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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여청] 다른 놈이랑 보면 화내실 거면서

헛소리. 내가 왜 화를 내?

마노 글 모음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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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여청 3편 입니다.

*결제창은 후일담 입니다.

1편: https://pnxl.me/a8qf5t


5년전 어느 겨울날.

"도사 언니. 좋아하는 사람이랑 첫눈을 보면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청명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당보를 보았다. 첫눈은 이미 내린 지 오래였고 방금까지 당가가 어쩌고 하며 떠들던 것 아니었나. 자신이 아무리 취했다지만 당보의 말 한마디 못 들을 정도로 마시지도 않았고, 사랑이니 뭐니 하는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당보와 나눈 기억은 없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청명에게, 당보는 대답 대신 가만히 술잔을 기울였다. 반쯤 차 있던 술잔을 비우고, 다시 가득 채울 때까지도 청명은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자신을 패서라도 대답을 들었을 청명이 술잔을 비우고, 채울 때 까지 자신을 기다려주는 것에 당보는 술렁이는 마음을 꾹 눌러 삼켰다.

"주변을 좀 둘러보시죠."

들떠 있는 당보의 말투에 청명은 당보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별만 가득하던 하늘에서 하나둘씩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왜 눈 이야기를 꺼내나 했더니, 새까만 밤하늘에 하얀 눈이 떨어지는 모습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는 맛이 있었다.

별을 구경하기 좋은 곳을 찾았다고, 달이 없는 오늘 마실 귀한 술도 가져왔다며 데려온 곳은 꼭 당보 같은 놈이 지었을 법한 정자가 곳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어디는 마을이 한눈에 보이고, 어디는 숲을 감상하기 좋도록 만들어진 정자들은 이곳을 사랑하고 아껴주던 장인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더라 라고 당보가 떠들어댔다. 여느 때와 같은 객잔이 아닌 정자에서 마시는 지라 어딜 봐도 똑같은 풍경에 청명은 금세 흥미를 잃고 당보가 가져온 분주에 집중했지만 말이다.

청명이 감탄하자 당보의 입꼬리가 둥근 호선을 그렸다.

"사천은 겨울에도 눈이 잘 내리지 않습니다. 첫눈이 내렸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내려 금방 물이 되어버리고요. 그래서인지 첫눈이 아니더라도 눈이 내리면 연모하는 이를 찾아가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속설 탓도 있고, 좋아하지 않더라도 새하얀 눈과 함께 술렁이는 마음들이 아이들을 정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죠. 하얀 눈을 맞으며 연모하는 감정을 말하는 이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냐."

"섬서는 그런 거 없답니까? 첫눈을 같이 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같은? 양민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도는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화산은 좀 다를 수도 있잖아요. 혼인을 금지하는 문파도 아니고."

"글쎄, 있어도 나보단 네가 더 잘 알겠지. 그리고 화산은 오히려 눈 치울 생각에 싫어하는 놈들이 태반일 거다."

당보는 그렇긴 하겠네요 하며 쿡쿡 웃었다. 지난번 화산에 오르자 눈 좀 치우라며 제게 빗자루를 던지던 청명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즐거운 듯 웃는 당보를 보며 청명은 답지않게 생각에 빠져있었다. 하나를 봐도 수백 가지 말을 꺼내는 당보이니 속설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속설 중 하필 좋아하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낸걸 보면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지금요? 이렇게 보면 아름답긴 하죠. 별과 함께 반짝이는 게 예쁘기도 하고요."

"그거 말고. 같이 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

"흠, 글쎄요. 어릴 때야 있었죠. 찾아오던 아이들도 더러 있었고. 지금은... 저보다 강하고, 다정하고, 붉은 매화가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랑 보면 좋겠다 싶긴 해요."

밤하늘을 보던 당보는 어느샌가 청명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굴 생각하는지 애정이 가득한 눈을 접어 보이니 순간 청명의 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너, 너 취향이 도사였냐? 그것도 화산?"

청명이 노망난 미친놈을 보는 것처럼 당보를 보니 당보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이 화산에 몇이나 있다고 다정하다 말하겠으며, 자신보다 강한 사람은 청명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제가 이 나이에 노망난 것도 아니고. 저보다 어린애들 만날 생각 없으니 걱정 마쇼."

당보의 말에 청명은 당보보다 나이가 많고, 당보와 안면이 있는 놈들이 누가 있나를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청문과 청진이었으나 둘 다 당보보다 강하진 않다. 다른 장로나 장문인을 떠올려도 해당하는 인물이 생각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당보가 다정하다 말할 정도로 당보와 친분이 있는 사람은 화산에 없었다.

