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새파란

카나마후


“요이사키 유키입니다.“

마후유는 매일 거짓말을 했다. 독서 모임을 하러 간다고 말하고는 다른 버스를 탔다. 아무 노래도 흐르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계속 걸었다. 무슨 색인지 알지도 못하는 하늘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병원 데스크에는 가짜 이름을 댔다. 예비 도쿄대 의대생 아사히나. 환자 카나데의 사촌 언니 요이사키 유키. 카나데를 기다리는 마후유.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마후유는 수많은 거짓말을 하며 이 세 삶을 겨우 살아냈다. 모두 자신의 것인 이름들을 손에 쥐고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카나데.“

마후유는 나지막히, 잠에서 깨지 않을 정도로 작게 카나데를 불렀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부름이었다. 카나데는 죽은 것처럼 잠을 잤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누운 카나데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도 허약하던 몸이 이제는 정말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여리고 창백했다. 귀를 아주 가까이 대어야 들리는 얕은 숨소리만이 카나데가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오늘도 하늘 사진을 찍었어.“

마후유는 카나데가 쉬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카나데는 너무 오랫동안 쉬지 못하지 않았던가. 마후유는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곡 작업을 하던 카나데를 떠올렸다. 가볍고 청량하면서도 어딘가 부드러운 멜로디의 곡이었다. 감정을 모르는 마후유가 듣기에도 정말 좋은 곡이었지만, 겨울에 어울리는 노래는 아니었다. 마후유가 의문을 표하자 카나데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곡에는 꼭 마후유의 가사를 붙이고 싶었어. 사실 몇 달 전에 시작한 곡이었는데, 그때는 입시 준비하느라 바빴잖아. 그래서 마후유는 가사를 썼다. 지칠 대로 지친 마음으로, 너무 오랫동안 건반을 잡지 못한 손으로 가사를 적었다. 잘 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몇 달간 했던 것들 중 가장 마후유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모르겠어.”

마후유는 하늘을 사랑하고 만 새의 이야기를 적었다. 지금은 새장 안에 살고 있지만, 틈새로 불어오는 봄바람에 자꾸 깃털을 비추어 보고 마는 새. 그렇지만 마후유는 끝내 곡의 데모에 그 가사를 붙이지 못했다. 

”계속 찾다 보면 언젠가는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 없이 혼자서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리 해도 안 돼.“

마후유는 떨리는 손으로 카나데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자는 사람한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약속하지 않았던가. 가사를 쓰는 동안 마후유의 이야기를 해 주기로.

”데모는… 아직까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어. 들으려고 했는데, 듣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져 와서… 숨을 쉬기가 힘들어. 이상하지. 좋은 노래였을 텐데.“

오직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후유는 매일 병원에 왔다. 카나데가 깨어 있든 깨어 있지 못하든,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완성하지 못한 가사 이야기를 했다. 언젠가는 이 생활도 끝날 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약간의 시간을 더 보내고, 대학에 가고 나면 더 이상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마후유는 매일 같은 작별 인사를 했다.

”내일 또 올게.“

색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것은 올해 5월부터였다. 아사히나 씨, 꽃 정말 예쁘지. 그 말을 듣고 올려다 본 하늘에는 잿빛의 꽃잎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색의 상실을 숨기는 것은 맛의 상실을 숨기는 것보다 조금 더 어려워서, 마후유는 입시 때문에 피곤해서 눈에 약간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해야 했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그 허술한 변명을 믿었다. 마후유는 늘 열심히 하니까. 그렇게 피곤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구나, 대단해. 그렇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않았으면 한다며 엄마는 스튜를 내밀었다. 눈에 좋다는 재료들로 만든 회색빛 스튜. 마후유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스튜를 깨끗이 비우며 색이 없는 세상도 전과 그다지 다른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 색이 안 보인다고?

네 명 중 셋이 진급하며 유닛 활동은 자연스레 뜸해졌다. 에나는 본격적으로 미술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미즈키도 예전보다는 학교에 자주 나갔다. 마후유는 말 할 것도 없이 바빴다. 평상시에는 K 혼자 곡을 쓰다가, 시험이 끝나고 3주쯤 후에 25시의 이름으로 짧은 곡 하나가 올라가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연락은 계속 유지하고 있어, 마후유는 자신의 상황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 하… 일단 확인해 보자.

