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무지개

김지우 장규진 오해원 배진솔

1.

 

“키스해도 돼?”

 

6월 중순의 놀이터였다. 시기상으로는 초여름이라는데 날로 변해가는 날씨 때문인지 몸에 닿는 온도나 습도만 보자면 7월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완연한 여름 날씨였다. 그런 감상을 뒷받침하는 듯 벌써부터 놀이터 구석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서라운드로 울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옆을 돌아보면 지우와 눈이 마주친다. 그 전부터 규진을 보고 있었다는 듯. 마주치는 지우의 표정만 보면 참으로 결연했다. 마치 오늘 안에 무슨 결판이라도 낼 것만 같은.

키스야, 싫지는 않지. 아니 오히려 좋아.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사이였으니까.

 

“또 내 입술 깨물려고 그러지.”

 

문제는 규진이 아닌 지우에게 있었다.

 

 

 

 

 

2.

 

“언니는 키스해봤어?”

 

고3이라 예년보다 30분 늦어진 지우의 하원 시간을 기다렸다 함께 손을 맞잡고 나와 걸어 나오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주 태연스레 나온 말과는 달리 규진의 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 학원 자습실에 앉아 책만 펴놓고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이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낼 수 있을까를 지우를 기다리던 30분 내내 시뮬레이션했다는 건 비밀이었다. 세상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지우에게만큼은.

궁금했다. 각종 매체나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저와는 전혀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는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여자친구라고 명명할 수 있는 존재가 옆에 있다 보니 절로 궁금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작년까지는 미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이듯 놀아놓고 올해는 고3이라고 뒤늦게 공부에 열을 올리는 지우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싶기도 했고.

 

“키스? 해봤지.”

 

언제?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려다가 마주 보이는 지우의 표정에 순식간에 침착해진다. 지우가 거짓말할 때면 짓는 특유의 웃음이 잠시 스쳐 지나간 걸 봐버렸으니까. 지우는 아직까지도 제가 거짓말을 할 때면 저 얼굴이 나온다는 걸 몰랐다. 알고 있다면 아주 태연스레 하는 거짓말과는 상반된 저 웃음을 지을 리가 없었다. 세상에 사귀고 있는 사람 앞에서 키스로 허세 부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싶었는데 그게 바로 김지우였다. 아예 남남도 아닌 제 애인이라는 사람이. 정말로 몸만 큰 애가 아닐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체구마저도 규진이 추월한 지 오래였고.

 

“진짜?”

 

그래도 내가 아니면 지금은 당연하고 앞으로도 이런 애 같은 언니 장단을 맞춰줄 사람이 있을까 싶어 반문했더니 아주 당당히 고개를 끄덕이더라. 사람이 참, 투명해서 좋았지만 이럴 때면 저보다 언니인데도 괜히 꿀밤 한 대 놓고 싶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규진이, 언니랑 키스하고 싶어?”

 

언제까지 허세 아닌 허세를 부릴지 궁금했는데 걸음을 멈추기에 잡고 있는 손에 따라 제 걸음 또한 멈춘다. 골목길 밖은 집 앞이었다. 키스를 한다면 이곳만큼 최적의 장소는 없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고 제 시그널을 알아들은 게 신기했다.

얼마 전 보수 공사를 했다는 가로등 불빛이 환하다 못해 눈이 부셔 몇 걸음 물러났다. 어차피 눈을 감을 테니 환하든 어둡든 별 상관은 없었지만. 가로등 불빛 사이 희미하게 비치는 지우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지우와는 무드 하나 잡기도 쉽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금의 계절과 시간과 온도가 참으로 절묘해서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였다. 봄은 원래 그런 계절이니까. 멀리 갈 것 없이 제 친구들 중에서도 최근에 연애를 시작하는 애들이 몇 명 있었다. 제 딴에는 잔뜩 능숙함을 가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키스가 처음인 규진에게도 어설픔이 느껴지는 지우의 입맞춤조차도 설레게 다가오는 그런 계절.

…라고 생각했는데.

지우를 밀쳐냈다. 혀로 입술을 쓸어봤다. 다행히 피가 나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혀끝으로 느껴지는 잇자국을 따라 잔뜩 부어올라 있는 것이 내일 아침 일어나면 터져 있을 확률 100%였다. 가로등 아래 서서 잔뜩 미안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저 인간을 어떻게 하면 잘 혼낼까 하는 고민을 할 정도는 됐다는 뜻이다.

