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연성

청명당보 청당


* 본 작품은 2차 창작물로 원작 스토리 진행과는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 원작 날조, 적폐 캐해 유의

"야. 그냥 화산에 와라."

"엥?"

"뭔 엥."

"아니, 그건 좀..."

"이 새끼... 도사를 꼬셔놓고 모르는 척하네..."

"제가 언제 꼬셔요?!"

화들짝 놀라는 낯짝이 얄미워서 이마에 주먹을 꿍 박고는 다시 병을 들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본새가 방금 막 차인 사내의 그것보다는 늘 보던 술에 전 도사인지 도사 아닌 도사 같은 모습이다. 당보는 스스로의 행동을 돌이켜보았다. 정말로 도사 형님을 꼬드겼던가? 꼬셨던가? 유혹을 했던가? 했던 것 같긴 하다. 납득한 채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 그게 또 심기를 거슬렸는지 이번에는 정수리에 주먹이 꽂혔다. 그 바람에 당보는 아프다고 투덜대며 머리를 감싼 채 한껏 어깨를 움츠렸다.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떠 청명이 있을 방향으로 올려다보니 귀여운 척하지 말라며 또 맞았다.

"저는 진짜 형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소!"

"알 바냐?"

"우리 그래도 친운데!"

당보의 마지막 말에는 입을 딱 다문채 남은 술에 원한이라도 서린 사람처럼 술술 마셔댔다. 어이쿠, 우리 도사 형님, 그러다가 선계 가버리겠소? 비꼬듯 말을 꺼낸 당보는 급하게 그의 입가에 안주를 한 점 들이밀었다. 이거라도 씹으면서 드시오! 아주 술을 물 마시듯이 마시고 있어... 당보의 행동에 또 그새 기분이 풀렸는지 돌산 바위 덩어리 같은 사내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고양이가 사냥감을 채려 궁둥이를 한껏 쳐들고 꼬리를 흔드는 모양새처럼 높게 올라갔다.

"새끼... 아양도 떨 줄 알고."

"아니, 이런 게 아양의 축에 듭니까?"

저저. 순진한 도사 놈이 진짜 아양 떠는 것들을 못 봐서 그러네. 눈을 가늘게 뜬 당보가 혀를 차자 청명은 까분다. 한 마디 뱉어냈다. 저 말에 정말 더 까불었다가는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라 매화가 날아와 꽂힐 것 같아 당보도 더는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다.

습한 기운이 공기 중에 가득했다. 곧 비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나무나 풀 따위가 무성한 곳 중에서도 반듯하게 세워진 정자는 두 사람이 자주 만나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공간이었다. 정자의 나무마저도 반질반질한 것이, 습기를 잔뜩 먹은 게 분명했다.

"형님, 비가 떨어질 모양인데... 이제 슬슬 일어나시지요."

청명은 정자 밖으로 고개를 쭉 빼내어 하늘을 힐끔 쳐다보고는 그러마, 했다. 커다란 몸을 일으켜 주독을 훅 날리고는 유유히 걸어 나갔다. 늘어진 술병을 처리하는 건 결국 당보의 몫이었다. 투덜거리면서도 빈 병을 얌전히 수거해 소매에 쑤셔 넣고는, 형님, 같이 가오! 하며 들러붙었다.

톡, 토독...

"아이고."

결국은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절대고수의 경지에 다다른 두 사람이야 경공을 빠르게 펼치면 비가 더 거세게 내리기 전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다. 그리고 비가 좀 쏟아져도 내력을 밖으로 돌려 몸을 얇게 감싸면 젖지 않을 수도 있다. 아직은 비가 덜 쏟아지는 모양새니 빠르게 마을에 가자고 말을 건네려던 차에 돌아본 청명은 한껏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보의 등허리께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악! 이 말코 도사가!"

"뭐라?"

청명은 당보를 들쳐 맨 채―정말로 짐짝을 매듯 어깨에 턱 얹힌 모양새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내력을 돌리지도 않아 비가 고스란히 두 사람의 몸을 적셔내었다. 안 그래도 장포가 묵직한데 비까지 맞아 축축해지면 그 무게를 어찌 감당할꼬! 게다가 소매에는 귀한 독이며 비도며, 당보에게 있어 중요한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장포만은 보호해 달라는 말을 깡그리 무시한 청명은 일부러 쏟아지는 비를 피하지 않았다.

"형님은 등선은 못할게요."

"새끼가... 말 가려해라."

"무슨 도사가 이래!"

"어쭈."

다리를 허우적대며 버둥대는 당보를 가볍게 제압한 청명은 씩 웃었다. 저놈이 홀딱 젖은 꼴을 보고 싶었다는 게 청명의 속내였다. 물에 빠진 쥐새끼 마냥 척척하게 젖어 징징대면... 아, 큰일이구만. 좀 동하는데... 다시 말하지만, 두 사람은 그저 친우일 뿐이었다. 당보는 청명의 음심 가득한 상상 따위 알지 못한 채 더 이상의 반항은 그만두고 이놈의 소낙비가 얼른 그치기만을 바랐다. 서서히 장포가 깊숙이 젖어들고, 장포 안의 무복까지 척척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명의 걸음걸이는 결코 빨라지지 않았다.

당보의 칭얼거림―칭얼댄다는 표현은 순전히 청명이 주장하는 바다― 끝에 결국 청명은 화음현 어귀의 객청에 발을 들였다. 쫄딱 젖은 두 사람을 본 주인장은 빠르게 면포를 가져다주었다.

"비가 좀 그치고 옷이 마를 동안만 머무릅시다."

