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연성

노을

청명당보 청당

초록의 열매 by 강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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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작품은 2차 창작물로 원작 스토리 진행과는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 원작 날조, 적폐 캐해 유의

 

어리디어린 사제를 위해 매년 돌아오는 생일을 기쁜 추억으로 남겨주고자 고군분투 해온 청문이 들으면 퍽 섭섭할 말이지만, 청명은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내심 누군가 챙겨주길 바라는 위인이 아니다. 청문이나 청진, 혹은 장로님 생신 축하한다며 삐약대는 어린 사질들이 아니면 아예 잊고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청명의 이런 성정을 당보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생일을 앞두고 칠 주야 전부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천의 주루를 잡고, 술을 준비하고, 음식까지 미리 주문을 해두는 심정을 알 리가 있나! 하루쯤은 제 마음대로 하게 놔두려 쓸데없는 독도 소매에서 죄 빼두기까지 했다. 당보는 코끝을 검지로 쓱 쓸며 자기의 관대함과 도사 형님을 향한 마음이 이만큼 깊다고 생각했다. 형님은 나한테 잘해야하오...따위의 말을 중얼대기도 하며.

 

어느덧 날짜가 훌쩍 코 앞까지 다가왔다. 역시나 눈치 없으신─꼭 이런 부분에 대해서만 더럽게 눈치가 없다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청명은 양다리를 휘적대며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을 사천으로 향했다. 아 거 참, 서안에서 보자 하니 굳이 굳이 사천에서 봐야 한다 하니 이 서방님이 가줘야지. 가끔 이렇게 앙알대며 제 고집을 피우면 정수리에 중지를 세워 박아주곤 했으나 그 또한 얄밉지 않으니 따라줄 수밖에. 사천에 맛집이 있다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사정사정했으니─다소 청명에 유리한 대로 기억이 남게 되었지만─ 마누라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암. 청명은 당보를 생각하니 자연히 입꼬리가 실룩대는 걸 애써 잠재우며 당가의 문턱을 건넜다. 뒷짐을 지고 크게 헛기침하면 당가의 어린 시비가 쪼르르 나와 검존께오서 도착하시면 이리로 오라 이르셨습니다, 하고는 당보의 서찰을 건네주는 것이다. 으아니, 서방님을 사천으로 오라 이르고는 저 먼저 꼬랑지를 빼? 마누라 예쁘다고 궁둥이 몇 번 토닥여줬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서는~ 하는 불만을 아해 앞에서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저 알겠다며 서찰을 품속에 집어넣고는 당보가 있을 장소로 발을 놀렸다. 마주하면 고 얄미운 정수리에 딱밤부터 날려주마, 그리고 오늘 밤에는 재우지 않으리라─그래, 사실은 이걸 위한 핑계에 불과했겠다─ 다짐했다.

 

“내가 당가까지 갔으면 딱 마중을 나와야지, 여기까지 불러대?”

“아잇 참. 여기에 예약까지 해두었으니 미리 와서 술상을 좀 내오라 일렀죠. 딱 오자마자 드실 수 있게.”

 

일전에 한 번 들렀던 주루였다. 그때가 언제더라,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달큰한 향을 뿜어내면서도 알싸하게 목구멍을 적셔 혓바닥에 착착 달라붙던 술의 맛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래, 그 술과 적당히 매콤하게 요리된 궁보계정의 궁합이 좋아 다음에도 오자 했던 말이 기억났다. 요 귀여운 마누라가 그걸 또 기억하고 자리를 잡아두었단 말이지. 청명은 사천까지 걸음 하였다가 당가에 헛걸음하고 다시 돌아 나온 일을 머리에서 지워주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오늘 밤에 얌전히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었다.

