의 곡을 들었다. 곡 너머의 공허감에 속이 울렁거려 노래를 꺼 버리고 싶을 때마다 악보에 한 마디를 더 적어넣을 수 있었다.

“…됐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마후유를 위한 곡이 완성되었다. 카나데는 메일을 보내기 전 심호흡을 했다. 마후유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두려웠다. 내가 있는 세상에서 함께 살아나가자. 설득이라기보단 호소에 가까운 노래였다. 카나데는 숨을 한 번 더 들이쉬고 전송 버튼을 클릭했다. 카나데가 아는 마후유라면 이 곡을 제대로 들어줄 거라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

#5.

‘보고 싶어.’

낮도 밤도 없이 25시에 고정된 이 이상한 세계에서 카나데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나름의 것들은 갖춰져 있어 잠자고 먹고 돌아다닐 수는 있었지만, 카나데는 대부분의 시간을 작곡에 썼다. 현실의 자신과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아 카나데는 쓰게 웃었다.

익숙했다. 다만 외로웠다. 마후유는 가끔씩만 찾아왔고,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과 함께 녹아 없어졌다. 이곳의 카나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마후유가 조금씩 자주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 자신을 조금씩 더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카나데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좋은 걸까?’

기다림은 길어, 카나데는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이 질문도 그중 하나였다. 이 세계는 마후유의 꿈속. 현실의 카나데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 그렇다면 마후유가 자꾸 꿈속에 찾아오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인 걸까? 가끔씩 그런 의문이 치고 올라왔다.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말자. 카나데는 다시 고개를 오선지에 파묻었다. 마후유를 위한 곡을 만들어야 했다. 이곳에 찾아오는 마후유는 점점 덜 지쳐 보였다. 점점 카나데에게 많은 말을 해 주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모든 게 잘 되고 있어. 카나데는 그렇게 되뇌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곡을 쓰며 며칠이 지났다. 곡에 어느 정도 얼개가 잡혔지만 아직 완성하지는 못한 어느 날, 언제나처럼 마후유가 찾아왔다. 이제 기억이 꽤 남아 있는 마후유는 전처럼 놀란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마후유는 그렇게 말하며 카나데의 손을 잡았다. 둘은 언제나처럼 세계를 걸었다. 분홍빛 구름과 별이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말 없이 바라봤다. 나란히 앉아 노래를 만들었다. 완성되지 못할 노래라는 것을 둘 모두 알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어때?”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해.”

마후유는 웃지는 않았지만, 전처럼 표정이 굳어 있지도 않았다. 카나데는 이제 마후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목소리 위에 얹혀지는 마후유의 노래를 들으며 자신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으므로. 그래서 카나데는 맑게 웃었다.

같이 곡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마후유가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녹아 흐르기 시작하는 마후유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곡 기다릴게. 카나데는 이제 어느새 둘 만의 작별 인사가 된 그 말을 기다렸다. 언제나처럼 마후유를 가볍게 껴안고, 다음에도 와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싶었다.

”가고 싶지 않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여기서 카나데와 있고 싶어.“

그 약속이 일그러지면서부터였다.

맞닿은 몸을 타고 무언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마후유는 놀랍게도 울고 있었다. 카나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마후유를 토닥이지 못하는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눈물과 마후유가 섞여 카나데의 어깨가 천천히 젖어 갔다.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마후유의 소망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곡을 만드는 것, 현실에 뿌리내리는 것.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이곳의 카나데는 그저 꿈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그걸 위해 마후유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영원토록 외롭다고 해도 카나데는 괜찮았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입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말을 꺼내지도 토닥거리지도 못한 채 카나데는 멍청하게 앉아만 있었다.

“…마후유,“

”깨어나서 노래를 만들 때도 카나데의 노래가 자꾸 생각나. 따뜻해. 가슴이 따끔거려.”

겨우 입을 열어 꺼낸 작은 목소리는 울먹이는 마후유의 말에 그대로 먹혀 버렸다.

