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고찰

설윤아 배진솔

 

 

 

 

 

1.

 

그 시각, 윤아는 볼펜을 굴리고 있었다. 3월 모의고사 영어영역 45번 문항만을 남겨둔 채.

몇 번을 읽어봐도 답이 헷갈렸다. 이렇게 보면 3번인데 저렇게 보면 5번 같았다. 난이도를 생각하자면 저만 헷갈려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확한 건 모든 학생들의 응시 시간이 끝난 뒤 풀릴 정답지를 대조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45문항 중 정답률이 가장 낮지 않을까. 볼펜으로 문제지의 3번과 5번을 번갈아 콕콕 찍으며 코카콜라라도 해서 답을 적어넣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눈앞에 어떠한 장면이 스친 것은.

 

그것은 마치 빔 프로젝터를 벽에 비추었을 때 출력되는 영상물 같은 풍경이었다. 매일 보는 저희 반 교실과 세부적인 부분은 달랐지만 전체적인 틀만큼은 비슷한 공간.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문제를 풀고 있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단발머리의 뒷모습. 마찬가지로 45번 문제에서 골똘하는 모양인지 하릴없이 볼펜을 딸깍이고 있었다. 굳이 정답률을 찾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 문제가 이번 영어 등급 컷을 좌지우지하겠구나. 저와 그 애뿐만이 아닌 모든 학생들의.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 애의 손이 이윽고 컴싸를 들어 5번을 찍는다.

눈을 깜빡이자 사라지는 풍경. 다시금 보이는 익숙한 제 책상 무늿결에 윤아는 결심한다. 정답은 3번이다. 볼펜을 내려놓고 컴퓨터 사인펜으로 정답을 이기하며 윤아는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확인한 3모 영어영역 45번 문제의 정답은 3번도 5번도 아닌 2번이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샜다. 이놈의 능력은 있어봤자 어디에도 쓸 데가 없었다. 꼭 2013년 겨울, 유행했던 모 아이돌의 크리스마스 캐롤 가사처럼. 이 초라한 초능력, 이젠 없었으면 좋겠어. 이곳이 현실이 아닌 SNS 공간이었다면 저의 #mood나 #menow 그 자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문장이었다.

 

 

 

 

 

2.

 

그것은 아주 갑자기 윤아를 찾아왔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몰랐다. 그냥 어느 날부터인가 자꾸만 이상한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생활이 힘들어서 헛것을 보는 건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럴 수 없음을 곧잘 알게 됐다. 그것은 환영도 무엇도 아닌, 일어나게 될 미래였다. 윤아 혹은 윤아가 아는 가까운 타인의 미래. 한두 번이야 우연이려니 넘겼지만 그런 장면들이 보이고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며 더는 무시할 수가 없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윤아의 삶이 180도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윤아는 여전히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제 능력을 알아차린 누군가가 찾아오기는커녕 능력의 존재 여부를 아는 이조차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윤아가 볼 수 있는 미래는 딱 1분이었다. 하루도, 1시간도 아닌 1분. 1분이면 컵라면이 익지도 않는다. 뚜껑을 열어봤자 라면인지 과자인지 모를 것들이 저를 반겨주겠지.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들킬 일도 없었고, 부러 제 입으로 사실을 고백할 필요도 없었다. 로또에 당첨되거나 하다못해 네잎클로버를 발견할 확률도 아닌, 땅콩을 깠더니 3개짜리 알맹이에 걸리는 일 같은 것. 견과류 알러지가 있는 제게는 그 어떠한 쓸모도 없는 능력이라는 얘기였다. 로또에 당첨될 확률이었어도 청소년인 윤아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능력인 건 마찬가지였다. 윤아의 부모님은 로또를 사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그것들이 온전히 제 미래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저의 미래가 대부분이었지만 가족이나 친구, 얼굴만 아는 누군가의 미래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중 윤아만이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상대의 미래가 보이지는 않았다. 오직 윤아와 상대 모두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경우가 범위의 최댓값이었다. 아주 가끔은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는 말처럼 유용한 것들이 보였지만 대부분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유명인 TMI보다 조금 더 나은 것들이 보였다. 가령, 편의점에서 ABC 민트초코 쿠키를 사 먹는 배진솔이라든가, 시험 시간에 오답을 체크하는 배진솔 혹은 복도를 뛰어다니다 슬라이딩을 하는 배진솔을 본… 잠깐만.

