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가족입니다

어쩌다 보니 가족입니다 03

평범하기에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일상

나의 바다 by 라마양
19
0
0

지훈의 하루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다. 평균적으로 6~7시에 기상하는 이들과 달리 지훈의 아침은 보통 10~11시였고, 아무리 일러도 9시였다. 오늘은 별일 없는 날이라 보통 때와 비슷하게 일어나야 했으나 오늘은 난데없는 기상 알람이 울렸다.

“지후니~ 그만 자고 일어나야지!”

“어….”

“해가 중천이다~ 일어나야지!”

바로 윤정한. 갑자기 우렁찬 소리를 외치며 들이닥친 그가 때아닌 알람이었다. 갑작스레 잠에서 깨게 된 지훈은 비몽사몽인 머리로 한참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했다. 그래봤자 아직 제대로 깨지 못한 머리론 지금 자신을 깨우는 게 정한이라는 것만 인식했다. 지금이 몇 시길래 이리도 깨우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어나야 한다고 하니 지훈은 반사적으로 몸만 일으켰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동그란 머리통 위로 정한의 웃음소리가 자연스레 쏟아져 내렸다.

“지훈이 잠 깨야지~ 형이랑 같이 밥 먹어야지~”

“으응….”

“밥 먹고 장 보러 가야지~”

“어엉…?”

“형이랑 장 보러 가기 싫니?”

“가자…, 가….”

누가 봐도 지훈은 아직 잠에서 덜 깬 게 보였다. 그 상태로 정한이 서운해하는 거 같으니 휘청휘청 일어나는 모습이 못내 귀여워 정한은 침대에 엎드려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여전히 반쯤 잠에 취해있는 지훈만 영문을 몰라 침대를 팡팡 치며 웃는 정한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지훈이 이제 잠 좀 깼어?”

“…깼어.”

“헤헤헤. 형이랑 그럼, 밥 먹으러 가볼까.”

“밥…, 먹어야지….”

“일단 세수부터 하자. 이러다 밥 먹다 자겠다.”

“어엉….”

몇 번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밥 먹다 잠든 적도 있어 지훈은 쉽게 수긍했다. 정한이 이끄는 대로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하자 남은 잠마저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대충 세수를 마치고 나오니 얼굴 앞으로 불쑥 컵이 내밀어졌다. 반사적으로 받은 지훈은 히히 웃고 있는 정한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쭈욱 들이켰다. 속을 훑고 내려가는 찬물에 그나마 남아있던 잠마저 훌쩍 도망가 버렸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평소와 다른, 지훈에겐 힘겹고 정한에겐 즐거운 하루일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으니,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어야겠다.

“형만 있어?”

“아니~ 승철이는 순영이 깨우러 갔어.”

“넷인가?”

“엉~ 명호가 밥해놨다고 가서 먹으래.”

“그래? 다른 얘들은 나갔나?”

“준휘 회사 데려다주는 원우 따라 같이 나갔데. 민규랑 석민이는 어제 못 들어왔고.”

“걔네는… 어쩌다 그런 강의만 잡아가지고….”

허허 웃는 정한을 따라 집을 나서며 지훈은 혀를 찼다. 아직도 수강 신청 망했다고 사색이 된 채 휴학을 논의하던 민규와 석민이 눈에 선했다. 그런 둘을 보며 명호가 촌철살인의 말로 자근자근 밟지 않았으면 둘은 그러고도 남았을 거였다. 그때 명호에게 네가 옆에서 고생이 많다고 얼마나 미안해했던가. 지훈은 그 뒤로 명호에게도 카드를 하나 쥐여주었다. 원우가 준 게 있다고 한사코 거절하는 명호에게 석민과 밥 먹을 때라도 쓰라며 억지로 쥐여 줬는데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셋은 대체로 붙어 다녔고 대체로 셋 중 둘은 아주 잘 먹었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들어올 수 있나 보던데?”

“그래?”

“엉~ 아까 카톡 온 거 보니까 오늘 준휘 어머니랑 저녁 먹을 때 민규가 꼭 간다고 보내놨더라고~”

“그럼, 석민이도 오겠네. 오랜만에 저녁에 사람 많겠다.”

