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ing

김민정 유지민

* 글에 등장하는 윈칼을 제외한 이름이 있는 인물들은 오로지 보다 원활한 글의 전개를 위해 창작된 캐릭터로, 멤버들을 포함해 그 어떤 실존 인물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고지합니다.

 

 

 

 평소에는 사람들로 붐비던 공원이 공연을 할 때면 왜 이렇게 텅 비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하나, 둘, 세어 봐도 겨우 일곱 명 정도. 그나마도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에 불과하다. 일곱 사람 중 노래와 연주를 들어주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성과를 받고자 하는 공연이 아니라 앞으로를 위한 연습 공연이라고, 저희는 프로가 아닌 어디까지나 배우는 처지라고 마음을 다독여도 피드백 없는 공연은 자연스레 사람의 맥을 빼고 만다.

왼손으로는 코드를 옮기고 오른손으로는 소리를, 입으로는 노랫말을 흘린다. 세트리스트는 웬만한 사람들이면 알 법한 해외의 유명 팝송과 얼마 뒤 릴리즈될 첫 싱글의 자작곡 세 곡. 언제나와 같은 익숙한 곡이다. 몇 번을 부르고 연주했는지 모를 곡들의 향연은 잠꼬대로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손과 입과 뇌에 익어 있다. 노래와 노래 사이에 아직 익숙지 않은 언어로 멘트를 치는 것 또한 메인보컬인 민정의 역할이다. 디테일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본질은 비슷한 말들. 다른 회화는 어려워도 버스킹 멘트 하나는 현지인만큼 잘 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마디 내뱉으면 옆에서 말을 이어가는 멤버들 또한 비슷하지 않을까? 낯선 타국에 떨어진 처지로서 당연할 수밖에 없는 생활의 처세.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대충 좋은 처세려니 위안하려는 편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이렇게 자국도 아닌 타국까지 날아와 모두의 외면 속에서 쌓는 경험이 장래에 도움이 될지. 도움은커녕 번아웃이라도 찾아오는 건 아닐지. 그러한 기우는 공연을 마치고 각자의 악기를 챙겨 숙소로 돌아갈 때쯤이면 길어진 그림자만큼이나 그 크기를 더한다. 그렇지만 멤버들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다. 멤버들도 똑같을 테니까. 오히려 그 애들이 제게 더 의지와 기대를 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늘 그랬으니까. 출국 수속을 밟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기 훨씬 전부터.

 

누군가 답을 줬으면 좋겠다. 이게 맞는 건지. 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돌파구라도.

 

 

 

 

 

1.

 

어려서부터 남들 하고 사는 것처럼 공부로 먹고살 생각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살기에는 가지고 있는 기질이 너무나 아까움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고, 주위 사람들 또한 입 모아 말하고는 했다. 민정이 넌 꼭 네 목소리로 존재를 알려야 한다고. 그래서 좋아하는 노래를 열심히 불렀고, 어느새 취미를 넘어 재능이 된 노래로 여기저기 오디션을 봤다.

그렇지만 밴드를 할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아이돌을 하더라도 댄스 그룹 정도였고 악기 정도는 부수적으로 배우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차례 오디션을 보다 보니 아이돌 밴드를 준비 중인 회사에 붙었고 어쩌다 보니 데뷔조의 리더가 되어 있었다. 리더와 메인보컬, 기타리스트 그리고 맏언니. 어느 하나 부담이 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포지션이었다. 보컬과 서브로 잡게 된 기타야 양분하는 멤버가 있긴 했지만 리더와 맏언니라는 포지션은 그 누구와도 양분할 수 없는 감투였고 갈수록 민정의 어깨를 짓눌렀다. 리더로서 연고 없는 여동생 세 명을 인솔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일반 댄스 아이돌 데뷔조처럼 경쟁에 경쟁을 더해 꾸려진 데뷔조가 아닌 사전부터 팀 단위로 짜인 데뷔조였음에도 사람 사는 세상인 만큼 멤버 간의 갈등 양상은 댄스 그룹 데뷔조들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민정의 역할은 의견이 갈리는 동생들 사이를 최대한 조율하는 한편 넷 중 가장 옳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 있었다.

처음부터 리더가 된 것은 아니었다. 왜 낯을 가리는 제게 리더의 자리가 넘어왔는지도 몰랐다. 회사에서는 네 사람 중 민정이 팀을 가장 잘 이끌어나갈 재목이라 리더직을 맡긴 것이라고 했지만 세 멤버 중 누구를 지목하더라도 저보다는 스스럼없이 리더직을 잘 수행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결국은 넘어온 리더의 자리, 제가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특히나 아주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밴드가 주류 문화가 될 리 없는 한국을 떠나 밴드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일본 유학을 회사 차원에서 준비하면서 책임감은 날로 커져만 갔다. 일본으로 넘어가서부터는 회사에서 1년 정도 배운 일본어로 일상 회화를 하는 걸 넘어 버스킹을 하는 건 물론 클럽 공연 스케줄까지 다녀야 했다.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건 일본에서 살 집과 최소한의 용돈, 일본 레이블에서의 주말 클럽 공연 스케줄 조정 정도였다. 그나마 용돈도 성인 하나 청소년 셋이 사용하기에는 애매하게 부족했고 정말로 버스킹이나 공연으로 돈을 벌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한 제정 사항을 관리하는 것 또한 민정의 몫이었다. 멤버들이 함께 관리할 수 있다면야 더 좋겠지만 생각처럼 잘 안 될 것은 뻔했다.

이걸 내가, 아니 우리가 할 수 있을까. 데뷔 직전 파산 위기였던 회사에서 데뷔 후 기적적으로 성공해 아직까지도 괴물 신인 타이틀을 후광에 얹고 다니는 선배 그룹이 했던 걸 보자면 못할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회사의 지령에 따라 출국을 준비하고 멤버들과 합을 맞추고, 비록 회사 작곡진들과의 공동 작업이긴 해도 제 손길이 들어간 곡을 녹음하고, 약 2시간 반의 비행 끝에 도착한 일본 숙소에서 짐을 풀면서도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이는 유학 초반 외출을 나갔다가 의사소통의 부제로 오해를 빚어 경찰서 정모까지 할 뻔한, 살면서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을 겪으며 민정을 더더욱 괴롭혔다.

 

 

 

 

 

2.

 

좋게 보자면 경험 쌓기용 버스킹을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걸 넘어 공연을 구경하고 가기도 하는.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을 꼽자면.

상대를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한 건 저 사람 어제도 오지 않았어? 하고 운을 뗀 드러머 세연 덕이었다. 좋게 말해 각자 개성이 흘러넘치는 멤버들 사이에서 그나마 착하고 귀여워서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멤버였다. 처음에는 그런가, 하고 넘겼지만 그 말을 들은 뒤로 확실히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실로 한 번 마주쳐도 좀체 잊을 수 없을 만큼 눈에 띄는 얼굴.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긴장을 놓지 못한 터라 이제야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아무래도 매일 보는 사람이니 현지인일까? 의외로 현지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저희부터도 외국인 유학생 신분으로 공연을 다니고 있지 않은가. 일단 착장이나 스타일링이 일본 현지인 치고 꽤 튄다. 아니, 저 사람이 아이돌도 아니고 밴드 공연을 구경하는 사람이라면 현지인이라고 생각해도 유별난 정도는 아니다. 이곳에서 스치듯 봤던 사람들 또한 공연자와 관객 할 것 없이 머리고 착장이고 각양각색이었으니.

몇 번 상대를 인지하다 보니 어느샌가부터 버스킹을 할 때쯤이면 그 사람이 있는지부터 살피게 됐다. 클럽 공연 일정상 버스킹을 하는 요일과 시간은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었으니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고, 실제로 최소 사흘 최대 하루에 한 번꼴로 그 사람을 보긴 했다. 처음부터 자리를 지킨 적은 없었지만 뒤늦게라도 걸음을 멈추고 끝까지 공연을 지켜보고 가는 걸 보자면 마음이 절로 벅차올랐다. 정말로 제가 하는 공연에 관객이라는 게 생긴 거니까. 나중에 사인해달라고 말 걸면 친필 사인 앨범이라도 줄까 봐. 상대와 스치듯 눈을 맞추며 그런 생각까지도 했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3.

 

가히 일본 유학 이래로 가장 최악의 하루를 꼽으라고 한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일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낮에는 버스킹이 있었고 저녁에는 클럽 공연이 잡혀 있었다. 유학 극초 회사에서 컨택해준 클럽이었고, 회사가 하는 일은 오직 컨택뿐인만큼 그 클럽에서 지속적으로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밴드 스스로의 무대로 성과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공연의 완성도와 관객의 호응 등이 민정과 멤버들의 밥줄로 이어지는 셈이었다. 클럽 차원에서 밴드를 쳐낸다면 이제부터는 저희의 손으로 컨택할 클럽을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민정은 언제나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완성된 무대를 보여주고자 했고 멤버들 또한 다를 것이 없었다. 처음 데뷔조가 짜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어가는 합주를 듣자면 그 결의는 더욱 현실이 되어가는 듯싶었다.

사건의 도화선은 여느 때처럼 이어지던 공연에서 서브보컬 겸 메인 기타리스트 유림이 아주 사소한 실수를 했던 것에서 비롯됐다. A 마이너 코드를 잡아야 하는 부분에서 메이저 코드를 잡은 건 사실 실수 축에도 끼지 못했다. 심지어 모두가 잘 아는 커버곡도 아니었고 얼마 전 릴리즈된 싱글 커플링곡 중 한 곡이었다. 민정과 유림이 주고받는 보컬 파트가 있어서 약간의 비즈니스 커플 모먼트가 필요한. 곡을 녹음하면서도 내가 저 애와 커플 분위기를 낼 수 있을까, 수차례 고민했던 곡이었다. 곡 자체는 적당히 신나는 곡이었고 유심히 듣지 않는 한 코드 실수 정도는 베이스나 드럼 소리에 묻힐 정도로 정말 별것 아니었는데 귀신같이 이를 캐치한 관객 중 한 명이 공연을 끝내고 갈 준비를 하던 유림을 붙잡고 지적을 날렸다. 마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걱정조차도 하지 않던 멤버들을 비웃는 듯.

사실은 그 전부터 타 팀들에 비해 저희 팀을 보며 쉬쉬하는 목소리가 있긴 했다. 그래도 우리는 저 사람들에게 외국인이니까. 생각하고 일본어 교습 1~2년 차인 저희 들으라는 듯 밴드를 무시하는 발언을 흘리는 이들을 이 꽉 물고 스킵했다. 적어도 아시아권 내에서는 밴드의 성지라는 국가에서조차 주류 씬에서 보이는 밴드들이 죄다 남성 혹은 여성 보컬과 남성 세션으로 이루어진 혼성 밴드고 오로지 여성으로 구성된 밴드는 몇 그룹 될까 말까 한 환경임을 한국에서부터 숙지하고 있었기에 문화 내 여성 혐오 언사라면 얼마든지 각오하고 있었다. 우리는 배우는 처지니까. 그딴 레이시스트 여성혐오자들의 헛소리보다 공연으로 우리가 얻어가는 게 많으니까. 이 동력으로 더 열심히 하면 한국에서 제대로 날아오를 수 있다고 스스로든 멤버들과든 몇 번이나 결의를 다졌던가.

그러나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부류는 네 사람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평소에도 욱하는 성질이 강한 유림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어로 욕을 뱉었다. 말과 함께 달려드는 유림을 민정과 멤버들이 합심해 말리지 않았다면 자칫 유혈 사태라도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성질 더러우라면 둘째가라 할 수준의 유림이라고 할지라도 스무 살도 안 되는 여자애가 30대 남성과 맞붙어 이길 수 있는 확률은 0에 수렴했다. 설사 같은 입장으로 맞붙는다고 해도 유림과 저희에게는 외국인, 여성, 그리고 고용 불안정 클럽 공연자라는 무려 세 가지나 되는 핸디캡이 있었다. 어딜 봐도 이쪽이 완전히 불리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욕을 하며 양쪽과 뒤에서 막고 있는 멤버들을 떼어내고 달려들려는 유림을 막고 잘 되지도 않는 일본어로 사과를 하는 건 리더인 민정의 역할이었다. 제대로 된 일본어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몰랐지만 상황을 수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무슨 말이든 했다. 사과하고 나가는 저희 들으라는 듯 뒤에서 하는 말은 해석도 하기 싫었다. 그래도 사장이 이 사태를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위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실로 모욕적인 순간이었다.