 

4반 교실은 윤아가 속한 3반보다 한 층 위에 있었다. 왜 하필. 2학년 개학식부터 숫자만 보면 옆반인데 이러면 옆반의 의미가 있냐고 툴툴거리던 진솔이 떠올랐다. 진솔이 윤아를 보러 내려올 때도, 윤아가 진솔을 보러 올라갈 때도 있었다. 어차피 1층으로 내려갈 용건이면 진솔이 내려왔지만 윤아가 올라가야 할 때도 종종 생겼다. 꼭 지금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밀어 넣고 책상과 책상 사이를 걸어 교실 문을 열고 왼쪽으로 돌아 계단을 오르고 오른쪽으로 도는 일련의 행동들이 왜 이렇게 억겁 같은지 몰랐다.

최대한 빨리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진솔은 이미 오른쪽 무릎을 붙잡고 복도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있었다. 키도 큰 애가 그러고 앉아 있으니 지나가던 애들의 시선이 진솔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방금 본 영상 그대로였다. 어떻게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하나도 빗겨나지 않는지. 진솔이 넘어지지 않았다면 어차피 조금 있다 돌아갈 교실, 의자 정도는 정리하지 말고 그냥 나올걸. 아주 때늦은 후회였다.

 

“윤아야.”

 

무릎을 붙잡고 있던 진솔이 고개를 든다. 곧바로 마주치는 시선. 진솔이 제 이름을 부른다. 표정은 아파 죽으려고 하면서 목소리만큼은 존나 해맑고 우렁찬 것이 제 앞에서 이상한 기행을 하던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당장 일어나 제게 걸어오려다 무릎을 절뚝이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그냥 서 있어. 말하며 다가가 진솔을 부축해 계단 옆 엘리베이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왜 넘어졌는데?”

“손 씻으러 가다가.”

“그게 그렇게까지 뛰어가야 할 용건이야? 화장실까지 얼마나 된다고.”

“…아.”

 

설윤아가 잔소리하니까 무릎 더 아프다. 나 이러다 못 걸으면 어떡해? 걱정해줘도 저딴 불길한 말이나 하는 게 내가 왜 얘 때문에 여기까지 올라와서 이 고생인가 싶었지만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 장면을 못 본 것도 아니고 친구가 넘어지는 걸 똑똑히 봤는데 모르는 척하는 게 어디 사람 된 도리겠는가.

온 학교가 떠나가라 넘어진 것 치고 다행히 진솔의 무릎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무릎을 소독하고 약을 발라준 뒤 반창고를 붙여주는 보건쌤과 그 짧은 응급처치 과정 하나에도 아프다며 오버액션을 하는 진솔을 보며 윤아는 생각한다. 몇 번이고 시간을 역행하더라도 제 선택은 지금과 같았을 거라고.

 

다시 능력 이야기로 돌아와서, 누군가 이것이 아예 쓸모없는 능력이냐 묻는다면 윤아는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는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아주 사소하지만 제게 유리한 미래도 종종 보였으니까. 체육 시간에 반 대항 피구를 할 때면 그렇지 않아도 잘하던 피구에서 완전히 날아다녔다. 윤아와 상대편 학생 단둘만 남았을 때 미래를 읽어 상대에게 공을 빼앗기기 전, 미리 상대를 맞추고 이겨 반 학생 모두에게 공짜 아이스크림을 쥐여준 적이 있었다. 그 외에도 맥도날드와 이삭토스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맥도날드보다 이삭토스트 줄이 짧아 손쉽게 끼니를 해결했으며, 좋아하는 아이돌 앨범을 살 때도 최애 멤버의 포토카드 풀셋을 얻기 위해 부러 오프라인 매장에서 앨범을 샀다. 비록 마지막의 경우 오로지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지는 식이었기에 100% 최애 포카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조금만 더 빨랐어도 진솔이 복도에서 슬라이딩 따위를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윤아가 보는 미래는 1분 이내의 미래였지만 확정된 미래가 아니었다. 제가 보았던 모든 미래가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을 미래였다면 모든 인과관계는 이미 정해져 있고 저는 그 운명의 수레바퀴에 순응할 수밖에 없음에 무기력해졌겠지만, 그 미래를 바꾸어도 타임 페러독스가 일어난다거나 세상이 뒤집히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선택지 같은 것. 뽑기를 했을 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지는 셈이었다. 보이는 미래가 긍정적인 것이라면 그대로 따르면 되었고, 그렇지 않다면 피해 가면 되었다. 이에 일종의 평행우주 같은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제 선택에 따라 무한히 갈라져 생성되는 평행우주. 비록 그 평행우주의 스케일이 유명 SF 창작물의 발톱 끝에도 못 미친다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3.