에나는 자신이 그린 일러스트 몇 장을 전송했다. 마후유의 눈에는 다 비슷한 색으로 보였다. 에나가 색감을 다채롭게 쓰는 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느낀 대로 답을 보내자 물음표 여러 개가 돌아왔다.

- 음식 맛이 안 느껴지는 거랑 비슷한 현상인 것 같아. 어차피 평소에도 색깔에 대해 신경쓰지 않으니 크게 불편한 건 아니지만.

아니, 아니지!! 두 명의 격한 반대가 돌아왔다. 일러스트와 MV 담당다운 반응이었다. 옷, 액세서리, 그림, 온갖 알록달록한 것들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역설하는 둘 사이에서 카나데가 채팅을 보냈다.

- 미각이 없어지는 거랑 비슷하다면… 역시 진짜 마후유를 찾아내야 돌아오는 걸까.

그래, 언제나 돌고 돌아 이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 시끌벅적하던 채팅방의 분위기가 조금 침울해졌다.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마후유의 감각 이상이 무슨 뜻인지.

- 꼭 그렇진 않을지도 몰라

미즈키가 조심스레 채팅을 보냈다.

- 뭐랄까… 내 생각일 뿐이지만

- 전에 해본 적 없는 강렬한 경험을 해 보면 감각이나 감정도 어느 정도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먼저 감각을 찾아야 진짜 마후유에 가까워질지도 몰라

감정은 신체의 반응이기도 하니까. 오랜만에 일리 있어 보이는 말을 한다며 에나도 동의하는 채팅을 보냈다. 그래서 마후유는 그 말대로 해 보았다. 에나가 축제에서 찍어 온 화려한 불꽃놀이 영상도 보고, 미즈키가 추천한 공연도 보러 가 보고, 카나데가 작곡한 완전히 새로운 장르의 시끄러운 노래도 들어 보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익숙한 무채색이었다.

그렇게 색을 되찾지 못한 채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입시 일정이 바빠지며 25시 멤버들과의 연락이 줄었다. 우등생 아사히나 마후유로 살아야 하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문제집을 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언제나 잿빛이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마후유는 그 생활에 점차 적응해 나갔다. 색도 맛도 없는 세상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 마후유의 원래 삶과 그렇게까지 다른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한 번 알아버린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가끔씩 가슴에 치미는 답답함. 하늘을 바라봐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때의 공허함. 그러한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마후유를 괴롭혔다. 아주 조금 열린 교실 창문 쪽으로 슬쩍 손을 뻗어 보게 만들었다.

마후유는 결국 도쿄대 의대에 합격했다. 사람이 살면서 해볼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경험 중 하나일 터였다. 합격증, 눈물 맺힌 가족들의 눈과 따뜻한 포옹, 어머니가 사온 케이크와 사랑한다는 말. 평생 받을 축하는 다 받은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마후유에게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다른 사람 일 같았다. 꽃다발도 케이크도 편지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랑해, 우리 딸.”

마후유는 가볍게 웃으며 케이크를 입 안에 떠 넣었다. 잿빛 커틀러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후유는 문득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따뜻한 분위기의 정돈된 식탁,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고급 케이크와 네가 내 딸이라 행복하다는 말. 그것은 마후유가 받아 온 최상의 사랑이었다. 마후유는 그것을 잘 알았다. 그 사랑이 싫은 건 아니었다. 문득 든 그 생각은 이상한 충동일 뿐이라는 것을, 합리적이지 못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랑, 사랑, 사랑. 자신이 평생 받아 온 것. 평생 필요로 해 온 것.

“저도 사랑해요.”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합격증을 받고 나니 남는 게 시간이었다. 푹 쉬고 가끔은 놀기도 하라는 어머니의 말이 낯설었다. 용기를 내어 음악 이야기를 꺼내보려 하다 곧 관두었다. 반응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마후유는 거짓말을 시작했다. 독서 모임을 한다는 핑계로 카나데의 집에 찾아가 곡을 만들었다. 가사를 쓰기 위해 읽은 책이 열 권은 될 테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카나데가 자신을 위해 만든 곡. 마후유의 가사로 비로소 완성될 노래. 거기에 마후유는 아주 좋은 가사를 붙이고 싶었다. 자신이 아는 것들을 넘어 아직 잘 모르는 감정까지도 담아내고 싶었다.

