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온도
2024. 10. 16. 달토끼 생일 헌정 연성.
처음으로 함께 맞이하는 심성훈의 생일이었다.
분수가 화려하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곳에서, 서가을은 예복을 입은 그와 무도회에 참석한 양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었다. 내려앉은 달빛 속에서 하늘로 흩어진 물방울이 비처럼 두 사람을 감쌌고, 오롯이 서로로서 마주하고 추는 춤은 그 자체로 완벽했다.
그리고 가을은… 처음으로 심성훈의 꾸밈없는 웃음과 마주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한 적은 없었으나 혼자서 가끔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무해한 작은 동물처럼 보이는 평소의 웃음이 아닌, 세상 모든 것에 무감한 듯한 이 남자가 짓는 ‘진짜 웃음’이란 어떤 것일까. 만일 그 웃음을 볼 수 있다면, 심성훈에게 정말로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물론 그것이 제 욕심임을 알고 있는 가을이 선뜻 먼저 꺼내 보일 수 있는 마음은 아니었기에 제 상상 속에서만 그려 보았던 그 웃음을 마주한 순간… 그는 망설임 없이 심성훈을 끌어안았다. 눈썹을 찌푸리며 웃는 그의 귀가 붉어져 있음을 알았기에, 늘 담담하기만 했던 남자의 얼굴에 서린 설렘과 기쁨, 그리고 안도감이 제 심장을 속절없이 뛰게 했기에. 새가 부리로 쪼듯 여러 번 입술에 부드럽게 와 닿는 키스에 가을은 그제야, 제 바람이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는 가을이 서투르나마 미리 준비해 두었던 저녁 식사를 함께 먹기로 했다. 샤브샤브, 불고기, 제육볶음, 떡갈비… 구색을 갖추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쌈채들을 민망한 듯 뒤늦게 식탁에 올려두는 가을이 심성훈에게는 마냥 귀엽게 느껴져 조금 놀려 볼까도 싶었지만, 저녁을 이미 늦게 먹게 되었음을 떠올린 그는 앞치마를 두른 채 음식을 데워 차리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가을의 등 뒤로 다가가 가만히 끌어안았다.
“아직 멀었어? 나 배고픈데.”
실상 정말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자신을 봐 달라는 일종의 투정이었지만, 금세 저를 향해 돌아서며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가 축 처지는 가을의 모습이 못내 좋았다. 사실 어떤 모습이든 좋지 않겠느냐만, 저와 시선을 마주하며 내보이는 모습과 감정은 오롯이 그만의 것이었으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걸리네요. 거의 다 됐어요, 성훈 씨. 앉아 있지 않고요.”
“네가 혼자서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만 덩그러니 앉아 있기는 조금 그렇잖아.”
저를 품에 끌어안은 채 건네는 심성훈의 말에 가을이 웃으며 종알거렸다.
“생일인 당사자가 가만히 앉아 있는 건 당연한 거예요. 내가 데려다줘요?”
저와 시선을 맞추는 와인빛의 눈동자, 웃음기가 담긴 채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종알종알 저를 향한 말이 흘러나오는 입술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는 끝내 가을에게 가볍게 입 맞추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도와줄게. 나…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도 되지?”
✻ ✻ ✻
설거지를 도와주겠다는 심성훈에게 잠옷과 수건을 안겨 주며 욕실로 밀어 넣은 가을은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그 몸 어디에 다 들어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심성훈은 잘 먹었고, 많이 먹었다. 요리가 다소 서툰 편인 가을이 준비하기에는 까다로웠던 고기 요리들을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기에, 그는 직접 생일상을 차리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심성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올 동안 설거지를 마치고 주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벌써 정리 다 끝냈어? 얼른 씻고 도와주려고 했는데.”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니 노곤한 모양인지 이미 눈에 잠이 한가득 담긴 얼굴로 제게 말을 건네는 심성훈을 보며 웃음을 꾹 참은 가을은 그의 젖은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씻는 동안 다 끝낼 수 있었으니까 먼저 씻으라고 했죠. 그런데, 머리 안 말렸어요?”