 

설상가상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싸우는 유림과 베이시스트 재서를 말려야 했다. 정확히는 싸움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따지자면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씻으러 들어가려던 제게 얘기 좀 하자고 베란다로 데리고 나와 하소연을 가정한 감정 쓰레기통 짓을 하는 유림을 보다 못한 재서가 유림에게 언니나 좀 그만하라고 화를 내며 촉발된 불화였다. 늘 그랬다. 유림이 불같다면 재서는 바람이었다. 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 그 불을 꺼뜨리기는커녕 더 크게 지피는 유형이기에 둘의 상성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 사이에 민정과 세연이 없었다면 둘은 거하게 팀을 말아먹은 후 손잡고 회사를 나가야 했을 것이다. 물론 민정은 유림보다는 재서가 좋았다. 재서에게 민정 역시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았다. 결정적인 순간 재서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몇 차례 있었고. 그렇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저에게야 도움이었지만 당사자인 재서에게는.

예상대로 재서를 향해 쌍욕을 날리며 몰아세우는 유림과 유림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그래서 내가 틀린 말 했냐고 반응하는 재서를 어느새 씻고 나온 세연과 합심해 두 개 있는 욕실로 집어넣었다. 언니 피곤하다 얘들아. 둘을 떨어뜨려 놓고 한숨을 돌릴 때쯤이면 없던 기까지 다 빨린 채였다. 머리도 지끈거리는 것이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다. 일찍 씻고 자고 싶은데 오늘은 둘 다 글렀구나. 나 잠시 바람 좀 쐬고 온다. 유림이 넌 애들한테 그만 성질내고 씻고 잠이나 자. 소리치고 다시금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혼자서 바깥 공기라도 쐬어야 몸도 마음도 괜찮아진 채 씻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4.

 

바람을 쐬기 위해 숙소를 나와 서울과 별다를 것 없는 도쿄의 밤 풍경을 내려다볼 때면 민정은 양산에서 서울로 처음 올라와 회사 연습생 숙소에 입성했던 3년 반 전을 떠올렸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던 캐리어의 감촉과 양산이나 서울이나 별다른 기후의 차이가 없음에도 괜스레 차갑게 느껴지던 바깥 공기 같은 것. 상경한 지 4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서울의 공기는 아직도 민정에게 그렇게 따스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서울의 공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은 서울 나름대로, 도쿄는 도쿄 나름대로 민정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쭈그려 앉아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자면 온몸의 소름이 민정을 에워쌌다. 이것이 마음에서 기인한 추위인지 물리적인 추위인지도 이제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두 가지 전부겠지. 4월에 접어든 달력과는 달리 온몸을 엄습하는 차가운 기운이 민정을 한껏 더 짓누르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클럽 사장이나 관객이나 멤버들이나 어느 하나 제 속을 썩이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데뷔하기 전에 누구 하나 병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병나면 회사에서 케어는 제대로 해줄까.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게 되는 회사라면 이렇게 일본까지 건너와 인디즈 생활 같은 걸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직원 한 명은 붙여줬겠지. 1~20대 여자애들 넷을 타지로 내모는 게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줄곧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민정의 시야에 낯선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왔다. 정확히는 운동화를 신은 누군가의 발. 신발의 디자인을 보자면 다행히 남자는 아니다. 시선을 들어 올려 바로 앞에 멈추어 선 이를 올려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다. 이전에 몇 번이나 마주한 바 있는. 그 사람이다. 매일 해가 떠 있는 늦은 오후에만 보다가 가로등 불 아래에 드리운 얼굴을 보자니 괜스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버스킹을 할 적에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늘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보고 떠났으니까. 몇 없는 관객들이 다가와 건네는 공연 잘 봤다는 말도 이 사람은 한 번도 건넨 적이 없다.

 

“…….”

“…….”

 

심적으로 익숙한 얼굴이라지만 완전히 아는 사람은 아니다. 아는 사람이냐, 모르는 사람이냐를 따지자면 모른다고 하는 편이 정답에 가까운. 그러니 아무 말 없이 저를 내려다보는 상대가 관객이고 뭐고 그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의 민정은 아이돌 밴드 유학생 김민정이 아닌 20세 한국인 여성 김민정이다. 낮 동안 최대한 끌어올렸던 사교성이 바닥나고 본연의 성질만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용건 있으세요?”

 

다 됐고 한국어로 물어보려다 최소한의 이성을 붙잡고 일본어로 말을 꺼내고야 아차 싶었다. 생각보다 말씨가 날카롭게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일본어로 저렇게 말하는 게 맞는지도 헷갈렸다. 공연용 회화는 몰라도 일상 회화는 어릴 적 일본에 살았다는 세연이 제일 잘했다. 그 시기가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기에 일본어 실력이 그렇게 유창한 편은 아니라고 해도 그 날 이후 멀리 나갈 때면 안전상의 이유에서든 회화 때문이든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마음으로 그 애랑 함께 나가고는 했다.

다행히 상대는 별로 개의치 않는지 표정에서나 행동에서나 싫은 내색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뒤적이다가,

 

“싱크로나이즈?”

 

밴드명을 입 밖으로 내는 거였다. 매일같이 소개하는 팀명이고 앨범 표지에도 새겨져 있는. 그래서 처음 듣던 시절보다는 꽤 익숙해진. 지나가다가 자주 마주친 사람이 보여서 아는 척이라도 한 걸까 싶었다. 그 아는 사람이 매우 처량맞게 앉아 있는 게 신경 쓰였던 걸지도. 생각하니 상대는 일어서 있고 저는 쭈그려 앉아 있는 게 민망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 외로 그렇게 키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최소 170은 넘을 것 같았는데 한 168cm 정도 되려나. 그럼에도 저보다 훨씬 큰 건 같았지만.

그때 연신 크로스백을 뒤지던 상대가 무언가를 꺼내 제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지. 받아 들어 가로등 쪽으로 비추었더니 선물 상자 재질의 포장 용기였다.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뭔가 문법 면에서 잘못 말한 것 같은데 뒤에 존대를 했으니 알아서 알아들었을 것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상대는 민정의 회화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네. 팬이라서 주고 싶었는데 말 걸기가 부끄러워서.”

“…….”

“매일 하교하면서 노래 잘 듣고 있었어요.”

 

일본어로 말을 걸었는데 대답은 한국어로 돌아왔다. 잘못 들은 건가? 생각하는데 노래 잘 듣고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나 말씨가 실로 자연스러웠다. 현지인들은 보통 신쿠로나이즈 정도로 발음하는 팀명인데 발음이 꽤 깔끔하다고 생각했더니 한국인이거나 최소 교포 같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자주 얼굴을 비치는 만큼 밴드의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막연히 했던 생각이 실체가 되어 다가온 거였으니까. 그것도 선물까지 내밀며. 선물을 받아들며 우리 회사 서포트 금지였나. 고민하긴 했지만 얼마 전 선배 그룹 멤버 생일 기념으로 들어간 유명 호텔 커스텀 케이크 서포트에 신이 나 그 케이크를 빼돌리고 프랜차이즈 케이크(와중에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노동자 착취로 유명한 S모 계열사 제품은 아니었다.)를 팬미팅 무대에 올렸다는 회사 고인물 직원들의 도시 괴담 같은 이야기가 인터넷을 달궜던 걸 보면 서포트 금지는 아닌 것 같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러니까 주는 선물을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숙여 보이며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 하루 힘들었던 일들이 일종의 액땜이었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마음이 벅차올랐다.

들고 있던 선물 상자 위로 점점이 물방울이 찍힌다. 비라도 오나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은 너무나 맑다. 그러다 축축해지는 뺨과 내밀어지는 손수건에 제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지금 멤버들과 유학 겸 실전 연습을 하는 거고 그러니 무슨 소리를 들어도 괜찮다고 매일같이 마음을 다독였지만 사실은 힘들었음을, 그 힘든 마음마저 리더 겸 맏언니라는 포지션에 혼자 삭혀야 했던 나날들이 물밀듯 떠올랐다. 그렇지만 공연을 할 때면 소수지만 노래가 좋고 잘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벅차올랐던 마음. 여태껏 들었던 일본어로 된 응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직접적으로 제 마음을 관통하는 한국어 응원. 그것들이 뒤섞여 울컥하는 감정에 눈물이 났다. 아, 나 아까 화장 안 지웠는데. 아니, 지금 여기서 방금 처음 말 튼 사람 앞에서 이렇게 울어도 되는 건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새 내밀어진 손수건을 받아들고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연신 눈물을 닦으면서도 이래도 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민정을 잠식했다.

눈물을 훔치다 보니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초면인 사람 앞에서 운 거지. 그것도 팬이라는 사람 앞에서. 손에 들고 있는 손수건은 언뜻 느껴지는 감촉이나 무늬 배열만 봐도 세련되고 고급져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꽤 축축하고 꼬질한 것이 민망했다. 울컥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민망함과 쪽팔린 마음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가능하고 허황된 생각이다. 만약에 어떠한 변수가 발생해 실현 가능하다고 해도 앞으로 아예 안 볼 얼굴도 아니다. 이 사람이 다시는 버스킹을 보러 오지 않더라도 매번 그 길로 다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어찌 됐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대라는 뜻이다.

 

“괜찮아요?”

 

물어보는 목소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조금 전 노래 잘 듣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는 다른. 그래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덕분에. 대답했다. 뱉고야 너무 단답이었나 싶어 금방 후회하긴 했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뭐라고 해야 하지.

 

“저, 선물도 받았고 제가 너무 민폐를 끼친 것 같은데. 제가 해드릴 게 있을지.”

 

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입으로는 말을 뱉으며 속으로는 연신 자학했다. 김민정 너 데뷔하고도 이렇게 말할 거야? 왜 이렇게 말을 못 해. 여태껏 배운 건 뭐가 돼.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저는 그저 매일 공연하시는 거 보는 것만 해도 좋아서.”

“…….”

“그러면… 버스킹하실 때 불렀던 노래 중에 듣고 싶은 곡이 하나 있는데.”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꽤 예쁘다. 말할 때의 목소리와는 또 다른. 그리고 막 부르는 것 치고 음정도 꽤 잘 맞는 게 노래도 꽤 하는 것 같은데. 연예인은 제가 아니라 저 사람이 해야 할 것 같다. 저 얼굴이면 아무것도 안 해도 천상 연예인감인데 노래까지 잘 하잖아. 4년 차 아이돌 연습생 아니랄까 봐 아이돌적 시선으로 상대의 목소리를 고찰하다가 문득 깜짝 놀랐다. 상대가 부른 노래 때문에.

그 노래는 민정이 살면서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완성한 첫 자작곡이었다. 기나긴 연습생 생활에 지쳐 차오르는 감정을 따라 1시간 만에 틀을 잡고 완성했던 곡. 가사나 멜로디에 직접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곡을 떠올릴 때면 가수의 꿈을 위해 해왔던 모든 노력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 힘들 때면 한 번씩 되새기고는 했던, 민정에게 있어 희망의 동아줄 같은 곡. 발매된 앨범에도 아직 실리지 않았고 이전에 멤버들끼리 매일 똑같은 곡만 부르는 것 같아 세트리스트에 변주를 주고자 시험 삼아 각자의 손을 거쳤지만 아직 공개되지 않은 곡을 하나씩 연주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와 딱 한 번 불렀던 곡.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도 극소수고 촬영을 하는 사람도 없겠다 시험 삼아 불렀던 곡이었는데.

 

“다른 자작곡들이나 커버곡도 좋았는데 이 노래를 부르던 목소리가 너무 예뻐서 걸음이 멈췄거든요. 그래서 인디즈 앨범은 앨범만 나오지 음원도 안 나오니까 자작곡인가 해서 매일 들으러 왔는데 그 날 이후로는 안 부르시더라고요. 저 사실 밴드 좋아해서 주말에 공연 보러 몇 번 갔었거든요.”

 

그 노래가 저 사람의 소중한 발걸음을 멈추게 했구나. 작사나 작곡은 회사 차원에서 가창이나 연주보다도 워낙 깐깐하게 평가하다 보니 사실 큰 자신감은 없었는데 제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 기질이 정말로 있었구나. 다시금 눈시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그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 눈물보다는 벅차오르는 기분이 컸으니까. 일반 아이돌 그룹이 아닌 밴드의 길을 택하고 밴드의 성장과 완성을 위해 일본까지 날아온 제 결심이 절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구나 싶은 마음에 스스로가 대견해지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여태껏 일어났던 일들이 정말 지금을 위한 빌드업인 것 같고 이런 제 비하인드를 알아주는 저 사람이 너무나 고맙기도 했다. 내 진짜 팬. 아마도 지금의 저 말을 영원히 못 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딱 한 번 불렀던 미공개 자작곡이었어요. 언제 나올지도 모르고 정말 딱 한 번만 불렀는데.”