 

온갖 손님이 뒤섞여 어지러운 1층이 아닌, 꽤 상층에 아늑한 방을 잡았겠다. 화려한 장식을 뒤로하고 도사보다도 더 도사같이, 가장 화려한 것이래 봐야 걸친 장포 소맷자락과 끝단에 수 놓인 모란과 나비가 전부인 사내가 양팔을 벌려 자랑하듯 방을 보여주었다. 하층에서 식사는 해봤어도 위층의 객청까지는 처음인 청명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저 아래 시전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데다, 저 멀리 당가가 언뜻 보이기도 했다.

 

“언제 또 방까지 잡았냐.”

“형님 편하게 잡수시라고 잡았죠. 그리고 검존의 명예를 지켜드리기 위해서라도...”

“이놈.”

 

뒷말에 반사적으로 당보의 허벅다리에 주먹을 꽂아 넣고는 설렁설렁 걸어 창 아래에 곱게 펼쳐진 술상 가까이에 다가갔다. 별로 세게 치지도 않았건만 엄살을 부리던 당보가 청명의 뒤를 따라 자리를 잡았다. 형님이 좋아하시는 분주를 가장 맛있게 만든다는 곳을 찾아가서 웃돈까지 얹어주고 얻어와 가게에 부탁해서 준비한 거다, 칠 주야 전부터 가게에 미리 말을 해놔서 제일 좋은 재료들로 엄선한 음식이다, 어떻다... 청명은 당보의 자랑스러운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런 것보다 쟤가 옆구리에 궁둥이 붙이고 앉으면 좋겠는데, 싶어 허리를 끌어안아 제 허벅다리 위에 앉혔다. 민망해하면서도 얌전히 제 다리 위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는 게 오늘 왜 이렇게 순순하지, 싶은 거다.

 

“너 오늘 또 뭐 새 독이라도 탔냐?”

“아니, 저를 뭐로 보시고? 늘 그런 게 아니라요, 아니, 애초에 독 조금씩 탄 건 익숙해지시라고 탄 건데!”

“새끼... 내가 만독불침만 되어봐라, 아무리 먹여도 소용없게 해주마.”

“솔직히 되어주면 제일 좋소!”

“네 실험이 소용없어져도?”

“그게 목적이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입술을 삐죽이는 게 보기가 좋아 엄지와 검지로 잡아당기듯 슬쩍 꼬집고는 잔을 내밀었다. 한번 따라 봐라, 하면 투명한 술이 잔을 그득 채웠다. 단숨에 들이키고는 아무래도 역시 우아하게 잔에 마시는 건 영 간에 기별도 안 가 병을 쥔 채 마시기 시작했다. 기껏 잔도 예쁜 걸로 준비해 놓았는데, 겨우 한 잔 받아마시고 이러기 있느냐며 투덜대는 마누라 입술에 궁보계정 한 조각 물려주고는 키들댔다. 아, 이게 사는 맛이지. 바쁘게 음식을 씹어대면서도 앞 접시에 청명의 입에 물려줄 안주를 하나하나 골라 입에서 술병이 떨어지는 족족 안주가 들어왔다. 오늘따라 입안의 혀처럼 구는 당보가 퍽 마음에 들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당보 놈이 뭐 부탁할 게 있나 보군. 이리하지 않아도 들어줄 참이지만 제 눈치 보느라 비위 맞춰주는 건 썩 마음에 드네, 따위의 생각이나 해댔다.

 

“형님이 사천 음식 잘 먹어주니까 뭘 자꾸 먹여주고 싶잖소.”

“느이 집 숙수랑 이 집이 음식을 잘해.”

“안 그래도 숙수가 검존 어르신 오실 때는 미리 알려달라 하더이다! 아주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맛나게 해드린다고. 늘 다 드셔주시니 그도 기쁘겠지요.”

“숙수한테 잘해줘라. 엉? 그 맛난 음식에 독이나 타서 애들 먹이지 말고.”

“그건 또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한데...”

“또!”

