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A Deep Breath

레인보우 환타시즘

실내수영장에서 무지개는 생기지 않아

Mymy by 아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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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환타시즘이라는 게 있대. 무지개는 물체가 아니라 광학적 환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게 불가능한데, 이를 두고 세상을 허상처럼 바라보는 걸 레인보우 환타시즘이라 한다나봐.

그게 뭔 말이야?

세상을 두 눈으로 보지만 그 안에서 뭔갈 이뤄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고.

Rainbow Fantasism

아무리 노력해도 뭐가 안 되는 때가 있다. 그 때가 길어지면 슬럼프고 쇠퇴기가 된다. 그게 지속되기 시작하면 은퇴를 고려한다. 허유빈이 서 있는 곳은 끝도 보이지 않는 기나긴 내리막길 중 어딘가였다. 내리막길을 걸어갈 때 가장 두려운 시점이 언제인지 아는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초입부인지, 끝까지 3걸음 남은 지점인지 생각에 빠지게 되는 때이다. 차라리 어딘지 모르고 생각없이 걷는 것이 편하다. 오직 이 내리막길의 끝만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죽어도 끝이 나오지 않을 때의 절망감은 마지막으로 남겨진 선악과다.

언제부턴가 수영장이 검은 입을 쩌억 벌리고 저를 바라봤다. 수영장 바닥이 발목을 잡아끄는 끝도 없는 심해처럼 보였다. 걷는 것 보다 수영하는 걸 먼저 배웠기에 늘 땅보다 편했던 물은 하염없이 저를 끌어내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의 세상은 이 120cm깊이의 네모난 수영장이 다인데 그 안에서 이제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거세게 물장구를 쳐도 벽은 손에 닿지 않았다. 긴 팔을 열심히 휘저어도 잡히는 게 없었다. 25m짜리 레인이 너무 길었다.

발이 바닥에 디뎌지지도 않고, 손을 뻗어 지지할 수도 없었으니 헤엄치기를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흐르는 세상에서 난 끊임없이 살아가는데,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햇빛이 들지 않는 실내 수영장에서 무지개는 생길 수 없었다.

“못 할 리가 없는데…….”

몸을 빙글 돌려 배영 자세를 취했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눈부셨다. 물기를 머금은 수경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물자국으로 얼룩져 있어 모든 게 흐리게 보였다. 얼굴에서 흐르는 물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물을 애써 뿌리치고 헤엄쳤다. 그렇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Rainbow Fantasism

레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물에 조명이 비치고 깃발이 비치고 천장이 비치고 허유빈이 비쳤다. 발끝에 차가운 물이 드나들었지만 빠질 것 같은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허유빈이 물에게 말을 걸었다. 말소리가 거대한 수영장에서 울려퍼졌다. 수영장의 이 많은 물이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공허하게 퍼졌다. 물이 철썩거리는 소리는 그의 말소리를 삼키지 않았다.

… 레인보우 환타시즘이라는 거 알아?

세상을 인지하지만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래.

물 속의 제가 뻐끔거렸다. 활짝 웃은 행복한 표정으로 중얼중얼. 입모양을 천천히 따라하며 소리를 내뱉는다. 옅은 숨결에 스멀스멀 퍼지는 저의 잔상은 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한다.

그딴 건 없어. 내가 만든 거니까.

허유빈의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들려온 청각적 자극은 몸과 물의 마찰음이 전부였다. 정신없이 물을 헤집고 채찍질해 앞으로 나아갔다. 깃발이 보일 때 쯤 눈을 뜨니 바닥의 타일이 선명했다. 실내 수영장에서 무지개는 생기지 않는다. 레인보우 환타시즘 같은 건 없다. 선명한 세상에서 해낼 수 없는 건 없다. 내 세상에는 무지개가 끼어들 틈이 없으니까, 나는 환각을 향해 나아갈 겨를도 없으니까…….

Rainbow Fantasism

무지개는 물체가 아니라 광학적 환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게 불가능하대. 그래서 가끔 세상을 무지개처럼 바라보느라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그런 게 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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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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