“정말요? 그럼 제가 제일 소중한 순간을 함께했던 거네요.”

 

미치겠다, 진짜. 부끄럽고 어쩔 줄 모르겠는데 전혀 싫지 않은 기분. 나중에 팬사인회 같은 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지. 지금은 그냥. 고장난 기계라도 된 기분이다.

 

“민정 언니 거기 있어?”

 

고맙다고 해야겠지? 생각하는데 저쪽에서 세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도 안 나와서 마중이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초면에 만난 사람과 너무 많은 일이 있다 보니 시간 개념도 모조리 날아간 모양이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

“곧 봐요. 내일도 보러 갈 테니까.”

 

말과 함께 손을 흔들어 보이고 멀어지는 상대. 점점 멀어지다 가로등 불 너머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좇으며 민정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받은 손수건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과 함께. 언니 거기서 혼자 뭐 해? 말하며 제 눈앞으로 손바닥을 펼쳐 보이는 세연이 시야를 가로막기 전까지 민정의 시선은 계속해서 상대가 사라진 골목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5.

 

버스킹과 클럽 공연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민정은 버스킹 파였다. 일본으로 넘어오기 전 소속사 차원에서 분기마다 연습생 쇼케이스를 설 적만 해도 민정은 철저한 후자였지만 정말로 인디밴드나 다름이 없는 일본 유학 생활이 사람을 180도 달리 만들었다. 그것이 관객이라고는 일곱 명뿐인데 그조차도 전부 지나가는 사람들뿐인 버스킹과 밴드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는지 아닌지 의문이더라도 수십 명 정도의 사람들로 채워진 클럽 공연이라고 해도 민정의 선택에는 변함이 없었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계속 그럴 것 같았다. 소기의 성과가 요구되는 클럽 공연과는 달리 버스킹에는 그런 것이 없었으니까.

저 사람, 오늘도 왔어.

솔직히 이제는 클럽에서의 의사소통이나 성과에 대한 부담감 때문도 있겠지만 ‘저 사람’이 줄곧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매일 버스킹 장소에서 마주치는 건 물론 그 날 이후 멤버들의 간청과 클럽 내부 문제로 옮기게 된 새로운 클럽에서도 마주치는 익숙한 얼굴. 이제는 ‘저 사람’이 없으면 허전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민정의 삶에 익숙한 듯 침투해버린 존재. 자연스러운 팬서비스인 척 손을 흔들어 보이자 줄곧 민정을 보고 있던 상대의 표정이 환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 날 숙소까지 들고 온 손수건은 손빨래에 세탁소 클리닝까지 거쳐 돌려주었다. 뭐라고 운을 떼며 손수건을 돌려줘야 하지, 여느 때처럼 공연을 구경하고 있는 상대를 보며 연신 고민했었는데 말 한 번 텄다고 그 전과는 달리 오늘도 공연 잘 봤어요, 먼저 말을 건네는 덕에 쉽게 손수건을 돌려줄 수 있었다. 가지셔도 되는데. 인상과는 달리 나긋한 말투로 대답은 하지만 별로 싫은 내색이 아닌 상대와는 그 이후로도 자주 마주쳤고 멤버들을 꼬셔 사인 앨범까지 선물로 주며 이름까지 트게 되었다.

상대의 이름은 유지민. 근처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유학생이라고 했다.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밴드 음악에 관심이 많다고. 한국어를 할 때나 일본어를 할 때나 목소리가 나긋하고 다정한 게 천성이 그런 사람 같아 보였다. 멤버들의 이름과 사인을 보며 이런 거 면대면으로 직접 받아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고 신기해하는 것이 꽤 귀여웠다.

 

“민정 씨? 이름 예쁘다. 민정 씨랑 잘 어울려요.”

 

멤버들의 이름을 훑다가 건네는 목소리에 잠시간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예쁘긴요. 지민 씨 이름이 더 예뻐요. 전 성도 이름도 너무 흔하잖아요. 그래서 멤버들이랑 예명까지 생각해뒀는데 회사에서 밴드면 본명을 써야 한다고 해서 넷 다 본명으로 데뷔하는 거로 결정이 났지만요.”

“그래요? 민정이도 예쁜데. 뭐라고 지으셨는지 궁금해요.”

“윈터요. 아니면 겨울.”

“둘 다 민정 씨랑 너무 잘 어울린다. 곡만 잘 쓰시는 줄 알았더니 작명도 잘 하시는데요?”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며 대답했더니 훅 치고 들어온다.

 

“아… 제가 지은 건 아니고 세연이가 지어줬어요. 제 생일이 1월 1일이거든요.”

“1월 1일생이요? 얼굴만 귀여운 줄 알았더니 생일까지 천상 아이돌인데요?”

 

떨쳐내려 했던 기분이 곱절이 되어 민정을 강타한다. 저런 말을 들은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뭐가 즐거운지 웃는 얼굴을 보며 자꾸만 미묘해지는 기분을 뜻하지 않은 팬사인회 예행연습을 불시에 하게 되어서 그런 거라고 열심히 다독였다. 보통 사인회 시간이 1분 안팎임을 생각하자면 지민과의 대화는 몇 분째 이어지고 있기에 더 이상 평범한 팬사인회의 범주에서 벗어나도 한참은 벗어났음을 알고 있다. 그것도 멤버들을 먼저 보낸 채인 걸 되짚어 보자면.

아직까지 지민이 펼쳐보지 않은 다른 장에는 남몰래 PS까지 써두었다. 인디즈 앨범이라 정말 말 그대로 사진 앨범처럼 구성된 아이돌 앨범과는 달리 CD 케이스 형태의 앨범이라 속지라고 해봤자 가사지나 몇 없는 단체 사진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 날 노래를 허밍으로 따라부르던 목소리가 너무 예뻤다는 내용을 최대한 꾹꾹 눌러 담은 글씨로 써 내려갔다. 다행인지 지민이 민정 앞에서 그 부분을 열어보는 일은 없어서 면전에서 피에스를 이름이 불리는 것처럼 읽히는 일은 없었지만.

 

“민정 씨 목소리가 더 예뻐요.”

 

물론 다음 버스킹이 있던 날 지민에게서 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크로스백에서 꺼내든 앨범 속지까지 펼쳐 보이며 말을 하는데. 이 사람 이 정도면 사람 몸 둘 바 모르게 하는 게 취미로 보일 정도다. 알면서도 매번 얼굴이 달아오르는 민정도 민정이었지만. 그걸 왜 면전에 펼치냐는 말도 못 하겠고 어쩔 줄 몰라하며 고마워요. 대답하는데 목소리가 괜히 떨려오는 게. 그런 저를 보며 지민은 그저 웃기만 했고.

 

 

 

 

 

6.

 

이전에 지민이 듣고 싶다는 곡은 멤버들을 꼬셔 그 주 금요일에 다시 불렀다. 앞으로 부를 수 있을지, 완성된 곡으로 나오더라도 이 곡조의 이 가사가 유지될지 단언할 수 없었지만 지민의 부탁을 꼭 들어주고 싶었으니까. 갑자기 이걸 왜? 물어보는 멤버들에게는 그냥. 분위기 수신도 할 겸. 어물쩍 넘겼던 기억이 난다.

 

“오늘 어땠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공연을 보러 온 지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매일 일상적인 이야기들만 나누다 처음으로 건네보는 공연에 대한 질문이었다. 공연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늘 지민 쪽에서 먼저 화제를 꺼냈고 민정이 대답하는 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졌기에 질문을 건네면서도 기분이 꽤 새로웠다.

 

“당연히 너무 좋았죠. 얼마나 듣고 싶었는데 드디어 듣게 된 거니까. 노래 듣는 꿈도 몇 번이나 꿨는걸요.”

“정말, 고마워요. 노래 이야기도, 늘 와주는 것도.”

 

마음속에서 나비 수십 마리가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저런 반응을 노리고 세트리스트를 수정하고 노래를 연습하고 질문까지 건넨 거지만 생각을 하는 것과 실제로 대답을 듣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니까. 지민의 플러팅 같은 말과 곡에 대한 칭찬이 이어지니 정말 어쩔 줄을 모르겠다. 곡 이야기에 마음이 더 동한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 사람이 워낙 이런 소리를 많이 해야 말이지.

말을 튼 이래로 지민의 이런 기행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제는 버스킹 대신 클럽에서 지민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클럽에서 민정이 지민을 먼저 알아본 건 그 날이 처음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팬서비스를 했더니 오히려 지민 쪽에서 민정에게 하트를 날리더라. 유림의 보컬 파트라 음이탈이 나거나 코드를 실수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얼마나 심장이 벌렁거렸는지 모른다. 왜 팬이 역으로 가수라고 하기에는 아직 민망한 연습생에게 끼를 떠는 건지.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혹시 저 꼬시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꼬신다고 하여 뭘 더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 상대가 친구든 팬이든 회사 동료든 누군가와의 친구 이상의 관계는 최대한 지양해야 했다. 회사 내 연습생들이나 멤버들 중에서도 그런 낌새가 있는 멤버들이 있다가 없다가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로 꼬시는 거면 어떡하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내가 미쳤지, 미쳤어 김민정. 무슨 쓸데없는 공상을 하는 거야. 입 밖으로 중얼거리며 이불을 찼더니 룸메이트인 재서가 언니 무슨 일 있어? 물어봄에 민망해져 잠꼬대인 척 눈을 감았다. 다른 생각들로 최대한 그 생각을 밀어내기 위해 노력하며.

 

 

 

 

 

7.

 

당분간 그런 나날이 반복되었다. 회사가 정해준 스케줄대로 클럽 공연을 다니고, 버스킹을 하고, 지민을 만나는. 멤버나 가끔 연락하는 회사 사람 혹은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쓸 일이 없던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본 유학 전후로 괴롭혀 오던 부담감이 부쩍 줄어듦을 민정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부담감이 해소된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이래서 새로운 사람과의 접촉이 중요한 거구나를 느낄 정도는 되었다.

 

“지민 씨!”

 

일본 레이블에서 전달사항을 전해 듣고 돌아오는 길,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들린 식당에서 지민을 발견했다. 알바는 아니고 손님 대 손님으로. 저도 모르게 아는 척을 했다가 입을 막았는데 뒤늦게 입을 막는다고 그 말이 없던 것이 되는 건 아니라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저쪽도 혼자 온 모양인지 2인용 테이블에서 앞자리를 비워둔 채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합석하실래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민하다가 마침 혼자 앉을 자리도 없어 보여서 못 이기는 척 원래부터 일행이었던 것처럼 앞자리에 마주 앉아 식사를 주문했다. 지민 역시 오늘 강의가 모두 끝나 이후로는 스케줄이 없다고 해서 밥을 먹고 나와서도 같은 동네라는 명분으로 함께 오후의 거리를 걷다가 숙소 근처에서 헤어졌다.