“마후유의 이야기를 해 줘.”

오랜만에 쓰는 가사는 자주 막히고 틀어졌다. 이 느낌이 아닌데. 고민하는 마후유에게 카나데는 그렇게 말했다. 마후유를 생각하면서 쓴 곡이니까, 완벽하지 않더라도 마후유가 원하는 대로 해 줘. 그래서 마후유는 그렇게 했다. 언제나 잿빛인 하늘을 보며 자신이 하는 생각을, 가끔씩 나타나는 비합리적인 충동을,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자유라는 단어를 이야기했다. 카나데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곡의 음조를 조금씩 수정해 나갔다. 어두운 방 가운데서 카나데의 흰 머리카락만이 모니터 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

따뜻한 무언가가 가슴에 쭉 퍼지는 묘한 기분. 어딘가 손끝이 가벼워져 멋대로 움직여버릴 것 같은 느낌. 카나데의 방 안에서 마후유는 종종 그런 경험을 했다. 집중한 카나데의 얼굴, 카나데의 컴퓨터 안 ‘마후유‘ 폴더에 든 수많은 미완성 곡들과, 이따금씩 자신의 손 위에 얹어지는 작고 차가운 카나데의 손. 그런 것들을 자각할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직 알지 못하지만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느껴보고 싶었다. 이 사실을 말해 주자 카나데는 작게 웃었다.

“그럼 그것도 포함해서 가사를 써 줘.“

이건 마후유의 곡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는 카나데의 귀가 어쩐지 빨간 것 같기도 했다. 추운 걸까. 마후유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방의 난방을 조금 올리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카나데, 추워? 카나데는 고개를 저었지만 이제 보니 어딘가 긴장한 듯 굳은 어깨가 확실히 추워 보였다. 왜 알아채지 못했지. 카나데는 몸도 약한데. 그래서 마후유는 난방을 올리는 대신 컵라면 두 개를 끓였다. 조용한 방 안에 울려퍼지는 데모 곡을 들으며 두 사람은 컵라면을 먹었다. 따뜻했다. 계속 이대로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마후유는 생각했다.

“카나데, 나 왔어.“

그렇지만 모든 좋은 것들이 그렇듯 순간은 영원하지 못했다. 시간이 꽤 지나 이미 마후유가 요이사키 가의 비밀번호를 외웠을 무렵, 마후유는 언제나처럼 같은 시간에 카나데의 집 앞에 도착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마후유는 눈 앞의 광경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새어나오는 소리를 간신히 참았다.

의자 위에 축 늘어진 작은 몸을 푸른 모니터 빛이 감쌌다. 안색이 파리했고 차가운 손이 힘없이 떨렸다. 카나데, 괜찮아? 괜찮은 거야? 정제되지 않은 말이 마구 튀어나왔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의식은 없는 듯했다. 마후유는 카나데를 제대로 눕히고, 119를 부른 후 털썩 주저앉았다. 알지 못하는 감정이 온몸을 죄다 헤집어 놓았다. 욱, 하고 마후유는 헛구역질을 했다. 어지러웠다.

마후유에게는 수많은 재능이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하는 것 또한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마후유는 매일 병원에 갔다. 하늘 사진도 찍었다. 자신이 카나데의 뭐라도 되는 양 가짜 이름을 대고 의사의 설명을 들었다. 가사지도 계속 들고 다녔다. 고비는 넘겼지만 체력이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호전되기 전까지는 거의 잠만 잘 거에요. 그 말에 톡, 부러진 샤프심이 공책에 튀는 것을 모른 척 했다. 파편의 흔적이 노트를 까맣게 더럽히는 것을 모른 척 했다.