"내가 알아?"

"음, 아무래도 그렇죠."

나도 알고 당보도 아는? 게다가 당보에게 다정? 얼굴밖에 모르는 애들까지 떠올려봐도 당보와 말 한마디 나눌만한 놈들은 없었다. 그렇지만 당보가 정말 좋아한다면, 그리고 그 놈도 당보를 좋아한다면. 당보가 원하는 대로 첫눈을 같이 보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첫눈이 왔다 일러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는 당보는 어딘가에 정착할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했으니.

그러나 청명의 생각이 깊어질수록 당보의 눈에 가득하던 애정은 차츰 씁쓸함으로 변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본인을 범위에 넣지 않는다는 건 일말의 연정도 없다는 걸 의미했다. 마음을 고백할 생각 따위 진작에 접은 지 오래지만 막상 마주하니 밀려오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다 속설인걸요. 누구랑 혼인할 생각도 없고 딱 지금처럼 발 가는 대로 돌아다니는 게 더 좋습니다."

그것이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임을 알아 청명은 그러냐 하고 말았다.

하나 둘 떨어지던 눈은 어느새 하늘을 가득 채워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당보는 소매 안에서 주섬주섬 연초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매캐한 독이 아닌 약초로만 되어있어도 연초인 건 매한가지라 청명은 그만 피우라고 눈치를 주었다. 당보는 청명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기를 뱉었다. 하얀 연기가 어두운 밤하늘을 가리다 곧 흐리게 사라지는 모습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걸 아는지 당보는 또 다시 후, 하고 연기를 뱉는다.

"날도 좋은데 이거 하나만 피울게요. 독도 아니고, 꽤 운치 있지 않습니까?"

장죽을 피우는 당보의 코와 양 볼, 장죽을 잡은 손끝이 전부 빨개져있었다. 입을 열때마다 입김이 나오는걸 보면 아무래도 춥겠지 싶어서 청명은 남은 술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그만 피우고 방이나 잡자."

당보는 아쉬운듯 입맛을 다시고는 자연스레 청명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청명은 내밀어진 손을 잡고 위로 휙 당겨 당보를 일으켰다. 자신이 일어나서도 떨어지지 않은 손에 당보는 떨리는 마음으로 눈밭을 걸었고, 그 옆엔 청명이 함께였다. 그렇게 두 무인은 하얀 눈밭을 거닐며 마을로 내려갔다.

차가운 것이 피부에 닿아 녹아내리는 느낌에 청명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아침부터 구름이 가득해 뭐든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정말 눈이 내리는 것을 보니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과 귀찮음이 밀려왔다. 척 보기에도 금방 그칠 것 같진 않아 보여 수련하던 검을 정리하니 멀리에서 첫눈입니다 사형! 하며 떠드는 어린 제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눈이라며 신나 하니 아직 어리구만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새어 나오는 웃음에 하얀 입김이 퍼졌다 사라지는 것을 보며, 청명은 당보를 떠올렸다. 첫눈은 본 적 없을 테니 눈 구경도 시켜주고, 그 김에 술도 마시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첫눈 기념으로 보러 가는 건 꽤 괜찮은 선택같았다.

청명은 고민없이 사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보는 정인이 된 이후로는 자신을 데려가거나, 그게 아니라면 어딜 갈 것이라며 미리 말을 해주었기 때문에 아무 말이 없던 오늘은 사천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막 대문을 나서는 당보와 마주칠 수 있었다.

"언니?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안 그래도 보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당보는 청명에게 가까이 다가가 두 손을 마주 잡고 배시시 웃었다. 자기 집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지 꼬리를 흔들어 대며 반기는 게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라도 되는 모습이었다.

"넌 나랑 일이 있을 때만 만나?"

"얼굴 보니 좋아서 그러죠. 제가 부르거나 술 마실 때 아니면 움직이지도 않으시잖아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당가에 들렸다 가시겠어요?"

"아니, 화음으로 가자."

당보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놓고 굳이요? 하는 얼굴에 싫으면 말던가. 하고 앞서가니 금방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제가 언제 싫다고 했어요! 그냥 궁금해서 그런 겁니다. 사천까지 오셔서는 정작 마시는 건 화음이잖아요."