그 날 하루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즐거운 우연이려니 했겠지만 동네가 거기서 거기다 보니 몇 번 더 지민과 마주쳐 밥이나 디저트를 먹거나 근처 마트를 돌아다니며 생활용품을 사거나 다른 밴드의 버스킹을 보기도 했다. 버스킹이야 민정은 배우는 처지고 지민도 밴드를 좋아한다고 하니 일종의 수업과 여가 생활 정도로 퉁쳤고, 마트도 뭐 지민도 스스로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건 매한가지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위안할 수 있었지만, 카페는 솔직히. 마주 앉아 커피와 디저트를 나누어 먹는 내내 이게 맞나 몇 번이고 고민하게 됐고 지민에게도 이게 맞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럴 때면 발동하는 소심함과 방어 기제가 민정의 입을 막았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계속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민과는 팬으로 만난 관계이고 저희는 언젠간 일본을 뜰 테니까. 그렇지만 같은 동네라는 명분으로 지민을 마주치기 위해 멤버들의 심부름을 대신하고 가까운 길을 산책을 하겠답시고 멀리 돌아갔던 행동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마음속 한켠에서는 이래도 되는 걸까? 와 둘 다 타지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지민 씨도 모를걸? 하는 두 생각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이 비단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멤버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아무리 여자라도 너무 가깝게 지내는 거 아니야? 우리 팬이라며. 그 사람 좀 무섭게 생겨서 언니가 너무 걱정돼. 여기가 한국도 아니고 일본인데 인신매매 야쿠자면 어떡하려고. 하는 말들을 잠자코 듣다가 마지막 말을 하는 게 하필 유림이라 실소가 새어 나왔다. 대사만 보면 거의 히데코 아가씨를 걱정하는 숙희다. 솔직히 그렇게 생긴 건 네가 제일인데? 웃으며 괜찮을 거라고 받아치면서도 멤버들이 자꾸 걱정하는 게 사람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그리고 걱정은 네가 더 많이 시키면서 누가 누구더러. 몇 차례 있었던 유림 관련 이슈를 떠올렸다. 연습생들 사이에서 유림의 이슈가 붉어지고 회사에 의해 관련 통로가 막힐 때면 제게 어떠한 역할을 요구하던 유림의 전적 또한. 언니, 곧 있으면 우리 만난 지 3년째다? 심지어 얼마 전 셀프 캠을 찍으면서는 저런 멘트까지 치더라. 마치 민정이 유림의 뭐라도 된다는 듯이. 미친놈아, 헤녀 주제에 나한테 왜 이래. 그냥 헤녀도 아니고 남미새면서. 최소 7년은 더 함께해야 할 팀 동료라 네가 좋아하는 그 성별한테나 가라고도 할 수도 없었고, 애초에 쟤는 민정이 여자를 좋아하는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를 거고 알아서도 안 되니까 스트레스만 늘었다. 지금도 이런데 데뷔하고는 저걸 얼마나 더 우려먹을지 짐작도 안 갔다. 회사에서도 유림과 민정을 짝으로 묶는 분위기니 더 한숨도 안 나왔다. 유림을 처음 보자마자 잠시나마 그 애의 얼굴이나 목소리가 제 취향이라 자주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과거를 지우고 싶은 적이 몇 번이었던가.

그래서 더 지민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을 꼬시는 건지 천성인지 저를 몇 차례나 고민하게 했던 언행들. 어느 쪽이어도 곤란하겠지만 민정은 지민의 행동에 아무런 의도가 없더라도 그런 사람은 아니길 바랐다. 꼭 유림이 아니더라도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유사 플러팅을 날리며 희망고문만 시켜놓고 결정적인 순간만 되면 우리 진짜 친구 맞지? 를 시전하며 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내던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왔던가. 그런 경험은 여태껏 겪어온 거로 충분했으니까. 물론 유림과 빗대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민에게는 엄청난 실례 같아서 그 생각들을 기각했지만.

 

 

 

 

 

8.

 

지민과의 연이은 만남으로 민정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접고를 반복하고 있는 사이 그룹 내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다 못해 바닥을 찍고 있었다. 선배 밴드 그룹의 일본 유학 생활 다큐를 보고 아시아 밴드의 성지인 일본에 도착한 초기에야 들떴을지 모르지만 낯선 타국에서 듣는 사람들도 없는 공연을 하고 자국어보다 타국의 언어를 일상처럼 사용하는 행위에 지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얻어가는 게 있더라도 어떻든 홀로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유학 생활에 지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민정이 부러 지민 생각을 더 하는 것에는 지쳐가는 일상에 대한 회피책도 있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멤버들 모두가 지쳐가니 유림과 재서 사이에서 좋지 않은 기류가 포착되는 일이 잦아졌다. 원래부터 상극인 성격이었지만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쌍방으로 투닥거리는 정도에 그쳐서 같은 데뷔조로 묶인 것이었는데, 연이은 타지 생활이 둘의 사이를 멀다 못해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 회사 직원들의 눈에는 여전히 전과 별다름 없이 비치겠지만 민정과 세연은 알았다. 저 둘을 어떻게 안 하면 데뷔해도 우리는 불화에 시달린다. 그것도 보통 불화가 아닌 왕따 수준의. 가수를 꿈꾸며 간혹가다 불화나 따돌림에 연루되는 그룹들을 보며 한 배를 탔는데 저렇게까지 사이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냐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이 그랬다. 데뷔해도 과연 그 욱하는 성질이 눌러질지 의문일 유림 쪽에서 뭐든 정석이고 대쪽같은 면이 있는 재서의 일거수일투족에 시비를 거는 행태였기에 절대로 쌍방의 불화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민정은 공연을 준비하랴 재서에게서 유림을 떼어놓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세연은 겨우 데뷔했더니 두 사람의 불화가 터져 그 여파가 저에게도 튀는 악몽까지 꾼다고 실토한 적이 있었다. 그 말에 당분간은 유림은 당연하고 재서도 서로와의 트러블 요소를 최대한 피하는 듯싶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보내주는 생활 계획표의 종지부는 좀처럼 찍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공연 플랜을 다 채우고야 귀국시킬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회사에 전화해서 귀국시켜 달라고 빌고 싶었지만. 이를 토로하더라도 그들은 그냥 별거 아닌 거로 왜 걱정이냐고 할 것 같아 고사한 적이 몇 번은 됐다. 유림이 저들 앞에서 물리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결론이 어떻건 리더인 제가 감수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민정은 당연히 이를 감수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유림은 두고 저에게만 비만의 화살이 날아가고 일이 흐지부지되거나 데뷔조가 엎어지는 것까지 상상되어 괴로웠다. 팀 내 불화로 매장 vs 멀쩡한 다른 데뷔조로 데뷔라면 당연히 후자를 고르겠지만.

 

역시나 오늘도 두 사람의 사이는 냉랭했다. 재서는 필요한 용건이 아닌 한 민정과 세연에게만 말을 걸었고, 유림은 아직도 제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늘 그랬다. 그 애의 스텐스만 보자면 회사 직원들이 충분히 둘의 좆창난 사이를 톰과 제리 혹은 같은 반 여학생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괴롭히는 초등학생 남자애 정도로(당연한 소리지만 이 역시 절대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문제였지만 회사에 그 정도의 인권 감수성을 기대하는 건 정말 무리였다.) 뭉갤 수 있을 정도였다. 오로지 당사자인 재서와 예민한 민정과 착한 세연만이 느끼는 기류.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해서 숙소를 맴도는 기류가 싫어 공연 현장을 정리하며 지민과 약속을 잡았다. 약속을 잡는데도 며칠을 망설였는지 몰랐다. 지민에게 여자 혼자 갈만한 칵테일 바 하나를 추천해달라고 했다가 지민 쪽에서 같이 먹자고 꼬셔서 만나기로 했고 당연히 이 모든 것이 구두로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오늘도 멤버들 특히 유림에게 지민에 대한 걱정을 들었고. 거의 3년은 본 너보다 안 지 몇 달도 안 된 그 사람이 훨씬 믿음직할 것 같은데. 생각을 꾹 삼킨 채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인사를 던지고 숙소를 나섰다.

사실 민정도 멤버들의 만류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저 사람이 과연 그런 사람일까? 인신매매 야쿠자 사이비 그 무엇도 제가 봐온 지민과는 들어맞지 않는다. 당연히 그런 범죄 수법을 저지르는 이들 중에서는 그렇게 생긴 이들보다 아닌 이들이 훨씬 더 많고, 지민 쪽은 굳이 말하자면 유림 말처럼 대놓고 스테레오 타입이라 역으로 의심이 더 가지 않았다. 저 얼굴로 그 말투와 성격인데 설마. 이는 앞선 여러 문제 때문에 민정이 어느 정도 지쳐 있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만큼은 아무렴 어떨까 싶은 거다. 이제는 부러 무슨 생각을 더 하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9.

 

지민은 벌써 약속 장소에 나온 상태였다. 저쪽에서도 민정을 발견한 모양인지 손을 흔듦에 인사를 나누고 함께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가게까지 걸어갔다. 민정은 부러 스몰토킹을 시도하는 쪽이 아니었고 지민 또한 평소와는 달리 특별히 무슨 말을 건네지는 않아 걸어가는 두 사람 사이에는 별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어색한 기류가 돌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어색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뜻한 기류. 벌써 5월 말에 접어든 계절 덕에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가게 내부는 지민의 말을 듣고 생각했던 것보다 아늑하고 은은한 분위기가 감돌아 기분이 좋았다. 주문은 당연히 일본어 구사에 더 능숙한 지민이 진행했고 민정은 지민의 추천에 따라 마음에 드는 칵테일 정도만 고르는 정도였다. 그거 보이는 거랑 다르게 도수 꽤 세다는데 괜찮겠어요? 묻는 지민에게 네, 저 술 잘 마셔요. 사실도 아닌 말을 패기롭게 내지르고 칵테일 잔을 받아들었다. 지민의 손에 들린 붉은 빛의 액체와 제 손에 들린 푸른 빛의 액체. 서로 대비되는 색깔이 예뻤다. 지민과 약속을 잡았을 때부터 자리를 잡은 지금까지 이게 맞는 걸까, 아무리 지치고 있다 쳐도 이러고 있어도 되나 하는 민정의 고민은 가게의 분위기와 마주 보이는 지민과 비워지는 칵테일 잔에 비례해 서서히 휘발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도 나쁘지는 않지, 싶은 마음이 올라왔고 지민도 좋아 보였으니까. 처음 충동적으로 약속을 청했을 적에도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저랑 같이 가요, 흔쾌히 대답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언니느은 저희가 왜 일본까지 왔는지 아세요?”

 

목으로 넘어가는 내용물과 비례해 목소리가 점점 늘어졌다. 입 밖으로 뱉어낸 호칭에 순간 놀라면서도 또다시 아무렴 어때, 갈무리했던 것 같다. 그 전부터 사적으로 불러보고 싶었던 호칭, 이참에 불러보는 거지. 지민도 별로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다.

 

“저희 팀이 하반기에 한국에서 데뷔하거든요.”

 

몰라요 솔직히. 뭐, 여기까지 왔으니까 데뷔하겠죠? 언니도 아시죠, 언커버. 제가 거기 메인보컬 언니 노래하는 거 보고 이 회사 오디션을 봤단 말이에요. 사실 그때도 아이돌 밴드에는 별 관심 없었고 그 언니 보컬만 좋아했고. 제가 춤도 어느 정도 추니까 이 회사 들어와도 당연히 댄스 그룹으로 나올 줄 알았거든요. 입사했을 때 밴드조보다 댄스조 플랜이 더 빨랐었고. 그랬는데 회사에서 너는 밴드를 해야 한다고 기타를 쥐여주는 거예요. 기타 배우면서도 이게 맞나? 몇 번이고 고민했고 자꾸만 댄스조 연습생들한테 눈이 가고 그랬는데.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절대 거짓말 아니고 진심이에요. 저는 데뷔한 친구들이 회사 아이돌 누구를 보고 동기부여를 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립서비스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회사 연생들이랑 언커버 콘서트 보러 갔다가 느낀 거예요. 그게 되는구나. 아이돌 밴드라고 해봤자 언커버 아니면 다 남자밖에 없었고 이 회사 첫 밴드도 남자였으니까 다른 세상 얘기 같았는데 공연을 보고 처음으로 저게 제 세상일 같은 거예요. 저렇게 멋있는 공연을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그런데 밴드니까. 저 혼자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요. 밴드의 심장은 뭐고 팔다리는 뭐고 드럼이랑 베이스는 부부고 그런 말을 들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연습하고 유학한다고 여기까지 오니까 알겠더라고요. 한 명이라도 삐끗하면 정말로 안 되는 걸.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를 모르겠어요. 회사나 동생들은 다 제가 잘해주고 있대요. 언니 아니면 누가 리더겠냐고. 근데 잘하면 그럴 수가 없어요. 뭐가 그러냐고요? 그건 비밀. 언니 눈에는 저희가 잘하는 것 같아요? 걔들도 겉으로는 제가 참리더니 뭐니 해도 속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할걸요. 저부터도 제가 쓰고 있는 이 감투가 너무 부담스러운데 다들 느끼겠죠. 특히… 아니다. 이것도 언니 앞에서 말하기는 그렇고. 아무튼, 저는 정말 열심히 하고 싶은데… 아니 계속 열심히 할 거예요. 언니가 매일같이 나를 보러 오는데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민정 씨는. 그러니까 내가 계속 보러 오지.”

“…….”

“저 밴드 좋아해서 나름 취향 까다롭거든요? 민정 씨가 잘해서 매일 보러 오는 건데 그렇게 말하면 저 섭섭해요.”