“찾아 주겠다고 했잖아. 곡을 완성하겠다고 했잖아.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마후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카나데는 고개를 들어 마후유를 바라봤다. 카나데의 품 안에서 마후유가 녹아내렸다. 카나데의 팔 위로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마후유의 흔적이 점점 작아지며 눈물처럼 바닥을 두드렸다. 결국 마후유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지, 카나데는 단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정쩡하게 내민 팔에서 마후유가 서서히 증발했다.

모든 흔적이 사라지고, 카나데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카나데는 마후유가 자신의 세계로 오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마후유는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마후유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들에게서 멀어져 평생 자신을 찾아가며 곡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후유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자신을 찾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내 곡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것만으로도 평생을 기다릴 수 있는데. 카나데는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별로 거창한 소망이 아닌 듯 한데도 도저히 닿을 수가 없어,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카나데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혼자 있을 때면 종종 이렇게 머리가 아팠다. 그럴 때마다 카나데는 제 노래를 따라 부르던 마후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점점 꿈 속을 많이 기억하게 된 마후유는 이제 노래를 조금씩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카나데는 웃었다. 자신의 노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게 행복했다. 거기에 자신의 의미를 얹어 주는 게 행복했다.

마음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라앉았다. 카나데는 숨을 길게 내쉬며 웅크린 몸을 풀었다. 마후유의 노래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고민해 보았다. 왠지 그 안에 해결책이 있을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음색과 따뜻한 분위기의 노래였다. 카나데의 노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한, 머무르는 듯한…

카나데는 불현듯 깨달았다. 마후유가 제 노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후유가 거부하지 않을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을. 이곳은 마후유의 꿈속이고 자신은 마후유의 망상이니까. 그렇다면 마후유의 소망은,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라.

카나데와 함께 사라지고 싶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마후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만든 노래는 마후유의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꿈속에 남고 싶게 만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카나데는 마후유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노래를 만들었으니까. 마후유가 행복해지기를 바랐으니까. 자신이 구원이라고 생각한 이것은 구원이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도 나쁜 것이었다.

앙다문 입 사이로 울음이 새었다. 눈물이 흘러 이미 구겨진 악보 위로 뚝뚝 떨어졌다. 매번 홀로 남는 것도 견뎠다. 매번 같은 곡을 쓰는 것도, 완성하지 못하는 것도, 따라잡지 못하는 것도 전부 견뎠다. 그런데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마후유는 오히려 괴로워졌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에도 저질렀던 과오였다. 죄책감이 카나데의 다리 위를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정신 차리자.‘

눈 밑 거칠한 살갗이 눈물에 젖어 따가웠다. 자신은 실존하지 않는데 통증만이 실재했다. 오히려 그 점이 도움이 되었다. 카나데는 다시 오선지를 집어 들었다. 설득력 없는 곡을 써야 했다. 지금까지 해준 말과 반대로, 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네가 다시 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해야 했다. 곡을 들은 마후유는 무슨 반응을 할까. 울까, 화를 낼까, 아니면 그냥 무시해 버릴까. 어떤 것이든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카나데는 마후유가 화를 내기를 바랐다. 자신에게 실망하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마후유는 현실에 남아 그곳에서 진짜 카나데와 곡을 만들 것이고, 이곳의 카나데는 사라질 것이다.

그것만이 가짜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라면, 카나데는 처음으로 비겁하게 사라져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나데는 마후유에게 줄 곡을 만들었다. 전과 같은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마후유가 알지 못하는 곡을 완성시켜야 했다. 주인에게 기억되지 못한 꿈은 사라진다. 마후유가 원하지 않는 카나데의 곡은 쓰는 순간 휘발되었다. 오선지에서도, 카나데의 기억에서도. 그 절대적인 압력에 저항하며 카나데는 곡을 써내려갔다. 손목이 아팠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곡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겨진 오선지가 쌓여 갔다. 카나데는 종이 뒷면에, 바닥에, 제 손등에 보이는 대로 음표를 적었다. 곡만으로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 남는 종이를 아무거나 쥐고 엉망진창인 글씨체로 편지까지 썼다. 마지막 문장까지 쓰자 눈앞이 흐릿했다. 한 손에 악보를, 다른 손에는 편지 한 장을 들고 카나데는 쓰러졌다.