청명은 재잘거리는 당보에게 대충 대꾸하며 화음으로 향했다. 흐린 구름만 가득하던 사천을 지나 섬서에 이르자 하나둘씩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화음에 가까워질수록 길가에 쌓인 눈을 치우는 양민들이 보일 정도로 눈이 흩날렸다. 당보는 잠시 하늘을 올려보더니 이쪽이라며 청명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골목을 지났다. 그러다 항상 가던 객잔들을 지나 외진 곳에 있는, 처음 보는 객잔으로 쓱 들어갔다.

점소이는 당보와 잠깐 말을 나누고 둥근 창 너머로 호수와 산이 보이는, 당보 취향의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한평생 화음에 살면서 이런 곳은 처음이라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이 술상이 차려졌고, 둘은 자리에 앉아 잔을 기울였다.

신이 났는지 평소보다 빨리 비워지는 잔에 빈 병이 하나둘 늘어났다. 창밖을 비추는 당보의 녹색 눈에 하얀빛이 생겼다 사라지는것이 참 예뻐 가만히 감상하는데, 문득 당보가 첫눈 어쩌고 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아까도 그렇고 별것 아닌 것들에 당보가 연상되는걸 보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릿속이 안개로 뒤덮인 것처럼 흐릿해 보야. 하고 부르니 바로 눈이 마주쳤다. 사르르 휘어지는 눈에 생각은 다 하셨소 묻는 것 하며 괜히 속내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이라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 나왔다.

"뭘 봐."

"먼저 보고 있던 건 언니거든요. 절 어찌나 뜨겁게 보시는지 얼굴이 다 뚫리는 줄 알았습니다."

청명은 큼하고 헛기침을 한 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네가 전에 첫눈이 어떻다 하면서 말한 적 있잖아."

당보는 여전히 청명을 보고 있었다. 부끄러워 하는 모습에 좀 더 놀릴까 싶다가도 지금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얼굴이 뚫어지도록 보고 있었으면서 아닌 척 하는 것도 귀엽고, 붉어져 있는 귀도 아주 사랑스러웠다.

"그때면.. 언제지. 5년 전 겨울인가? 정자에서 마셨을 때, 맞죠?"

"어. 첫눈에 무슨 말이 있다며."

"좋아하는 사람이랑 첫눈을 같이 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죠. 이거 말고도 첫눈을 보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던가, 첫눈을 3번 먹으면 감모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도 있긴 합니다."

청명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은 후부터 뒷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들어본 속설이 하필 사랑이라니. 이러면 꼭 속설처럼 뭐라도 해보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오늘따라 당보가 생각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면전에서 인정하기엔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청명은 한참 동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뒤로 미루었고, 당보는 한 쪽 손을 탁자 위로 올려 잔을 만지작 거리는 청명의 손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는 청명의 손과 잔 사이로 손가락을 들이밀어 청명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웠다.

"이건 왜요? 오늘 내리는 눈이 첫눈이라도 돼서. 제 생각이라도 하셨습니까?"

"어..., 지금 우리가 보는 게 첫눈이야."

다른곳은 몰라도 화음은 첫눈이다..

청명은 잔을 잡고 있던 손을 당보와 마주 잡았다. 자신을 향한 흔들림 없는 시선에 당보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창밖의 눈을 보았다. 은은한 달빛에 하얀 눈송이들이 반짝거렸고, 민망해 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정인의 눈 역시 반짝거렸다. 첫눈이구나. 이걸 보고 내 생각을 하셨구나.

"그래서 보러 와주신 거에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네가 좋아할 것 같았어."

당보는 마주 잡지 않은 손으로 제 얼굴과 입가를 가렸다. 이러지 않으면 새빨개진 얼굴이 여실히 드러날게 뻔했기 때문이다. 다른 건 기억도 못하면서 꼭 이런 것만 기억해 설레게 하지. 바보 같은 말코. 진짜 나빴어. 당보는 잠시 얼굴을 가리다 살짝 팔을 내리고 청명에게 물었다.

"그때 제가 누구랑 보고 싶어 했는지는 기억해요..?"

당보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청명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기 밖에 모르는 저 도사가 제 발걸음을 맞춰주고, 술잔을 기울여준 것이 어느새 20년이 지났다. 무심한 듯 다정한 행동들에 당보가 설레기 시작한 것도 20년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형편없는 당보의 고백에 제 감정을 자각할 만큼 청명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5년 전도, 이러한 감정의 연장선 이었던 것이 아닐까?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퉁명스러운 대답에 당보는 정말 당장이라도 저 눈밭으로 달려 나가 연모한다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기억나지도 않던 말을 무의식 속에 넣어두고 자신을 떠올렸다는것 아닌가! 

