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합본]

배우 당보 X 검도 선수 청명 | 현대 AU

마노 글 모음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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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맞춤법과 띄어쓰기 오류, 오탈자 수정을 거친 본편과 외전을 모아둔 합본입니다. 목차는 하단을 참고해주세요.

본편

上. 내가 없는 당신은 그런 얼굴인가 싶어서

中. 너 보여주려고 찍고, 올린 거라고

下. 앞으로의 미래에도 네가 있으면 좋겠는데

에필로그. 뻔한 수작인 걸 알면서도

외전

고백. 당신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담배. 매실 향 밖에 안나요. 좋아하시잖아요?

재결합. 주인 없다고 티를 내는구나

上. 내가 없는 당신은 그런 얼굴인가 싶어서

- 기사 보셨어요?
[여배우 ○○, 전 국가대표 청명과 단둘이 카페에....]

- 기사 찐임? 그래서 미국 간 거야?
[베일에 싸인 세리머니의 주인, 드디어 밝혀져....]

- 이거 삼촌 얘기 아니에요?
[계속되는 럽스타그램 의혹. 커플룩과 커플링까지....]

띠링 띠링 띠링

“이게... 뭐야?”

당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애꿎은 전원 버튼만 괴롭혔다.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화면이 켜져 새로운 연락이 오고, 디엠이 오고, 카톡이 오고, 문자가 오고.... 분명 아침에 100%로 충전한 배터리는 12시도 안 돼서 방전 직전에 멍하니 있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저와 형님의 사이를 아는 사람들부터 건너 건너 얼굴만 익힌 모든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는 듯했다. 연락이라곤 새해 안부밖에 없는 사람들, 고등학교 지인들, 남자랑 사귄다는 걸 안 뒤로 연락을 끊어버린 가족들, 아까부터 제 눈치를 보는 현 직장동료들까지. 어쩐지, 평소보다 따라붙는 시선이 많더라.

지금이 11시 40분이니까 한국은 새벽 1시쯤. 전화를 하면 받긴 하겠지만 듣는 귀가 많은 여기서 섣불리 연락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일어나면 다른 쪽에서라도 연락을 줄 테니, 저는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당보 씨, 준비할게요.”

“네.”

- ...너 괜찮냐. 진짜 헤어졌어?
[데이트 목격담 속출.... 첫 만남은 3년 전 모 프로그램....]

문자라도 보내둘까 청명과의 대화창을 들락날락하는 사이, 신경 쓰이는 기사에 당보는 재빨리 알림을 클릭했다. 단순히 사진을 갖고 노는 다른 기사랑은 차원이 다른 제목을 차마 모른 척 넘길 수 없었다. 형님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서로 떨어져 지낸 지 벌써 반년째였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기사에서 주장하는 목격담은 둘이 같이 음료수를 사더라, 청명 선수의 경기를 응원하러 왔더라 같은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행동의 나열이었다. 증거 사진이라며 올린 것도 전부 3년 전 사진이고, 의심 가는 몇 가지 내용도 전부 청명의 입으로 해명을 들어 종결된 것들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형님이 날 두고 무슨 바람이람? 당보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어떻게든 짜맞춰 둔 사진들을 훑어보았고 끝없이 내려가던 손가락은 하나의 사진에서 멈췄다.

나란히 케이크 진열장 앞에 앉아, 청명은 늘 고르던 생크림 케이크를 가리키고 여자는 다정히 웃어주는 사진. 외부인이 찍었음을 증명하듯 흐릿한 초점에 여자 쪽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상대는 자신이 아니었고 케이크를 보는 저 얼굴은 전 국민이 아는 얼굴이라 목격담에 오른 것이다.

사복 차림인 걸 보니 휴일이거나 은퇴한 뒤의 사진일 텐데, 하필 흐릿하고 검정만 고집하는 청명이라 사진만 보고는 정확히 어느 때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하필 자세히 살펴볼까 하는 순간 폰은 꺼져버렸고, 문 너머로 저를 찾는 목소리가 커지니 수사는 잠시 중단. 하는 수 없이 당보는 폰을 충전기에 꽂아두고 대기실을 나갔다.

저런 사진에 휘둘리지 말고 6시간 뒤 올 애인의 연락을 믿자고 되뇌면서.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당보는 인사들에 대충 웃어주며 서둘러 대기실로 향했다. 예상보다 지체된 촬영으로 체력적, 정신적인 피로가 평소의 배는 달했기 때문이다.

무슨 기사가 터졌는지 촬영이 길어질수록 노골적인 시선은 자꾸만 늘어갔다. 과장 없이 제가 당가 사람이라고 밝혀진 날보다 더한 시선을 받는 것 같았다.

시작할 땐 비어 보이던 세트장은 끝내 사람들로 가득 찼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는 전체적인 분위기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다. 제 움직임 하나하나에 따라붙는 눈은 귀여웠고, 쉬는 시간만 되면 원하지도 않는 배려를 하며 말을 붙이려는 건 애교로 보였으니 말 다했지.

“당보 씨,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술이라도 한잔,”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은 피곤해서요.”

말을 자르고 나온 거절에도 상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초면에 실례인 것도 알고 거절하면 물러나니 다행이지, 정말 문제는 저런 것들이다.

“청명 선수의 연애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이어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다짜고짜 녹음기에 카메라라.... 어디서 유출된 건지 대기실 앞엔 스태프라 적힌 옷을 입고 마스크를 눌러쓴 사람이 대여섯 명 서 있었다. 무시하고 문을 열면 제 뒤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대기실을 촬영하는데 이것들은 사생활이라는 개념도 없는지. 가만두면 제 짐까지 손댈 기세라 당보는 널브러진 짐들을 죄다 가방에 쑤셔 넣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찰칵!

차량의 문이 닫히자마자 셔터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게 낫다. 형님과 엮인 기사에 제 이름이 거론되느니 파파라치 사진이 찍히는 게 차라리 나았다.

 

“바로 호텔로 가실 거죠?”

당보는 가방을 뒤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타자마자 출발해 곧장 호텔로 가는 줄 알았는데, 따라붙은 기자들을 보고 우선 차부터 출발시킨 모양이었다.

아무렇게 집어넣어 엉망인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찾아 꺼내고, 재부팅을 기다리는 동안 당보는 멍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한산한 거리는 아까까지 혼란스럽던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들려오는 음악은 잔잔하고 마침 금메달을 걸고 환하게 웃는 청명이 작은 화면을 가득 채우니, 당보는 혹시 하는 생각에.

“한국에서 온 연락 있습니까?”

잠금을 풀기도 전 매니저에게 물었다.

“없었습니다.”

곧바로 들려오는 대답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럼 내 쪽으로 연락했나? 당보는 우르르 밀려드는 알림을 무시하고 청명과의 통화 기록만을 확인했지만, 그 역시도 예상외라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 기록은 12시 13분. 그것도 어제 점심, 제가 건 게 마지막이었다. 지금 한국은 오전 1시 정도니, 기사도 확인하고 대응을 끝내기까지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연락을 안 해?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에 당보는 곧장 인스타로 들어가 청명이 올린 스토리들을 확인했다. 첫 스토리는 아침 식사, 두 번째는 하천 위의 오리 한 마리, 2시간 전 올라온 세 번째 스토리는 운동복을 입은 채 가방을 메고 벚꽃길을 걷는 청명의 뒷모습이었다.

당보가 아는 청명의 하루는 아침 먹고 조깅, 점심 먹고 헬스장, 저녁 먹고 실내 운동이 반복되는 하루였다. 하지만 마지막 스토리는 운동을 끝내는 모습도 아니고, 데이트의 정석 그 자체인 벚꽃을 구경하는 모습이지 않은가. 나 보여주겠다고 각 잡고 스토리를 올릴 사람이 아닌 걸 아는데. 형님 주변에 이렇게 사진 찍어 줄 사람이 없는 걸 아는데.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 오해, 일 겁니다.”

얼굴을 찌푸린 채 핸드폰만을 응시하는 당보의 모습에 매니저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렇게 얼굴을 구겨도 영화 같으니 배우는 배우구나 하는 말은 속으로 삼키며.

“뭐, 그렇겠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곧 정정 기사도 뜰 거고, 두 분이 서로 좋아하는 걸 알고 계시니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기사로 정정하지 않았으니 무소식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스토리로나마 소식이 있으니 바람의 확정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매니저님은 바람이라고 생각하세요?”

“네, 네?”

“애인이 바람피운다는 기사가 떴는데, 해명은 없고 스토리로 데이트 인증에. 12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말을 안 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냐고요.”

“....”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당보는 의자에 머릴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도 아니었다. 엄한 사람 괴롭힌다는 자각도 있었고, 화풀이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냥... 다 괜찮을 거라고, 우리 사이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위로가 듣고 싶었을 뿐이다.

 

당보는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전화를 제외한 모든 알림을 끄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시침이 새벽 2시를 향해 가는지라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시간이나 때울 겸 내일 촬영에 쓸 대본을 읽고, 야경도 잠깐 봤다가 와인도 서너 잔 마셨다.

“진짜 조용하네....”

하루 종일 번쩍거렸던 건 착각이었다는 듯 조용해진 폰을 당보는 가만히 내려보았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작 기사 하나에 애인을 못 믿고 추궁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관뒀다. 만약 거짓말을 한다 해도 한국으로 가지 않는 이상 진실을 알 수 없는 건 똑같으니, 결국 어느 쪽이든 자기만족에 불과하지 않은가.

“형님은 스토리만 올리면 다야? 먼저 전화 한번 해주지도 않고, 카톡도 없고.... 내가 궁금하긴 해요? 우리가 사귀는 건 맞나?”

멈춰있는 사진에 당보는 들을 이 없는 투정을 부렸다. 화면 속 청명은 아무 고민 없이 기뻐하는데, 내가 없는 당신은 항상 그런 얼굴을 하고 있나 싶어 기분이 조금 울적해졌다.

- 형님 오늘 올라온 기사 봤어요? 형님이 누구랑 사귄다던데ㅋㅋㅋ

- 여긴 럽스타그램이라고 난리 났어요. 저 몰래 커플룩도 맞춰 입고, 같이 케이크도 고르시더만. 누구 생일이라도 되나 봅니다?

- 그냥 좀 유명한 팬인데 오늘은 기자가 오더라니까요. 이제 형님도 꽁꽁 싸매고 다니셔야겠수.

- 스토리 봤습니다. 그렇게 잘 찍는 분이 있으면 진작 소개 좀 해주지 그러셨어요. 형님 애인은 종일 시선에 죽는 줄 알았는데, 벚꽃 구경도 가고. 아주 즐거우십니다.

- 형님,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우리 정말 헤어집니까? 요즘 한국은 헤어지자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해요?

당보는 채팅창 가득 채운 메시지를 죄다 지워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별 영향은 없지만 알코올도 들어갔으니 괜히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자자. 이것이 당보가 내린 결론이었다.

지이잉

“형 전화 옵니다!”

“이 시간에?”

멀리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청명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애들이랑 놀아준다고 소지품은 전부 두고 왔건만, 고작 전화 하나 때문에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에 짜증부터 났다. 청명이 생각하기론 전화를 걸 용기가 있는 녀석 중 제가 오늘, 이 시간에, 진이가 하는 검도장에서 일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한창 훈련에 집중해야 할 4시 반에는 더더욱.

“누군데! 애들이면 그냥 끊기게 둬.”

청명은 청진을 향해 소리쳤다. 정말 중요한 일이면 다시 연락하든가 문자를 보내든가 할거고, 그때 봐도 충분할 테니까. 하지만 청진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팔만 휘적휘적 흔들어 댔다. 한 팔을 머리 위로 올리기도 하고 양손으로 뭘 만들려다가 혼자 머릴 짚고. 그러다 주변을 살피더니 입을 뻐끔대는 것이다.

‘당보 씨요.’

“야! 나랑 자리 바꿔!”

헉 사범님 전화 받으러 간다. 여자 친구가 전화했나 봐. 전에 없다고 하시지 않았어? 그럼 남자 친군가 보지. 나 전에 잠금화면 봤는데 머리 긴 남자 사진이었어. 잘생겼어? 뒷모습이라 얼굴은 못 봄. 근데 사범님 눈 높잖아. 그럼 무조건 잘생겼겠지.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청명은 성큼성큼 청진이 있던 언덕 위로 올라갔다. 황당한 얼굴의 청진을 내려보내고, ‘허당보’ 세글자에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억제했다. 설렘 사이 불쑥 왜?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당보가 전화하고 싶다는데 안 받을 이유도 없고 나도 목소리 들어서 좋고.... 뭐 애인 사이가 다 그런 거 아니겠냐.

“여보세요.”

“....네, 여보에요.”

약 하루 만에 듣는 당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이 낮았다. 장난스러운 애교는 여전하지만, 이것마저 기분을 가리기 위한 수작 같아서. 제가 모르는 큰일이라도 생겼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장난치지 말고. 무슨 일인데.”

“갑자기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럼 전화는 뭐야. 거기 지금 새벽 3시잖아. 내일도 촬영 있는 거 아니야?”

“형님도 제 목소리 듣고 좋잖아요.”

“말 돌리지 말고.”

청명은 조용해진 당보를 그저 기다렸다. 평소 같으면 웃으며 너스레를 떨 녀석이 조용하니 뭔가 일이 있구나 싶어서. 축 처진 널 안을 수도, 마주 앉아 이야길 들어 줄 수도 없는 이 상황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님, 얼굴 보여주면 안 돼요?”

“그럼 대답할 거냐.”

“네에.”

작지만 확실한 대답에 청명은 버튼을 눌러 영상통화로 전환했다. 짧은 연결음 동안 머릴 정리하고 오랜만에 얼굴을 보나 싶었지만, 정작 반기는 건 어두운 화면이라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에 금방 표정을 바꿨지만 말이다.

“당보야. 보여?”

“손도 보여주세요.”

청명은 별생각 없이 양손을 번갈아 화면에 비춰주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당보는 입고 있는 옷부터 시작해 귀를 보여달라, 목 주위를 비춰라, 머리는 뭐로 묶었냐 하고 자기 말만 해대니 얼마 없는 인내심은 금방 바닥을 치고 말았다.

“네 얼굴이나 비추고 말하지?”

“아, 맞다. 잠시만요.”