 

진솔과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다. 두 가구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이 2005년 초였다고 하니 윤아고 진솔이고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물론 두 사람이 온전히 서로를 인식하게 된 것은 그보다는 훨씬 더 늦은 시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최초의 기억이 존재하는 시점을 진솔과의 시작이라고 해야겠지. 그때부터 시작된 끈질긴 인연이 두 사람을 지금까지 이어주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윤아는 진솔과 함께 하굣길을 걷고 있었다. 2살 이후로 한 번도 이사를 한 적이 없었기에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14년째 함께하는 등하교였다. 윤아와 진솔 중 한 사람에게 따로 일정이 없지 않은 한 최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비슷한 일상이 이어지지 않을까. 진솔과 대학교까지 같은 곳으로 가게 된다면 그 이후에도. 아니다, 이건 차차 생각하도록 하자.

대화의 주도권은 진솔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윤아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말을 하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편한 진솔과 말을 들어주는 것이 편한 윤아. 상반된 두 사람의 특성이 오히려 둘을 지금까지 친구로 묶어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 진솔 또한 윤아의 적당한 리액션에 가장 만족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진솔과 함께 집에 도착해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윤아는 왼쪽 진솔은 오른쪽 현관문을 열고 헤어져 씻고 잠드는 보통 날이 이어질 줄만 알았다.

 

눈앞에 어떠한 장면이 스치기 전까지는.

 

걸음이 멈췄다. 멈춘 곳이 횡단보도 앞이었기에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잘못 본 건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보이는 장면은 아까와 같았다. 현실과 미래의 배경이 하나로 겹친다. 눈앞에는 횡단보도가, 길 건너에는 윤아와 진솔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있다. 언제나와 같은, 눈을 감고도 묘사할 수 있는 동네의 풍경. 그러나 그 풍경에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빨갛게 점멸하던 불이 흐려지고, 흐리던 초록빛이 선명해진다. 당연한 듯 발을 떼어 길을 건너려는 진솔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설윤아, 왜 이래? 묻는 목소리와 함께 저를 이상한 듯 내려다보는 진솔의 시선이 꽂힌다. 불도 바뀌었고 차도 안 오는데 왜 사람을 못 건너게 해? 시선 속에서 진솔이 하려는 말이 역력히 읽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파트 앞 횡단보도는 다른 곳에 비해 신호대기 시간이 길었다. 이 신호를 놓치면 몇 분이고 더 기다려야 함을 저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윤아에게는 이 모든 것을 진솔에게 이해시킬 경황이 없었다. 저 멀리서 쏜살같이 달려오는 덤프트럭 한 대가 보였으니까.

브레이크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미친 듯이 질주하던 트럭이 횡단보도의 흰 선을 밟는다. 밟고도 한참이나 더 미끄러지듯 주행하다 저 멀리 정지된 차 뒤에서야 겨우 멈추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속도와 제동거리 때문에 도로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만약에 제가 미래를 보지 못했다면? 진솔이 저를 무시하고 발을 내디뎠다면? 이 모든 가정이 윤아의 기분을 아연히 만들었다. 매일 쓸데없다고 자조했던 능력이 저와 진솔을 살린 셈이었다.

 

그 순간, 느슨해진 긴장에 다리가 풀렸다. 진솔을 잡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진솔 또한 방금 지나간 트럭 때문에 놀란 눈치인지 마찬가지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놀라 뒤로 넘어가려는 진솔을 잡으려고 했는데 역으로 진솔의 위로 엎어졌다. 평소였다면 길 한 가운데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배진솔 무릎 괜찮나? 저번에 넘어진 무릎에 별 이상이 없는 걸 보건실에서 직접 보고도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별 문제 없겠지.

그러나 본디 문제란 전혀 생각지 않은 곳에서 발생한다.

 

“…….”

“…….”

 

윤아는 다른 의미로 아연한 현실을 마주한다. 진솔을 깔고 엎드려 있는 자신과, 제 코에 닿는 타인의 숨, 그리고 입 앞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입술의 감촉, 그리고.

미쳤나봐, 바닥에 손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말도 안 나왔다. 그건 진솔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뭐지. 하마터면 일어날 뻔한 사고 때문인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희에게 무슨 말을 묻는 것이 들렸지만 뭐라고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도 곧장 저희가 사고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걸 눈치채고는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사이 신호가 바뀌고 마찬가지로 기다리고 있던 오며 가며 몇 번 본 적 있는 대학생 이웃 언니 두 명이 윤아와 진솔을 따로 부축했다.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같은 동 사람이니 특별히 집을 가르쳐 줄 필요도 없어 잠자코 따라 걸었다. 감사합니다. 빠져나가는 정신 사이에서 저들보다 아래층에 살기에 먼저 내리는 둘에게 이 정도라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엘리베이터가 뱉어낸 층에서 내려 양쪽 집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윤아뿐만이 아닌 진솔 역시도 계속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일단 진솔과 떨어져야만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할 것 같았다. 모든 생각은 수용성이니까 씻으면 가라앉겠지. 생각하며 윤아는 제 집 현관문을 열었다.

