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가족입니다 02
평범하기에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일상
정한의 하루는 때때로 해도 뜨지 않아 풀벌레도 조용한 시간에 시작되곤 했다. 오늘도 그런 날 중에 하나로 새벽 시장을 도는 날이었다. 겨울은 이미 한참 지나 거리마다 색색의 꽃이 잔뜩 핀 4월이지만 아직 새벽 공기는 쌀쌀했다. 대충 씻고 뭐라도 욱여넣으려 주방에 가니 식탁 위에 커다란 보온병이 놓여있었다. 같이 놓인 쪽지엔 예쁜 글씨로 ‘나갈 때 가지고 가! -승관-’ 이라고 쓰여 있었다. 잠들기 전에 주방에서 부산스레 움직이더니 이걸 하고 있었나 보다. 피곤이 푹 젖어있던 얼굴에 꽃보다 환한 미소가 걸렸다.
“자~ 오늘도 힘내 볼까!”
아직 자고 있을 승관을 위해 작게 외친 정한은 기모 달린 바람막이를 걸치고 품엔 보온병을 소중히 안은 채 집을 나섰다. 문을 나서니 딱 옆집 523호의 문이 열리고 승철이 나왔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눈이 반쯤 감긴 채였고, 역시 대충 씻고만 나왔는지 숱 많은 머리는 까치 집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부스스했다.
“용케 일어났네.”
“안 일어나면 깽판 친다며. 우리 한솔이 푹 자야 한단 말야.”
“걘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잘 자잖아.”
“아니거든!”
“그려, 그려. 암튼 가자. 늦겠다.”
하여간 승철은 동생 일에 관해선 공격력이 높아지고 들이박고 보는 게 문제라고 정한은 생각했다. 그런 정한도 누가 승관에 대해 안 좋은 말 하면 표정을 싹 굳힌 채 상대방을 물어뜯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때문에 학창 시절 별명이 ‘총 든 깡토끼’라 불렸으면서 승철에게만 혀를 찼다. 물론 승철 또한 학창 시절 별명이 ‘파탄자’였다. 뜻은 ‘파괴하는 사탄 자식’. 친구는 끼리끼리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별명이었다.
“오늘은 꽃 시장 다음에 원두 보러 가는 거지?”
“엉. 명호가 사달라고 한 거 먼저 보러 갈 거야.”
“엉야~”
찬바람에 절로 움츠러드는 몸에 승철을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 옆에서 정한은 바람막이를 더 여미며 품 안의 보온병을 더 꽉 안았다. 스테인리스라 원래라면 차가울 텐데 안에 내용물 덕분인지 보온병은 뜨끈했다. 제법 쌀쌀한 새벽바람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뜨끈해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너 뭐냐.”
“뭐가.”
“아니~ 새벽에 나갈 때마다 피곤해 죽~겠단 얼굴로 나왔으면서 오늘은 왜 실실 웃고 있냐고.”
“히히~ 짜잔!”
항상 새벽에 나갈 때마다 서로 죽상인 얼굴로 털레털레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오늘 정한은 어딘가 빛나 보여 승철은 괜히 정한을 찔러봤다. 그럴 때마다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면서 승철은 매번 정한을 쿡쿡 찔러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쿡 찌른 승철만 정한이 품에서 꺼낸 보온병에 쾅-하고 얻어맞았다. 물론 실제로 맞은 건 아니었다. 승관이 애써 싸준 걸 냅다 무기로 휘두를 정한이 아니었기에. 그건 그냥 승철의 마음에 훅 들어간 어퍼컷이었다. 외상은 없어도 내상이 깊게 새겨졌다는 말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니까.
“승관이가 해준 거야?”
“엉~ 우리 관이 기특하지 않니~ 새벽에 너랑 시장 간다고 했더니 어제 자기 전에 해뒀나 봐. 나오기 전에 보니까 식탁에 놔둔 거 있지?”
“나도… 아까 한솔이가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 줬다, 뭐.”
“한솔이가? 이 시간에 웬일로 깼데. 잘 안 깨잖아.”
“글쎄? 전역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우리 승관이는 전역하자마자 꿀잠 자던데.”