그제야 심성훈이 아, 하며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심성훈을 거실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날씨 쌀쌀해져서 머리 안 말리고 자면 감기 걸려요, 성훈 씨.”
욕실로 가서 새 수건을 꺼내 온 가을은 머리의 물기를 가볍게 수건으로 훑어내고는, 두피를 마사지하듯 살짝살짝 눌러 가며 꼼꼼하게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얌전히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심성훈이 작게 웃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말리기에는 드라이기가 낫지 않아?”
“늦은 밤이라 시끄러울 거예요. 그리고 열기로 말리면 머릿결 상해요.”
제 머리칼에 와 닿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어쩌면 그건 단순히 제게 닿는 손길에서 느끼는 것만이 아닌, 가을의 곁에 머무름으로써 느끼는 안정감의 다른 형태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심성훈은 그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눈을 감았다. 체감하기조차 어려울 오랜 이전에도, 지금도, 많은 걸 바란 적은 없었으니까.
그저 미소 한 번, 손길 한 번을 바랐을 뿐.
그것이 충족된 지금, 그는 제 머리를 말려 주는 가을에게 무해한 작은 동물처럼 제 몸을 기댔다. 처음으로 가을과 함께 보내는 생일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오롯이 하루를 내어주는 날. 자신이 가을을 욕심내도 되는, 그런 날.
소파에서 꾸벅꾸벅 조는 심성훈에게 우격다짐으로 제 침대를 내어준 가을은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이불을 고쳐 덮어 준 후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거실로 향했다. 발코니 창문을 여니 한결 쌀쌀해진 밤의 공기가 가을의 향을 품은 채 뺨을 스쳤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가끔 별을 보러 간다던 심성훈의 말이 문득 떠올라 가을은 발코니로 나가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늦은 시간이라 그나마 빛이 적은 시간이기 때문인지 유난히 별들이 반짝였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쩌면 도시의 빛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을 별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를 떠올렸을까, 아니면 그리운 추억을 되새겼을까. 그때였던 듯 했다. 딱히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심성훈에게서 아주 오랜 시간의 흔적을 엿본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 그리고 그것이 제가 그에게 선뜻 다가설 수 없게 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될 것임을 알았던 순간이.
아무래도 날씨가 생각보다 쌀쌀한 모양이었다. 코가 찡해지는 느낌에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던 그 순간, 등 뒤에 닿은 온기가 가을을 멈춰 세웠다.
“나만 침대에 재워 놓고, 여기서 뭐 해?”
나른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가을이 제 허리를 감싼 손을 겹쳐 잡으며 웃었다.
“왜 깼어요, 성훈 씨 자다가 깨는 사람 아니잖아요.”
“문득 눈을 떴는데 네가 없기에. 추운데 왜 여기 있어.”
제 어깨에 턱을 올리며 온몸으로 당겨 안는 그의 품에 기대듯 안기며 가을은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르고 조금 더 가까워진다면, 그러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다시 돌아올 생일 때면… 자신은 그에게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될까.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었으면 좋겠다고.
가을의 침묵을 온기로 가만히 채우던 심성훈이 작게 웃었다.
“이번 생일… 너와 함께해서 정말로 즐거웠어. 이건 너라서 가능했던 일이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움찔 굳은 가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년 생일도 너와 함께 보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도 될까? 나는,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럴게요, 가을의 대답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심성훈이 작게 웃으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 약속한 거야.”
밤이 깊어 갔다.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도 잠자리에 들듯 희미해지는 순간까지, 두 사람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그 자리를 지켰다. 심성훈의 첫 생일을 마무리하고 다음 해의 생일을 기대할 수 있을 다음 날이 다가올 때까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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