어둡던 화면이 완전한 암흑으로 덮이고 부스럭 소리와 흔들리길 몇 번. 곧 환한 빛과 함께 청명의 시야엔 잔뜩 흐트러져 침대에 누운 당보가 화면을 채웠다. 늘 입던 짙은 녹색의 로브는 쇄골을 훤히 드러내고, 눈은 풀려서는 바보같이 헤실거린다.

미친 새끼. 청명은 황급히 화면을 손으로 가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공원엔 저와 청진, 그리고 검도장에 다니는 애들뿐이고, 그마저도 청명과는 거리가 있는 언덕 아래에 모여있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너, 아니, 누가 전화할 때 옷을, 그따위로 입어.”

“형님도 아는 옷인데?”

“그러니까....”

청명은 저보다 저 옷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저 옷의 어딜 당기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당보가 허구한 날 천 자락을 들치며 제 반응을 즐기는 것도 안다. 지 혼자 짜증 내고 미안하다며 붙어올 때 입는 옷이었고, 한 번에 벗기 편하다고 좋아하는 옷이었다. 한마디로 날 유혹하겠다고 입어대는... 옷인데...? 그걸 왜 입고 있어?

“너 바람났냐?”

“네? 제가요?”

“그래. 나도 없는데 그걸 누구 보여주려고 입고 있어?”

“그렇다고 보통 바람피운단 말이 나옵니까?”

“그럼 그건 왜 가져갔는데. 나도 없는 미국에서 그거 입고 지랄하는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상식적으로 바람을 피우면 이런 식으로 전화를 걸겠습니까. 저 못 믿어요?”

제대로 된 해명은 없고 얼버무려 넘어가려는 태도에 청명은 당장이라도 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못 믿냐고? 정말 못 믿는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닌가? 일하는 거 알면서도 전화를 걸고, 검사라도 하듯 몸을 뜯어보고, 자기가 잘못한 건 알아서 대답도 안 하고.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말장난할 기분 아니다.”

“아니, 오랜만에 얼굴 보는데 옷 하나 때문에 싸워야 하냐고요. 그냥 잘 때 입는 옷이잖아요. 자려고 입은 거고 그러다 보니 형님이 생각났고,”

“누가 싸우재? 좋게 좋게 넘어가려는데 니가 먼저 개 같이 굴었잖아.”

“가뜩이나 피곤한데 형님까지 이러셔야 해요? 그냥 넘어가면 안 되나? 앞으로 형님 없을 땐 안 입으면 되잖아요.”

“두 번 말 안 해. 카메라 돌려.”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당보는 카메라를 돌려 머무는 방을 보여줬다. 침대 옆은 비어있고, 소파엔 겉옷들이, 그 앞의 탁자엔 대본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빈 와인잔과 와인병이 3병...? 도저히 자신을 믿을 수 없던 청명은 연신 눈을 감았다 떴지만, 와인병의 수는 변함이 없으니, 저건 환상이 아닌 현실일 것이다.

제정신인가? 청명의 머릿속을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이었다. 촬영에 방해된다며 전날엔 절대 술을 입에 대지도 않던 녀석이, 그것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금주를 시키던 놈이. 지금 혼자 와인을 3병이나 처먹은 거야?

“너, 저 와인, 혼자 다 마신 거냐?”

“그럼 누구랑 마십니까? 지금도 옷 때문에 애인을 쥐 잡듯이 잡아대는데.”

“아니, 너 내일 촬영은? 이번 주 내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제가 촬영이 있든 없든 형님이랑은 상관없잖아요.”

“보야, 너 지금 취했다. 내일도 일할 텐데 기운 빼지 말고 자자. 응?”

청명은 씩씩대는 당보를 달래고자 다정히 말을 건넸다. 얼굴과 목이 붉게 물들어 제대로 취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고집부리는 것도 그렇고 기분 좋으면 바보같이 웃어대는 것도 딱 취했을 때 반응이라 우선 재우고, 멀쩡한 상태로 대화해야겠다는 결론을 세웠다. 하지만 당보는 청명에게 있어 가장 예상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왜요. 이젠 관심 없어요? 아아. 어차피 잡은 물고기니까 먹이는 안 준다 이건가?”

자기가 더 상처받은 얼굴로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정말이지 생각도 못 했다.

“당보야 지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우선 자고 일어나서 얘기하자.”

“무슨 오해요? 여기 무슨 말이 도는지는 알고 하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술 깨고, 아침에 길게 이야기하자고. 너 지금 제정신 아니잖아.”

“왜, 자꾸 끊으려고 그러는데요. 이제 저랑 말도 섞지 말래요? 저 술 깨고 일어나면 입장문 내고, 삼자대면해서 우리 헤어집니까? 형님보고 그러래요?”

“아니, 뭔....”

“난 지금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형님이 나한테 화내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왜 이런 개 같은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요. 지금 이게 다 제 잘못입니까?”

청명은 말문이 막힌다는 말의 뜻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턱 끝까지 말이 차올라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데 가까스로 이성이 틀어막고 있는 느낌. 머릿속에선 감정에 충실한 단어들이 떠오르지만, 한 구석에 있는 이성이 막아서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어떻게든 단어를 골라 문장을 만들어봐도 당보의 얼굴을 본 순간 전부 흩어져버리니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래요, 사과를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데이트 중에 술 처먹고 구질구질하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귀찮게 시간 끌지 말고 여기서 끝내시죠. 헤어집시다.”

“뭐? 아니, 잠깐 당보!”

아까까지 보던 처연한 울먹이는 얼굴은 어디 가고 분노에 찬 험상궂은 얼굴이 까만 화면에 비쳤다. 곧바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죄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고, 카톡, 문자는 전부 보질 않았다. 혼자 잡은 물고기니 뭐니 주절주절하더니 이제는 헤어지자고? 내가 씨발 뭐 때문에 너랑 헤어지는데? 내가 널 사랑하고, 네가 날 사랑하는데 우리가 왜?

中. 너 보여주려고 찍고, 올린 거라고

 

“진아, 비행기 몇 시 출발이라고?”

“내일 아침 10시요.”

청진은 캐리어에 옷과 충전기, 음식을 집어넣고 있는 청명을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전화가 왔다며 신나게 달려갈 땐 언제고 잡으러 가야 한다고 짐을 싸고 있는 형을 차마 좋게 볼 순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형이, 그것도 헤어진 전 애인을 잡으러 미국까지 가신다는데 그 얼굴이 사람 하나 묻을 것 같은 얼굴이라 전 애인분께 아주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전 애인인 그분과의 전화가 끝나고 형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좋은 얘기가 오가지 않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청명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이 굴던 그가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길래 무심코 오래 버텼네요. 라는 말이 나와 온몸을 맞았지만 그럼에도 그에 대한 원망은 단 1g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바람피운다는 오해를 하는 것 같다는 말에 청진은 진심으로 당보의 정신건강을 의심하게 되었다. 어딜 봐도 좋은 구석이 없는 제 형을 그쪽 말고 누가 좋아할 것이며, 형은 한 번에 두 사람을 사랑할 정도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그런 기사가 나왔다면 제가 모를 수가 없었다. 제가 몰랐다면 청문형이, 혹은 제자들이, 다른 선수가 발견 즉시 제게 연락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 이 경우엔 미국에서 시작된 기사가 아직 한국까지 퍼지지 않은 거겠지.

청진은 청명이 기억하는 대화 내용을 토대로 바람, 환승 등의 키워드를 청명의 이름과 조합하여 검색했다. 한글로는 깨끗하던 검색 결과에 영어로도 검색을 시도했고, 그 결과 온갖 사진과 자극적인 제목들로 뒤덮인 기사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누구랑 연애를 해?”

“저도 미치겠습니다. 이 사진은 또 언제 찍힌 건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저분하고는 촬영 이후로 연락한 적이 없는데.”

둘은 당보도 오해할 수밖에 없던 누가 봐도 다정한 데이트 사진을 보고 있었다. 당사자도 기억하지 못해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사진. 혹시 카페나 상대에 대한 정보가 있을까 SNS를 뒤져봤지만 전부 추측일 뿐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그때 어땠는지 기억은 나요?”

“뭐한 게 있어야 기억하지. 그냥 검도 수업하고 헤어졌다니까?”

청명은 검도를 가르치라길래 가르쳤고 관련해 말을 나눈 게 다라며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청진이 기억하는 영상은 청명의 기억과는 달랐다. 겉보기엔 단순히 검도를 배우는 영상이었으나 그해 방영된 드라마 홍보의 하나로 은근한 스킨십이 빈번하게 비쳤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드라마가 다친 검도 선수와 그런 선수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방영했던 터라 드라마가 현실이 된 건 아니냐며 논란이 있기도 했다. 굳이 허리를 끌어안고 자세를 잡아주거나, 서로의 땀을 닦아주고,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해 주는 모습이 단순 비즈니스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청명이 상대의 머릴 넘겨주고 5초간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장면은 다각도에서 촬영되어 지인밖에 없던 팔로워를 일주일 만에 10만으로 만들었으니 말 다했지.

“그때 당보 씨랑 싸웠잖아요.”

“싸운 게 아니라 오해를 푼 거지.”

“오해는 무슨. 제발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매달렸잖아요. 다시는 그런 촬영 안 하고, 경기에만 집중하겠다고 한 걸 다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용케 안 헤어졌네요?”

“...졌어.”

“네?”

청명은 멍청하게 되묻는 청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게 놀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만, 바쁘게 기사와 영상을 찾아보는 동생은 정말 듣지 못해 물은 것 같았다.

“헤어졌다고. 반년 정도 당보랑 연락 안 했어.”

청진은 쓸데없이 나불거려 필요 없는 정보를 잔뜩 얻어버린 방금의 저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몇 달 조용하다가 금방 데이트하러 가길래 아무 문제 없는 줄로만 알았지, 헤어졌다가 재결합한 사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미친 듯 케이크를 퍼먹더니 술병에 죽으려던 그날인가? 아니면 훈련 내내 멍해 있다 한 소리 듣고 구석에서 혼자 훌쩍이던 그날? 아니면 그 사이? 아니면 둘 다?

“뭐 옛날 일이고, 지금은 잘 사귀고 있잖아.”

아뇨, 현재 진행형인데요. 청진은 불쑥 떠오른 말을 억누르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어느 날인지가 아니었다. 재결합에 실패한 청명을 맞이할 미래를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기사는 최대한 빨리 내려보겠습니다. 입장문은 소속사랑 맞춰서 낼 거니까 그 부분도 어필하십쇼. 사진은... 어떻게 잘 해명해 보시고요.”

“무슨 입장문? 당보랑?”

“공개 연애하시게요? 허락은 받았습니까?”

“소속사랑 뭐 한다며.”

“제가 말한 건 여배우 쪽입니다. 그쪽은 모르고 있을 텐데 저희 쪽에서 갑자기 부인 할 순 없잖아요.”

“아. 그렇지.”

이제야 알아챈 듯 한 박자씩 늦는 대답에 청진은 밀려오는 두통의 기운을 느끼며 머리를 감싸안았다. 저걸 보내도 될까? 지금도 사고회로가 전부 한 사람에게 쏠려있는 저 인간을, 보내는 게 맞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진은 청명을 막기는커녕 날개를 달아 주었다. 매니저를 통해 호텔의 같은 층에 방을 잡았으며, 청명에게 잡혀있던 두 달간의 모든 일정을 취소시켰다. 만일을 대비해 근처 분위기 좋은 식당과 술집을 정리해 주었고, 상황에 따른 적절한 해명과 형이 도착할 때쯤 입장문을 내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에 더해 무조건 같이 돌아오라며 한 달 치 짐을 싸주기까지 했으니, 청명으로선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던 것이다.

“넌 왜 항상 그런 식이야?”

앞서가던 남성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려세운 여성이 물었다. 다정한 커플 같지 않게 싸늘히 내려보던 녹안의 남성은 잡힌 손을 뿌리치며 지긋지긋하다는 듯 대답했다.

“또 뭐가 문젠데.”

“내가 많은 거 바랬어? 사과 한번 해달라는 게,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어,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이럴 거면 오늘 데이트는 왜 하자고 했어? 저번처럼 핑계나 대지, 왜 나와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

“하.... 네가 데이트 하자며. 다른 커플들처럼 영화 보고, 카페 가고 싶대서 지금 해주고 있잖아. 뭐 내가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해야 끝나는 건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지금 내가 사과하나 받으려고 이러는 줄 알아?”

“아니면 뭔데. 고작 사과하나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면,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지. 나도 좀 알자.”

“고작?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래, 넌 그 잘난 자존심밖에 모르지. 그걸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이 한 뼘 위의 남성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자신과 다른 무감정한 얼굴에 꽃다발을 던져버리고 성큼성큼 화면을 빠져나갔다. 남은 건 갈색 머리의 남성이 떨어진 꽃다발을 내려보는 장면뿐이라, 금방 화장을 고친 배우의 신호에 맞춰 촬영은 재개되었다.

스태프들은 남성의 연기에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손으로는 조금씩 주변을 정리했다. 카메라 앞에 홀로 선 배우는 NG한번 내지 않는다는 그 당보라, 이번 씬도 곧 마무리하겠네 싶었던 것이다. 표정도 무표정으로, 아무 대사 없이 내려보기만 하면 되는 장면이라 시간이 끌릴 요소도 없었다.

그렇게 수 초가 흐르고, 감독의 신호가 떨어지기 직전 울긋불긋한 뺨을 타고 하나의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설마 NG인가? 대본에 없던 눈물에 스태프들은 긴장한 채 이어질 감독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눈물 연기는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아 그만큼 촬영이 늘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감독은 당보의 연기를 만족스러워했고, 모니터링 끝에 나온 수고의 말에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저녁 드시고 가십니까?”

“바로 호텔로 가죠.”

어제보다 훨씬 지쳐 보이는 모습에 매니저는 군말 없이 호텔로 차를 움직였다. 뭐라도 드셔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그러다 오늘 아침을 또다시 맞이하는 것보다 차라리 푹 주무시는 게 나아 보여서. 거울을 통해 당보의 상태를 확인하고, 자동차가 멈춘 틈을 타 몰래 문자를 보내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며 자신을 위로했다.

물론 매니저는 배우가 머무는 호텔이나 개인정보를 유출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니저로 일하는 5년 동안 촬영 전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연락하기도 전에 준비를 끝내 저를 기다리던 사람이 30분이 지나서 나타난 걸로 모자라 퉁퉁 부은 눈으로 하는 첫마디가.

“미안합니다. 폰이 망가져 시간을 못 봤네요.”