 

“언니 키스해봤다며?”

“…해봤지.”

 

내 꿈에서. 소심하게 덧붙인다. 참,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처음부터 믿은 건 아니었지만.

 

“세상에 누가 애인 앞에서 키스 경력으로 자랑을 해.”

“그래도. 내가 언니인데 못 해봤다고 하면 안 되잖아.”

 

이상한 데서 승부욕이 발동하는 저 성정은 언제쯤 고쳐질지 궁금했다. 그래서 더 다그치는 대신 언니는 나랑 사귀는 게 아니라 이기고 싶은 거야? 물으면 고개를 내젓는다.

 

“연습 많이 해 올게.”

“뭘로 연습하게?”

 

잔뜩 풀죽은 얼굴로 말하기에 받아쳤더니 드라마 영화 키스씬 모음 열심히 찾아보려고. 대답하는 게 도저히 밉지가 않아서 그래. 열심히 해. 갈무리하고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던 게 석 달 전이었다.

 

 

 

 

 

3.

 

“그게 언제적 얘기인데 그래.”

“언제적은. 집에 갔더니 가족들이 무슨 일 있냐고 걱정하는데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민망했다고.”

 

대답하면 힝. 소리를 낸다. 습관도 있겠지만 저렇게 행동하면 상대가 그 누구더라도 한마디 더 못 하고 봐줄 걸 알고 하는 행동이었다. 아마 둘 다겠지. 그걸 알면서도 귀엽다고 생각하는 규진도 문제였지만.

그 이후로 키스 이야기가 나온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한 번쯤은 그 주제가 나올 법한데도 그랬다. 지우는 또 실수라도 할까봐 눈치를 살피는 듯했고 규진은 별생각이 없었다. 사귀는 사이인데 언젠가는 하지 않을까. 지우가 먼저 하지 않는다면 제 쪽에서 먼저 할 수도 있는 거니까. 먼저 입술을 들이대는 사람이 누구든 그 시기가 올해는 아닐 거라는 생각 정도나 했었는데 지우 쪽에서 이렇게나 이르게 이 주제를 들고 올 줄은 몰랐다.

 

“나 너랑 키스하려고 체리 꼭지 묶기 연습까지 했어.”

 

그걸 진짜로 하는 사람이 있어? 물음이 턱 끝까지 올라왔는데 입 밖으로 이 말을 냈다가는 정말로 삐질 것 같아서 혼자 어떻게 연습했어? 물어봤더니 거울 보고 했단다. 규진도 익히 아는 지우네 집 거실 전신거울을 마주 보고 동네 청과물점에서 사 온 일회용 플라스틱 체리 통 안에서 체리를 하나씩 꺼내며 연습을 했을 지우를 생각하자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걸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쉬운 것 같기도.

 

“그러니까 이제는 키스해도 되지?”

 

말하는 얼굴이 참으로 비장하다. 누가 보면 키스가 아니라 전장이라도 나갈 것처럼. 그 모습이 웃겨서 저도 모르게 웃었더니 장규진 나 못 믿어? 여전히 나를 불신하는 거지? 하기에 아니야, 믿어. 김지우는 체리 꼭지 묶기 달인이고 나는 그런 언니가 너무 존경스러워. 열심히 달래야 했다. 그러고도 좀체 잡히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한참이나 손깍지를 낀 채 하릴없이 그네만 타야 했지만. 다른 걸 차치하고서라도 그네를 타고 있어도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8월까지 이 날씨가 계속된다면 1년 내내 여름이어도 좋을 만큼.

 

“언니도 나도 대학생 되면 둘이서만 여행 가고 싶다.”

 

그래서였을까. 가끔씩 버킷리스트처럼 하던 생각으로 운을 뗐다. 지우와 제가 모두 성인이 되어 여름을 나려면 최소 2년은 더 열심히 살아야 했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만 혹시나 변수가 생긴다면 그 이상. 수능이 5개월도 안 남은 사람을 옆에 두고 할 생각은 아니니 이 생각은 지우도록 하자.