“진짜요?”

“네에, 진짜요.”

 

저도 몰랐던 주사 중 하나가 넋두리였나 싶을 정도로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에 목이 타기도 하고 제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지민 때문에 부끄러워져서 옆에 있던 물잔을 들어 들이켰다. 물이 좀 다네. 맛있다. 딸기 생각나고. 딸기? 지민 씨 칵테일 색이 그랬던 것 같은데.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남에게 방해되지 않을 볼륨으로 이름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는 지민. 이 언니도 눈이 풀려 있네. 눈 풀린 것도 잘생겼다. 얼굴과 조명의 매치가 아주 절묘했다. 이 언니가 나랑 같이 데뷔를 해야 하는 건데. 함께 눈을 맞추고 기타를 치며 보컬 파트를 주고받을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 못해 미칠 것 같았다.

 

“언니, 언니도 언니가 예쁘고 잘생긴 거 알고 있죠?”

 

솔직히 언니가 제일 아이돌 같아. 우리 그룹 비주얼 유림이보다 언니가 더 예뻐. 걔는 예쁜데… 아까도 언니랑 술 먹는다니까 장기 떼이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걔가 언니나 나보다 더 그렇게 생겼거든요? 각설하고 언니가 살면서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잘생겼어요. 솔직히 우리가 이렇게 안 만났으면 언니랑 좀 좋게…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다. 우리 데뷔하고 막 여잔데 일본에서 싱크로나이즈 리더 민정한테 플러팅 받은 적 있다고 올리면 어떡하지. 그때까지 우리가 만날 수 있긴 할까요? 나는 언니가 계속 나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말이 점점 더 노빠꾸로 나왔다. 이제는 이 모든 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입 밖으로 내는 말인지도 헷갈렸다. 이에 대한 뒷감당도. 여태껏 봐온 지민이라면 제 이야기를 막 할 사람은 아닐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아, 이래서 데뷔한 친구들이 팬들에게 연애를 들키고 알계가 파이고 사과문을 쓰는구나. 싶긴 했는데 여기가 한국도 아니고 일본인데.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지민에게 부축을 받아 도쿄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민정 씨, 괜찮아요? 뭐 필요한 거 없어요? 뺨에 닿는 밤바람에 그 자리에 멈춰선 제게 묻는 지민의 목소리. 저… 언니요. 언니가 제일 필요해요. 말하며, 업히기라도 할 것처럼 지민의 목에 양팔을 둘렀다.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자각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지민과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 말고는.

시야가 점멸하고 정신을 차려 보면 모르는 건물 내부에서 지민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점멸했다 선명해지는 시야에서는…

꿈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눈앞을 어지럽히는 머리칼.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낯설지 않은 얼굴. 손끝으로 느껴지는, 낯설지만 알고 있는 타인의. 그 외 여러 가지 외부 자극들이 파편처럼 민정의 오감을 스쳤다. 아마도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상상한 적도 없던, 그렇고 그런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겠지. 아니 어쩌면 무의식중으로는 이미 상상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게 이렇게 리얼할 리 없으니까.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는 아찔한 꿈결에 취해 언니가 절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내뱉은 말에 옆에 누운 지민의, 민정 씨도 나 잊으면 안 돼요. 꼭이야. 속삭이던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이것도 꿈인지 생시인지, 지민이 한 말인지 제가 한 말을 지민이 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몰려오는 수마 때문에 오락가락했지만.

 

 

 

 

 

10.

 

눈을 떴다. 보이는 건 낯선 천장.

너무나 진부하다 못해 사리조차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클리셰. 그러나 눈을 떠서 낯선 주변 경관을 둘러보자면 당연히 이런 진부하다 못해 국을 끓여 먹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낯선 천장과 낯선 이불의 감촉, 심지어 이불의 감촉에 닿는 건 옷도 아니고 맨몸. 이불을 걷어 제 몸을 훑자면 역시나. 여기저기 낭자한 흔적과….

결국은 했구나. 내가 결국은.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지민과의 기억이 민정에게 자괴감을 선사했다. 술을 먹고 선을 넘어도 한참이나 넘은 말을 줄줄이 이어나가던 민정과 그런 제 말을 잠자코 들어주던 지민. 둘 다 취해서 제정신도 아닌 와중에 계산은 착실히 하고 나와 바람을 쐬며 걷다가 스파크가 튀었고 도망치듯 들어왔던 모텔. 저보다는 멀쩡해도 술에 취했던 지민이 무슨 말을 하다가 부끄럽다고 베개에 머리를 박았던 것도 같은데 몇 번이고 이어진 관계에 중간 과정 대부분이 희석되었다. 유지민이 받는 처지였음에도 주던 저보다도 존나 선수였다는 감상 말고는. 사실은 몇 번이나 했는지도 헷갈렸다. 역시 이 사람도 처음부터 나를 꼬셨구나 싶던, 그나마 고등학교 때 같은 꿈을 좇던 학원이나 학교 언니 친구 동생 몇 명이랑 인스턴트식 연애 조금 했던 민정과는 비교가 불가능했던 지민을 생각하자니 그냥 우리는 이렇게 될 운명이려니 싶은 거였다.

맨몸으로 누워 그딴 생각이나 복기하는 것도 민망해서 바닥에 떨어진 속옷과 겉옷을 주워드는데 지민은 없다. 어디 갔지. 생각하며 방을 둘러보는데 선반 위에 메모지 하나가 눈에 띈다. 민정 씨 오후에 학과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메모지를 집어 읽어보면 내용이 그랬다. 어제 술 먹다가 제 앞에서 전화를 받던 지민이 떠올랐다. 이미 취하기도 했고 민정은 잘 쓰지 않는 말들이라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능숙한 일본어로 통화를 이어가는 지민이 진심으로 멋져 보여 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손뼉을 치던 저의 모습도. 흑역사였다. 알고 있던 내용임에도 괜스레 마음이 허전했다. 괜히 먹버라도 당한 기분이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격정적으로 해놓고 다음 날 민망하게 눈이 마주치다 어색하게 헤어지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핸드폰 케이스 안에 지민의 쪽지를 넣으며 생각했다. 문제는 다음에 지민을 만나는 날이 되겠지만.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는 내내 지민 생각을 했다. 그만 생각하라고 스스로를 다그쳐도 생각은 전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본디 생각이란 건 하지 말라고 스스로 되뇔수록 오히려 더 샘솟는 법이었다. 그래서 다 씻고 구비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체크아웃 시간을 1분 남기고 모텔을 나서면서도 계속해서 지민 생각을 했다. 버스킹을 하다 처음 지민을 발견했을 적부터 대화를 트던 밤, 그리고 어제까지. 분명히 맑은 날 낮임에도 마음이 울렁였다. 지민이 보고 싶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세연인가? 그러게, 어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라고 해놓고선 내 쪽에서 연락을 못 했었네. 숙소를 향한 발걸음을 서두르며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세연도 재서도 유림도 아니었다.

 

“네, 안녕하세요. 네, 네.”

 

……

발걸음이 멈췄다. 이렇게 갑자기요? 생각하고 물어봐도 대답은 같았다. 이번 주를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통보. 말만 이번 주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고 클럽과는 이미 회사 선에서 협의를 마쳤으니 공식 계정에 올릴 내용도 생각해 두란다. 그렇게 힘들 때는 귀국의 ㄱ도 안 꺼내더니 왜 하필 오늘. 일본 유학도 갑자기더니 오라는 것도 갑자기였다.

그러면 지민은. 지민은 당분간 버스킹은 몰라도 클럽 공연을 보러 올 시간은 안 된다고 했는데.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버스킹도 아주 잠시 봤다가 다시 학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애교 섞인 반존대로 나 없어도 잘 해야 해요,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것조차 플러팅 같았지. 지민은 아마 몇 주는 지나야 이 소식을 들을 거였다. 그 전에 그룹 SNS를 통해서 소식을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민과 대화라도 좀 나누고 싶었는데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있나.

문득 민정은 제가 지민이 다니고 있는 대학교조차 알지 못함을 깨닫는다. 대학교야 이 동네에 하나뿐이니 대충 짐작이 갔지만 그 학교는 단과대학이 아닌 종합대학이었다. 민정은 지민이 무엇을 전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할 틈은 없었다. 대화는 언제나 민정을 궁금해하는 지민을 위주로 이루어졌고 민정은 한 번도 지민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궁금한 것이 있더라도 존재하는 이성이 선을 지키라고 내면의 궁금증을 틀어막았고, 질문을 삼키던 것이 몇 번이었던가. 당연한 소리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연락처조차 몰랐다.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자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어제의 약속조차도 지민과의 모든 만남이 그리하였듯이 공연을 정리하며 구두로 맺은 약속이었다.

 

먼저 주저하고 선을 그은 것은 민정이었다. 그게 아니면 지민이 언제나 저를 보러 올 거라는 확신으로 선을 긋는 척 자만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이러다 공연이 마무리되는 날 지민에게 따로 연락을 이어나가자고 말할 생각이었으니까. 지금 와서는 그 모든 것이 허황된 꿈에 불과한 계획들. 백날 선을 그어 봤자 술 먹고 잔 순간부터 그 선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는데. 아니, 애초에 술을 먹은 것. 평소의 저였다면 생각지도 못할, 우연인 척 지민을 만나기 위해 감행했던 외출과 발걸음 끝에 인연이 닿았던 순간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얼굴만큼이나 내면도 중요하니까 싫어진 척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마음 한켠에 두고 있던 유림 대신 지민과 눈을 맞추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주고받는 상상을 하던 스스로를 깨달았을 때. 그 전에 지민이 듣고 싶다고 했던 미공개 곡을 멤버들을 졸라 합주했을 적부터 이미.

반면 지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지를 줬다. 아마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전공이 무엇인지, 심지어는 연락처를 물어도 지민은 흔쾌히 대답해주었을 것이다. 그것이 지민이었다. 그러나 이제 지민과는 곧 떠나게 됐다는 말도 건넬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아마 지민은 언젠가 한국 음악방송에 나오는 민정을 보고야 민정의 소식을 알게 될 터다. 그러고는 아, 이 사람 데뷔했구나 잘됐네 하고 넘길 것 같았다.

그랬구나. 이게 다 그랬던 거구나. 나만 안일했던 거구나. 지민 씨, 지민 언니.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지민이 저를 보며 했던 자기를 잊지 말라는 말이. 그러고 본인도 민망해하던 모습이 머릿속을 부유한다. 민정도 말해주고 싶었다. 잊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제 더는 지민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커다란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숙소로 돌아와 멤버들에게 통화 내용을 전하고 지민 없는 마지막 공연을 하는 내내 민정은 생각했다. 지민의 말처럼 민정은 절대 지민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11.

 

일본으로 출국할 때만 해도 매서웠던 한국의 날씨는 어느덧 봄을 넘어 완연한 초여름이 되어 있었다. 서울과 도쿄 사이에 시차나 기후 차이가 없음을 앎에도 비행 끝에 도착한 공항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 참으로 생경했다. 내딛는 발걸음뿐만이 아닌 뺨에 닿는 후덥지근한 바람조차도. 짐을 챙겨 멤버들과 함께 회사에서 온 밴을 타고 서울로 향하며 민정은 귀국 통보를 받은 날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예정된 공연 일정의 반도 채우지 않은 시점 귀국을 서두른 이유. 회사 앞으로 드라마 대본이 들어왔다고 했다. 정확히는 밴드 활동과 연기를 겸하고 있는 선배 그룹 멤버의 드라마 스케줄을 조정하는 대신 아직 데뷔하지 않은 저희 그룹 멤버를 조연으로 꽂아달라는 딜을 했다는 이야기. OTT 서비스에서 성황리에 방영 중인 시즌제 드라마의 존재는 민정도 알고 있었다. 워낙 유명했으니까. 새 시즌의 촬영일과 선배 그룹의 해외 투어 일정이 겹쳐 회사에서도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대신 저희 중 한 명을 밀어 넣기로 한 모양이었다.

도착한 회사에서는 여러모로 파급력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와 함께 네 사람 모두에게 대본을 배부했다. 꽂아주기식 캐스팅이지만 그 타겟이 특정 멤버가 아닌 멤버 전원이고 그중 한 명이 붙는다면 오디션을 본 건 맞으니 꽂아주기가 아니라는 애매한 합법과 편법의 중간책이었다. 연습생 시절 단체로 들은 연기 수업과의 관련성은 알 수 없었다. 요즘은 아이돌도 연기를 많이 하니까 지금과 관계없이 데뷔 후를 염두에 두고 진행한 수업일 거겠지만.