#6.

‘다시 그 꿈을 꾸고 싶어.’

이번에야말로 카나데에게 제대로 말할 것이다. 같이 사라지겠다고. 자신을 괴롭게 할 뿐인 현실에서 멀어져 평생 함께 곡을 만들겠다고. 어딘가 멍하다는 학교 친구들의 걱정도, 무슨 일 있냐는 나이트코드 멤버들의 걱정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제 시간에 잠드는 것만이 중요했다.

며칠 후, 마후유는 드디어 원하던 꿈을 꾸었다. 익숙한 분홍빛 세계에서 깨어나자마자, 마후유는 카나데를 찾아 달렸다. 카나데, 어디 있어? 나 이번에는 전부 기억해. 너만 허락해 주면 여기에 계속 있을 수 있어. 평생 꿈 속에서 살 수 있어. 소리를 질러도 카나데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후유는 계속 달리다가, 바닥에 가만히 쓰러져 있는 카나데를 발견하고 멈췄다. 카나데의 몸을 일으켜 제 어깨에 기댔다. 작고 차가운 손을 조심스레 주물렀다. 그 상태로 한참을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카나데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악보와 편지를 마후유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나, 마후유의 부탁은 들어 줄 수 없을 것 같아.”

“왜 그런,“

”지난번에 만난 이후로 생각을 많이 해 봤어. 마후유가 여기로 온다면 마후유도 나도 상처받을 일은 없겠지. 평생 헤어질 일도 없을 거고. 하지만… 하지만 마후유는 마후유의 세계에서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해. 상처를 받더라도.”

“싫어.”

“이런 말밖에 못 해서 미안.“

”여기에 카나데랑 있고 싶어. 카나데도 사실은 그게 편하잖아. 계속 만들어야 하니까. 그 말 같지도 않은 저주 때문에 내가 필요하니까!“

마후유는 소리를 지르며 씩씩거렸다. 카나데를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내 꿈이라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으면서! 왜 멋대로 그렇게 말해?”

”…미안해.”

”미안하면 여기에 있게 해 줘.“

마후유는 화를 냈다. 죽은 눈으로, 가라앉은 표정으로 어린애처럼 마구 떼를 써 댔다. 싫어. 네 멋대로 말하지 마. 여기에 있게 해 줘.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카나데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나는 마후유가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해서 생긴 거야. 그러니까 내가 사라져야 해. 마후유는 바깥의 나랑 계속 곡을 만들어. 힘들겠지만… 찾고 싶다고 했잖아. 나는 가짜야.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카나데는 몸을 돌려 마후유를 꼭 껴안았다.

“정말 미안해. 그래도 곡, 꼭 들어 줘.”

“필요 없어.”

마후유는 카나데를 노려보았다. 씩씩대며 카나데의 깡마른 어깨를 세게 쥐었다. 손에 들린 편지와 악보가 구겨졌다. 카나데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마후유의 손에서 점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마후유의 손이 어깨에서 팔뚝으로, 등으로, 천천히 내려가며 카나데를 끌어안았다. 마후유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울먹이며 아주 작게,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만 뱉었다.

자신이 천천히 사라지고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카나데도 녹아내리고 있었다. 눈물과 카나데와 마후유가 섞여 바닥이 엉망이었다. 이 분홍빛 세계도, 언제 존재했냐는 듯 녹아내리고 있었다.

별이 가득한 하늘이 일렁였다. 쏟아져 내리는 별들을 두 눈에 가득 담으며, 마후유는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떼 마지막 억지를 부렸다.

“꿈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줘.”

“…응.”

“다시는 못 오더라도 평생 잊어버리지 않게 해줘.”

“응.”

“가지 마…”

두 사람은 껴안은 채 세계와 함께 녹아내렸다. 두 사람의 흔적이 마구 섞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눈물처럼, 비처럼, 피처럼. 잘 가. 손에 카나데가 쥐여 준 종이들만이 남아 있을 때쯤, 마후유는 눈을 떴다.

#7.