 

“후내년까지 기다릴 필요 있어? 내년에 가면 되지. 내가 알바하고 다 준비해서 너 데리고 갈 거야. 국내든 해외든 말만 해.”

“언니가? 언니 해외여행 가본 적은 있어?”

“가족 여행으로는 가봤거든. 없어도 내가 너 한 명 못 데려 다닐까 봐. 내가 너보다 언니인데 그것도 못 하겠어?”

 

그놈의 언니는. 아무래도 못 미더웠지만 말만이라도 자신감이 넘치는 게 좋아서 그래, 내년이든 후내년이든 같이 떠나자. 대답해주며 지금으로써는 아직 머나먼 여행 이야기나 했다. 아니다, 내년에 갈 거면 국내가 좋은 것 같아. 해외는 후내년에 가고. 말을 주고받고 있자면 벌써부터 그 날이 가까워진 기분. 귓가를 울리는 풀벌레 소리가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친다. 머릿속에는 전망 좋고 예쁜 펜션 앞 벤치에 붙어 앉은 저희의 모습이 절로 그려지고 있었고.

그러다 보면 거짓말처럼 조용해지는 순간이 온다. 본디 한 번 시작된 이야기에는 끝이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적막하거나 불안하지 않은, 기분 좋은 고요함. 한참이나 울던 풀벌레 소리는 물론, 배달용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음 하나 들려오지 않고 미풍만이 불어오는 정적 사이. 지우와 눈이 마주친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마주치는 지우의 눈동자가 밤하늘을 수놓은 별보다 반짝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 순간 가볍게 울렁이기 시작하는 마음과,

 

“키스하고 싶어.”

 

분위기를 따라 뱉어지는 진심. 지우가 먼저였을까, 규진이 먼저였을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네에서 일어나 서로에게 가까이 밀착했다. 그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제 허리를 감는 지우의 팔과,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숙여지는 고개와 감기는 눈, 그리고 마주치는 입술과 제 입술 사이를 헤집는.

이번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김지우는 키스를 잘했다. 체리 꼭지 묶기 연습이 얼만큼의 효과를 발휘한 건지는 몰랐지만 3개월 전의 망한 키스 따위는 떠오르지 않을 정도는 됐다. 이제야 진짜 언니 같아서 두근거렸다. 오랜 창작물 클리셰처럼 첫키스를 하면 종이 울린다든가 하는 건 없었지만 확실히 기분이 요상하게 들뜨는 것이. 키스 하나 하기 위해 돌아온 시간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지우와 처음 사귀기로 한 날과도 또 달랐다. 말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가장 유사한 비유를 찾자면 손목에서 뛰고 있는 맥박이 휴대폰 진동처럼 제 몸을 감싸고 종소리 대신 사이렌이 울리는듯한.

…….

입안이 허전했다. 눈을 뜨자면 지우의 얼굴 대신 한밤중의 놀이터 풍경만이 규진을 반긴다. 손목에서는 빛이 발광하고 있었다. 사이렌의 출처는 환청도 맥박 뛰는 소리도 아닌 손목에 둘러진 애플워치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시선을 내리자면 놀이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지우가 보였다. 언니? 손을 내미는데 별안간 튀어 오르듯 일어난 지우가 꺅! 소리를 지르며 뒤돌아 놀이터를 돌기 시작했다. 언니, 어디 가? 물어도 제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열심히 달려 멀어지기에 몇 발자국 따라붙다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

 

“언니 괜찮아?”

“몰라아. 모르겠어. 기분 진짜 이상해. 나쁘게 이상한 게 아니라 좋게 이상한데 설명을 못 하겠어.”

 

놀이터 한 바퀴라도 돈 것인지 헉헉거리며 돌아오는 가로등 아래의 얼굴이 붉었다. 쪽팔려. 나 어떡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아주 크게 숨을 들이쉬다 내쉬며 호흡을 고르다 잘못 들이쉬었는지 캑캑거리다 고개를 드는데 규진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다시 꺅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린다. 규진아, 나 어떡해. 무슨 기분인지 이제는 알겠어. 너무 좋아. 행복해서 날아갈 것 같아. 그러니까.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더 해보면 안 돼?”