 

연기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다. 밴드가 무슨 연기를 하냐는 말은 옛말이었다. 애초에 민정에게 그런 정통 락스타적 신념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장 좋았을 뿐. 배우가 아니다뿐이지 가수, 특히 아이돌도 연예인이기에 데뷔 후의 삶은 모두 일종의 연기다. 그 장르가 정통극이 아닌 리얼리티를 표방할 뿐이지. 문제는 민정에게 얼마만큼의 연기에 대한 재능이 있냐는 거겠지만.

누가 붙고 떨어지냐에 따라 앞으로의 일본 공연 및 앨범 발매 스케줄이 짜일 거라고 했다. 보컬과 기타 포지션이 겹치는 민정이나 유림 중 한 명이 붙는다면 나머지 세 사람에서 일본으로 출국하겠지만, 세연이나 재서가 붙는다면 공연은 어렵겠지. 세연이 없다면 드럼 없이 어쿠스틱 형식으로 공연이 진행될 수도 있었다.

민정은 내심 유림이 오디션에 합격하기를 바랐다. 그 애가 없다면 동생들과 셋이서 비교적 화기애애하게 공연을 돌 수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지민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지민이 저를 반겨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최소 마지막 인사를 나누든 운이 좋아 연락을 이어나가자고 하든 지금과 같은 어중간한 상황에서는 탈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세연이나 재서가 오디션에 합격하거나. 제가 오디션에 붙고 나머지 세 사람에서 일본으로 출국할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일본 출국 자체가 취소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애초에 제가 합격할 가능성보다 동생들이 합격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예전보다야 나아졌지만 보컬 멤버만 기억되다 못해 그룹명 그 자체로 불리는 반면 비보컬 멤버는 악기 세션 정도로만 취급되는 한국 밴드 풍토 때문인지 세연과 재서는 뮤직비디오 출연 등으로 한두 차례 차출되었고 연기에도 꽤 두각을 보였으니까 제가 붙을 가능성은 다른 멤버들보다는 작을 것이다. 일단 다른 걸 떠나 혼자 연기를 할 자신도 아직은 없었으니까. 주어진 기회인 만큼 오디션을 보는 것도 연기를 하는 것도 모두 열심히 하겠지만. 눈으로는 대본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앞으로 일어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2.

 

오디션 결과가 떴다. 누가 붙더라도 저는 아니겠지 생각하던 예상을 뒤엎고 회사 직원으로부터 이름이 불리던 순간 민정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가장 먼저 고민해야 했다. 연습을 하면서도 자꾸만 이게 맞나? 연기라면 세연이나 재서가 더 잘했을 텐데? 의문이 들어서 저보다 연기에 재능 있는 동생들에게 물어봤더니 언니 연기가 제일 실감 났다고 입을 모아 말하니 오디션 볼 때 연기의 신이라도 강림했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다가도 좀체 납득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도 결과였지만 이렇게 되면 정말로 지민을 볼 기회는 더 적어지니까. 무엇보다 세 사람만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고.

드라마는 해당 포맷이 그러하듯 주요 OTT 서비스 수요 세대인 1~20대를 노린 헤테로 캠퍼스물로, 민정의 역할은 선배 그룹 멤버가 맡은 여자 주인공의 친한 동생이자 동아리 후배였다. 주연과 조연 사이에 걸친 나쁘지 않은 위치로써 극 중에 적당한 장치를 주는 인물이 대외적인 설명이었지만 사실은 여자 주인공의 친한 동생이자 함께 입부한 여자 동기를 짝사랑하는 퀴어 캐릭터였다. 중후반부가 되면 동기는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고 민정은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여자 주인공과 어울리면서도 동기를 생각하며 한숨짓는다. 그 때문에 대본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지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대본이 제 손에 들어오게 된 걸까. 합격한 이유 또한 평소보다 더 실감난 열연을 펼쳐서도 있겠지만 민정에게 당사자성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게다가 대본 리딩을 위해 현장을 찾았을 때 만난 상대 배우의 인상이 지민과 꽤 겹쳤다. 깜짝 놀라 하마터면 지민의 이름을 부를 뻔했지만 그 전에 봤던 이름이 지민이 아니기도 했고 지민보다는 키가 작아서 초면에 실수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민이 아님에 실망하는 한편 얼마나 마음을 쓸어내렸던가. 세상이 저를 두고 깜짝카메라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 물론 상대는 첫 느낌만 지민과 비슷했지 볼수록 전혀 다른 사람인 데다가 상대 쪽에서 먼저 살갑게 저를 챙겨주었던 터라 민정 역시 상대를 편하게 대하게 됐다. 흑발을 하고 등장했던 대본 리딩 때야 비슷하게 보였지 금발로 탈색을 하고 온 뒤에는 그냥 별개의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 덕에 현실과 연기를 완전히 분리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반쯤 꽂아주기 식으로 하게 된 연기, 상대에게서 끝까지 지민을 봤다면 얼마나 많은 NG를 냈을지.

 

드라마는 회사의 예상대로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선배 그룹 멤버의 공이 가장 컸지만 이번 시즌 뉴페이스로 출연한 배우들의 비주얼과 연기력도 출중해 그중 한 명이었던 민정에게도 스포트라이트가 왔다. 실제로 길을 지날 때면 Live My Life 나왔던 김민정 아니냐는 질문을 몇 차례 듣기도 했다. 여남 주인공들의 더치페이스가 잘된 편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본 적이 있었고 민정 또한 동감하는 바였다. 물론 남자가 잘생겨봤자 민정에게는 그 어떠한 감흥조차 줄 수 없었지만.

촬영이 거듭되며 밴드의 데뷔 찌라시가 수면 위로 오르기도 했다. 가장 늦게 입사한 재서를 제외한 세 사람이 회사의 공개 연습생이었던 터라 그 전부터 선배 그룹에서 타고 내려온 팬층이 얕게나마 있었지만 지금의 반응은 확실히 민정의 존재 덕이 맞았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싱크로나이즈 일본에서 낸 곡 좋고 언커버 콘서트 오프닝 무대에서 봤었는데 예쁘고 잘하니까 데뷔하면 잘 됐으면 좋겠다는 글이나 회사로 도착하는 편지나 선물들을 보자면 제가 그래도 욕 안 먹고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가 뿌듯했고 그 전까지 했던 고생들도 어느 정도 봉합되고 있음에 바쁜 와중에도 일본 활동 때보다는 매일이 행복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관심을 받는 만큼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이 민정의 어깨를 누르기도 했지만 그러한 부담감조차 긍정과 낙관이 되어 민정을 움직이게 했다. 그래서 이 마음이 밴드 데뷔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매일 잠들기 전마다 바랐다. 그러면 지민도 어디선가 제 생각을 하겠지.

사실 단 하루도 지민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연기를 할 때도, 민정은 활동하지 않는 두번째 싱글을 녹음하면서도. 지민이 민정 없는 공연을 보러 올까? 제 손길이 담긴 곡을 듣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드라마를, 민정과 상대 배우의 관계성이 지민에게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같은 생각을 했다. 멤버들에 대한 걱정은 촬영이 거듭될수록 희석되는 반면 지민은 절대 희석되지 않아 그것들이 민정의 연기와 작사의 귀감이 되었다. 아마 저의 모든 유성애 작사와 연기는 지민이 매개가 아닐까. 드라마 촬영 중간중간 메모해둔 악상이나 영감을 토대로 곡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이 났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이 사람은 왜 도저히 멀어지지가 않는지. 이제는 지민이 저를 일방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관계에 불과할 텐데 저는 언제까지 지민 생각을 하게 될지.

 

 

 

 

 

13.

 

끝나지 않을 줄 알았던 드라마 촬영도 어느새 끝을 향하고 있었다. 처음에야 어색했던 배우 및 스태프들과도 안면을 텄고 연기든 낯선 사람들과의 조우든 서서히 적응할 무렵이라서 촬영이 마무리된다는 소식이 시원섭섭하다고 생각하던 차.

일이 터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인터넷 등지를 떠돌기 시작한 싱크로나이즈 기타리스트 유림의 이야기들. 중학교 때 싱크로나이즈 유림의 후배였다는 서두로 시작된 글에는 멤버들이나 회사조차 몰랐던 사실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유림은 중학교 2학년 말까지 육상을 했다. 중간에 크게 슬럼프에 빠져 결국 육상을 관두었고 우연히 접하게 된 기타가 제 길이라 기타리스트를 꿈꾸게 되었다는 것이 유림에게 들은 과거사의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육상부 활동 중 문제가 여러 차례 발생했다고 했다. 흔히 체육계 관습 따위로 포장되지만 절대 그렇게 포장되어서는 안 될 폭력의 증거들. 교사나 손윗사람 앞에서는 싹싹하지만 손아랫사람들 앞에서는 폭력성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었다는 일화들. 본투비 락스타라 성격이 튀었던 게 아니라 애초에 글러 먹었던 거구나. 싶어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말 회사 내 누구도 알지 못했다. 유림의 생기부 자체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으니까. 그 전까지 유림은 성격이 조금 많이 거칠고 방랑기가 있어도 예쁘고 잘생긴 얼굴에다 워낙 기타를 잘 쳐서 다들 무슨 일을 쳐도 감싸고 넘어갔던 멤버였다.

올라온 글에서도 이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가 이렇게 올려봤자 그 언니는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이력이 없고 본인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거라고. 교사들 사이에서는 엇나가기는커녕 스스로 새 길을 잘 찾아 나간 선배니 본받으라는 칭찬만이 오갔고, 학생들만 이 사실을 안다고. 이제 데뷔하는 그 사람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라도 아는 게 저희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이라는 끝맺음. 그 대목을 보며 민정은 재서를 떠올렸다.

 

“저 언니랑 같이 못 살겠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서와 세연이 돌아왔다. 공식적으로는 인기리에 방영 중인 민정의 드라마 스케줄에 맞춰 데뷔 준비를 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지만 민정은 직감했다. 완전히 좆됐구나.

유학 생활 당시 끝없는 번아웃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공연을 끝까지 마칠 수 있던 것에는 지민만큼이나 세연과 재서의 역할이 컸다. 툭하면 재서, 가끔은 민정과 세연에게 역정을 내던 유림을 말리는 것은 민정이었고 재서를 달래는 것은 세연으로 역할이 나누어졌기에 어떻게든 유지되었던 것이 네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혼자 드라마를 촬영하면서도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는데 역시나. 민정이 있어 그나마 유지되던 유림과 재서의 사이가 완전히 좆창이 났다. 세연 혼자 말리는 것은 한계였고, 애초에 세연부터도 유림 앞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평소에는 세연을 귀여워했던 유림이었지만 수가 틀리면 괴롭힘을 가한 것을 세연이 말한 적이 있었다. 결국은 유림을 이기지 못한 두 사람이 회사에서 그나마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직원에게 간청하여 한국으로 돌아온 참이었는데 과거사까지 터진 설상가상의 상황이었다.

민정은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알 적부터 회사에 멤버들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해왔지만 늘 멤버들 간에는 그럴 수도 있다, 데뷔 직전에는 절로 봉합될 거라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들어왔다. 오히려 리더가 되어서 그것도 중재를 못 하냐는 답변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한 적도 있었다. 리더직을 임명한 것도 책임을 묻는 것도 순 회사 마음대로였다. 그러면 동생들 중 한 명을 리더로 삼지 그랬어요. 말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설사 말한다고 해도 회사에서는 유림보다는 네가 더 잘하지 않냐는 감투만을 재차 씌울 것 같았다. 연습생 때부터 늘 그랬다. 회사는 왜 매번 그 애만 싸고도는 걸까 하는 의문이 간혹 들었지만 이것 또한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이 아니었다. 민정이 할 수 있던 것은 몇 번이고 동생들과 함께 상황을 피력하는 것밖에 없었다.

넷이 살던 숙소에는 민정과 세연 둘뿐이었다. 유림은 회사에서 임시방편으로 집으로 보냈고 재서는 회사로 찾아온 가족들과 함께 본가로 돌아갔으므로. 숙소로 돌아와 세연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너도 재서처럼 집에 가 있지, 말하면 나라도 숙소에 없으면 진짜 끝날 것 같아, 대답하는 목소리가 너무 지쳐 있어 말없이 끌어안고 숨을 고르고는 했다. 병원이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렇지만 민정은 남은 드라마 촬영 스케줄을 수행해야 했다.