“그래서 좀 있다 장 보러 갈 건데 지훈이도 가자~”

“그래, 그래~”

깨우기 전부터 이미 같이 갈 생각이 만만이었으면서 정한은 이럴 때마다 매번 묻곤 했다. 그때마다 지훈은 허허롭게 웃으며 그러마-하고 말았다. 유독 형 중에서 정한에게 약한 탓이 컸다. 하루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건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지만 그 안에 가족의 일은 언제나 예외가 되어왔으니까. 지훈이 괜찮아 보이면 정한은 살짝 눈치 보던 것도 잊고 히히 모드가 됐다. 그 모습을 싫어하는 이들은 적어도 13명 안에선 없었다.

“어, 지훈이~”

“어, 형.”

“순영이는?”

“일어났어. 세수하고 온대.”

526호에 사는 지훈의 집에서 원우와 명호네인 521호를 가려면 당연히 지수와 순영의 집을 지나야 했다. 때마침 524호를 지날 때 승철이 나와 함께 가장 안쪽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명호가 준비한 아침 메뉴가 뭔지, 그게 부족하면 뭘 더 해 먹을지 이야기하다 금세 도착한 521호의 비밀번호를 익숙하게 눌렀다. 서로의 집이 내 집인 양 지낸 지 오래라 들어가는 모습이 내 집처럼 편안해 보였다.

“오~ 명호가 밥 많이 남겨놨는데? 어때, 지훈이~ 안 부족하겠어?”

“응. 뭐, 먹고 부족하면 그때 생각해 봐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아, 우리 집에 김치찌개 있어. 먹고 부족하면 그거 먹자.”

“그랭~”

“우리 저번에 먹었던 진미채가 준휘네에 있나?”

“그럴걸?”

어떻게 할지 정하자마자 셋은 각자 밥과 국을 데우고 식탁에 식기를 놓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다. 냉장고를 아무리 뒤져도 먹고 싶었던 반찬이 안 보여 승철이 내던진 질문에 곧장 지훈의 답이 날아왔다. 여섯 집 중에서 요리하는 집이 정해져 있어 밥도 대체로 그 집에서 먹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원우네엔 승철과 정한네 반찬이, 준휘네엔 지수와 지훈네 반찬이 몰려있었다.

“먹고 싶으면 권수영 보고 가져오라 할까?”

“아냐, 번거롭게.”

“나 뭐 가져와?”

“준이 집에서 진미채 좀.”

“그거 말곤?”

“아냐~ 안 가도 돼.”

“괜찮아, 얼마나 멀다고. 갔다 올게. 그거면 돼지?”

“엉.”

때마침 들어온 순영이 그 말을 듣곤 갔다 온다며 다시 집을 나갔다. 승철은 괜히 안 가도 된다면서도 좋아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참, 평소엔 가장 맏형다우면서도 이럴 땐 동생 같았다. 그렇게 말하면 삐지기 때문에 동생들은 그저 속으로만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물론 정한과 지수는 승철이 삐질 걸 알면서도 놀리듯 몇 번 말한 적 있어서 승철이 모르진 않았다. 그저 이런 모습을 보여줘도 당연히 받아줄 걸 알아서 나오는 행동이라 모두 익숙하게 받아줄 뿐이었다. 열세 명이 배운 가족이란 게 그랬다.

“호랑이 등장-!”

“어, 빨리 와라.”

“넌 또 뭘 바리바리 가져왔어!”

“아니- 가서 보니까 집에서 묵은지를 보냈더라고? 그래서 그거랑 형이 말한 진미채랑 다른 거 몇 개 더 가져왔지~”

“어, 우리 호랑이 왔니~ 나중에 치우는 건 순영이가 하면 되겠다~”

“어…, 나만? 진짜?”

요란하게 등장하는 순영을 지훈은 무참하게 씹었고, 승철은 품에 든 반찬통들에 화를 내고, 정한만 순영을 받아주면서도 치우기 당번에 순영을 꽂아버렸다. 다 같이 먹으면 좋을 거 같아서 들고 온 순영만 억울해졌다. 반찬을 식탁 위로 내려놓으면서 구구절절 말이 길어지는 순영이 귀여워 정한은 눈을 반짝였다.