 

언니 또 도망가려고? 물으려다 묻지 않기로 한다. 세상에는 기류라는 것이 있기 마련. 뭐가 뭔지 모르겠는 지금도 그랬다. 조금 전 숨을 몰아쉬던 모습은 거짓말이라는 듯 다시금 노련히 저를 끌어당기는 지우에 규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4.

 

규진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와 씻고 침대에 누운 후에도 자꾸만 심장이 벌렁거렸다. 끝없이 반복되는 펌프질 소리에 스스로가 잠식되는 건 아닐까 괜한 걱정이 들 정도로.

연애도 키스도 처음이었는데 규진 앞에서는 괜히 능숙한 척하고 싶었다. 제가 규진보다 언니니까. 그래도 한 살이라도 먼저 태어난 제가 리드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지우는 규진을 만나는 내내 하고 있었다. 그게 아주 완벽히 망해버렸다는 걸 규진의 입술을 깨물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키스 한 번 하는데도 세상 떠나가라 온갖 야단법석을 부리며 느껴야 했지만. 그래서 기껏 감고 말린 제 머리나 헝클이며 이불킥이나 해야 했다. 아, 창피해. 그러면서도 닿았던 규진의 입술이나 혀의 감촉이 떠올라 다른 의미로 돌아버릴 것 같아 이불을 차고의 반복이었다. 첫키스였으니까.

맞아, 첫키스. 심장이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냥 뛰는 것도 아니고 BPM413526으로. 저도 모르게 아 대박! 아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다 현재 시각을 떠올리고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럼에도 온몸을 감도는 흥분은 전혀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아마 밤새도록 이럴 것 같았다. 아, 나 진짜 어떡해? 생각 같아서는 창문을 활짝 열고 동네방네 소리치고 싶었다.

 

엄마 나 장규진이랑 드디어 키스했어!

 

 

 

 

 

+5.

 

“덥다.”

“나도.”

“놀이터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 갈까?”

 

좋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네 놀이터 쪽으로 방향을 옮겼다. 온몸이 녹초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더 더웠다. 비 소식을 빗겨 난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던 아침이 무색할 만큼. 행사 특성상 한두 번 겪어온 더위가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부스를 돌고 집에 가라고 소리치는 이제는 일종의 이벤트 장치가 아닌가 싶은 세력들에게 엿을 날리고 퍼레이드 트럭을 따라가는 예년과 다를 것 없는 행사 패턴을 답습하고 있음에도 유난스럽게 더 지치는 하루였다. 왜였을까. 가장 가깝고 기댈 수 있는 하나뿐인 존재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날로 이전보다는 나아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상이었고,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자학하는 풍토를 가장 꺼리며, 여자와 남자의 성별을 초월한 사랑만큼 금수 같은 행위는 없다고 풍자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자신이었음에도 아주 가끔씩 이유 없이 그런 생각이 몰아닥칠 때가 있었다. 나는 단지 존재하고 있을 뿐인데 왜 일면식도 없는 인간들에게 저딴 말이나 들으며 존재를 부정당하고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그 인간들이 뭐나 된다고. 그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타 대학 퀴어 동아리들과의 연합 애프터 모임을 가정한 지인 모임에서 마주 앉아 술을 마셨던, 법적 관계만 없다뿐이지 얼마 전 외국에서 혼인신고까지 해서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는 졸업생 언니 커플의 후일담이 마음을 더 후벼팠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어느 정도 술이 깬 뒤 잡고 있는 애인의 손을 느끼며 생각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도저히 남의 이야기처럼 넘길 수 없는 주제였으니까. 지금 당장 식을 올리더라도 저희의 혼인신고서는 끝도 없이 반려당할 것이고, 두 사람 중 한 명이 다치거나 죽어도 보호자조차 될 수 없을 서로의 미래가 자꾸만 떠올라서.

 

“내년부터는 호텔 방 잡고 구경만 할까?”