소매 안의 독초들이 무사한지, 비도가 괜히 젖어 녹이라도 슬진 않았을지―물론 당가의 장인들이 제작한 것이니 비를 좀 맞았다고 해서 녹이 슬거나 문제가 생길 리는 결코 없겠지만―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방에 들어선 당보는 거침없이 장포를 벗고, 무복까지 벗어 속곳만을 입은 차림으로 소매에 든 것을 죄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노라니 청명은 깊은 한숨만이 내쉬어지는 게 아닌가. 저 새끼는 옆에 듬직한 사내가 있어도 아무렇지 않군... 정말로 한 톨의 연정조차 없는지. 그게 서운해지려다가도 청명은 마음을 다잡았다. 알 반가. 당보 새끼는 어쨌든 제 곁에 있어야 했다. 어차피 친우라고 해봐야 서로 뿐인데, 그러면 기왕 하는 김에 정인도 하고 다 해보지 뭐. 당보는 알지 못할, 알았다면 그 하얀 얼굴을 잔뜩 매화색으로 물들일게 뻔한 생각 따위를 하며 청명도 젖은 도복을 벗어냈다. 척척한 옷을 벗어내고 있자니 문득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당보 놈이 헤, 입을 벌리고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새끼... 눈깔 뭔데."

"예? 제가요? 제가 언제요?"

"그 음흉한 눈깔 뭐냐고. 새삼 반했냐?"

"아니. 형님 도사 아닙니까?"

"우리 문파는 혼인이 가능해."

"혹시 좀... 고프신지..."

짙은 눈썹을 들썩. 아무래도 이리저리 위에 껴입을 게 많은 탓에 제일 안에 받쳐 입는 속곳만큼은 얇디얇아 당보의 몸선이 그대로 비춰보였다. 그걸 가만 보고 있자니 아까 잠시 비를 맞으며 상상했던 게 청명의 머릿속에 훤히 펼쳐졌다. 저 작달막한 머리통에서 무슨 상상이나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청명은 차려진 밥상을 굳이 거절하고 돌려보내는 작자는 아니었다.

커다란 몸을 숙여 당보의 낯 가까이로 다가가자 당보는 흠칫하고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분위기가 묘해지니 괜히 점소이가 편히 쉬시라며 정돈하고 나간 침상이 신경이 쓰였다. 여기서 침을 삼키는 순간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이게 싫은가? 불편한가? 도망치고 싶은가? 그렇지는 않다는 게 오히려 당보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차라리 곧 색사 직전의 요상한 기류가 싫고, 역겹다면... 그냥 애써 모르는 체해도 되었다. 미간을 좁히기만 해도 청명은 선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아마 한동안은 마음을 갈무리하느라 단장애에 처박혀 있겠지. 당보는 그동안 산채나 털러 다닐 것이다. 하지만...

당보는 청명의 멱을 잡아 입술을 접붙였다. 말캉한 입술이 맞닿자 청명의 단단한 팔뚝이 당보의 허리를 끌어당겼고, 당보는 그의 손길에 자신을 맡겼다.

**

"형님은 적당히 란게 없소?"

"적당히 한 건데."

"이게...?"

밤새 시달린 당보는 아마 자신이 무인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못했으리라 짐작했다. 저놈의 도사는 무슨 양기가 그리 철철 넘치는지! 당보는 끙끙대면서 은근슬쩍 청명의 팔을 끌어안아 어깨에 고개를 푹 기댔다. 한껏 아양 떠는 표정을 하고는 아잉, 형님, 애교스레 말하는 모습에 청명의 표정이 헤벌레 해졌다.

"새끼... 업혀라."

아주 못 걷는 건 아니었지만. 우리 정인 된 지 첫날이니까. 당보는 괜스레 유치하게 굴어보고 싶은 마음에 안 하던 짓을 해가며 기어코 청명의 등짝을 차지했다. 다리를 달랑거리며 갑시다! 외치는 가볍게 들뜬 듯한 목소리에 청명은 그저 픽픽 웃을 뿐이었다. 당가의 독쟁이가 이렇게 귀엽게 굴 줄 알았나... 가주나 원로원 놈들은 다 늙어빠져선, 반로도 못한 것들이라 그런지 꼰대에 귀염진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데 당보만이 검댕이들 사이에서 톡 튀어나온 작고 알사탕처럼 달았다. 이게 다 저기 어디 양민 아해들이 말하는 콩깍지인지, 뭔지.

청명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등에 업은 이가 흘러내릴까 단단히 허벅다리를 당겨 올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결코 작지 않은 사내를 업고 가는 모양새가 이러려고 덩치를 키웠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청진이나 장문사형이 보노라면 기겁을 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아늑하고 작디작은 오두막 하나를 지어 당보 놈 밥이나 해먹이고, 밤엔 좀 예뻐해 주며 사는 걸 아주 잠깐 상상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강호고 뭐고, 마음에 안 드는 놈은 죄 패고 다니던 사내가 연모하는 이를 만나 이리 말랑한 생각을 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고. 당보는 청명의 속내는 모르지만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비슷한 상상 따위를 하며 청명의 목덜미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그런데, 형님은 언제부터였소?"

"세 번째 봤을 때부터?"

"... 이 양반 감정에 둔한 줄 알았더니..."

"난 누구에게나 솔직하지."

허, 하고 웃은 당보는 얄밉다는 듯 청명을 흘겼으나 이내 실실 웃어버렸다. 알게 뭔가, 어쩌면 서로 처음 봤을 때부터 이렇게 되리라 느낌이 왔을지도. 청명의 목을 확 끌어안은 채 볼에 입술을 몇 번 쪽쪽댄 당보는 드물게 설레는 기분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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