이었다면. 거기에 더해.

“혹시 술 냄새 많이 납니까? 뺀다고 빼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라고 말하다 저 혼자 눈물을 훌쩍인다면 누구든 저처럼 행동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늘 밝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우울함에 잠겨 죽으려고 하는데 살리려면 뭐를 못 하겠는가.

-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1

매니저는 도착했다는 문자를 남기고 조심히 잠든 당보를 깨웠다. 아까부터 사라지지 않는 1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차올랐지만, 이 이상 끼어드는 것이 마냥 좋을 것 같진 않았다.

“내일은 안 오셔도 됩니다. 종일 방에만 있을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그쪽으로 연락하세요.”

당보는 졸린 눈을 비비고는 짐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걱정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얼굴에 애써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면 어서 들어가시라는 목소리가 금방 뒤를 이었다. 이윽고 당보가 엘리베이터에 탄 것까지 확인한 매니저는 이 또한 문자에 남긴 뒤 호텔을 떠났다.

“하아....”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당보는 내내 짓고 있던 미소를 벗어던지고, 잔뜩 지친 얼굴로 벽에 머릴 기댔다. 아침부터 몸도, 정신도 멀쩡하지 않은 상태로 일을 하려니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잠깐의 여유만 생겨도 불필요한 생각들이 머리를 헤집어대 틈만 나면 대본을 읽었고, 그 결과 생각은 멈출 수 있었으나 가만히 있어도 자꾸만 시야가 흐려지는 부작용이 생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하루를 보냈다.

지금이라도 술을 사 올까? 조용히 올라가는 숫자를 보다가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남은 와인도 몇 병 없었고, 그렇다고 룸서비스로 시키기엔 귀찮았기에. 하지만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이 상태면 뭘 먹어도 금방 취해 쓰러질 거다. 이걸 취했다고 봐야 할지 지쳐 쓰러졌다고 봐야 할지는 모르지만, 결과는 같으니 상관없었다.

타이밍 좋게 열린 문에 당보는 조심히 주변을 살피고 객실이 있는 복도로 걸어갔다. 괜히 마주쳤다가 말이라도 걸면 상당히 곤란한지라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번의 코너를 돌고 마주한 복도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았고, 가장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눈앞에 보여 당보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어제까지만 해도 한국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미국에 있어.

당보는 현실을 부정하며 힘겹게 한 걸음 내디뎠다. 조용한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는 누구나 돌아보기에 충분했고, 그건 눈앞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저 인간이 지금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내가, 헤어지자고 한 걸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자꾸만 올라가려는 시선을 내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복도를 걸었다. 문에 반쯤 기대있던 사람이 몸을 완전히 세우니 목적이 저인 건 분명해서, 마음속으론 차라리 팬이기를 바랐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겠지. 옷도 처음 보는 옷이고 모자 때문에 얼굴도 잘 안 보이잖아. 그러니까... 그냥 무시하자.

마침내 문 앞에 다다른 당보는 아무렇지 않게 문고리를 잡았다. 제가 옆에 서도 아무 말 없는 상대에 내심 실망하고, 들어갈지 말지 눈치를 보다 시선이 딴 곳을 향할 때 재빨리 문을 열었다. 저 혼자 들어갈 틈만 열어 몸을 들이밀고자 했으나, 이는 자신과 방을 가로막은 두툼한 팔에 금방 무산되었다.

“잠깐 얘기 좀 해.”

“저는 할 얘기 없습니다.”

“10분. 그 정도는 내줄 수 있잖아.”

“안 되겠는데요. 제가 좀 바빠서.”

당보는 문 사이를 가로막은 팔을 밀어도 보고, 당겨도 봤지만 원래 존재했던 것처럼 청명의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청명의 팔 아래로 몸을 숙여 들어가기를 시도했고, 안타깝게도 문 앞을 차지한 청명의 다리에 막혀버렸다.

“뭐 하자는 겁니까.”

“얘기 좀 하자고.”

“전 할 말도 없고, 들을 말도 없습니다.”

당보는 자꾸만 날카로워지려는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 그럴듯한 말로 내뱉는 데 성공했다. 나쁜 사람 하기 싫어하시니 친히 헤어지자고 해줬건만 뭐가 또 불만인지. 이 상황에도 미안해 하나 없는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시는지.

오직 분풀이에 불과한 말들뿐이라 가까스로 참아냈지만, 정제된 말로는 이 지긋지긋한 소모전을 끝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띵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청명의 팔이며 다리를 때리기도 했다만, 비키지도 않고 힘을 주는 게 아닌가.

“안 비킬 겁니까?”

“얘기한다고 해주면.”

“미쳤어요? 사람 오잖아요.”

“같이 들어가면 되겠네. 그럼 문제없잖아.”

“장난치지 말고 빨리 팔 치우라고요.”

아무리 꼬집고 찔러도 청명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할 뿐 행동에 변화는 없었다. 이대로면 정말 기사 1면에 얼굴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라 순간의 자존심과 앞으로의 커리어를 저울질한 결과, 청명을 방에 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유로워진 문을 열고 당보는 곧바로 소파로 걸어가 몸을 기댔다. 들어오자마자 한 병 비우고 잘 계획은 불청객에 의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리 우리가 헤어진 사이라지만, 추태를 부려 안 그래도 바닥인 호감도를 혐오로 끌어내릴 필요는 없으니. 어느 정도의 예의는 우리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다.

“얘기 안 해요?”

당보는 제 옆을 두드려 아직도 현관 앞에 서서 볼 것도 없는 방을 둘러보는 청명을 불렀다. 찌푸린 얼굴을 보면 또 뭐가 마음에 안 드신 건 맞는데 평소처럼 엉덩이를 붙여오니 원인이 나는 아닌가 하고. 옆에 앉은 청명의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아 10분 타이머를 맞춘 뒤 신호를 주었다.

“나는 너랑 헤어지기 싫다.”

“...계속해요.”

“확인해 보면 알 텐데 기사 전부 내려갔어. 한국은 조용해서 그런 기사가 난 줄도 몰랐고, 사진이 찍힌 것도 어제 알아서 출국하기 전에 진이랑 형이랑 얘기해서 입장문도 냈다. 사람들이 럽스타그램이니 뭐니 하는데 스토리 올린 것도 네가 해달래서 한 거야. 너 보여주려고 찍고, 올린 거라고.”

“네에.”

“목격담이라고 나온 사진은 지금 어디 카페인지 알아보는 중이다. 상대가 누군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찾아보는 중인데 배우 쪽도 본인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거 같더라고. 사진 각도가 절묘해서 그렇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고 자부할 수 있어. 대회 시즌이라 케이크를 살 리도 없고, 샀어도 너랑 먹지 거기서 그분이랑 먹지는 않았을 거야.”

“응.”

“그, 잠깐 이것 좀.”

청명은 또 뭘 해명해야 할지 고민하다 당보가 쥔 핸드폰을 가져갔다. 형이 하는 말은 당보 씨 성에 차지 않을 게 뻔하니 여차하면 기사에 나온 스토리나 해명하라는 청진의 말이 떠올라서. 힘없이 넘겨지는 핸드폰을 받고 유독 반응이 컸던 스토리를 하나씩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게 어제 올린 스토린데. 여기가 검도장 근처 공원이거든? 이번에 벚꽃이 예쁘게 펴서 너도 보여주려고, 전에 남친 짤 뭐 그런 거 갖고 싶다 그랬잖아. 그래서 거기 잘 찍는 애한테 부탁했던 거야. 검정 후드티 하나로 커플룩이니 뭐니 하는 건 넘어가고. 기사에 내가 최근에 카페를 다닌다고 하던데 다 얘들이 사다 준 거 올린 것밖에 없다. 영화 티켓은 네가 좋아하는 거 재개봉한다고 그래서 진이랑 보러 간 거고. 이건....”

청진이 짚어준 것과 기사에서 본 것을 위주로 해명하다 보니 금방 1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청명은 당보 몰래 타이머를 정지시켰다. 눈치채지 못했는지 얌전히 제 말을 듣고 있는 당보에 긴장하며 해명을 이어가던 중.

“이 꽃은 지금도 우리 집에 있어. 애초에 너 주려고 샀던 거고,”

순간 어깨에 기대어진 온기에 말을 멈췄다. 눈가는 붉고 그새 늘어난 병들은 안 봐도 뻔히 그려지는 상황이라, 몸이 안 좋으면 다음에 얘기하자고 할 것이지 뭐 하러 방에 들이고 그러냐. 하고 들을 이 없는 원망만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잠든 당보를 품에 안아 조심히 침대로 걸어갔다.

“...응?”

침대에 눕히자마자 눈을 뜬 당보는 제 생각보다 가까운 청명의 얼굴에 눈을 깜박거렸다. 제 등을 감싼 걸 보면 소파에서 옮겨준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가까울 필요는 없지 않나 해서.

“아니... 너 침대에 눕혀주려고.”

“아, 피곤해서요. 얘기는 끝난 거죠?”

청명은 끄덕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차마 선택할 수 없었다. 끝났다고 하면 이대로 쫓아낼 테고, 아니라고 하면 피곤한 애를 붙잡고 귀찮게 하는 꼴이라 어느 쪽도 달가운 선택지가 아니었다.

“어디까지 기억나는데.”

“사진 막 보여주던 것까지요.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 안 나고.”

“다시 말해줘?”

“됐습니다. 형님이 다 했으면 끝난 거죠. 이제 가도 됩니다.”

진이가 문제라고 했던 것들을 전부 해명했음에도 변하지 않는 상황에 청명은 초조하게 타들어 가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어떻게 그냥 가라는 말이 나올 수가 있냐. 적어도 헤어지지 않겠다던가, 아니면 다시 들어보겠다던가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짜로 가?”

“네.”

청명은 단호한 말에도 몸을 떼지 않고 도리어 한 뼘 정도 거리에 있던 얼굴을 서로의 숨이 섞일 정도로 가까이했다. 마주한 눈에서는 선명한 애정을 읽어내고, 흔들리는 호흡에서 미약한 긴장감을 잡아내며. 기껏 고개를 숙여주어도 아득바득 돌아가려는 네 본심을 헤아리고자 했다.

“...왜? 나 사랑하잖아. 기사도 다 오해였고, 그분이랑은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니까.”

“전 해명하라 한 적 없는데요.”

“그러면 왜 들인 건데.”

“모르죠. 이 지경이 되어도 멍청하게 기대하는 것밖에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이번엔 좀 다를까 했는데 형님은 여전하시니.”

애매모호한 대답에 청명은 코앞의 녹색 눈을 보고, 입술을 한번 봤다가 다시 눈을 마주했다. 제가 생각하는 게 맞냐고 고개를 숙이면 언제나처럼 눈을 감아오니, 그대로 입술을 눌러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몸에 손을 대거나 입을 열어주진 않아서, 장난치듯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쪽쪽거렸고 금세 풀어진 얼굴로 웃음을 참는 당보를 볼 수 있었다.

“정답인가?”

“완전 틀렸습니다.”

“뭐야. 아니라고?”

“순서가 틀렸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사랑해?”

“반만 맞았어요.”

당보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아주 재밌다는 듯 청명을 올려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한 대 쥐어박았을 얼굴이 오늘따라 사랑스러워 마주한 눈을 피하면 커지는 웃음소리는 덤이었다.

“자꾸 놀리지 말고 알려주지 그래.”

“제가 그랬잖아요, 이게 다 제 잘못이냐고.”

제 가슴을 콕 콕 찔러대며 설마 까먹은 건 아니죠? 하고 재촉하는 눈빛에 청명은 비로소 정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가장 쉬운 길을 굳이 돌아가게 만든 제 동생과 기필코 오붓한 시간을 보내주리라 다짐하면서, 반쯤 걸쳐있던 몸을 온전히 침대 위로 올렸다.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해. 다짜고짜 화부터 낸 것도 미안하고....”

청명은 가슴 위에 올라온 손을 제 얼굴 쪽으로 당겨 은색 반지 위에 입술을 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익숙하고도 낯설어 우승이라도 한 것 같은 묘한 흥분감을 주었고.

“사랑해, 진심이야.”

“네에, 저도 사랑해요.”

목을 감싸안은 허락에 참아왔던 애정을 마음껏 퍼부어주었다.

下. 앞으로의 미래에도 네가 있으면 좋겠는데

지이잉

“시끄러...”

당보는 잠에 취한 채 소음의 원인을 향해 팔을 휘적였다. 방에서 진동이 울릴 것이라고는 핸드폰뿐이었고, 소리를 들어보니 자신의 반대 자리나 그 옆의 탁자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팔을 뻗는 족족 두툼한 무언가에 부딪혀 도저히 알람을 끌 수가 없었다.

탁탁

엥 벽인가. 벽치곤 말랑한 것도 같고....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팔에 걸린 무언가를 주물거리니 금방 알았어. 하는 소리와 함께 알람이 꺼졌다. 그리곤 어깨를 끌어당기더니 뜨끈한 어딘가에 머리를 대어주고 이불까지 덮어주는데 그게 또 안락하고 편안해서. 당보는 생각하길 멈추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하여간 잠귀는 밝아가지고.”

청명은 한쪽 팔을 당보에게 내어준 채로 간밤에 온 연락을 확인했다. 이미 시차 적응을 끝낸 몸은 익숙한 루틴을 하자며 난리였지만, 정신은 정반대라 평화로운 지금을 깨고 싶지 않았다. 팔 위의 무게도, 고개를 숙이면 닿는 갈색의 머리카락도, 가슴에 닿은 따뜻한 온기도 전부 놓고 싶지 않았다.

연락의 대부분은 진이에게서 온 것으로 상태는 어떻냐,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 등 영 쓸모없는 말뿐이라 무시했다. 걱정하고 위로하는 말 몇 개에 대충 답장을 보내고, 쓸모없는 광고는 지우며 시간을 보내면 지금 읽씹하는 거냐는 문자가 날라왔고. 이마저도 읽고 답장하지 않자 전화가 걸려 왔다.

“왜.”

“어때요? 잘 됐어요?”

청명은 가슴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곤히 자는 당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제 어깨에 코를 박고 가끔 미간을 찡그리는데 살살 문질러주면 금방 풀어진 얼굴로 숨을 쉬는 모습이 아주 사랑스러웠으며, 손을 건드리면 잠결에도 꼭 잡아주니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아.... 네. 축하합니다. 안 들어도 알겠네요.”