"그럼 알려드릴까요? 제가 그때, 누구와 같이 첫눈을 보고 싶어 했는지? 저는 저보다 강하고 다정하고, 매화가 잘 어울리, 웁"

청명이 당보의 입에 안주를 들이밀며 눈으로는 그만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당보는 안주를 오물오물 받아먹으면서도 눈으로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청명을 보았다. 청명은 저 감정이 자신이 아니라 그때 첫눈을 보고 싶다던, 그 다정인지 뭔지 하는 도사 놈한테 보내는 것 같아 맞잡은 손을 세게 쥐었다.

"어쩌라고! 그렇게 좋으면 그 새끼랑 보던가! 아니면 뭐 여기에 불러줘?"

씩씩대며 화를 내는 모습이 선명한 질투인지라, 당보는 부러질 것 같은 손을 빼지도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서로의 코가 닿을 만큼 몸을 기울이자 청명의 눈이 흔들리며 자신의 눈과 입술을 번갈아 보았다.

"이럴 때는 나랑만 보자고 말해주시는 겁니다. 정말 다른 놈이랑 보면 화내실 거면서 바뀌질 않으시네."

"헛소리. 내가 왜 화를 내?"

청명은 짜증을 내면서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손을 빼 밀어낼까 싶다가도 당보와 술잔에 손이 묶여 있어 밀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가까워지면 꼭 제게 접문을 해주기 때문에, 그렇다고 당보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신이 달려들 것만 같아서.

"저를 연모하시니까요. 흘러가는 말 하나에 사천까지 절 보러 와주실 만큼, 다른 사람이었으면 나갔을 주먹 한번 참고, 고운 말 한 번 더 써주실 만큼이요."

당보는 청명의 코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원하던 거 맞죠? 하며 배시시 웃어 보이니 당과로 입을 채운 것 마냥 입안이 달고 목이 턱 막힌다.

"... 앞으로도 나랑만 봐, 첫눈도 다른 것도."

"그럼 도사 언니는 첫눈이 내릴 때마다 절 보러 와주세요. 사천은 눈이 오질 않으니 알 수가 없단 말이에요. 알았죠? 약속이에요."

당보는 어린아이처럼 약지를 내밀었고, 청명은 손가락을 걸며 오냐. 하고 답했다. 말뿐인 약속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했다.

청명은 번쩍 눈을 떴다. 지독한 술 냄새가 아닌, 가라앉은 겨울 공기가 방을 채우고 있길래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빛이 들어오는걸 보면 밤새 눈 구경 하겠다고 창도 안 닫고 잠든 모양이었다. 저대로 두면 자신은 몰라도 당보는 추워할 것 같아, 허리를 안고 있는 당보의 팔을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찬 공기에 움찔하는 당보의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준 뒤 열려있는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이 차가운 새벽공기와 떠오르는 햇빛에 물들어 반짝반짝 빛났다. 푸른 소나무에도, 달밤을 비추던 강에도 전부 하얀 눈이 내려앉아 혼자 보기엔 아까운 풍경이었다. 청명은 당보를 덮은 이불을 내려 자는 당보를 깨웠고, 당보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왜요 하는 눈으로 청명을 올려보았다.

청명이 제 뒤의 창문을 가리키자 당보는 눈을 몇 번 비비고 몸을 어기적어기적 일으켜 창문 곁으로 다가갔다. 눈이 그친 게 거기서 거기죠. 하고 중얼거리며. 그리고 창밖을 본 당보는 이런 제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달밤에 눈이 흩날리는 것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떠오르는 주홍빛과 그늘의 서늘한 푸른빛이 어우러져 새하얀 눈밭에 번져나가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청명은 그렇게 좋은가 싶어 내심 뿌듯했다. 당보의 벌어진 입에서는 소리 없는 감탄과 입김이 흘러 나왔고, 양 볼과 창틀을 잡은 손의 마디마디는 붉게 변해있었다. 추운 줄도 모르고 넋이 나가 있으니 제가 챙겨줘야지 싶어 떨어져 있던 이불로 당보의 몸을 둥글게 감싸주었다.