 

해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걸까. 모임이 파하고 버스가 끊기기도 했고 걸어서도 올 수 있는 거리라 동네까지 함께 걸어오는 길, 넌지시 운을 떼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러다 하루종일 호텔에만 있으면 어떡해? 말하다 괜스레 부끄러워져 어느 부스에서 샀는지 받았는지 기억도 안 나는 부채로 제 얼굴을 가렸던 것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래, 이제 우리도 좀 여유로운 퀴퍼를 즐길 때가 됐지, 싶어서.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배부른 소리라고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놀이터 쪽으로 돌아 나와 벤치에 앉는데 목이 말랐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쉴 곳이 생겼다고 목이 마를 일인지. 목마르다. 그러게. 말을 주고받다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오기로 했다. 둘 다 나가서 시원한 편의점 에어컨을 만끽하는 방향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또 나가기가 싫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 덕인지 의외로 서서히 부는 미풍 덕인지 놀이터 안이 의외로 시원하기도 했고 에어컨 바람이야 실내에서 충분히 맞고 왔으니까.

가위바위보에서 진 해원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언니, 나는 메로나! 를 외쳤다. 너는 연장자 공경이란 게 없니. 받아치는 해원에게 카드는 내 거 줄게, 제 카드를 건넸다. 카드를 받고 멀어지는 해원을 보다가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제야 진짜 살 것 같네. 온종일 사람 틈바구니에 있다가 오직 저 혼자뿐인 놀이터 풍경에 마음이 뻥 뚫리는 듯했다. 아무리 외향형이지만 오늘은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르던 에너지가 바닥날 정도로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그와 비슷하게 불필요한 인간들도 꽤 마주쳤으니.

 

온 김에 놀이터나 한 바퀴 돌까 싶어 일어나 놀이기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그네 쪽에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는 하나가 아니라 둘. 순간 말로만 듣던 비행 청소년이면 어떡하지, 쫄았는데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으니까. 알다 못해 어렸을 때부터 거의 친동생이나 다름없이 마주쳤던, 며칠 전에도 인사를 나눈 동네 꼬맹이들.

2인용 그네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지우와 규진을 지켜봤다. 진솔은 그 애들을 볼 수 있었지만 애들에게 진솔은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곳이 자기들 세상이라는 듯 그네를 잡고 있지 않은 쪽 손을 꼭 잡고 꺄르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보고 있자면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여자애들 둘이 붙어 있다고 사귀는 줄 알았다가 헤녀우정 어택을 맞은 적이 여럿이었지만 둘에게는 그 전부터도 보는 사람 마음을 동하게 하는 분위기 같은 게 있었다. 정말 별거 하지 않는데도 보고 있자면 제가 둘만의 세상을 염탐이라도 하는 기분이라서 인사만 하고 사라져준 적이 그 전에도 몇 번은 됐다.

울렁이는 마음을 달래며 자리를 뜨려는데 별안간 일어난 둘이 가까이 붙는가 싶더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머나 세상에. 고전적인 비명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뒤를 돌았다. 돌자마자 양손에 메로나를 든 채 걸어오던 해원과 마주쳐야 했지만. 언니 우리 그냥 집에 가서 쉬자. 해원의 어깨를 돌려 황급히 발걸음을 뗐다. 이게 바로 어른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며.

 

“솔아.”

“응?”

“우리 꼬맹이들 결혼할 나이 될 때까지만 행진 다닐까?”

 

해원에게 받아 든 메로나 비닐을 뜯고 내용물이 꽂힌 막대를 입 쪽으로 옮기던 동작이 멈춘다. 언니도 다 봤구나. 참 빠르기도 하지. 제 생각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해원이 새삼 신기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잘 사귀고 있는 거였지만.

 

“그때면 우리도 결혼했겠지?”

“당연하지.”

 

우리 결혼하면 그 다음 해부터는 호텔 방 잡고 구경만 하는 거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얽히는 새끼손가락. 약속의 유효성은 그때가 되면 알 수 있을 터였다. 오늘 하루 진솔을 괴롭히던 생각들이 점차 희석되기 시작한다.

어쩌면 별로 멀지 않은 근미래에는 지우와 규진의 이름이 나란히 찍힌 청첩장을 받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진솔은 그 날이 아주 멀지 않기를, 지우와 규진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해원과 저 또한 법적으로 묶인 관계가 되어 있기를, 맞잡은 해원의 손을 고쳐 잡으며 진심으로 바랐다.

 

 

 

 

 

 

 

Happy Pride Month!

키스 후 놀이터 한 바퀴 에피소드는 여러 버전으로 인터넷 등지를 떠돌았던 카피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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