“어. 이제 끊는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바쁜 것도 아니고....... 잠깐, 형 혹시 지금 하고... 있어요? 아니죠?”

볼일이 끝나 끊겠다는 것을 무슨 뜻으로 알아들은 건지. 바들바들 떠는 목소리에는 댁이 그러고도 사람이냐는 욕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하긴 무슨. 울까 봐 건들지도 못한다.”

“어휴.... 나중에 귀국 날이나 알려주세요.”

“야 사진 어딘지 찾,”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사람이 말만 하면 끊고 지랄이네.”

어쩐지 익숙한 상황에 청명은 혀를 차며 짜증을 속으로 참아냈다. 그러자 늘어져 있던 몸이 청명에게 바짝 붙어 가슴에 턱을 기대고 눈을 깜박인다.

“...왜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나른한 눈동자에 담기는 건 저뿐이었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라서. 얼굴을 숙여 입을 맞춰... 주려다 실패했다.

“뭐야.”

“저 방금 일어났어요. 적어도 이 닦을 시간은 줍시다.”

청명은 입을 막은 손 너머로 치우라고 눈짓했다. 그래도 치우지 않자, 손바닥 위에 입술을 붙였고, 고개를 저으며 빠져나가려 들길래 팔로 당보의 상체를 끌어안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형니임. 진짜 안 됩니다.”

“안 되는 게 어딨어.”

“장난치지 말고 놔줘요.”

당보는 청명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 거부를 표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간격은 종이 한 장의 틈도 벌어지지 않았고 진심인가 하는 생각에, 전략을 바꿔 청명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대기 시작했다.

청명은 꽤 저항하나 싶었으나 찌르면 찌를수록 몸을 움찔대더니 끝내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양팔을 들어 항복을 취했다. 의기양양해진 당보는 여유롭게 침대에서 벗어났지만 금방 겨드랑이가 들어 올려져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청명의 아래에 갇힌 채 말이다.

“형님? 제가 이긴 거 아니에요?”

어리둥절한 얼굴은 청명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차 자신에게 손을 댈 거라고 생각조차 못 하는 얼굴이었다. 저 얼굴만 아니었어도 속옷만 내리고 땀 좀 빼는 건데. 넌 진짜 나 만나서 다행인 줄 알아.

“네가 어떻게 이기냐? 내가 봐준 거지.”

“봐줄 거면 끝까지 봐주시, 아! 잠깐, 야!”

당보는 얼굴 가득히 청명의 뽀뽀 세례를 받은 뒤에야 욕실로 갈 수 있었다.

“내가, 내가 안 한다는 것도 아닌데!”

당보는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는 내내 투덜거리는 입을 쉬지 않았다. 그거 조금 기다리면 뭐가 덧나냐부터 시작해, 깨끗하게 닦고 하자는 게 잘못된 거냐, 빨아준 다음에 키스하는 건 싫어하면서 왜 이건 또 고집을 부리냐 등 옷을 갈아입는 동안 쉴 틈 없이 청명의 귀를 괴롭혔다.

“지가 유혹해 놓고 넘어가니까 저러네.”

“제가 언제 유혹했다고 그럽니까? 기분 나빠 보여서 물어본 거잖아요.”

“눈을 이쁘게 접지나 말던가.”

“자기가 좋아해 놓고 또 나보고 뭐라 그래.”

가디건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은 당보는 입을 삐죽이며 청명에게 양팔을 뻗었다. 그 신호를 모르기엔 연애 기간이 너무도 길었던지라 다가가 양손을 잡고 당겨주면, 당보는 일어나는지 안겨드는지 모르게 청명에게 딱 붙었다.

“봐라. 또 꼬리 치지.”

“이건 유혹 맞으니까 넘어오시죠? 안 할 것도 아니잖아요.”

손은 전부 서로에게 묶여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둘은 입을 맞댔다. 가볍게 쪽쪽 대기만을 몇 번, 어느 순간 벌어진 틈새로 신음을 흘려대는데 명백하게 한쪽에서 흘리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유혹한 당보조차도 당황스러워 애써 고개를 피하면 피하는 대로 따라붙어서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호흡을 잡아주기까지 한다.

“흐으, 이제 그만 해요. 이따, 이따 더 하면 되잖, 읍.”

이번에도 당보는 먼저 그만을 외쳤다. 그런데도 청명이 기어코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억지로 몸을 뒤로 물려 숨을 골랐다. 이런 흐름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청명이 하고 싶은 대로 뒀다가는 계획은 고사하고 당장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할 미래가 눈에 훤했다.

“우리 나가기로 했잖아요. 응? 오랜만에 데이트 하자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근데 언제 하자고는 안 정했잖아.”

청명은 태연하게 당보의 입술을 엄지로 문질렀다. 아까와 비교하면 확연히 붉은 입술은 부드럽고 말랑하고 아주 촉촉했다.

“저 옷도 예쁘게 입었는데.... 진짜 안 나가요?”

당보는 눈꼬리를 내리고 가디건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계산적인 움직임을 청명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청명은 당보의 연기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기에. 지금도 이걸 잡아먹어, 말아 하는 눈으로 보는데 제가 뭘 할 수 있겠냔 말이다. 그리곤 입술이 당겨지자, 당보는 순순히 눈을 감았고.

“애교만 부리면 다 되는 줄 알지.”

짧은 입맞춤과 함께 들려온 허락에 와락 청명을 끌어안았다.

 

“아 해요.”

청명이 입을 벌리면 당보는 포크 가득 꽂힌 샐러드를 청명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제 점심부터 먹은 거라곤 과자 몇 조각과 커피뿐이라는 말을 듣자, 당보가 챙긴 닭가슴살 샐러드 속 단백질은 전부 당보에게 밀어주고, 자신은 풀만 먹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관광지나 갈 줄 알았더니.”

당보에게 닭가슴살 한 조각을 먹여주던 청명이 중얼거렸다. 오랜만의 데이트라고 좋아하더니 정작 하는 건 공원에 앉아 샐러드 먹기라 8년의 연애 동안 알아낸 당보의 취향을 재정립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뉴욕을 상징하는 관광지이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라는 것은 별개로, 제가 아는 당보는 소박한 듯 보이면서 고급스러운 걸 찾는 아주 까탈스러운 녀석이었다. 아무리 맛집이라 하여도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고급품이라 하더라도 취향이 아니면 내치는, 그런 놈이란 말이다. 그러면서도 사진으로 남기는 건 좋아해 자기 맘에 안 들어도 모델로 저를 세워놓고선 즐거웠다 말하는 바보기도 했고, 배우답게 뮤지컬이나 영화에 감동하는 귀여운 면이 있기도 했다.

“여유롭고 좋지 않아요?”

“브로드웨이나 타임스 스퀘어 같은 곳 가자고 할 줄 알았다는 뜻이야. 여기 무슨 박물관도 있고 자유의 여신상도 있고 그렇다며.”

“그쵸. 전망대도 많고,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많아요. 궁금해요? 형님 취향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 네 취향이지. 구경하고 사진 찍고 그러는 거 좋아하잖냐.”

청명은 당보가 집어준 방울토마토를 받아먹었다. 샐러드만 먹고 사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과일도 챙겨 먹는 모양이었다.

“음... 형님 언제 귀국하는데요?”

“진이가 말 안 했나? 너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저 폰 수리 맡겼어요. 그래서 못 받았나 봐요.”

“...언제?”

“형님이랑 헤어진 날이요. 그대로 와인에 퐁당 빠트렸거든요.”

와.... 다행이다. 청명은 주스를 벌컥 들이켜 바싹 타들어 가던 속을 진압했다. 어쩌다 와인에 빠트리게 된 건지 열심히 설명하는 당보의 말보다 혹시 내가 싫어서 차단했었나 하는 생각이 떠나가도록 두는 게 훨씬 급했다. 제 연락을 받지 않는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진이의 연락도 받지 않아 얼마나 당황했는지. 하마터면 스토커로 잡혀갈 뻔한 상황이지 않은가.

 

“왜요? 차단한 줄 알고 쫄렸어요?”

당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청명의 반응을 살폈다. 궁금해하는 것 같아 설명해 줬더니, 혼자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게 꼭 안도한 사람의 모습이라 상당히 재미있었다.

“내 입장을 생각해봐. 안 놀랄 수가 있나.”

“전 안 놀랄 것 같은데요?”

잘못 들었다는 듯 청명이 당보를 응시했다. 그 상태로 뭐? 하고 되물으면 안 놀랄 것 같다고요. 하고 대답까지 하니 어이가 없었다. 이게 미쳤나? 갑자기 이별 통보를 받고도 안 놀란다고?

황당한 청명이 말을 잇지 못하자 당보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큽, 하고 몸을 떨었다. 그제야 청명은 장난이었구나 하는 안심과 그에 상응하는 짜증을 담아 주먹을 머리에 박아주었다.

“아!”

당보는 맞은 자리를 감싸안았다. 하도 오랜만에 맞아서 눈물도 찔끔 나오는 것 같고, 멍이 든 것도 같았다.

“안 놀란다는 사람이 술에 그렇게 취해서 전화를 하냐?”

내가 취하고 싶어 취했나? 먼저 이상한 사진 찍어놓고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한 게 누군데.

“평소에 잘 해줬으면 그런 오해도 안 하죠! 전화 거는 법은 알아요? 문자 보내는 법은 아시냐고!”

“네가 뭘 하고 있을 줄 알고 전화를 걸어. 시차만 13시간인데.”

“녹음을 보내주면 되잖아요. 아니면 영상을 찍어주던가.”

“그래서 스토리 올려주잖아. 뭐 하는지, 누구랑 있는지. 그걸로 다 확인할 수 있으면서 뭘 더 바래.”

“형님은 내가...!”

당보는 내가 하자고 해서 하시는 거냐고 추궁하려던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귀찮으면 하지 말든가 하는 말도, 내 생각을 할 순 없는 거냐는 말도 전부 목 너머로 삼켰다.

 

당보가 챙겨온 돗자리는 성인 남성 두 명이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워있어도 가운데 한 명 더 누울 수 있을 만큼 커다랬다. 이걸 깔 때만 해도 도시락도 먹고 낮잠도 자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같은 이야기나 하며 하루를 보낼 줄 알았는데. 화를 내다 말고 됐다며 돌아눕는 당보를 그대로 두었더니 한 시간 내내 이 모양이다.

“에휴....”

청명이라고 이런 상황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에 미국으로 건너올 만큼 사랑하는데 이런 상황을 반길 이유가 있겠는가. 다만 사과 한 번으로 해결되기엔 반년 동안 쌓인 게 많았고, 물리적인 거리가 사라진 지금 불만을 토로할 상대는 눈앞에 있어 되는대로 말을 쏟아내다 보니 이 꼴이라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난... 그걸 형님 목소리로 듣고 싶었어요.”

갑자기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청명은 바깥을 향해있던 몸을 안쪽으로 돌렸다. 팔을 뻗어도 닿지 않는 자리엔 긴 갈색 머리가 흐트러진 뒷모습이 있었다.

“영상통화는 한 번 하면 끝이지만 녹음이나 동영상은 다르잖아요. 언제나 생각날 때 들을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스토리도 좋지만 그건 24시간 후엔 사라져서 가끔은 놓친단 말이에요. 다시 볼 수도 없고....”

당보가 몸을 돌리자 훅 가까워진 거리에 청명이 몸을 움찔 떨었다. 이젠 팔을 뻗으면 당보의 어깨 정도는 감쌀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어딜 갔는지, 밥으로는 뭘 먹었는지, 내 생각은 났는지.... 그런 걸 형님이 전화로 이야기해 주길 원했어요. 그럼 하루를 보내면서 오늘은 이걸 말해줘야지, 저걸 알려줘야지 같은 생각도 해줄 거고, 내 하루는 어땠는지 물어봐 주고, 시간이 늦어지면 잘 자라며 인사해 줄 거 아닙니까. 우리가 같이 살 때처럼.”

청명이 한쪽 팔을 옆으로 벌리고 하늘을 향해 몸을 돌리자, 당보는 냉큼 청명의 팔에 머리를 벴다.

“근데 그건 귀찮아할 것 같아서 스토리를 올려달라고 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라도 형님의 하루를 알고 싶었거든요.”

“말이나 해보지 그랬어.”

“그러게요. 그땐 안 해줄 것 같아서 그랬는데 물어는 볼걸 그랬나 봐요.”

“내가? 해줬을걸.”

“그냥 문자도 안 보내면서 말은 잘하십니다.”

삐죽 내민 입술에 청명이 제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럼 입술이 쏙 들어가는데 그게 귀여워 입을 맞추고, 두 번으론 아쉬워 또 입을 맞추면 찡그린 얼굴은 어디 가고 부끄러운 듯 눈을 피하는 당보가 있었다.

“스토리 매번 올렸잖아. 전화도 안 받은 적 없을 거고.”

스토리야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올라왔으니 그렇다 치고, 전화는 어땠나 생각해 보면 제가 언제 걸어도 청명의 응답이 있었던 것 같긴 했다. 저녁이나 새벽은 청명의 주 활동 시간이니 받을 만한데 이른 아침에도 목소리 듣고 싶다 전화를 걸면 그것 또한 받고는 열심히 하라 말 해주던 것이다. 언제나.

“어.... 그러네요? 다 받아줬네?”

“그래. 다 해준다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던 당보는 머릿속으로 지난 반년 동안의 연락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문자는 텀이 있긴 해도 하나를 보내면 늘 하나 이상이 보내졌고, 사진을 보낸 날에는 얼굴은 아니더라도 신체 일부가 담긴 사진을 보내왔었다.

“매일 자기 전에 셀카 보내달라고 하면 해줘요?”

“그 정도야 그냥 하지.”

가끔은 누구랑 있다거나, 술을 마신다고. 그래서 연락이 늦을 수 있다고 보내기도 했고.

“어디 갈 때마다 알려달라고 하는 건요?”

“지금 스토리로 하는 게 그거 아니냐?”

내가 언제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꽃을 사 장식해 둔 것도 모자라 좋아하는 영화를 기억하고, 동생이랑 보러 가고.

“내가 생각날 때마다 꽃을 사달라고 하면?”