“우리는 밥 차렸으니까, 치우는 건 순영이가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지….”

“뭔 말이 그렇게 길어~ 빨리 앉아서 밥이나 먹어.”

“아니-, 나는….”

“같이 치워줄 테니까 그냥 좀 앉으라고-.”

케케케 웃으며 놀리기 바쁜 정한에 순영은 점점 굴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햄스터가 되어갔다. 차라리 아까처럼 호랑이라고 구는 게 더 낫지 땅 파는 권순영은 영 적응이 안 되는 지훈이라 결국 말을 얹고 말았다. 그제야 표정이 풀린 순영이 자리에 앉았다. 겨우 밥숟가락을 들 수 있게 되자 지훈은 말없이 밥만 먹었다. 정한은 이제야 장난이었다며 같이 치우자고 순영을 달랬고, 승철은 밥 먹고 장 보러 다 갈 건지 물었다. ‘다 같이 가야지~’란 정한의 말에 순영이 생각난 듯 안 그래도 사야 할 게 있다며 쉽게 수락했다. 지훈이야 뭐, 잠에서 깨기도 전에 수락했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식사는 명호가 준비해 준 볶음밥을 먹고도 부족해 승철의 집에서 김치찌개까지 가져와 싹싹 비우고서야 끝났다. 아직 배가 반쯤 불러있던 정한만 소파에 반쯤 누운 채 그런 셋을 기다렸다. 그사이 단톡에 사야 할 게 있는지도 물어보느라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 드문드문 오는 답변에 네 사람이 필요한 것까지 더해 정리하니 식탁 위는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벌써 다 했어?”

“엉. 셋이 하니까 금방 끝나던데?”

“아니, 나도 부르지.”

“뭘. 셋만으로도 충분하고만.”

“얘들은?”

“나갈 준비하고 온대. 커피 마실래?”

“아니. 오늘 신메뉴 만들 거라서 괜찮아.”

이미 준비가 끝났단 말에 정한은 다시 소파에 몸을 드러누웠다. 출근하고 나면 눕고 싶어도 누울 수 없으니 이럴 때라도 누워있어야 한다는 게 정한의 지론이었다. 그런 정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승철이라 잔소리하기보단 그 옆으로 가 앉는 걸 택했다.

“혼자서 괜찮겠어?”

“안 그래도 아까 얘들한테 시간 되면 와달라고 했어.”

“엉. 혼자 다 먹고 저번처럼 잠 못 자지 말고.”

“안 그래도 승관이한테 잔소리 엄-청 들었으니까 그만하자….”

“넌 좀 혼-나야 돼.”

“정한이 형이 왜 혼나?”

“어~ 얘들아, 왔니? 이제 가자여~”

“윤정한 저거, 진짜!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준비를 마치고 돌아온 순영과 지훈은 성질내는 승철에게 의아해하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성까지 붙여 부르는 걸 제일 싫어하는 승철이 저렇게 부르는 걸 보면 대부분 정한의 잘못이 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쯤 죽은 눈으로 ‘그래, 그래.’하고 대충 정한이 수긍하며 끝나는 일이 다반사라 그랬다. 그 짐작대로 원우네를 나와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동안 그대로 마무리됐다. 지훈은 하루 이틀도 아닌 일이라 그러려니 차에 탔고, 순영은 뒷좌석에 형들을 밀어 넣고 대신 운전대를 잡았다.

“나도 좀 있다 같이 갈까?”

“그래도 돼?”

“엉. 나 오늘 연습 없어.”

“같이 가면 나야 좋지~ 지훈이는 오늘 뭐 해?”

“나? 오늘은… 별일 없긴 해. 어제 작업 하나 끝나가지구.”

“그럼, 지훈이도 같이 가자.”

“뭐, 그래.”

“나도오오.”

“형은 도장 문 열어야지. 관장님이잖아.”