 

그 덕에 민정은 유림의 탈퇴 소식을 조금 더 늦게 듣게 됐다. 중간중간 회사와 세연 재서에게 온 연락에 분명히 전부터 이런 일이 있었다고 누차 말해왔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전부였고, 조금 더 시일이 지나서야 멤버들에게 모든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일이 터진 초기 회사에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과거사와 멤버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하나로 연결하지 못하는 추세였고, 애초에 두 사실을 믿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에 따라 회사 측은 침묵하고 있었고, 이렇게 침묵한다면 흐지부지되겠지 하는 생각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유림의 행적은 점점 더 확실한 물증이 되어 인터넷을 달구었다. 다른 멤버들은 무슨 죄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드라마로 얼굴을 알린 민정이나 멤버들에 대한 비난의 화살 역시 소수 존재했다. 그 사이에는 그룹 자체를 보기 싫다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그제야 회사 내부에서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데뷔조가 짜인 게 얼마인데 어떻게 엎냐는 의견과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학교폭력 가해자가 데뷔하면 겨우 반응 오는 그룹도 망한다는 의견 반으로 갈라졌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어떻게 멤버를 바꾸냐고 주장하는 전자의 직원들을 보자면 민정은 이 회사가 이러니 중소를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후자의 직원들 또한 이 점을 지적했다. 어차피 유학 생활은 메이저도 아니고 인디즈니까 멤버를 교체하고 나중에 한국 앨범 수록곡으로 재녹음하면 되니 문제가 없을 거라고.

회사 내부의 의견이 전적으로 후자로 모아진 것은 재서 덕이었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까지 함께 다녔던 친구가 유림의 후배였다. 중학교 때 육상을 접고 체육 교사를 하기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친구는 좀체 제 이야기를 하는 일이 없었는데 재서의 데뷔를 축하하며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고 했다. 이에 재서는 유림에게 이런 식으로 피해를 본 게 저뿐만이 아니라는 것에 용기를 냈고, 그룹과 친구를 위해서라도 틈틈이 모아두던 증거들을 회사에 송부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유림의 이면을 직원들이 보게끔 유도한 세연의 재치는 덤이었다. 그룹 내에서 확실한 물증이 발생하자 그 전까지 나 몰라라 했던 직원들마저 이것만큼은 묻고 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인터넷을 소소히 달구긴 했지만 정식 데뷔 전이었기에 자르는 것은 순조로웠고, 앞으로 이것이 그룹의 발목을 잡을 것 같지도 않았다.

민정은 모든 전말을 전해 들으며 당연히 이게 맞다고 생각했다. 연습생 중 새 기타리스트를 선정하고 합을 맞추는 데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멤버와의 합이 잘 맞을지도 의문이지만 개인의 적응과 팀의 합과 도덕 윤리를 맞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이를 모두 없던 것처럼 취급하고 함께 데뷔하더라도 7년 동안 마음은 절대 편치 않을 거였다. 특히나 재서나 세연에게 너무나 미안하겠지. 사람으로서의 윤리관은 당연하고 심적으로도 시한폭탄을 하나 두고 있는 격이었으니. 그렇기에 민정은 부디 실력이 조금 못하더라도 새 기타리스트라도 좋은 사람이 오길 바랐다. 본디 밴드란 개인보다는 팀이 잘 어우러져야 완성되기 마련이니까.

 

 

 

 

 

14.

 

새 멤버를 선정했다는 말을 들은 것은 며칠간 진행된 마지막 해외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멤버가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반면교사가 있으니 제발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세연과 재서는 이미 만나고 말까지 텄다는데 물어봐도 언니가 직접 만나보면 알 거라는 말만 하더라. 얘네가 저렇게 말한다면 최소 이상한 사람은 아닐 것 같아 보였지만.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회의실 한쪽에 앉아 있는 낯선, 아니, 낯설지 않은. 잠시간 숨을 멈췄다. 혹시나 방을 잘못 찾아왔나 싶어 문을 닫고 방을 다시 확인하고 문을 연 후에도 보이는 이는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언니, 안 들어가고 뭐 해.”

 

뒤에서 재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혀 놀랄 것 없다는 목소리. 역시나 헛것일까, 생각하는데 지민 언니 언니가 좋아하는 거로 사 왔어. 말하며 저를 앞서 손에 들고 있던 회사 앞 프랜차이즈 카페 음료수를 건네는 세연을 보자면 절대로 헛것이 아니다. 반사적으로 문을 다시 닫았다. 이게 맞나? 무슨 생각부터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숨도 안 쉬어졌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연습생 생활을 하며 고친 줄 알았던 고질적인 회피 기제가 다시금 민정을 괴롭혔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으면서 왜 못 볼 사람 보듯 굴어?”

 

옆에서 그런 제 꼴을 모두 지켜보던 재서가 말을 건넨다. 나랑 얘기 좀 하자, 말하며 앞서 걸어가는 재서를 따라 다른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모를 줄 알았지? 나랑 세연이랑. 그 인간도 다 알았어.”

“…….”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언니니까. 언니는 맨날 언니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나는 솔직히 언니가 우리 팀 리더라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래서 언니가 누굴 만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었고 나한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용기도 낼 수 있었어.”

“…….”

“지민 언니, 정말 좋은 사람이더라. 말 트자마자 언니가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겠더라고.”

 

한때는 할 말은 다 하는 재서의 성격이 시원해서 부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전부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유림의 일도, 민정과 지민의 관계도. 민정과 세연이 마냥 참고 있을 때 유일하게 유림과 맞서던 재서라 잊고 있었는데 이 애는 올해 겨우 18살이었다. 민정조차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여 당연히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너 때문 아니야. 오히려 내가 너랑 세연이한테 짐을 많이 졌지.”

“그런 말은 나중에 나랑 단둘이 있을 때 하고 지민 언니랑 인사부터 해. 지민 언니도 우리 앞에서 언니 얘기 많이 했으니까.”

 

재서가 민정의 팔짱을 꼈다. 뿌리치려다 그냥 함께 회의실 앞까지 왔다. 이제는 내가 알아서 들어갈게, 팔짱을 풀며 태연한 척 문을 열고 들어와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다행인지 뭔지 재서나 지민 쪽에서 먼저 민정에게 말을 건네기 전에 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장이 지민을 소개하는 목소리를 듣고, 최대한 처음 만나는 사이인 것처럼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누면서도 민정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차 안이고 저는 아직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머릿속은 토네이도 그 자체인데 겉으로는 동요하지 않고 있는 스스로가 그사이에 참 연예인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기쁘면서도 슬픈 일이었다.

 

 

 

 

 

15.

 

“어떻게 된 거예요?”

 

질문을 건넨 건 실장이 나가고 둘이 이야기 해, 민정에게 귓속말을 남기고 재서를 데리고 세연이 밖으로 나간 이후였다.

 

“많이 놀랐죠?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이게 다 어떻게….”

“이야기가 좀 긴데.”

 

그렇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것. 지민이 하는 이야기라면 몇 시간이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회의 감동은 그 이후에 나눠도 늦지 않으니까.

 

“두번째로 만났을 때 제가 유학생이라고 했었죠? 유학생은 맞는데 처음부터 계획하고 유학을 간 건 아니었어요. 민정 씨가 보기에는 제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겠지만 저도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었거든요.”

 

지민 역시 민정처럼 아이돌을 꿈꾸며 여기저기 오디션을 봤다고 했다. 그러다 대형 기획사에 합격해 4년간 연습생 생활을 했지만 회사가 지향하는 데뷔조 컨셉과 맞지 않거나 사내 남자 아이돌의 집중 푸시로 데뷔가 자꾸만 밀리는 등 갖은 이유로 데뷔가 좌절되어 회사를 나와야 했고, 그러던 도중 언커버 붐이 불었다. 남자 아이돌이라면 몰라도 여자 아이돌이라면 절대 수요가 없을 거라고 여겼던 직접 곡을 쓰고 연주하는 여자 아이돌 밴드의 비상이었다. 요즘은 댄스 아이돌 회사에서도 악기를 가르치기도 하고 원래부터 기타를 칠 줄 알았기에 이왕 데뷔할 거면 블루오션에 뛰어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밴드 아이돌 오디션을 함께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민은 비주얼이나 실력은 당연하고 대형 기획사 비공개 연습생 출신이라는 경력으로 모두가 반기는 인재였고 민정네 회사와 언커버의 성공으로 여자 아이돌 밴드를 준비하게 된 다른 회사에 동시에 붙을 수 있었다. 전자는 약속된 밴드 명가였지만 중소 기획사인 반면 후자는 지민이 4년간 몸담았던 회사 다음가는 대형 기획사인데다가 무엇보다 데뷔 플랜이 더 빨랐다. 지민이 고민 끝에 그곳을 택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기로 왔으면 그때 우리가 만났을 수도 있었겠네요?”

“그러게요? 지금 생각하니 아쉽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정은 제가 지민이었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당시 지민의 나이를 생각하자면 빠른 데뷔만큼 안심되는 플랜이 없었을 테니까.

문제는 그 회사의 밴드 플랜이 확실하지 않았다는 점. 첫 그룹부터 밴드를 냈던 이곳과는 달리 댄스 아이돌만 내왔던 회사에서 밴드 아이돌을 론칭하려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 때문에 지민은 밴드로 입사한 회사에서 댄스 트레이닝을 받아야만 했다. 데뷔조 또한 밴드를 낼지 댄스를 낼지 밴드와 댄스를 합쳐 트랜스포머형 그룹을 낼지로 매번 의견이 분분했다. 지민이 할 수 있는 건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트레이닝을 받고 열심히 연습하는 것뿐이었고, 그 끝에 데뷔조 멤버로 선정되었지만 그룹과 컨셉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최종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때 준비한 건 결국 댄스 그룹이었던 거죠?”

“네, 그랬죠. 댄스 그룹.”

 

그 회사에서 데뷔한 그룹이 누구였더라. 시대는 돌고 돈다고 교복 + 청순 컨셉을 표방하며 데뷔한 아이돌이 떠올랐다.

데뷔조에서 탈락한 지민에게 회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연을 제안했지만 지민은 이를 거절하고 회사를 나왔다. 스스로가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일련의 일들이 지민을 너무나 지치게 만들었으니까. 이 정도면 아이돌은 정말로 제 꿈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마음이 힘들었지만, 제 발로 회사를 나온 지민은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나마 잘하던 게 회사에서 배우기도 했고 그 전부터도 조금 하던 일본어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음악을 하겠다든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거창한 계획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한국보다 시장이 큰 일본 밴드 음악을 찾아 듣는 게 삶의 낙이었는데 정작 그 그룹들을 찾아갈 용기는 없음의 딜레마. 그래서 메이저 밴드는 뒤로하고 인디즈 위주로 구경을 다녔다. 그러나 그 밴드들을 보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저 사람들은 어떤 사정으로 밴드를 하게 된 걸까. 밴드가 저 사람들의 생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어서. 지민이 밴드를 좋아하는 걸 아는 학교 친구들의 추천으로 밴드 서클 활동도 해봤지만 지민 내면의 공허와 갈증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그러다 듣게 된 거죠, 그 노래를.”

 

분명히 남의 이야기인데 제 이야기 같았거든요. 민정 씨 목소리도 너무 예뻤고. 어떻게 저 목소리로 저런 노랫말을 부르는 걸까, 가사를 직접 썼다면 가사를 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온종일 고민했지만 저는 민정 씨가 아니니까 알 수 없었죠. 그래서 매일 보러 갔는데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그 노래를 안 부르더라고요? 그룹명이 싱크로나이즈라기에 찾아보니 언커버처럼 회사 전통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온 차기 밴드 데뷔조라고 해서 클럽에도 몇 번 갔었는데 거기서도.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민정 씨 자체가 궁금해지더라고요. 물론 처음 만난 날은 100% 우연이었지만 그 날 이후로는 일부러 더 민정 씨를 보러 갔었어요. 저는 알잖아요? 이 시절 제일 필요한 건 누군가의 가장 진실된 응원이라는 걸. 저는 민정 씨뿐만이 아닌 다른 친구들도 그 마음을 전해 받기를 바랐어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회사에는 언제 들어온 거예요?”

 

지민의 말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처럼 벅차오르는 마음과 잠겨오는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민정 씨가 한창 드라마 찍을 때?”