“꽃집을 차리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와아아.. 정말? 내가 아는 형님 맞아? 당보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청명을 올려보다 눈이 마주치자 금방 고개를 가슴에 파묻었다. 저는 손끝을 보다가 멀리 푸른 하늘을 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머리카락 끝만 만지고 있길래 형님도 나처럼 딴청을 피우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형님, 나를 그렇게나 사랑해요? 이렇게 이상한 고집을 부려도 깨물어 주고 싶다는 얼굴로 볼 만큼? 헤어지자는 말에 달려와 주길래 아직도 사랑하는 건 알았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항상 내가 더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난 영원히 형님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요. 진짜 어떡해. 너무 좋다....

“왜.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

당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사실 청명도 알고 있었다. 대답이 싫은 게 아니라 좋음에 가까워 이런다는 것을. 얼굴을 보지 않아도 타오를 것 같은 귀와 점점 뜨거워지는 가슴은 당보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형님이 절 너무 사랑해서 부끄러워요....”

“뭐 그런 것 가지고.”

청명은 픽 웃으며 당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고 어두운색의 머리는 빛을 받아 은은한 갈색으로 비쳐 청명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쳐 지났다. 우리가 이렇게 한가하던 적이 있었나. 선수 시절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느라 제대로 된 데이트는 없었고, 대회라도 나가면 선수와 팬의 입장에서 만났지 연인다운 무언가를 하긴 힘들었다. 당보가 촬영에 들어가면 같이 자는 시간조차 줄어 얼굴 보기도 힘들지 않았던가.

아는 사이로는 12년, 애인으로는 10년, 동거한 지는 7년. 난 앞으로의 미래에도 네가 있으면 좋겠는데. 넌 어떨지 모르겠다. 우리 반지도 있고, 서로 상견례도 이미 했잖아. 뉴욕은 동성혼도, 하루 만에 결혼하는 것도 가능하니까. 나는 지금 이대로도 좋지만 네가 모두에게 축하받고 싶다면 그것도 좋다. 반지도, 프러포즈도 뭐든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러니 당보야. 나랑....

 

눈을 깜박이자 어느새 고개를 들고 있던 당보가 부드러운 미소로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지?

“형님.”

“...어.”

목이 막힌다. 아름다운 저녁 하늘 때문인지,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인지 눈이 차츰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입가를 가려 속삭이길래 잘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면.

“만약에 영상통화로 자위해달라 하면 해주실 거예요?”

“......미쳤나?”

감동이고 뭐고 죄다 날려버리는 말에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남은 건 배를 부여잡고 웃는 당보뿐이었다. 구를 듯이 웃다가 이젠 훌쩍이기까지 하는데 넋이 나간 청명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양 볼을 부여잡고 환하게 웃는 것이다.

“형님이 너무 진지하시길래 농담 좀 한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애인이 보고 있는 것도 몰라요?”

“하.... 너는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들을 사람도 없어요. 지금 다들 정리 중이라 바쁘거든요.”

당보는 눈부신 주황빛 하늘을 뒤로하고 아직도 멍한 청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노을 때문인가 싶어 가려주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눈을 찌푸리는 게 제대로 가리지 못한 듯 보였다.

“우리도 갈까요?”

청명의 눈동자에 당보가 한가득 차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 청명은 자연스레 깨닫는 것이다. 네가 날 만나서 다행인 게 아니라.

“보야.”

“네?”

내가 널 만나서 다행이라는 것을.

“우리 결혼할까?”

 

“뭐, 뭐예요 갑자기.”

대답으로 보기 애매한 말에도 청명은 당보의 손을 잡고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방울토마토보다 새빨간 얼굴엔 손으로 가려도 숨겨지지 않는 기쁨이 묻어나왔다.

“여기선 혼인신고만 하고, 돌아가서 뭐든 해줄게. 식이든, 반지든. 네 남편 능력 좋은 거 알잖아.”

“저도 능력 좋거든요? 지금 받는 출연료가 얼만데, 아니. 이게 아니라.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요.”

“오늘 같이 있었잖아.”

청명은 맞잡은 손에 있는 은빛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논란이 생길까 목걸이로 끼고 있는 저와는 달리 패션이란 핑계로 끼고 있는 반지는 안쪽에 저와 당보의 이니셜이 새겨진 커플링이었다.

“그냥 이렇게. 앞으로도 너랑 함께하면 좋을 것 같아서.”

“.......”

당보는 청명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맞잡은 손만 멍하니 봤다. 분명 좋고 설레는데 걱정도 있고, 불안감도 있어서 섣불리 대답을 내뱉을 수 없었다. 난 미래에 대한 아무 계획도 없는데, 덥석 수락했다가 후회하면 돌이킬 수도 없잖아.

“...만약에 제가 싫다고 하면, 우리 여기서 끝이에요?”

“결혼 안 하고 평생 살면 되지.”

“형님은 미래 계획이 있으실 거 아니에요. 은퇴하긴 했지만, 코치라던가 감독이라던가 그런 쪽으로....”

“없는데?”

“네?”

“계획 없다고. 진짜 너 없으면 안 될 거 같아서 결혼하고 싶은 거야.”

한참을 생각하던 당보는 청명의 손을 힘주어 잡고 떨리는 마음으로 청명과 눈을 마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충동적인 대답보다 조금이라도 정돈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식은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커다란 호텔 예식장에서 형님 가족이랑 선수분들 모시고, 저도 가족들 모아서 크게 축하받고 싶어요.”

“응.”

“반지는 지금 걸로 해요. 대신 형님도 끼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집은 가구 몇 개만 새로 맞췄으면 좋겠고... 아, 인스타에도 우리 결혼한다고 알리고, 기사도 내요.”

“그래. 그렇게 하자.”

“상견례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부모님이 나와주실진 모르겠는데... 형님네 가족분께 인사드리고 싶긴 해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상관없어.”

“그리고....”

물기 어린 눈을 한 당보는 청명에게 쓰러지듯 안겼다. 당신을 사랑해서 다행이라고, 날 사랑하는 게 형님이라서 정말 행복하다고.

“좋아요. 결혼 할래요.”

에필로그. 뻔한 수작인 걸 알면서도

청명은 깜깜한 대문을 봤다가 다시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9시에 맞춰 데리러 와달라 해놓고는 10시가 돼가는 지금까지 아무 연락이 없으니, 걱정도 들고 지루하기도 했다. 잠깐 나가서 커피를 살까 싶어도 주변에 카페는 보이지 않았고, 그 사이에 당보가 나올지도 모르니 자리를 비우기도 애매했다.

“...상견례는 제대로 하는 게 좋겠죠?”

“하면 좋지.”

눈을 감으면 아른거리는 그날의 말들이 청명의 귀를 맴돌았다. 이상하게 불안해 보이는 당보와 갑작스럽게 잡힌 가족 모임. 결혼 준비에 한창 바쁘던 때라 이때의 청명은 당연히 제 가족들과 잡힌 상견례를 말한다고 생각했었다.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닌데 격식 있는 자리는 부담스러울까 한정식집으로 예약해 두었던 것을 바꾸자는 의미로 알아들었단 말이다. 연을 끊었다 하더라도 결혼 소식은 전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연락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부자들은 가족 모임이라는 말에 정의가 다른가? 왜 한 집안 모임에 다른 집안이 끼어들어서 미래를 의논해?

번쩍

불이 들어온 센서 등과 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란에 청명은 눕혔던 시트를 세우고 시동을 걸었다. 굳게 닫혀있던 대문이 열리고 여러 사람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오더니 각기 다른 차를 타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세상에 관심 없는 청명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이 보이자, 청명은 문을 열고 당보를 마중 나갔다.

”형니임. 오래 기다렸어요?”

“9시에 끝난다며.”

“잔이 비면 보내 준다는데 비우면 자꾸 채워져서 나갈 수가 없더라구요.”

“잘하는 짓이다. 30살이나 먹어 놓고 그거 하나 거절을 못 해.”

청명의 핀잔에도 당보는 헤실헤실 웃으며 허리에 팔을 두르고 쪽쪽거렸다. 술 냄새와 온갖 향수 냄새를 묻히고 나온 당보는 차로 가는 동안 청명에게서 떨어지질 않았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어도 감은 팔을 풀지 않고 버티다 기어코 청명이 주먹을 들게 했다.

“이잉. 아파요.”

칭얼대며 더욱 엉겨 붙는 통에 청명은 뒷좌석에 당보를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당보는 덜컹거리며 문을 열려고 애를 썼는데, 문이 열리지 않도록 앞을 막고 있으니 곧 눈꼬리를 내리고 버림받은 것처럼 저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창문을 열든가 하면 될 것을 눈빛만 보내고 있으니 사랑스럽고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나오지 말고 거기 있어.”

청명은 창문을 톡톡 두드리고 손으로 운전석을 가리켰다. 곧 차에 탈것이니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었으나 당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창문에 호 입김을 불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며 배시시 웃었다.

“이러니까 밖에서 술을 마실 수가 있나. 이걸 고칠 수도 없고.”

불퉁한 말과 달리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청명은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당보는 냉큼 청명을 향해 팔을 뻗었는데, 뻔한 수작인 걸 알면서도 청명은 당보의 허리를 당기며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게 깜박이던 불빛이 더 이상 켜지지 않을 때까지, 청명이 뒷좌석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청명은 조용히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창문에 머릴 기댄 당보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기에. 이름 모를 누군가 선곡한 노래보다 제 애인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울림이 훨씬 좋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리고 스쳐 가는 풍경 속 은은하게 비치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말이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꼭 반한 사람처럼 보고 계시네.”

창밖을 향해있던 눈이 마주치자, 당보는 창문에 기대있던 몸을 청명에게로 돌렸다. 단정하게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 두어 개가 풀어져 있고 드러난 얼굴과 목은 붉게 물들인 채로 눈을 사르르 접어 웃어 보인다.

“나 말고 누가 널 그렇게 봐.”

“글쎄요, 한두 명이 아니라서 모르겠는데.”

“누구 향수인지는 기억하잖아.”

“아, 그건 미안하대요. 결혼 얘기일 줄 모르고 부른 거라고. 다음에 형님네 가족도 모여서 식사하자고 하셨어요.”

“그러냐.”

저녁 메뉴를 말하듯 가벼운 투라 청명은 빠르게 언제가 괜찮을지를 계산했다. 다음 주는 일정이 있어서 안 되고, 다다음 주 주말은 당보와 가구를 보러 가기로 했으니, 시간을 빼기 어려울 것 같아서. 차라리 잡아둔 상견례 날에 같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쪽 집안 입장에서는 10년 만에 연락한 아들이 결혼해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잠깐 뭐라고?

“누, 누가?”

“아버지가요. 사천당가 사장님?”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아버님께서 지금 나한테 사과하시고, 우리 가족과 식사 하자 말한 그런 상황? 청명은 좀전의 상황을 곱씹어보며 룸미러로 제 머리가 눌리지는 않았는지, 옷은 괜찮았는지를 확인했다. 바로 앞에 차를 대 두었으니, 제가 당보를 마중 나가 차에 태운 모습까지 전부 보셨을 테니까. 취한 놈을 바로 데려가질 못할망정 애정행각을 좀 하긴 했는데 사각지대라 안 보였을... 아, 불빛.

“.........보야.”

“네?”

“그 대문 앞에 센서 등 있잖아. 그거 혹시 고장 났다거나 기계가 좀 예민하다던가....”

“멀쩡할걸요. 최근에 새로 달았다고 들었는데.”

그래, 고장 날 리가 없지. 갓 성인이 된 얘를 홀랑 채가서 결혼까지 한 것도 모자라 입술부터 들이대고 보는 개쓰레기 인간으로 아시겠네. 그것도 부모님 집 앞에서, 문도 안닫고....

착잡한 청명의 마음도 모르고 당보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제 사람이 인정받았다는 안도감, 행복, 기쁨이 어우러져 당보를 들뜨게 했다. 이런 상황은 집에 들어가서도 변하지 않았는데 부모님께 도착했다는 연락을 남긴 당보는 청명에게 달려들며 애교를 부렸고,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청명은 당보가 하는 대로 이끌려주었다. 금방 화면에 뜬 답장을 보고 잔뜩 굳어 버렸지만 말이다.

- 그래, 다만 애정행각은 때와 장소를 가려주면 좋겠구나.

...역시 키스는 하지 말 걸 그랬다.

고백. 당신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세상에. 형님이 이런 말을 했었다고? 당보는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를 손에 들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처음 보는 종이에 익숙한 글씨체였지만, 잔소리 좀 했다고 기분 나쁜 티를 풀풀 내며 소파에 누워있는 저 인간이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죽 해놨어. 괜찮아지면 연락해. 사랑해.”

당보는 홀린 듯이 내용을 읽고는 재빨리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의식하지 않고 나온 말이라 소리는 작았지만, 소파에 있는 청명에게 들리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슬쩍 눈치를 보면 상자를 열기 전과 변하지 않은 자세기도 하고, 청명이라면 뭔 소리냐며 되물을 법도 한데 그러지도 않으니 정말 못 들었나 싶어서.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편지를 보며 기분 좋은 설렘에 빠져들었다.

한편, 청명은 설정해 둔 시간이 지나 핸드폰 화면이 자동으로 꺼지고 나서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한 달 만의 휴일이라 점심때 일어나서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게 2시간 전인데. 갑자기 죽 이야기가 나온 것도 모자라 괜찮아지면 연락하라고 하고, 날 두고 사랑한다고 하고. 들고 있는 게 무엇인지라도 알면 후련할 텐데 뒷모습에 가려져 무얼 하고 있는지, 뭘 보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당보.”

“....”

이것 봐라. 이젠 불러도 대답을 안 하네. 굳이 제 주변의 테이블을 두고 넓은 거실 저 구석에서 꼼지락거릴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한테는 딴 사람이랑 촬영 한번 했다고 그렇게 뭐라 하더니 자기는 당당하게 내 앞에서 하니까 상관없다 이거냐? 청명은 뚱한 표정으로 소파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살금살금 당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당보의 주변엔 정리를 하려는 건지, 어지르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종이와 사진들이 눈에 띄었고. 종이가 담겼을 분홍색 상자와 어딘가 눈에 익은 물건들이. 마지막으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잡혔다. 청명은 어이가 없어 나오려는 헛웃음을 참고 당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랑 사는 게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 집에 오면 안겨드는 것도 좋고, 밥부터 목욕부터 하며 애교 부리는 것도 귀여워 죽겠어.”

당보의 말을 듣자마자 청명의 머릿속에 이어질 문장들이 줄줄 떠올랐다. 노래 가사였던가? 아니면 명언?