“카나데…”

그렇지만 모르는 척 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기에, 병실 안에서 마후유는 비로소 두려워했다. 손이 카나데의 흰 머리카락 위를, 다 채우지 못한 가사지 위를 불안하게 맴돌았다. 공포. 마후유가 잘 아는 몇 안되는 감정이었다. 마후유는 언제나 도망쳐 왔다. 사랑받지 못할까 봐, 실망하게 만들까 봐, 기껏 쌓아올린 것들이 전부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며 살았다. 마후유는 공포를 감추는 데 소질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언제쯤 깨어날 수 있어?”

시간이 없었다. 마후유는 한 달 후에 도쿄대로 간다. 이전처럼 병실에 자주 오지 못할 것이다. 카나데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가사 마지막 줄은 계속 비어 있는데, 약속대로 마후유의 이야기를 해 주지도 못할 것이다. 전에 카나데는 무섭지 않냐고 물었었다. 원하지도 않는 대학에서 계속 모범생 아사히나로 살아야 하는 것이 버겁지 않겠느냐고. 그때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그런 것보다는 카나데를 보지 못하는 게 더…

“보고 싶어…”

카나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얹었다. 이러고 있으면 언제나 따뜻한 기분이 들곤 했다. 체온이 더 높은 것도 손이 부드러운 것도 마후유 쪽이었지만 왠지 반대인 것만 같았다.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긴장한 마후유의 손이 찼고 따뜻한 병실에 누워 있던 카나데의 손이 부드러웠다. 그런데도 맞잡은 손은 전혀 따뜻해지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볼이 뜨거웠다. 새하얀 시트 위로 마후유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마 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후유는 몸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카나데가 조금 움직인 것 같다고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착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지긋지긋했다. 그런데도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는 자신이 있다. 울음 때문에 뭉개진 목소리로 정말로 깨어난 거냐고, 카나데가 맞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자신이 있다.

마후유는 계속 지켜봤다. 숨소리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손이 약간 더 움직인 것도 같았다. 마후유는 모든 게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을 무거운 무언가가 천천히 누르는 감각에 눈물마저도 천천히 멎었다. 그때, 아주 작은 목소리가 신음을 흘렸다.

“으, 으으…”

“…카나데?”

카나데가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는 걸 마후유가 막았다. 굳은 몸을 겨우 움직여 의료진 호출 벨을 누르고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마후유는 말을 꺼내려 했다.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는 수많은 문장 중 뭐라도 끄집어 내놓으려고 했다. 보고 싶었어. 정말 다행이야. 몸은 좀 괜찮아?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다. 뜨겁고도 시원한 무언가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주저앉지 않고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후유.”

카나데의 시선이 천천히 마후유를 향했다. 보잘것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마후유의 이름을 뱉으며 웃었다. 눈물을 겨우 참고 고개를 들자 카나데와 눈이 마주쳤다. 파랬다. 하늘처럼 파랬다.

“고마워.”

아, 하고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지긋지긋한 희망고문이 현실이 된, 생에 처음일 강렬한 경험.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서 녹아내리는 감각. 일렁이는 시야가 온통 파랬다. 카나데의 눈동자로부터 색이 퍼져 나갔다. 아름다웠다. 

누군가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마후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후유가 아는 사랑은 안정적이지만 답답한, 무언가 가슴을 꾹 누르는 듯한, 말하자면 아무 맛도 없는 최고급 케이크 같은 것이었다. 이 감정을 사랑이라는 말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마후유 안의 모든 것들이 눈물이 되어 뚝뚝 흘러내렸다. 보고 싶었고, 파랬고, 눈물에 젖은 얼굴이 축축했고, 따뜻했고, 새파랬다. 

의료진이 도착해 카나데의 몸에 부착한 장치들을 떼어내는 동안, 마후유는 언젠가 카나데에게 해야 할 수많은 말들을 정리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했었다. 이 이야기를 해 주면, 카나데는 웃을까? 자신의 곡이, 자신이 해낸 일을 깨닫고 편안한 표정으로 웃어 줄까? 더 이상 곡을 만들다 쓰러지는 일이 없을까? 마후유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떠올렸다. 웃음이 새었다.

손끝이 가벼웠다. 마후유는 카나데가 몸을 추스르는 것을 도왔다. 입에 물컵을 대어 주었다. 카나데를 바라보며 아주 옅은 웃음을 띄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

이제서야 마지막 가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