 

회사와의 첫 컨택은 클럽에서였다. 민정네 밴드의 공연 날, 아주 간헐적으로 찾아왔던 직원에게 캐스팅을 받았다는데 지민은 아마 자신의 개인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클럽 사진을 보고 저를 찾아온 것 같다는 추론을 했고 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회사는 밴드를 만들 거라면서 인스타그램 캐스팅을 해오면 어쩌라는 걸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그렇게 데려온 사람이 지민이라 망정이지.

 

“그런데 낌새가 절 밴드로 데뷔시킬 생각은 아니었던 거로 알아요.”

 

그냥 뭐라도 시키려고 데려왔겠지, 싶었다. 다음에 론칭될 댄스 아이돌 그룹에 넣을 수도 있었고 연습생 서바이벌 하다못해 댄서 서바이벌 같은 곳에 보낼 수도 있었다. 혹은 배우로 데뷔시키거나. 이 회사는 늘 그러니까. 그런데 요즘도 프듀를 하나? PD가 조작한 거 들켜서 감옥 갔다며. 뭐, 오디션 프로그램은 워낙 다양하니까.

반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지민의 보컬과 기타 실력이 그렇게 두기에는 매우 아까웠다는 점. 게다가 춤과 랩까지. 회사에서는 지민을 솔로 가수로 데뷔시킬 플랜까지 짜두고 있었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림의 전과가 터졌고 이 모든 것이 지민을 급하게 밴드 데뷔조로 투입하는 계기가 됐다. 민정이 이를 알지 못한 것은 드라마 촬영이 시작된 시점부터 매일같이 숙소와 촬영장만을 오갔기 때문. 세연과 재서가 지민을 원래부터 같은 멤버였던 것처럼 대하는 게 그 증거였다. 재서의 이야기만 들어봐도 셋이서는 벌써 별의별 이야기를 다 나눈 거로 보였으니까. 모두가 우연에 우연들이 더해져 완성된 운명이었다.

 

“저 민정 씨 보고 싶어서 드라마도 열심히 봤잖아요.”

“…아?”

“민정 씨 얼굴이랑 노래랑 기타 연주랑 작사 작곡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연기도 잘 하더라고요? 민정 씨 나오는 부분만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몰라요.”

 

아는 사람으로부터 드라마 이야기를 듣는 것도 여전히 부끄러운데 한술 더 떠 저 그 부분 제일 좋아하잖아요. 말하며 드라마 명대사를 내뱉는 것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 이 사람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그렇지만 전혀 싫지 않았다. 지민의 행동 하나하나가 늘 그리웠으니까 오히려 반가웠다.

 

“그래도, 화면 속 말고 진짜 민정 씨랑 다시 만나니까 좋다.”

“…….”

“아니다, 이제 멤버니까 편하게 말해야겠지?”

“…….”

“다시 만나서 반가워, 민정아.”

 

아무런 호칭 없이 편하게 불리는 이름을 듣는 순간 속이 한없이 울렁였다. 나쁘지 않다 못해, 너무나 설레는 기분. 데뷔하더라도 평생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지민에게 듣는 저의 이름. 민정은 난생 처음으로 흔하디흔한 제 이름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민에게 불리는 이름이라면 그 이름이 무엇이더라도 좋아했을 거였다.

사실 지민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지민이 데뷔조까지 갔던 만큼 뛰어난 연습생 출신이었다 해도 캐스팅 자체가 과연 우연으로 일어날 일일까. 언젠가 유림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는데 역시 그랬던 거였다. 얘가 찔렀구나. 서포트 빼돌려 먹기를 제외하고는 생전 스케줄에 안 오는 직원이 거기까지 왔다는 건 역시. 애초에 그 애가 멤버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부터가 저를 향한 일종의 열등감임을 민정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게 실체가 된 건 사건 이후였지만. 사실상 민정의 키를 제외한 모든 면이 그 애의 상위호환인 데다 동생들도 저만 의지하니까 배알이 꼴렸겠지. 그런 민정이 유림을 좋아하는 티까지 냈으니 약점이라도 잡았다 싶어 얼마나 신이 났을까. 그 애 생각만 해도 피곤했지만 그렇게 만난 게 지민이고 장본인은 이제는 없는 존재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중간 과정과 저희가 그 애에게 받은 상처를 생각하자면 마냥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16.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그룹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데뷔 직전까지도 회사 내부 작곡가가 쓴 곡과 민정의 곡 사이에서 끝없는 갑론을박이 오간 끝에 결정된 자작곡 타이틀곡은 발매된 지 1주일도 되지 않아 차트를 역주행하더니 기어이 데뷔 활동 마지막 주에는 대형 기획사에서나 할 수 있다는 데뷔곡으로 1위 트로피를 받는 기록을 세웠다. 1위 가수로 싱크로나이즈가 불리던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비록 회사 작곡가들과의 공동 작업물이 섞여 있긴 해도 네 멤버 모두의 손길이 들어간 첫 앨범이었기에 너무나 뜻깊은 순간이었다. 팬들을 위시한 인터넷 등지에서는 싱크로나이즈의 성공 요인을 전곡 자작곡 앨범과 지민의 영입이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성공적인 멤버 교체와 성공적인 곡 선정. 모든 것이 터닝포인트인 셈이었다. 민정은 거기에 더해 데뷔 전 지민으로 교체된 리더 자리를 꼽았다. 세 사람 중 연습생 기간이 가장 길었던 민정보다 지민의 연습생 기간이 더 길기도 했고 누가 봐도 지민만한 천상 리더감이 없었다. 저 대신 마이크를 잡고 능숙히 멘트를 치는 지민을 볼 때마다 언니가 진짜 내 복덩이야, 말하려다가 부끄러워서 입을 닫았던 적이 몇 번은 됐던가.

지민이 가장 좋아하는, 그래서 민정과 지민을 이어주게 했던 곡은 비록 타이틀곡은 아니었지만 타이틀곡만큼이나 저명성 있는 수록곡으로 유명해졌다. 팬들 사이에서는 팬송이었고, 팬덤 바깥에서는 힐링송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참여한 다른 곡들과는 달리 편곡만 도움을 받았을 뿐 작사 및 작곡란에 단독으로 기재된 제 이름을 볼 때면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연예인 친구들은 민정의 그룹 팀워크를 부러워했다. 넷이서 어떻게 그렇게 돈독하냐고 물으면 민정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유지민 언니 효과라고도 할 수 없잖아? 그룹도 연애도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으니 몸이 고되어도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민과 이렇게 함께하는 모든 순간순간이 기적의 연속이었으니까. 세연은 물론 재서까지도 하루하루가 바쁜 와중에도 일본에서의 힘듦 따위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언니도 그렇지? 언니가 정말 행복해 보여. 말하는 동생들에게 온전히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더라도 대충은 알겠지.

 

“왜 나만 따로 불렀어?”

 

연습실 문을 열자 보이는, 한창 기타를 연습 중인 지민에 처음 기타를 잡았을 때가 떠올랐다. 한때는 현악기의 특성상 조율을 하고 또 해도 음정이 흔들리는 것이 예민한 제 성정을 닮아 보기 싫었던 적도 있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오래된 것 같은 연습생 초기의 이야기. 그런 생각 따위는 진작에 날아간 지 오래였고, 지금은 저의 몸 일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좋아진 악기. 특히나 지민과 눈을 마주하며 기타를 연주할 때면 내가 이래서 기타를 배우게 됐구나 하는 생각까지.

지민의 맞은편에 앉아 함께 구매했던 피크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거라도 티 내자고 지민이 주었던 피크. 그러다 어느새 지민과 눈이 맞는다. 몇 번을 마주쳐도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마음이 간질거리게 만드는 사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났다. 평소였으면 좋을 때다. 하는 세연과 언니들 연애질은 집에 가서 하세요, 하는 재서의 장난스러운 타박이 들려야 할 텐데 연습실에는 오직 둘뿐이다. 동생들이 있었다면 지민은 드럼이랑 베이스는 부부니까 둘도 우리처럼 사귀라고 역으로 두 사람을 몰았을 거였다. 거기에 두 사람은 우리끼리 사귀면 부부가 아니라 가족끼리 왜 이래가 된다며 똑같이 손사래를 쳤겠지.

 

“그냥, 둘만의 시간도 필요하니까? 요즘 콘서트 준비한다고 둘만 있을 기회가 없었잖아.”

 

데뷔곡부터 워낙 성과가 좋은 데다가 실력까지 검증이 됐기에 이듬해 봄 두번째 앨범 활동이 끝나자마자 콘서트 일정이 잡혔다. 오늘은 그 날로부터 정확히 보름 전이었고. 첫 단독 콘서트에 멤버들 모두가 연습 삼매경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지민이 제일 열심히였다. 회사에서 준 휴가까지 반납한 채 연습 중인 것만 봐도.

 

“애들 나가서 숙소에 아무도 없을 텐데?”

“숙소에서 단둘이 있고 싶어?”

 

민정이, 그렇게 안 봤는데 기대하고 있었구나? 뭐래, 언니의 욕망 투영을 이런 곳에서 하는 거야? 그건 비밀. 말은 그렇게 하면서 기타를 정리하고 가까이 다가오는 게.

 

“민정이도 내가 제일 좋지?”

“갑자기?”

“대답해봐.”

“당연히 좋지. 안 좋을 게 어디 있어, 언니인데.”

“그런 거 말고.”

“…….”

“우리, 일본에서.”

 

그 얘기는 왜 하는 거야, 부끄럽게. 아직도 생각하면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를 정도로 180도까지는 아니어도 한 135도 정도는 돌아 있었던 그 날 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몇 달 사이에 별의별 일이 다 있어서 그 날의 이야기는 터놓고 말할 틈도 없었다. 세연이나 재서는 저희가 이미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고 민정 스스로도 잠정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나는 여전히 유효하거든.”

“…….”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네가 닿을 수 없이 높은 곳까지 올라가더라도 날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

“좋아해. 나는 네 목소리에 힘을 얻었으니까 나도 너한테 평생토록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지금이 그 타이밍이구나. 심장이 덜컹였다. 지민에게 직접적으로는 처음 듣는 말일 것이다. 멤버들끼리 애정 표현 식으로 좋아한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의미로는. 오히려 민정 쪽에서 자기를 좋아해달라고 했던 적은 딱 한 번 있었지만. 그 말에 대한 답이라면 정말 먼 길을 돌아온 말이었다.

 

“나도 그래.”

“…….”

“언니랑 만난 이후로 틈틈이 써왔던 노래들을 봤는데 온통 언니더라.”

“…….”

“드라마 찍을 때도, 다른 일을 하면서도 언니 생각밖에 안 했어. 그 덕에 촬영 내내 감정이입을 너무 잘 해서 칭찬도 받았잖아. 신인인데 감정 연기를 왜 그렇게 잘하냐고.”

“…….”

“나도 좋아해. 언니가 내 인생의 빛이고 터닝포인트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겹쳐지는 손과, 가까워지는 거리. 마치 천둥이라도 치는 것처럼 귓가를 진동하는 심장 소리. 이러다 심장이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그렇다 해도 지민과 함께라면 뭐든 좋을 거라는 미친 생각까지 드는 걸 보면. 지민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제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사이였다.

언니, 그거 알아? 나는 사실 처음부터 언니가 좋았어. 세연이 덕에 언니를 처음 봤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전부터였을지도 몰라. 매일같이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 언니를 보며 버스킹만 하던 우리가 한국에서 데뷔하고 단독 콘서트를 열 정도로 성공했을 때 언니가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 생각을 했었다? 공연하는 나도, 보러 올 언니도 감회가 새롭겠지? 하고 말이야. 언니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그때까지 나를 보러 올지 어떨지는 생각도 안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언니랑 같이 공연을 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게 됐네. 가수와 주변인도 아니고, 같은 배를 탄 팀 동료 이상으로서. 우리의 첫 콘서트는 어떨까? 나는 언니와의 다른 나날보다 그 날을 평생 안 잊어버릴 것 같아.

이 이야기는 공연자로서 그 공연장을 찾을 때 지민에게 하기로 한다. 지민을 만나기 전까지의 민정이라면 그때까지 지민과의 사이가 유효하며, 밴드가 순항할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었지만 지민은 제게 내일을, 미래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민정은 그저 밴드의 항해도 지민과의 미래도 지금 같으리라고 믿고 나아가면 되었다. 내일을 약속하고, 구름 뒤에 비치는 빛처럼 내면의 두려움을 걷어내 주는 지민의 손을 마주 잡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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