“넌 어떻게 안 귀여운 구석이 없냐. 자는 중에 내 이름을 몇 번 불렀는지 기억은 해? 대답도 제대로 안 하면서 부르기만 하고. 내가 너 깨우려다 말았어.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가지 말라고 칭얼대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냥 침대에서 뒹굴고 싶은 마음뿐이다.”

“야!!”

청명은 성큼성큼 다가가 당보가 들고 있던 하얀 종이를 낚아챘다. 지금 보니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것은 제가 준 편지와 선물,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고, 얼굴에 홍조를 띠고 저를 올려보는 당보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말랑한 볼을 콕 찌르고 빼앗긴 종이를 눈앞에서 흔들어 주고 나서야 얼굴을 찡그리니 말이다.

“돌려줘요!”

“이걸 왜 읽고 있어.”

“읽는 건 제 마음이죠. 어차피 제거잖아요.”

“이게 왜 네 거야. 내가 썼는데.”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청명은 편지를 돌려주지 않았다. 낯 뜨거운 내용이 적혀 있어 부끄럽다는 이유도 있지만 팔만 뻗으면 제가 돌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저 당당한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다.

“진짜 안 주실 겁니까?”

“어.”

“정말요?”

“그래.”

청명이 팔짱을 끼고 돌려주지 않자, 입을 삐죽 내밀고 어떻게든 가져갈 것처럼 노려보던 당보는 씩 웃으며 제 옆의 다른 종이를 손에 들었다. 청명이 알고, 당보도 아는 나비 모양 편지지는 비교적 최근에 써준 편지로 청명 자신이 아직 생생하게 내용을 기억하는 편지였다. 이는 달리 말하면 방금 것보단 부끄러움이 덜 하다는 뜻이기도 해서 내용을 쭉 떠올린 청명은 고개를 끄덕여 읽기를 허락했다.

“흠흠. 보야, 어젯밤에 꿈에 네가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에서 이유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꿈을 꿨어. 꿈속에서 우리는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서로를 쫓아다녔는데 네 옷이 꼭 나비처럼 팔랑거리던 게 유독 기억에 남더라. 비슷한 옷을 찾아보려니 네가 입기엔 답답할 것 같았고, 단순히 초록색이 들어간 걸 원한 게 아니라서 준비하는데 늦었어. 네가 그렇게 꽃을 좋아하는 게 이해가 되고 내 앞에서 입을 걸 생각하니, 아 또 가져가시네.”

“읽지 마. 읽지 말라고.”

당보는 들고 있던 편지를 빼앗기고 바닥에 펼쳐두었던 종이들이 죄다 상자에 들어가는 중에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청명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정리하는 손길은 깃털을 집는 듯 조심스럽고 아닌 척하고 있지만 부끄러워하는 게 눈에 보이니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설렘에 두근거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 형님. 그거 저 주세요.”

그러던 중 청명이 집은 한 장의 사진에 당보의 시선이 쏠렸다. 청명은 사진의 양면을 살펴보고 순순히 당보에게 건네주었는데, 청명이 바닥을 정리하고 이거 안방에 넣어둔다? 하고 물을 때까지 당보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속에는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한 당보와 어색하게 브이를 한 청명이 있었다. 당장 둘의 헤어스타일이 지금처럼 길지 않고 짧았다는 것부터 시작해 일정 거리를 두고 찍은 것이나, 억지로 웃어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당보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사진은 당보가 20살이 되던, 막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찍은 사진이었다.

 

“자. 새해 선물.”

포토 부스의 커튼을 열며 나온 청명이 밖에서 기다리던 당보에게 한 장의 사진을 건넸다. 당보는 사진을 받자마자 쪼르르 가로등 아래로 걸어가서는 불빛에 사진을 비춰본 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몇 장 뽑았어요?”

노란 빛 아래의 당보는 밝은색의 코트 하나만 입고 있었다. 드러난 곳마다 새빨갛게 물들이고 이제는 식어 열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핫팩 하나를 쥐고서 말이다.

“한 장.”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은 청명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당보에게 다가갔다. 저한테는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한다며 따뜻하게 입고 오라고 난리를 치더니. 정작 자기는 잘 보이겠다고 코트만 달랑 입고 나와 버티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봐라. 눈처럼 하얗던 피부를 저리 물들이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이나 하는 것을.

“당보.”

청명의 부름에 당보는 냉큼 몸을 돌렸다. 기껏 찍은 사진이 한 장뿐이라 제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돈을 지불한 청명이 갖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비록 처음으로 단둘이 찍은 사진에, 형님이 먼저 찍자고 말해주고, 제게 선물이라며 주기까지 했지만! 형님이 오늘 하루를 저와 보내주신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을 돌리자 가까이 있는 청명의 얼굴에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려서, 당보는 나지막이 본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저 안 추워요.”

“알아. 그래도 하고 있어.”

청명은 단순히 두 번 감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는 매듭을 만들고, 어디는 길게 빼내어 만들어진 리본을 당보의 목에 매어주었다. 베이지색 코트에 분홍 목도리의 조합은 밤에 봐도 묘한 조합이었는데, 모델이 좋으니 청명에겐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게다가 완성된 모습을 보고는 분홍빛으로 물든 얼굴을 손으로 가려버리기까지 하는데 어떻게 귀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만 가리면 아무도 자신을 못 본다고 생각하는 얘도 아니고. 그러고 있으면 가려진다고 생각하는 건가? 20살이? 아.... 심장 아파. 미치겠다 진짜.

“보야, 나 좀 봐봐. 응?”

청명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당보의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얼굴을 덮은 손가락을 떼어보기도 하고, 열이 오른 손등을 긁어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 손을 내리지는 않으니.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색이 별론가?”

아닌 줄 알면서도 시무룩한 투로 말을 붙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통하지 않는지 주춤거리며 부끄러워서 보여주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다 아시잖아요.”

청명은 픽 웃고는 크게 한걸음 움직여 당보의 코앞으로 이동했다. 당황한 당보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고, 청명이 바짝 다가가면 또 뒤로 한 발짝 움직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전에 길바닥에서 넘어졌을 때도 그래 놓고는.”

“그때랑 다르죠.”

“똑같던데.”

뭐라도 말할 것처럼 우물쭈물하던 당보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청명과 눈을 마주했다. 은근한 기대와 두려움이 비치는 시선에 청명은 본능적으로 발을 멈췄고, 곧 두세 걸음 다가온 당보가 스치듯 뺨에 입을 맞춘 뒤에는 몸을 움찔 떨었다. 분명 추운 겨울인데도 당보와 닿은 자리는 너무나 뜨거웠다.

“우리 사이가 다르잖아요.”

당보는 한 뼘 거리에 있던 몸을 뒤로 물리며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상대가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있었고 자신은 성인이 되었으니 문제 될 것도 없다 여겨 한 행동이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찡그리거나 질색하는 기색도 없으니, 제가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나 싶어서. 당보는 애써 울적한 기분을 감추고 청명에게 말을 붙였다.

“......아, 아니에요? 저는 같은 마음인 줄 알고,”

“한 번만 다시 해보자.”

말을 마친 청명은 당보의 양 뺨을 감싸 쥐고 입을 맞췄다. 놀라 동그랗게 뜨인 눈이 사르르 감기고, 허리에 감아오는 온기를 느끼며. 그렇게 한참 동안 당보를 놓아주지 않았다.

 

“크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고. 옳지.”

청명은 새빨개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당보가 의식적으로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입이 막히면 코로 숨을 쉰다는 당연한 상식도 잊고 입을 맞추는 동안 숨을 참은 것에 더해 자기 때문에 분위기가 깨졌다며 울상인 녀석을 보고도 쿵쿵 뛰는 심장은 진정 할 줄을 몰랐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입은 헉헉대며 숨을 쉬는 모습도 그저 좋기만 했다.

“형님은 괜찮아요?”

“나는 누구처럼 숨을 참지 않았으니까.”

장난스러운 말에 당보는 청명을 째려보고는 툭 쳤다. 다른 놈들이 이런 짓을 하면 저 눈을 어떻게든 순한 양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이상하게도 네가 째려보는 건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는데 거기서 어떻게 숨을 쉬어요.”

“코로 쉬면 되지.”

“이론은 저도 압니다. 막상 하려니 생각대로 안 돼서 그러죠....”

당보는 발끝으로 바닥을 콩콩 찍으며 중얼거렸다. 저는 스킨십도, 애인도 전부 형님이 처음인데 형님은 경험도 많고 자연스러워 보여서. 이런 생각이 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샘솟는 서운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제 마음을 모르는지 실실 웃고만 있는 청명이 조금 밉기도 했고 말이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도 못 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사람이 낫잖아요.”

“넌 별로였어?”

“별로면 이러고 있겠어요?”

나는 떨려서 아무것도 못 했는데 형님은 능숙해 보이니 하는 말 아니냐며 당보는 황당하다는 듯 덧붙였다. 그럼에도 상대는 마냥 귀엽다는 얼굴로 보고 있으니, 악을 쓰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서 시무룩해 있으면.

“너도 그러면서 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아니면 이것도 수작인가?”

하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화들짝 놀란 당보는 이마를 감싸안고 뒷걸음질을 치다 제 발에 걸려 바닥에 넘어졌다.

“제, 제가 언제 수작을 부렸다고 그래요. 처음인데 어색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귀여워서 좋던데.”

청명이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었으나 당보는 바닥에 주저앉아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어쩐지, 그때 바로 번호를 주더라. 연하면 다 좋은 거죠? 어리고 귀여우면 아무나 상관없다는 거잖아요.”

청명은 무릎을 굽혀 종알거리는 당보와 눈높이를 맞췄다. 튀어나온 입술을 쭉 잡아당기면 금방 아프다고 홀랑 집어넣을 거면서, 굳이 제 성질을 긁어보려는 당보를 봐줄지 말지 고민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말이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당보는 내내 움직이던 입을 꾹 다물고 청명의 눈을 피했다. 봐줄 때 말해야 본전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청명의 눈이 떼쓰는 어린아이를 보는 표정이라 더더욱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안 할 거면 일어나고.”

당장이라도 갈 것처럼 몸을 일으키자, 당보는 다급히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청명의 패딩 끝자락을 붙잡았다. 괜찮다고 잡힌 손등을 살살 문지르면 당보는 패딩을 놓아 주는 대신 청명의 손가락을 잡았고, 손가락 하나만 잡혀있던 손은 어느 순간 겹쳐 빈틈없이 마주 잡혔다.

“......대답 안 해줬잖아요.”

“대답?”

“아까 뽀뽀했을 때요. 우리가 같은 마음인지 아닌지.”

어두운 밤하늘과 새까만 머리카락도 서로의 달아오른 얼굴을 숨겨주지 못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인지 알면서도, 당신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좋아해요. 형님은, 저 어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명은 당보를 와락 끌어안았다. 제가 얼마나 기다린 줄도 모르고 떨어대는 바보 같은 녀석에게 그토록 원하던 사랑을 속삭여 주면서, 추위도 모르고 행복하게 웃었다.

“사랑하지. 처음 본 날부터 쭉 그랬어.”

담배. 매실 향 밖에 안나요. 좋아하시잖아요?

“형님은 흡연 하는 애인 어때요?”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에 청명은 들고 있던 폰에서 뒤의 소파로 시선을 옮겼다. 2인용 소파 위에 엎어져 대본을 보는 모습은 변함이 없는데, 어쩌다 그리로 생각이 튀어버렸는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면 다행이지만, 저를 떠보려는 질문이라면 오랜만에 진지한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끊어.”

“제가 핀다는 건 아니고. 연기하다 보면 피는 장면을 찍을 수도 있고, 흡연자를 구할 수도 있잖아요.”

“요즘은 다 CG로 된다며.”

“그래도 해본 사람이랑 아닌 사람은 차이가 있죠.”

당보는 손가락으로 틀어져 있던 티비를 가리켰다. 이번에 들어가는 작품과 같은 감독이 찍었다며 틀어두었지만 둘 다 취향이 아니었던 터라 배경음악 정도로 두던 영화로, 마침 주인공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저 역할은 오디션부터 흡연자만 모집했어요. 캐릭터가 골초기도 하고, 감독님이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분이시거든요.”

청명은 이어지는 당보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자신이 왜 담배를 피워보고 싶은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는데 성인이 되면 꼭 피워 보고 싶었다, 올해 버킷리스트였다 등 이상한 이유를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했던 것처럼 진지하지도 않고 단순한 투정에 가까운 터라 대충 그러냐 하며 맞장구쳐주면, 당보는 짜증을 담아 무릎으로 청명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대답만 하지 말고요. 저는 애인이랑 맞담도 해보고 싶었단 말입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삐죽 내민 입술이 훤히 보이는 말에 청명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흡연까지는 호기심이라 치부하고 넘어가 줄 수 있었지만, 비흡연자 앞에서 맞담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소리가 아닌가.

“하러 가.”

선뜻 내어진 대답에 당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청명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당연히 반대하실 줄 알고 던진 직구가 이렇게 잘 통할 줄 몰라서, 신이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진짜요? 저랑 맞담 해주실 거예요?”

“저기 흡연구역에서 사람 하나 잡아. 겸사겸사 그 새끼랑 사귀면 되겠네.”

“전 형님이랑 하고 싶은데.”

“어쩌라고. 가서 네 취향 맞춰주는 사람 만나라니까?”

불퉁한 말투에 당보는 꼬리를 내리고 청명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 주제를 더 끌고 가다간 담배고 뭐고 대판 싸울 미래가 아주 선명하니 지금은 바짝 숙여야 할 때였다.

“제가 형님 말고 누굴 만난다고 그래요.”

술도, 클럽도 신경 쓰지 않길래 괜찮을 줄 알았는데, 담배는 안 되는구나 하며. 아쉽게 무산된 첫 번째 시도에 미련을 두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서, 당보는 그로부터 두 달 뒤 숨겨두었던 담배를 걸리고 말았다.

“너 이거 뭐야.”

“...담배요.”

“언제부터 폈어.”

당보는 청명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제 말을 꺼낼지 눈치만 보다 까먹었던 담배가 여기서 나올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피워라도 봤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당보의 폐는 담배의 ㄷ자도 모르는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답 안 해?”

날이 선 말과 무언가 구겨지는 소리에 당보는 눈을 질끈 감았다. 4,500원이 하늘로 날아간 지금, 다음은 여지없이 제 머리일 것이기 때문에.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고자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감쌀 준비를 했다. 그러나 1분이 지나도 청명이 당보에게 손을 대는 일은 없었고, 의아해진 당보가 슬쩍 고개를 들면 무표정한 청명과 손에 들린 담뱃갑이었던 것. 그리고 소파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담배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꺼내나 했지. 너나 내 주변에 흡연자는 없는데 말이야.”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아서....”