 

매번 집구석이 이러쿵저러쿵 징징대면서도 청명이 한마디 거들면 아니 뭐 또 그 정돈 아닌데~ 하며 머리카락을 빙빙 꼬아대는 게 영 마뜩잖다. 누군들 처가댁 욕하는데 한 술 얹어주고 싶으리. 그저 마누라 기분 상하게 한다 하니 거기에 편들어주는 것뿐일 진데도 그래도 당가가 제일이라며 험담을 한 당사자가 말을 바꾸니 어이가 없어 그랬다. 당보를 위해 원로원을 나서서 엎어준 것도 모자라 제자도 찾아 붙여줘, 비무도 해주며 이놈의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가 잘났는지도 짚어줘, 가끔 심심할까 봐 찾아와 놀아주기까지 하는데도─그 모든 과정에서 당보의 전낭을 탈탈 털어간 점은 쏙 빼놓은 참이다─ 서방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청명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리며 당보의 둔부를 슬쩍 건드렸다.

 

“아아! 지금 말고.”

“얼씨구, 나중 때도 있는가?”

“이따가 노을 봐야 하오.”

“노을은 뭔, 그거 매일 보는 꼴 아니냐.”

“여기서 보는 풍경이 또 남다르다니까?”

 

당보는 청명의 허벅다리 위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그 언저리에서 밖을 내다본답시고 허리를 쭉 빼고 몸을 기울이니, 어찌 되었든 무인이라 강골일 테니 혹여 떨어진다 해도 크게 다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무엇보다 애초에 떨어질 만큼 낭창거릴 몸이 아님을 알면서도 괜히 가슴팍이 선뜩해진 청명이 재빠르게 그 뒤로 다가가 허리에 팔을 감아 받쳤다.

 

“야야, 뭐 그리 온몸을 쭉 빼고 쳐다보냐!”

“안 넘어지오, 무슨 물가에 내어놓은 이해인 줄 아오?”

 

강한 햇살을 가리듯 손날을 눕혀 눈 위로 가져간 당보가 반대편 손으로 저기, 하고 하늘을 쭉 가리켰다. 점점 해가 넘어가며 산 중턱에 걸렸다. 서서히 산 주변과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청명은 팔십이 넘는 평생 화산에서 주야장천 봤던 노을이 오늘따라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푸른 잎이 짙게 우려낸 치자색으로 물들고, 그 빛이 사천의 땅에 스며들었다. 주루의 최상층까지 닿아 당보의 뺨을 금빛으로 반짝이게 했다. 푸른 하늘의 변하는 것보다 가장 와닿았던 건 역시 제 팔 아래에 감싸인 당보의 머리 색이 반짝이는 순간이 아닐까.

 

“오늘 무슨 날이냐?”

“...? 이 양반이, 자기 생일도 모르고 있었소?”

 

여태 자기가 그냥 이런 귀한 장소를 마련해 노을까지 보여주겠다고 전전긍긍한 줄 알았냐며 다소 억울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항변하는 당보의 모습에 그저 웃음을 터뜨렸다. 뭘 부탁하고자 함도 아니었고, 그저 정인의 생일이기에 최선을 다해 좋아하는 걸 해주려던 것뿐이었다. 청명은 기쁜 마음으로 당보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살짝 매캐하지만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드는 향냄새와 아릿한 독초 향이 훅 풍겨왔다.

 

“고맙다.”

“무얼... 그리 감동이오?”

“따지자면 네 얼굴이 감동이긴 하지.”

“솔직히 말해 보시오, 형님! 저 뭐 보고 만나는 겁니까?”

“네 미모. 미모가 사그라들면 버릴 거다.”

“아니, 이 양반이 진짜?”

 

청명은 장난스레 대꾸하고는 킥킥 웃어댔다. 하지만 어찌 있을쏘냐, 저 노을이 비쳐 환하게 금빛으로 물들었던 정인의 모습을. 오늘은 제법 마음에 드는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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