코 끝에 걸리는 겨울 냄새와 눈 냄새, 청명의 매화향. 얼굴을 비추는 따스한 햇살과 이불의 온기, 첫눈. 다람쥐라도 지나갔는지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후두둑 하고 떨어지는 눈을 보니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흔한 눈사람 하나 만들어 보지 못한 어린 시절.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화된다지만 끔찍한 기억은 여전히 미화되지 않은 채 당보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이건 당보의 나쁜 습관이었다. 되돌아가지 못할 시절을 떠올리고 곱씹는 것. 이제는 이해하지만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행동들, 말, 눈빛. 끊임없이 잘리고 다듬어져 하나의 무인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했던가. 그렇기에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버리는 것은 당보의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 삭막하고 딱딱한 집안이 아닌 생명이 느껴지는 풍경. 자유와 편안함. 모든 것은 그 순간을 잊게 만들면서 동시에 떠오르게 만든다. 그리고 당보는 문득 자신이 겨울에 대한 즐거운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출했을 때부터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었고, 커서는 낭만을 잃어버렸기에.

"도사 언니."

"어."

"저희 눈사람이라도 만들까요?"

청명은 당보가 종종 상념에 잠긴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반짝이며 풍경을 보던 눈동자가 아무 감정을 담고 있지 않음을 눈치챘을 때. 처음엔 억지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말로 주의를 돌려보고 답지 않게 입을 맞춰 시선을 제 쪽으로 돌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청명은 가만히 당보를 기다린다. 무엇이 너를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는 몰라도 깨어난 뒤 널 잡아줄 한명은 필요했으니.

청명은 조용히 머릴 묶고 장포를 챙겨입었다. 아직도 멍한 당보의 어깨 위에 이불대신 장포를 걸쳐주고, 매화색 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리면 당보는 그제서야 청명에게 시선을 준다. 차가운 당보의 손을 감싸 쥐고 갈까? 하고 물으니 당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을 걸었다. 청명은 나와서도 당보가 아무 말 없기에 아직도 기분이 안 좋은가 싶어 걱정했는데, 밟을 때마다 움푹 파이는 발을 보며 즐거운 듯 웃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호수의 가장자리에 다다르자 당보는 주저앉아 손으로 주변의 눈을 둥글게 뭉치기 시작했다. 옷이 끌리는데도 쪼그려 앉아 눈을 굴려대는 모습이 귀여워 웃고만 있으니 안 하고 뭐하십니까? 하는 핀잔이 날라와 궁시렁 거리며 눈덩이를 굴렸다.

청명이 하나를 만들고 기다리니 금방 당보가 조그만 3개의 눈덩이를 굴리며 청명의 곁으로 다가왔다. 당보는 자신의 골반까지오는 큰 눈덩이 하나와 무릎까지 오는 눈덩이 3개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거 하나만 너무 큰데요."

"니게 작은 거지. 이 정도는 되야 사람만 할 거 아니야."

"저는 3개나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누가 눈사람을 사람만 하게 만듭니까? 다 요만하게 만들죠."

당보가 자기 허벅지쯤에 손을 올려 높이를 표시했다. 그럼에도 청명이 뭐, 어쩌라고 하는 눈빛을 보내니 당보는 누가 그렇게 크게 만드냐고요.. 하며 3개의 눈덩이들을 다시 굴렸다.

청명은 왠지 눈에 익은 나무의 아래에서 당보를 기다렸다. 자신보다 작은, 당보의 키 쯤 되는 것이 심어진 지 얼마 안 된 나무 같아 나뭇가지를 살살 흔들어 쌓인 눈을 털어냈다. 그러고 있자 당보가 매화나무네요? 하며 커다란 눈덩이들을 하나씩 청명의 곁으로 가져왔고, 청명은 먼저 가져온 2개로 눈사람을, 당보는 남은 2개로 눈사람을 만들었다.

사람만한 나무를 사이에 두고 눈사람이 2개나 있으니 충분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보는 곧장 쓸만한 나뭇가지를 줍기 위해 움직였고, 청명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눈을 뭉쳤다. 주먹만 한 눈덩이 하나를 만들고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꽂아 눈사람 위에 얹으니 제 뒤에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당보랑 다를 게 없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청명이 당고를 만드는 사이, 당보는 긴 나뭇가지 서너개를 들고 달려왔다. 제멋대로인 나뭇가지의 길이를 일정하게 맞추고 바깥은 위로, 안쪽은 아래를 향해 꽂아 눈사람끼리 손을 잡는 모양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손가락 만한 나뭇가지로 한참 꼼지락 거리더니 청명은 ( ¯ − ¯ ) , 자기는 (*´ ワ `*) 하게 얼굴을 만드니 청명이 곧장 당보의 머리에 주먹을 박았다.