“대회 때문에 연락이 늦어지니까 좋았겠다? 심심하면 담배도 빨고, 친구들이랑 맞담도 하고. 아주 즐거웠겠어.”

“저 진짜 핀 적 없어요. 사기만 하고 불도 안 붙여 봤는데.”

“당보야. 담뱃갑 하나에 20개가 들어있다더라. 근데 네 거에는 17개 밖에 없더라고. 남은 3개는 어디로 갔을까.”

“그 하나는 처음 산 날에 태워보려다 떨어트렸고요, 하나는 다른 분이 빌려 달래서 드렸고. 나머지는 뭐에 썼더라....”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으며 청명은 당보를 가만히 내려 보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끊으라고 하고 싶지만, 얌전히 제 말을 들을 녀석도 아니고 다 큰 성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이상하니까. 평소 같으면 호기심으로 하나 사봤다, 앞으로는 입에 대지도 않겠다 하고 넘어갈 법도 한데 다 들킨 와중에도 거짓말이나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제가 미덥지 못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작년 설을 마지막으로 가족과 연락을 끊은 것 같던데 제가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 같아서 마음이 심란했다. 경제적, 정서적으로 저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당보로서는 제게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나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

“형님 잘못했어요. 화 풀어요.”

짜증 가득한 눈썹이 펴지고, 묘하게 변한 인상에 당보는 청명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애교를 부렸다. 무표정한 얼굴은 분노보다는 슬픔에 가까워 보여서, 제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리기를 바랐다.

“화 안 났어.”

청명은 담배를 한쪽으로 치우고 제 다리를 두드렸다. 의미를 알아차린 당보는 청명의 다리 위에 앉아 살포시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자연스럽게 두르려던 팔은 저지당해 몸만 기댄 모양새가 되었지만, 청명은 당보의 양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입에도 뽀뽀해 주었다.

“그래서 언제부터 폈냐. 나 대회 나가 있을 때?”

“안 폈어요. 애인 간접흡연 시킬 것도 아니고. 형님이 제 연기 바로 알아채는 걸 아는데 어떻게 숨겨요.”

“그럼 이건 뭐야. 서랍에 숨겨두지도 않았고, 겉옷 속에 넣어 뒀잖아.”

“그냥 한번 사 본 겁니다. 게다가 있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고요.”

“피고 싶은 건 맞고?”

“그렇.. 긴 한데 형님이 반대하면 굳이 할 생각 없습니다. 중독성이 크다고도 하고, 몸에도 좋지 않으니까요.”

“이미 반대하지 않았나.”

“화난 거 맞네. 펴본 적 없다는 말도 안 믿고 있죠?”

“몰라.”

서늘한 목소리에 당보는 기대있던 고개를 들어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청명을 보았다. 지금도 제 등을 토닥이고 있으면서 말꼬투리나 잡고, 아까는 화 안 났다고 입 맞춰 줬으면서 지금은 또 모른다고 그러고. 자꾸만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뽀뽀는 왜 했어요? 화나면 안 해주면서.”

“냄새나나 보려고 그랬지. 깨끗하던데.”

“핀 적이 없으니, 아무것도 안 나는 게 당연하죠.”

“오늘만 안 핀 건지, 몰래 빼고 온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

또다시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대화에 당보는 입술을 씹으며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진심으로 돌과 대화를 해도 이보다는 잘 통할 것이다. 안 핀다고, 핀 적 없다고 열 번은 말한 것 같은데. 여태껏 제 말을 듣긴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지 않은가.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다음엔 숨기지 마. 내가 모르는 힘든 일이나 말 못 할 사정이라던가,”

“아니 태어나서 핀 적이 없다니까?”

제가 그동안 뭘 숨겼다고 이러시는지. 당보는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머리를 꾹 눌렀다. 형님 몰래 사고를 친 적도 없고, 비밀로 한 일도 없는데. 설령 있다고 해도 들키지 않았단 말이다. 전에는 담배를 사기만 해도 바로 헤어질 것처럼 협박해놓고는, 이제는 피워도 상관없다고 숨기지만 말라고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담배부터 올려두고 대화를 할 걸 그랬습니다. 이렇게 빙빙 돌아갈 필요도 없이 말이죠.

당보는 청명의 품에서 벗어나 치워둔 담배를 전부 제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뭐해하는 청명의 말을 무시하며 주방에서 라이터를 챙겼고,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냈다.

“뭐하냐고.”

청명은 현관 앞에 서서 당보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신발을 신을 때까지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보고만 있었는데, 손잡이를 돌려 그대로 문을 열어버리는 바람에 말보다 먼저 손이 튀어 나가 열리는 문을 붙잡았다.

“어디 가.”

“어차피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시니 그냥 흡연자 하려고요. 그럼 깔끔한 사실적시니까 서로 억울할 일도 없고 좋잖아요!”

빽 소리를 지른 당보는 팔 아래로 몸을 숙여 밖으로 뛰어나갔다. 청명은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 따라가려다 이상하게 차가운 바닥에 집으로 돌아가 신발을 갈아신었고, 그 덕에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따라오지 마요.”

소리 지른 것이 무색하게 당보는 금방 청명에게 따라잡혔다. 정확히 말하면 5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청명이 따라붙은 것에 가까웠지만, 당보가 느끼기엔 더 이상 도망칠 틈이 없으니 따라 잡혔다고 봐도 무방했다.

“안 따라가.”

“그럼 왜 이쪽으로 가는데요. 편의점은 반대에 여기는 형님이 갈 곳도 아니잖아요.”

“어딜 가든 내 마음이지. 따라가는 거 아니니까 신경 꺼.”

당보는 청명에게 들릴 정도로 짜증 난다고 중얼거리며 발을 움직였다. 그동안 한 번도 가지 않은 이곳은 살고 있는 집과 거리가 있고 단지의 구석에 위치해 평소에는 갈 일이 없던 장소로, 두 사람 다 비흡연자인 만큼 더더욱 꺼리게 되는 공간이었다.

아, 담배 냄새. 아직 흡연구역은 멀었음에도 주위에 진동하는 냄새에 당보는 눈을 찡그렸다. 저야 이런 걸 각오하고 발을 들였기에 상관없었지만, 형님은 맡으면 안 되는데 싶어서. 당보는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청명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 끝나면 나갈 테니까 거기서 기다리고 계십쇼.”

당보를 따라 제자리에 멈춘 청명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당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청명이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지라 급히 청명의 앞에 양팔을 벌리고 길을 가로막으면, 청명은 잠시 발을 멈췄으나 그대로 당보를 지나쳐 성큼성큼 흡연구역으로 걸어갔다.

“저기는 가봤자 형님 할 것도 없어요. 도망 안 칠 테니까 말 좀 들으라고.”

“넌 가서 뭐 하는데.”

“흡연구역에서 할 게 뭐 있겠어요. 담배나 피우는 거지.”

“취향 맞춰줄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멈칫한 당보는 뒤늦게 말뜻을 알아차리고 그거 장난이에요! 거짓말이었다고요 하며 청명의 팔을 붙잡았으나, 청명의 고집을 막지 못한 채 질질 끌려갔다.

 

“담배랑 라이터.”

기어코 한자리를 차지하고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모습에 당보는 혀를 찼다.

“저한테 맡겨뒀어요?”

청명의 손이 닿지 않을 거리를 두고, 당보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불을 붙이기 전 진짜 펴도 되나? 하는 생각에 슬쩍 청명을 보았지만, 제가 피지 않으면 본인이 필 기세라 조심히 라이터를 켜고 담배의 끝에 불을 붙였다. 끝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함과 동시에 연기가 피어올랐고 폐에 들이차는 냄새에 담배를 쥔 손을 멀리하자, 입에 닿기도 전에 불이 꺼졌다.

“엥? 이게 왜 꺼져?”

이미 꺼진 담배를 입에 물어보아도 다른 매체에서 봤던 것처럼 연기가 나거나 숨이 막히거나 하는 느낌 없이 그냥 탄내만 나는 것에 당보는 들고 있던 담배는 버리고 새로운 것을 손에 쥐었다. 바로 입에 물어야 하나 싶어 불이 붙는 걸 확인한 뒤 입에 물었고, 이번엔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뜻으로 청명과 눈을 마주했는데.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려서 두 번째 담배 역시 쓰레기통으로 보내주었다.

“...뭐하냐?”

당보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열이 오르는 얼굴을 양 팔로 가렸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창피하고. 온갖 감정이 머릿속을 휘저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오자마자 허세나 부리길래 어디 잘하나 보자 하는 얼굴일 줄 알았지, 그렇게 불안한 얼굴로 보고 있으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건지. 애초에 제 말 한 번 믿어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던 일이란 말이다.

“바보 같기는.”

멀리 있던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리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당보는 슬그머니 팔을 풀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청명의 얼굴은 분노도, 짜증도 아닌 안도만을 담고 있어서 그만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머리를 만져주던 손이 점점 주머니 쪽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급히 청명의 팔을 밀어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제대로 못 하는 거 같길래.”

청명은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담배를 꺼내 당보의 입에 물려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게 뭐지 하는 얼굴로 올려보고 있으니, 당보의 손에 있던 라이터도 가져가 물고 있는 담배 앞에 대주었다.

“내가 빨라고 하면 빨대라고 생각하고 빨아.”

당보가 고개를 끄덕이자, 청명은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빨아.”

청명의 신호에 당보는 빨대를 생각하며 숨을 빨아들였고, 훅 올라오는 역한 연기와 메슥거림에 몸을 앞으로 숙이며 기침을 토해냈다.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울렁거리고. 담배를 피우면 기분이 나아진다던가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던데 저는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들고 있던 건 청명이 가져가 냄새는 좀 사라졌지만, 진정되지 못하고 올라오는 기침은 여전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괜찮아?”

“아뇨.... 토할 것 같아요.”

“그러게, 고집은 왜 부렸어.”

청명이 직접 넣어주는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당보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처음 먹는 맛도 아니고 집에 굴러다니는 매실 맛이라 심장이 간질거렸다. 비록 남은 담배를 전부 반으로 부러트려 버리는 걸 볼 때는 조금 아깝기도 했지만, 저를 보는 청명이 내밀어주는 손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해보니까 어때.”

꼭대기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청명이 물었다. 당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완전 별로였다고, 다시는 피우지 않겠다고 답했다.

“취향은.”

“아, 장난이었다고요! 아직도 못 믿어요?”

“믿지. 아깐 미안했다.”

사과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당보는 버튼을 누르는 청명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밖에서 이러면 보통 밀어내거나 짜증 내던 사람이 받아주는 걸 보고 있자니, 무산된 데이트가 떠오르고 솔직히 꼴렸던 청명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제게 미안해하는 지금이라면 받아줄 법도 하지 않나 싶어서, 당보는 은근한 목소리로 어깨에 머릴 기댔다.

“형님 이따 다시 말해주시면 안 돼요?”

“뭘?”

“담배 물려줄 때 한 말이요. 저 취향이 좀 바뀐 것 같거든요.”

“빨대라고 생각하라고?”

“그다음이요. 두 글자에 빨대랑은 첫 글자가 같습니다.”

청명은 금방 의미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는 당보의 이마를 툭 쳤다.

“담배 냄새나서 싫어.”

“사탕 먹어서 매실 향 밖에 안나요. 좋아하시잖아요?”

“사탕으로 빠질 냄새면 간접흡연이 왜 있겠냐. 너 손이랑 옷에서도 냄새나는 거 모르지?”

당보가 급하게 제 손과 티셔츠의 냄새를 맡는 사이, 청명은 당보의 손목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냄새난다는 말 하나 했다고 시무룩해져서 졸졸 따라오기만 하는 뺨에 입 맞춰주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멈춰 선 당보를 집으로 들여보냈다.

“아니면 같이 씻던가. 제대로 핀 것도 아니니까 씻으면 냄새도 빠질 거 아니냐.”

“...진짜요?”

“싫으면 말고.”

“아뇨 너무 좋아요! 같이 씻어요.”

재빨리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챙긴 당보는 후다닥 욕실로 들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욕조에 물을 받자 곧 청명이 들어와 옷을 벗었다. 오늘은 흥분에 미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산산이 부숴버리는 두툼한 근육을 보면서 당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소리를 들은 청명이 씩 웃으며 다가오기까지 하는데. 지금 달려들어도 되나? 하지만 아직 몸에서 냄새날 텐데. 물을 받을 게 아니라 옷 먼저 벗을걸... 하고 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있으니, 청명은 당보의 턱을 잡고 그대로 혀를 섞었다.

“그냥 해. 이 정도는 괜찮으니까.”

당보의 안에서 무언가 뚝 끊어짐과 동시에 청명의 손이 당보의 상의를 벗겨냈다. 곧이어 첨벙 하는 물소리가 뒤를 이었고, 후에는 질척이는 소리만이 욕실을 가득 채웠다.

재결합. 주인 없다고 티를 내는구나

- 청문형이 버섯 사 오라고 하십니다.

청명은 미리보기로 대충 내용을 확인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어락에 손을 올렸다. 체육관에 있었을 때면 몰라도 집 앞에 도착한 시점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 버섯을 사 온다는 선택지는 청명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일찍 오래서 일찍 왔더니 심부름이나 시키고 말이야. 청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청진을 내보내겠다고 다짐하며 꾹꾹 번호를 눌렀다.

“저 왔어요.”

제 기억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에 청명은 피식 웃으며 신발을 벗었다. 현관에서부터 고소한 음식 냄새가 나는 것도 그렇고, 여전한 가구들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지난 명절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안심되었다. 비록 늘 둘이 오던 게 혼자가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뭐야, 버섯은?”

제 방에 가방을 두고 겉옷을 벗고 있자, 양손에 장갑을 낀 청진이 청명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없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 하자 그럼 그렇지 하며 한숨을 쉬는데 상당히 거슬리는 꼴이라 다리를 걷어차는 것으로 짜증을 풀었다.

“일찍 와줬잖아.”

“아오.... 문 앞에서 문자 봤을 거 아닙니까. 이럴까 봐 비밀로 한 건데.”