마후유는 침대에서 깨어났다. 눈앞으로 보이는 풍경에 실패를 실감할 수 있었다. 쏟아지는 별도 분홍빛 구름도 없는 단조로운 세계. 마후유가 사는 세계. 주먹을 꽉 쥐자 너덜너덜해진 종이 뭉치가 느껴졌다. 마후유는 조심히 손을 펴 보았다. 세계를 가로질러 온 곡이 있었다. 정말 그 세계가 존재했다는 듯, 약간 분홍빛이 돌았다. 마후유는 그것들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시간은 아직 새벽이었다. 마후유는 조용히 컴퓨터를 켰다. 구겨진 음표 하나하나를 컴퓨터에 적어 넣고 헤드셋을 꼈다. 딸깍, 소리와 함께 곡이 흘러나왔다.

곡은 엉성했다. 급하게 만든 티가 났다. 중간중간이 비어 있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 곡은 여전히 카나데다웠다. 너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잔인할 만큼 따뜻한 곡이었다. 아직도 카나데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노래를 계속 듣게 될 만큼.

‘결국은 다 자기 멋대로야.’

제멋대로 세카이에 들어와서 바보 같은 말을 한다. 수백 번 기각당한 희망을 다시 한번 믿게 만든다. 여전히 사라지고 싶은데, 이제는 꿈속에까지 나타나 너를 위한 거라며 곡을 만들어 준다. 다시 만나자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한다. 그리고는 정말로 다시 나타나 버린다. 다시 나타나 마후유에게 곡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마후유가 꿈속으로 끌어당겨 놓고는 다시 제멋대로 현실로 떠밀어 버린다.

‘나빠…’

마후유를 구하겠다는 그 말로 희망도 절망도 제멋대로 주고 또 뺏어간다. 가슴이 계속 아프게 따끔거렸다. 꿈속에서처럼 간질거리지도, 두근거리지도 않았다. 마후유는 머릿속으로 마음껏 카나데 탓을 했다. 네가 나쁜 거라고.

계속해서 노래를 듣다 보니 메일 아이콘이 깜빡거렸다. 메일함을 열어보니 그동안 확인해보지 않은 연락이 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나데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컴퓨터를 자주 켜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광고, 안내문, 쓸데없는 메일들 사이로 익숙한 주소가 보였다. K. 마후유는 메일을 지워 버릴지 잠시 고민했다. 마음을 다잡고 메일을 클릭하자, 곡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마후유, 꼭 들어 줘. 이쪽이든 저쪽이든 지독하게 카나데다워 진절머리가 났다.

헤드셋을 통해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노래였다. 순간 신곡 데모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싫을 정도로 따뜻한 것만은 닮아 있었다. 마후유는 눈을 감았다. 좋은 노래였고 동시에 당장 컴퓨터를 꺼 버리고 싶었다.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노래의 느낌만이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아까의 노래와 멜로디 진행이 어딘가 유사했다.

두 카나데는, 마후유가 이곳에서 남기를 바라며, 같은 노래를 만들었다.

‘정말 나빠…‘

속이 울렁거렸다.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났다. 순 제멋대로다. 매번 휘둘리고 들어주는 척 하면서 결국은 카나데가 바라는 대로 되어 있다. 역시 카나데가 나쁜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노래를 멈출 수가 없었다.

노래를 세 번은 더 듣고서야 헤드셋을 뺄 수가 있었다.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져 몸이 뻐근했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 위에 나동그라진 카나데의 편지가 보였다. 마후유는 편지를 집어 들고는 잠시 고민했다. 아직은 편지를 읽을 자신이 없었다. 마후유는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후유는 편지를 서랍장 한 구석에 밀어넣었다. 언젠가, 마후유가 카나데의 결정을 받아들였을 때에, 울렁거리지 않고 이 노래를 다시 들어 볼 수 있을 때, 꼭 그 편지를 읽어 볼 것이다. 마후유는 그렇게 다짐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카나데.‘

’보내 준 노래 들었어.‘

마후유는 나이트코드를 켜 메시지를 남겼다. 잠시 망설이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25시에 보자. 마후유는 도망치듯 컴퓨터를 껐다.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봤다.

녹아내린 세계에 두고 온 행복을 찾아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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