“승관이는 긴장 풀려서 그런 거 아냐? 걔 원래 환경 바뀌면 긴장해서 탈 자주 나잖아.”
“그렇긴 하지.”
서로의 동생 자랑으로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서로의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흘러갔다. 이십 년 넘게 옆집에 살고,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이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진 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네 동생이 내 동생이고, 내 동생도 네 동생이지.’가 되었다. 고작 이름 앞에 붙는 성 씨로 가족이라 칭하기엔 그들이 본 시간이 워낙 길었다.
“지훈이 말로는 찬이도 아직 적응 중인 거 같던데. 조슈지 돌아오면 얘들 데리고 1박 2일로 놀러 갔다 올까?”
“좋지~ 오랜만에 바다나 보러 갈까? 얘들 바다 좋아하잖아.”
“아! 저번에 단골이 강원도에 놀러 갈 일 생기면 이야기하랬는데. 자기 거기에 펜션 하고 있으니까 싸게 해준다고.”
“강원도 바다도 좋지. 그럼, 조슈지랑 이야기하고 지훈이랑 원우만 일정 조절하라고 하면 되나?”
찬바람에 코를 훌쩍이며 승철은 운전석에 올라탔다. 미리 히터를 틀어둬서 차 안은 제법 따뜻했다. 안전밸트를 매고 히터를 끈 사이 조수석에 정한이 탔다. 품에 보온병을 꼭 안은 채 안전밸트를 매던 정한은 일전에 들었던 얘들의 일정을 되새겨봤다.
“어- 아니? 민규랑 석민이 지금 과제 때문에 죽어가고 있어서 그것도 봐야 해.”
“걔네는 수강 신청을 왜 망해가지고!”
“망하고 싶어서 망했겠어. 자기들도 실수했다고 엄청 힘들어했잖아. 우리보단 걔네가 더 힘들지.”
“하긴….”
차가 출발한 뒤로도 둘은 아직 자고 있을 동생들 이야기와 여행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 시장을 돌고 난 뒤에 더 사야 할 게 없는 지 등등 이야깃거리는 끝없이 나왔다. 매일 얼굴을 봐도, 하루에 꼭 한 번은 같이 밥을 먹어도 열셋 중 열을 책임지는 큰 형들이라 그런지 할 이야기는 매번 차고 넘쳤다. 열셋이 모여있는 만큼 서운한 일도, 힘든 일도,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열셋의 배는 생기곤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서운함과 힘들었던 순간, 슬펐던 일, 기쁜 일들을 나누고 나니 어느새 꽃 시장에 도착했다. 어둑했던 하늘도 해가 뜨고 있는지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어두운 하늘 아래엔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벌써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승철과 정한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자연스레 스며 들어갔다. 여기저기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승철은 정한의 뒤를 쫓아갔다. 익숙한 걸음으로 단골 가게에 도착한 정한은 우선 명호가 요청했던 꽃부터 찾았다. 꼼꼼하게 꽃 상태와 색을 확인해 계산하고 가게에 놓을 꽃은 사장님의 추천으로 분홍색 스위트피 한 다발만 샀다.
“오늘은 이것만 사?”
“엉. 저번에 산 꽃도 아직 생생해. 오늘 온 건 명호가 부탁한 거 사려고 겸사겸사 온 거야.”
“옹~”
정한에게 넘겨받은 꽃다발을 조심히 안은 승철은 더 볼일 없다는 말에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혼자보단 사람이 있는 게 좋지만 이렇게 우글우글 모여있는 곳은 힘들었다. 정한 역시 다르지 않기에 빠르게 승철을 뒤따라갔다. 시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거 같은데 어느새 하늘은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누군가 하늘에 덧칠해 놓은 유화처럼 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따사로워 보였다.
“배고파-.”
“차로 가서 승관이가 준비해 준 거 먹자.”
“좋아, 좋아~”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하늘 감상은 뱃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밥 소리에 저 멀리 내던져졌다. 배고프면 천하장사도 힘을 못 쓴다는 데 그들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일단 배부터 채워야지. 차로 돌아가 뒷좌석에 사 온 꽃을 조심히 내려놓고 차에 타 정한이 소중히 가지고 온 보온병을 열었다. 차 안에 순식간에 차오른 고소한 향이 더 허기지게 만들어 챙겨온 컵을 꺼내고 따르는 손길이 하루 중 가장 다급했다.
