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1] 이든힐 AU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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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광야에서 그를 덮쳐온 것은 허기와 갈증이었다. 얼마나 먼 길이 될 지 모르는데 빈 손으로 그곳을 떠나올만큼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이샤는 그 허기의 원인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공복 때문이 아니라 결핍에 의한 것이었다. 일 년 넘게 그를 괴롭혀왔던 그 결핍.

그곳은 낙원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있다고 믿었던 그곳에 이샤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원해도 절대로 채울 수 없는 갈증이었다.

“그럼 버리고 가려고?”

그런 갈증 속에서 그를 깨운 것은 한낮의 해처럼 쨍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기억 속 목소리와 비슷하기도 하고 목소리에서 미처 다 벗겨내지 못한 앳된 티를 담고 있어 아예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느 쪽인지 조금 더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 이샤는 자꾸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굳이 생존자 캠프를 찾아서 움직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허기진 낙원에서 도망칠 수 있다면 걷는 방향은 어디라도 좋았다. 이동 중인 생존자 무리와 마주친 것은 그가 감염자들과 내면의 결핍에서부터 도망치고 며칠이 지난 뒤였다.

낙원 밖은 어느 곳이든 지옥이었다. 갑작스럽게 인원이 늘어나는 것을 반기는 곳 또한 없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가는 실랑이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샤는 먼지 앉은 모포를 끌어당겼다. 떠나는 게 큰 문제는 아니지. 그러나 그런 생각을 다 마무리짓기도 전에 쨍한 목소리의 주인이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허락도 받지 않고 풀썩 앉는 움직임에 흙먼지가 일었다. 마른 식량을 건네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심코 받아 들었다가, 이샤는 그것을 먹는 대신 손에 든 채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필요 없다, 곧 갈건데.”

어디로. 아까에 비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특별히 행선지를 묻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구체적인 행선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은 드물다. 걸음이란 위치 대신 다분히 목적 지향적이었다. 살기 위해서, 어딘가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그런 것들. 그렇기에 그 또한 특별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물음을 올렸던 것이고 이샤 또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예상과는 달리 정적을 깬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주워왔으니까 내가 가라고 할 때까지는 있어.”

웃기네. 그 억지스러운 말에 이샤는 짧은 감상을 돌려주었다.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스스로도 찾지 못한 이유에 덧붙여 그에게도 왜 하고 물으면 대답은 마찬가지로 짧고 실없었다. 그냥. 그것은 대답이기도 하고 대답같지 않기도 했다.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군, 너는…. 그 말은 곧 이어진 두 글자에 막혔다.

헌영.

헌영이라고 불러. 짧은 목소리와 낯선 이름자가 툭 그의 앞으로 던져졌다.

손을 뻗어도 된다는 것처럼.


821.

해가 저무는 시각이었다. 이 시간이 되면 그를 찾으러 가는 것 또한 이샤의 일과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노을로 녹아들 것 같은 모습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우. 오직 사람에게만 남겨진 이름을 부르면 그가 느리게 이샤를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멀리 사라질 것 같은 시선에 이샤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지. 이샤의 말은 늘 그 지점에서 끝난다.

그렇게 기다려도 현철은 오지 않는다.

뒷말까지 그렇게 이어갈 수 있는 자신은 이샤에게도 없었다.

밤의 베이스 캠프는 고요하다. 피곤과 슬픔에 잠긴 사람들의 숨소리 사이로 이따금 멀리서 그르럭거리는 감염자들의 소리만이 세상의 전부이다. 그 소리들을 이샤는 하임우의 숨소리로 채우고자 했다. 같은 모포를 두르고 기대어 잠든 하임우의 숨소리는 고르고 생자 특유의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불이 아니다. 딱, 그만큼의 체온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겨우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조금 흘러내린 모포에 다시 손을 대어 고쳐 덮으며 이샤는 하임우의 어깨에 깊게 얼굴을 묻었다.

이샤에게는 그만한 온기라도 상관 없었다. 다 타고 남은 재라도, 더이상 그가 이전처럼 불꽃으로 주변을 밝히지 않아도. 아니, 차라리 그 온기가 자신에게는 기꺼웠을 지도 모른다. 그가 불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지점에서는.

곽현철이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위악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는 악행은 커녕 위악에마저 서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 자신을 죽이는 독이 되었다.

이샤가 그를 잡을 생각이 있었다면 잡았을 것이다. …애써 잡지는 않았다.

이샤는 그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끝내 이리프를 꺾어내고 인간 하임우를 지켜낸 대가로서 그는 부서지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사실 자체는 이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산산조각이 되어 부서져 내리더라도, 볼품없이 파편만 남아도 그것이 자신의 팔 안에서라면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이샤가 인간 하임우를 여전히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그러니 그것은 부서지고 있었던 곽현철을 향한 이샤의 마지막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곽은 앞으로도 그 배려를 모를 것이다. 아마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참으로, 빌어먹게도.


021.

이 때쯤에는 곽현철은 종종 쇼파에서 잠이 들고는 했다. 주에 한 번 정도, 많으면 두 번 정도는 이샤와 이리프에게 언질을 주고 차를 몰아 멀리 갔다오는 때가 있었다. 돌아오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어김없이 돌아오고 나면 피곤한 듯 방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잠들기 일쑤였다. 어디서 구르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먼 곳의 흙먼지 냄새가 묻어있는 그를 보며 이리프는 최근들어 곧잘 떠올리고는 했던 생각을 또다시 꺼내었다. 참으로 새삼스럽게 그가 작아보인다고. 기억에 남은 자리의 주름들은 날이 다르게 깊이를 더해가고, 이제 머리는 반백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색이 되었다. 이리프는 아직도 선명히 그 날의, 한 팔로 그와 이샤를 끌어안고 도망치던 그 단단한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데도.

아저씨. 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 침묵에 이리프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쇼파와 자신의 팔 안에 어느새 작게 느껴지는 몸을 가두면 희미한 숨소리가 들리고, 이어 맥없이 놓여있던 한 팔이 그의 몸을 가볍게 안아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형.

잠에 취한 목소리가 웅얼거리며 부르는 소리에 이리프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느린 호흡에 맞게 몇 번 자신의 호흡을 맞춰보다가 이리프는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꿈 꿨어? 괜찮아, 좀 더 자. 언젠가 잠들지 못하던 자신에게 그가 해주었던 것처럼.

주름 패인 이마에 부드럽게 입술이 가 닿았다. 점막을 통해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가 선연했다. 확실한 실재감이었다. 아마 그가 눈을 뜨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이마에서부터 아래로 느리게 훑어 내려가던 입술은 이내 코 끝에서 가벼운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보다 느리고 고른 숨소리와 함께 붙들었던 팔이 툭 떨어졌다. 들어가서 자라는 말은 할 수 없을 것 같아, 이리프는 조심스럽게 쇼파에 놓여있던 모포를 끌어 당겨 그의 몸 위로 덮었다.

계속해서 꿈꿀 수 있으면 좋겠다.

깨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이르프는 다만 잠든 그에게는 닿지 않을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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