“애기들 섭섭해할 텐데~”

자기 외에 정한의 카페에 모이는 것 같아 승철의 힝힝 모드가 삐죽삐죽 흘러나왔다. 유독 혼자 있는 걸 못 견뎌 하는 승철은 이럴 때마다 막내들보다 더 동생처럼 굴었다. 한, 두 번 겪어본 게 아니라 셋은 그의 책임감을 콕콕 찌르는 걸로 능숙하게 대처했다. 철이 없어도 의젓한 맏형이기에 승철은 또 시무룩한 상태로 ‘그렇긴 하지.’하고 수긍했다. 그렇다고 서운해할 상태를 그대로 두진 않았다.

“어차피 오늘 저녁반 내가 하니까 형은 그때 가.”

“…그럴까.”

“오면 나야 편하지~”

“너 또 힘 쓰는 일 나 시키려고 그러지.”

“민규도 없는데, 너 아니면 누구 시키겠어~”

“힘쓸 일 있으면 나 시켜도 돼.”

“형이 우리 지훈이를 어떻게 부려 먹겠니. 차라리 승철이를 시키지.”

“넌 좀 쉬어야 해. 그냥 내가 할 테니까 넌 쉬어.”

“맞아. 지훈이 넌 좀 쉬어라. 어떻게 매일 일만 해.”

“아니, 뭐. 힘쓰는 일이 얼마나 많다고….”

어제도 일하고, 그제도 일하고, 그그제도 일했다며 투덜거리는 순영에 지훈은 멋쩍어 목덜미만 쓸었다. 곡 작업은 지훈에겐 숨 쉬는 것과 같아서 쉬지 않고 하다 보니 이래저래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원우 덕에 밤새 작업하는 일은 없어졌어도 그만큼 쉬는 날 없이 작업하다 보니 다들 틈만 나면 쉬어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며 지훈을 소파에 앉혀두기 일쑤였다. 예전엔 그게 불안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쉬었다. 쉰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쉬고 나면 막혔던 부분이 풀릴 때가 많았다. 혼자였다면 그런 거 하나 모르고 살았을 텐데 형제만 12명이라 지훈에겐 천운이었다.

“안 되겠네. 순영이가 오늘 지훈이 뭐 못하게 지켜봐.”

“아이. 뭘, 당연하게. 오늘 지훈이가 손가락 하나 까닥 못 하게 지켜봐야지~”

“지훈이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해야겠는데?”

“권순영, 넌 또 뭘 그렇게까지….”

“아니-, 너 저번에도 쉰다고 말만 하고 하나도 안 쉬었잖아!”

“안되지, 안돼. 오늘은 꼭~ 쉬어야겠네.”

“이러다 밥도 떠먹여 주겠다, 아주.”

“괜찮은데?”

“아- 쫌!!!!”

성내는 소리와 함께 찰싹 때리는 소리, 억울해하는 소리, 팡 터지는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언제나처럼 같은 일상이었다. 계속 이어져 왔고, 여전히 이어지고, 앞으로도 이어져 갈 일상이란 정말 천운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그래서 지훈은 이 순간 화를 내면서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잃지 않았음에, 잃어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들의 품 안에 간직할 수 있음에.

──────

*이제와 쓰는 tmi

1. 나이는 승철/정한/지수=30, 준휘/순영/원우/지훈=28, 명호/민규/석민=26, 승관/한솔/찬=23(22)

2. 승철은 태권도 도장 관장, 정한은 모 대학가 카페 사장, 지수는 모 기업 영업사원, 준휘는 작은 출판사 직원, 순영은 댄스 팀 리더 겸 승철의 태권도 도장 파트 타임 사범, 원우는 사진 작자, 지훈은 작사작곡가, 명호/민규/석민은 대학교 4학년, 승관/한솔/찬은 제대한 휴학생.

3. 부가회 107동 5층 전부 13명만 살고 있음. 순서대로 521호 젓가락형제, 522호 최형제, 523호 윤앤부, 524호 호형제, 525호 문짝형제, 526호 이형제가 살고 서로의 집 비밀번호는 각자 다르나 다 알고 있음.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