“오~ 이거 조슈지 표 비프스튜 아냐?”
“그런 거 같은데? 난 또 사 온 줄 알았더니, 만든 건가 본데?”
“와하학- 그러네~ 우리 과니가 만든 거네~”
배고픈 만큼 가득 따른 컵 안엔 한눈에 봐도 엉성한 칼질로 자른 게 보이는 채소와 고기가 가득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본인들이 원하지 않는 한 주방에 발도 못 붙이게 해서 10명의 동생 중에서 막내들은 유독 요리를 못했다. 과도도 못 잡게 할 만큼 유난스럽게 굴었는데 어느새 다 컸다고 서툰 칼질로 만든 요리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마 승관에게 레시피를 가르쳐줬을 지수도 지금 그들의 심정과 같았으리라고 둘은 생각했다.
“갑자기 그때 생각난다.”
“언제?”
“얘들 소풍 간다고 김밥 싸줬던 날.”
“아아. 옆구리 터진 김밥 먹다가 배 터질 뻔했지~”
“밥 간도 제대로 안 돼서 짜고, 당근은 덜 익었고, 단무지 물 안 빼서 밥 노랗게 물들었잖아.”
“그랬지-. 오이 껍질 벗기다가 손가락 베고!”
“맞아. 엉망진창으로 만든 김밥이었는데 얘들이 다 먹었잖아. 먹다 남겨도 할 말 없다고 생각했는데 빈 도시락통 보고 울었잖아, 나.”
매해 소풍 도시락은 그들의 부모님 중 바쁘지 않은 이들끼리 상의해서 준비했었는데, 그해엔 모든 부모님이 바빴었다. 매번 직접 만든 도시락을 들고 갔었기에 큰형들은 이번에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밖에서 산 음식이 나쁜 건 아니지만 누군가 만들어 준 도시락은 그 안에 담긴 애정만으로 아주 다른 추억이 만들어진다고 셋은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은 생애 첫 김밥 만들기에 도전했다. 사실 그 일은 19살 고3이 가진 광기로 이뤄진 거였다. 공부 외엔 뭐든지 다 쉬워 보이고 재밌어 보이는 고3 특유의 광기에 눈멀어 가지 말아야 할 길로 셋은 신나게 달려갔고 엉망진창으로 굴렀다. 짜고 단무지 물이 배 신맛이 뒤섞인 옆구리 다 터진 김밥을 먹으며 그때 셋은 ‘앞으로 김밥은 사 먹자.’로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 결심은 매년 김밥 싸달라는 동생들의 요청에 이뤄지진 못했다.
“그럴 때도 있었지~”
“이젠 승관이가 이런 것도 해주고, 시간 참~ 많이 지났다~”
“옛날이야기 많이 하면 나이 먹은 거라던데 승철이도 나이 먹었네~”
“넌 아닌 줄 아냐!”
“아이~ 당연히 먹었지. 조슈지도 먹었지.”
셋이 모이면 별거 아닌 이야기로도 키득거리던 때처럼 두 사람은 따뜻한 스튜를 다 비울 때까지 그 시절 소년이 된 것처럼 떠들어댔다. 이 순간 한 사람이 없는 것에 아쉬워하면서.
“원두만 사면 돼나?”
“아니~ 우리 준이 밀크티 재료가 똑 떨어져서 그것도 사야 하고, 명호 찻잎도 떨어진 거 같아서 사야 해.”
“갈 때가 많구만.”
깔끔하게 비운 보온병을 정리하고 차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사이 완연하게 해가 뜬 하늘이 유난히 청명하게 보였다. 어쩐지 오늘 하루 즐거운 일이 가득할 거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최근 자주 들어 귀에 익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창을 내리니 봄바람이 살랑였다. 원두와 찻잎을 사서 돌아가는 길엔 장을 봐서 들어가도 좋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아직 자고 있을 지훈과 순영을 깨워 밥 먹고 산책 겸 같이 장 보러 가도 좋겠단 생각도 들었다. 뭐든, 함께라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도 정한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옆에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승철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정한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긴 시간을 함께한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유대감이란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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