청진은 아려오는 다리를 절뚝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금쯤 훈련이 끝난 형이 버섯을 사 오고, 씻는 동안 전골을 끓여 먹으면 완벽했는데. 저 사랑에 미친 인간 때문에 전부 말아먹었다.

청명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청진을 무시하고 거실을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형이 만드는 집밥을 먹을 생각에 신이나 발걸음이 가벼웠다. 안 그래도 몇 달간 배달 음식만 먹어 질린 참이었는데, 아예 며칠 여기서 지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형 저 왔,”

“형님 오셨어요?”

주방 한쪽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청문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청명에게 대답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선명한 목소리의 주인은 분홍색 앞치마를 메고 하얀 밀가루가 묻은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믿기지 않아 청명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청문형과 당보가 요리하는 모습은 청명에게 있어 낯선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는 청문의 자리에 제가 있었으며, 둘이 만든 요리로 청문과 청진을 대접해 주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익숙함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도 청명은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어 제 다리를 꼬집었다.

당보가 한 손에 만두피를 올리고, 그 위에 소를 얹어 빚어낸 만두가 차곡차곡 접시에 쌓이면, 청진이 찜기에 만두를 담아가고 당보는 다시 접시 한가득 만두를 채우는 일이 반복된다. 청명이가 눈을 못 떼는군요. 이럴 거면 더 일찍 부를걸 그랬습니다. 하는 형이나 그걸 웃으며 받아주는 당보나, 둘이 버섯이나 사 오라고 하지 그래요? 하는 진이나. 전부 청명의 상식을 벗어난 것들뿐이었다.

“명아. 그리 좋으면 당보 씨랑 마트나 다녀오거라.”

“네, 네?”

“좋네요. 여기서 붙어 있지 말고 가서 데이트하고 오십쇼.”

어버버하는 청명이 네? 만 반복하는 사이 당보는 입고 있던 앞치마를 정리하고, 손과 얼굴까지 깨끗하게 씻어 현관에서 청명을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외투에 들어가 있어 빼주고자 목에 손을 댔더니 화들짝 놀란 당보가 목덜미를 잡고 저를 돌아보거나. 청명의 주머니에서 차 키를 빼낸 당보가 익숙하게 조수석의 문을 열고 청명을 기다리다 둘 다 멈칫한 헤프닝이 있긴 했지만, 내심 이런 상황이 반가웠던 청명에게는 아주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를 타고서도 서늘한 얼굴로 정면만을 응시하는 당보에 청명은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헤어진 전 남자 친구와 마트에 버섯을 사러 가는 이 황당한 상황은 둘째치고, 왜 네가 우리 집에서 만두를 빚고 있던 것일까. 만약 제가 버섯을 사 왔다면 꼼짝없이 당보와 저녁을 같이 했을 것이다. 어쩌다 헤어진 것이 들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싸해졌겠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던 너는 도망치거나 할거고, 그럼 뒷수습은 내가 해야 하는데 뭐라고 해명하냐. 잡고 싶어서 말을 안 했다고? 연기인 걸 알면서도 네 옆에 있고 싶었다고? 생각만 해도 지끈거리는 상황에 청명은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다 같이’ 집에서 밥을 먹자고 할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이건 내 잘못이 아니지 않나? 나야 오랜만의 가족 식사니 피할 이유가 없다 할 수 있지만, 너는 이제 가족도 아니고 뭐도 아닌데.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고 해놓고 뻔뻔하게 남의 집 주방에서 만두를 빚는 게 말이 되냔 말이냐. 게다가 청명은 몇 번이고 신호를 보냈었다. 너랑 연락하고 싶다고,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당보가 제멋대로 집을 뛰쳐나간 당일에는 제 화를 식히느라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멀미 나요?”

눈을 감고 있던 걸 오해했는지 운전하다 말고 당보가 말을 걸었다. 그런 것 아니라고 손을 휘저으면 제 반응을 살피는지 눈을 마주하는데 얘가 이런 얼굴이었던가. 늘 생글생글 웃는 얼굴만 보다가 무표정을 보니 제가 아는 당보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연기를 하는 것일까 찬찬히 뜯어보면 말랑했던 볼살이 아닌 평소보다 진한 화장이, 늘 하고 다니던 액세서리 하나 없이 밋밋한 귀와 목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보니 늘 단정하게 반묶음 하던 머리도 곱게 풀러 두었고, 핸들을 잡은 손의 허전한 약지가 눈에 띄었다. 아주 주인 없다고 티를 내는구나.

“왜...요? 저 얼굴에 뭐 묻었어요?”

적색 신호가 걸리자, 당보는 재빨리 핸드폰 카메라로 제 얼굴을 확인했다. 이리저리 돌려보며 무언가 묻은 건 없는지, 화장이 지워지진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나오기 전과 똑같이 말끔한 얼굴에 당보는 해명하라는 듯 청명을 콕콕 찔렀고, 청명은 당보에게 향해있던 몸을 창 쪽으로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거 집어요. 네. 3개면 될 겁니다.”

언제나 서로의 손이 나란히 올라오던 손잡이는 쇼핑리스트를 쥔 당보의 차지였다. 청명은 당보가 가는 대로 집으란 것을 집을 뿐, 간식이나 술에 대한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따라만 다녔다.

너무 오래 걸리는데. 이럴 거면 그냥 내가 확인하고 골라 오는 게 낫지 않나. 당보가 고개를 저으면 다른 걸 집고, 또 다른 걸 집는 상황이 3번이나 반복되자 든 생각이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당보는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로 돌아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입도 다물고 손짓으로 청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당가 출신이라 네 행동 하나하나에 잡음이 많은 것은 알고 있어 충분히 참고 넘어갈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이해와는 별개로, 손짓으로만 물건을 고르자니 답답했고 어정쩡하게 카트 옆을 걸으며 네가 시키는 것만 집어야 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도 살 게 남았는지 조그만 종이를 들여보고는 저 혼자 카트를 출발시키는 것도 거슬리는지라 청명은 느릿하게 움직이는 카트를 손으로 멈춰 세웠다.

“줘.”

청명이 손을 내밀자, 당보는 청명의 눈을 한번 손을 한번 보고 카트에서 손을 뗐다. 그러더니 청명이 있던 카트의 옆자리에 서는데 종이가 아니라 카트를 달라는 뜻으로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카트를 받아서 뭐에 쓰겠냐. 뭘 사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짧은 한숨을 내쉰 청명은 왜 안가냐는 듯 자신을 보는 당보의 손을 도로 손잡이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그 위에 제 손을 얹은 채 야채 코너를 향해 카트를 움직였다. 당보의 손에 있던 종이는 어느 순간 청명의 손에 들려있었고 서로의 손이 포개진 채 카트를 끄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계산대에 이르기까지 둘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들고 있던 짐을 뒷좌석에 내려놓은 당보는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았다. 쓰고 있던 마스크는 벗고 모자는 쓴 채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청명은 안전벨트도 시동도 걸지 않고 앉아만 있는 당보를 곁눈질로 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길래 출발하나 싶어 벨트를 맸으나 내려요. 한마디와 함께 운전석 문을 쾅 닫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이다. 청명은 기껏 맨 벨트도 풀지 않고 따라가려다 어깨가 걸려 그제야 벨트를 풀고 당보를 따라갔다.

당보는 구석진 벽에 기대 멍하니 건너편 도로를 보고 있었다. 마스크도 없고, 모자는 손에 쥔 채로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일까 몸으로 오가는 길목을 가리면 당보는 흘끗 시선을 주고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큰형님이 먼저 부르셨어요.”

“뭐를?”

“오늘요. 제가 찾아간 거 아니라고요.”

“아.... 형이 연락했구나.”

“아직 말 안 하신 거죠?”

주어 없는 말에 청명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직이라 표현할 시간이 아님에도 돌려 말해주는 네 다정에 고마워해야 할지, 제 미련 때문에 이런 상황을 겪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럴 거 같았습니다. 형님이랑 싸웠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대회 준비 때문에. 바빠서 말 못 했어.”

“아, 그렇네. 준비는 잘하고 있어요?”

“준비할 게 뭐 있나. 평소처럼 훈련하고 그러는 거지.”

“어디 다친 곳은 없고요? 형님 한 번씩 크게 아프잖아요.”

“멀쩡하다. 너는?”

“저도 그래요.”

잔잔하게 이어지는 대화에도 청명은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오늘 행동을 보면 아주 마음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지금의 대화는 꼭 마지막을 앞둔 것 같아서. 반년이나 지났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애정이 아직 네게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무슨 생각 해요?”

“네 생각.”

“지금 하기엔 좀 늦지 않았나.”

분명 웃고 있음에도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얼굴로 당보는 들고 있던 모자를 청명에게 씌워주었다. 모자도 쓰는 법이 있다며 늘 제 머리가 눌리지 않도록 신경 써주었는데 오늘은 꾹 눌러 씌우기만 했다. 제가 당보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가 서로의 눈을 볼 수 없도록. 그러더니 한참을 입만 벙긋거리다 말하는 것이다.

“오늘 뻔뻔하게 굴어서 미안했습니다. 그동안 연락 씹은 건 이것보단 쪼금 덜 미안하고요.”

“뭐 인마?”

“솔직히 형님도 그날 말 심하게 한 거 인정하시잖아요. 저 진짜 상처받았단 말입니다. 뭐라고 하셨더라... 네 좆같은 성격 받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작작 하라고 그랬나?”

“네가 헤어지자고만 안 했어도 그렇게까지 안 했다.”

“그동안 키스신 하는 것도 다 참고 넘어갔는데 왜 이제 와서 지랄이냐고도 하셨죠. 기억납니까?”

“너는 거기에 대고 나랑 이런 소모전 하는 게 지친다고 그랬지. 지난 이야기 하자는 게 아닌데 왜 지난 일을 꺼내와서 널 힘들게 하냐고.”

“네에. 그랬죠.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씁쓸한 미소를 지은 당보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작은 무언가를 찾아 손에 쥐었다. 손가락에서 빼낼 때는 당연히 당신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가져왔건만 막상 주려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련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당신과의 흔적을 정말이지 주고 싶지 않았다.

“집에 있는 건 다 버리셔도 됩니다. 대부분 형님이 사셨으니 가지셔도 되고 팔아도 되고, 마음대로 하세요.”

당보는 청명의 손을 잡아 그 위에 반지를 올려주었다.

“받아요, 이거 주려고 만난 겁니다.”

제 손안에 들어온 게 반지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청명은 당보의 손목을 잡아 억지로 반지를 쥐게 했다. 살살 잡아줬더니 힘으로 빠져나가려 들길래 양 손목을 벽에 고정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모자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자 모자를 던져버리고 당보의 턱을 잡았다.

“싫어.”

노려보는 눈은 촉촉하게 젖어있었고 양 뺨에는 선명한 눈물 자국을 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악을 쓰는 것이다.

“저한텐 필요 없으니까 돌려드린다고요.”

“팔아서, 뭐라도 사 먹어. 쇼핑도 하고 영화도 봐. 너 좋아하는 술도 먹고 여행도 가고, 뭐라도 하면 되잖아.”

“제가 이걸 어떻게 팔아요. 형님이 무슨 마음으로 주신지를 아는데.”

“알면 그냥 가지고 있어.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네게 줬는지 알면.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형님이 우셨잖아요. 대회에서 상처를 입어도,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던 사람이. 제가 헤어지자고 해서 울었잖아요. 그런 제가,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습니까. 무슨 염치로...”

말을 하기도 전부터 울먹이던 당보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제 잘못을 알아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하 씨... 왜 우는데. 네 말을 생각하면 지금 울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 아니냐?”

우는 얘를 두고도 차마 제 성격대로 굴 수 없어 청명은 당보를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손목이 풀리자 힘이 빠진 당보는 주저앉을 듯 비틀거렸는데, 청명이 허리를 받쳐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나서야 벽에 몸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청명은 가만히 당보를 내려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또륵 떨어지는 눈물에 심장이 아려와 당보의 눈가를 문질러 눈물을 닦아주고자 했다.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청명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출 줄을 몰라서 청명의 손과 어깨까지 축축하게 물들이고 말았다.

“이제 좀 괜찮아?”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청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당보는 청명을 안을 듯 말듯 팔을 꼼지락거리며 대답을 미뤘는데 청명이 당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자 입을 열었다.

“잘못했어요. 못된 말해서 죄송해요....”

“빨리도 말한다.”

“반지,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거 보면 눈물이 나서.. 흡, 얼굴 보면 또 짜증 낼 것 같아서어....”

“그래, 계속 울더라. 그럴 거면서 필요 없기는 무슨.”

청명은 허전했던 당보의 약지에 다시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짝이는 손을 흐뭇하게 보고 있다가 손을 내려주고 붙어있던 몸을 떼면, 당보는 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체중을 실어 몸을 기댔다.

“...혹시 나 싫어졌어요? 정떨어지고, 그래요?”

“갑자기?”

“요즘 연락 안 했잖아요. 오늘도 제 이름 한 번도 안 불러주고, 얼굴도 피하고.”

“헤어졌잖아. 헤어졌는데 어떻게 그래.”

아, 이건 좀 심했나. 아니라고 소리치거나, 적어도 사과할 줄 알았는데. 축 처진 얼굴로 입까지 다물어 버린 당보에 청명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장난이었다고 그래야 할지, 좋아한다고 말해야 할지. 어차피 너나 나나 이대로 헤어질 마음 없는 거 알았으니 그냥 키스 한번 하고 박력 있게 사랑한다고 하는 게....

 

“저랑 사귀면...... 니다.”

이해하지 못한 청명이 되묻는 것보다 얼굴 전체를 새빨갛게 물들인 당보가 청명의 손을 가슴 위에 올리는 것이 더 빨랐다. 그러고는 그 손이 떨어지지 않도록 꾹 누르는데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열기와 두근거림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때쯤 돼서야 귓가에 속삭이는 것이다.

“저, 저랑 사귀면. 가슴 만져도 된다고요....”

허, 참. 청명은 저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리지도 않고 피식거렸다. 어디서 요망한 걸 배워와가지고. 이러면 내 화가 풀릴 줄 알았나 보지? 바보 같기는, 만질 것도 없는 거 만져봤자 흥분이나 하겠냐? 네가 여자도 아니고 나처럼 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손에 잡히는 게 있긴 하겠냔 말이다.

“지금도 돼?”

“차에서면...... 네에.”

 

당보는 그로부터 1시간 뒤에 걸려 온 청문의 전화에 간신히 청명에게서 탈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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