당보는 아프다며 엄살을 피우면서도 한걸음 물러나 완성된 눈사람의 모습을 감상했다. 자신과 도사 언니처럼 손을 잡고 다정하게 있는 모습이 좋아 헤벌레 하다 제 눈사람 위에 만든 적 없는 눈덩이가 얹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동그란 눈덩이에 가지가 꽂혀있는, 비녀를 꽂은 제 머리와도 같은 눈덩이는 청명이 만든 것이 분명했다. 당보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감동받은 얼굴로 청명을 돌아보았고, 청명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긁적였다.

"내가 준 비녀가 있어야 너 잖아."

그 말에 당보는 제 소매 안의 녹색 머리 끈을 꺼내 청명 눈사람의 목에 빙 둘러 리본을 매어주었다. 그리고 청명의 곁에 다가와 손을 잡았다.

"녹색 머리 끈이 있어야 도사 언니죠."

자신들처럼 손을 잡고 있는 두 개의 눈사람은 이제야 완전해 보였다. 청명은 표정까지 똑같다며 웃는 당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녹색 끈을 매어준 것이 마음에 드니 이번만 봐주자 하고 생각했고, 당보는 이런 청명의 생각을 모른 채 작게 중얼거렸다.

"사라질걸 생각하니 아쉽네요.."

"뭐가 아쉽냐. 다음에도 만들면 되는 것을."

"바쁘거나 중요한 일 때문에 못 만날 수도 있잖아요. 상황이 여의치 않을 수도 있고."

"바빠도 눈사람 하나 만들 시간은 있겠지. 아니면 뭐... 화산에서 지내던가. 첫눈이 올 때까지."

"눈은 매년 올 텐데요?"

"그럼 매년 있으면 되겠네. 어차피 너 하는 것도 없잖아."

청명은 떨리는 마음으로 당보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름 청혼의 의미도 담았고, 정말 겨울에만 지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제 옆에 눌러앉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당보는 붉어진 얼굴의 청명이 장난으로 대꾸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한 말임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쿵쿵 울리는 이 심장 소리가 부디 청명에게 들리지 않길 바라며. 한 단어씩, 떨리는 목소리로 제 진심을 담아 내뱉었다.

"저 사천 독쟁이입니다. 연초도 맨날 피고, 비무하자 성가시게하고. 그리고 언니보다 약하고 아이도 못 낳고. 얼굴은 좀 예쁘지만 저보다 더 예쁘고 어린아이들도 마음만 먹으면 취하실 수 있잖아요. 진짜 저로도 괜찮으십니까? 저랑 혼인하는 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청명은 코웃음 치며 당보의 머리를 툭 쳤다.

"책임져준다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겁나?"

"제가 아니라 언니가!"

"나는 너로 충분하다. 다른 제자들이 눈치 보이면 심처로 들어가던가, 당가에서 지내던가. 그러면 되겠지."

당보는 청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쩐지 맞잡은 손에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고, 청명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전해져 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저랑 당가에서 지내요... 당가는 부인을 안으로 들이니까요. 언니도 화산에서 저랑 그런 거 하기엔 눈치 보이실 거고..."

"내가 눈치 볼게 뭐 있다고."

당보는 맞잡은 손을 풀고, 청명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겨울 같지 않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얼굴은 매화빛 눈동자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어릴 적 제게 좋다 고백해오던 아이와 닮아서, 바람에 흩날리는 눈과 언제나 제게 향해지는 다정함에 당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뜨거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수초간 닿아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당보는 감았던 눈을 뜨며 청명에게 물었다.

"이런 거... 하실 수 있겠어요..?"

청명은 자신을 보는 당보의 허리를 제 쪽으로 가까이 끌어 당겼다. 답지 않게 뜨거운 몸은 당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녀석이 꼬리를 내리고, 온몸을 붉게 물들인 채 자신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모습에 청명은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취향 참 지랄맞다는 생각과 자신만 볼 수 있도록 어딘가에 가둬두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이러니 애초부터 청명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가둬 둘 수 없다면 항상 제가 옆에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당가에서는 할 수 있지."

청명의 대답에 당보는 환한 미소로 청명을 마주 안았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평소의 두근거림으로 바뀔 때까지. 둘은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후일담

"너는 내가 왜 좋냐?"

청명은 제 다리를 베고 누운 당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눈이 마주치면 헤실 웃는 당보의 미소가 잘 보이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청명의 질문에 당보는 웃으며 청명의 배에 얼굴을 비볐다. 기껏 넘겨준 머리가 다시 얼굴을 가림에도 청명은 짜증 하나 없이 또다시 머리를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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