 

 

 

 

 

4.

 

무슨 정신으로 씻고 침대에 누웠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몸에 물이 닿으니 조금 전보다야 정신이 들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천천히 숨을 고르며 타임라인을 하나씩 정리해보기로 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눈을 깜빡였을 때 보였던 장면.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고 당연한 것처럼 먼저 건너던 진솔과 진솔을 향해 달려오던 덤프트럭의 잔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윤아가 진솔을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잡아당겼어도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절대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눈앞에서 진솔이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렸다. 진솔을 잡아당긴 것은 백 번이고 잘한 행동이 맞았다.

문제가 있다면 윤아가 본 것이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점일까. 진솔을 인도 쪽으로 잡아당겼을 때 윤아는 그 모든 미래를 봤다. 평소에는 존나 짧은 1분 뒤가 그때는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을까. 어디까지나 기분 탓임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걸 모두 보고도 수습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 윤아를 괴롭게 했다.

 

단순한 입맞춤이었다면 덜 충격적이었을까. 뽀뽀야 유치원 때 이미 한 적이 있으니까. 생일이 연말과 연초에 몰려 있는지라 2월경 늦은 생일파티를 할 때 남자애와 뽀뽀를 하기 싫다는 일념으로 서로와 뽀뽀를 한 과거는 사진으로 인화되어 집안 창고 사진첩 한켠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물론 제 손으로 그 사진을 꺼내본 일은 한 번도 없다. 다른 사진을 찾기 위해 앨범을 열다가 그 사진을 발견하더라도 이게 무슨 가족끼리 왜 이래냐고 기겁하며 페이지를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진솔과 한 것은 그 당시의 풋풋하고 귀여운 뽀뽀 따위가 아니었다. 진솔에게는 비염이 있었다. 그 때문에 모르는 사이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을 종종 목격하고는 했다. 주위에서 숨은 코로 쉬는 거라는 말을 들을 때면 비염이 없는 사람은 이런 제 고통을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연설하던 진솔의 푸념 또한 여러 차례 들은 바 있었다. 비염이 없는 윤아로서는 들어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비염 때문에 살짝 벌려진 진솔의 입술 사이로 윤아의 혀가 스쳤다. 당연히 입술 사이를 가르고 혀가 들어가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스쳤다는 것 하나로도 그것은 단순한 접촉사고 이상의 스케일로 윤아를 괴롭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친구를 교통사고에 휘말리게 하는 것과 교통사고에 휘말릴 뻔한 친구를 말리다 정신줄을 놓고 그 친구와 키스하는 것. 두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였다. 그 최선의 선택지 때문에 끝없는 고뇌에 빠져야 할지라도. 진솔, 아니 그 누구였더라도 저와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였다. 당장은 괴롭더라도 서로가 이 모든 일이 고의가 아닌 우연임을 알고 있으니까 친구와 키스를 했다고 하여 앞으로의 사이가 소원해질 일은 없었다.

 

문득 진솔의 입술 감촉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적당히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게 나쁘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미쳤다. 진짜 미쳤다는 말 말고는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설윤아 네가 진짜 미친 거지. 그랬다. 문제는 윤아에게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네가 누굴 안 만나서 이러는 거지, 끝없이 중얼거렸지만 그럴수록 진솔이 윤아의 머릿속을 더 채웠다. 진솔의 얼굴, 숨결, 입술, 그 모든 것들이.

그러다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했던 생각. 그런데 왜 하필 제일 많이 보이는 게 배진솔일까. 타인의 미래가 보였을 때 가족들이나 다른 친구들의 미래도 보였지만 자신의 미래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것이 진솔이었다. 당시에는 제일 친한 친구라서? 정도로 갈무리했던 생각이지만. 내가 설마 배진솔을? 배진솔은 내 친구인데? 어쩌면 설마 그때부터. 그때부터 조, 좋, 좋아했던 거라고? 말도 안 돼. 생각하면서도, 침대를 구르며 설콩이를 퍽퍽 때리다 설콩이는 무슨 죄인데 애꿎은 제 주먹을 맞고 있나 싶어 내려놓으면서도 윤아는 느꼈다. 왜 그렇게 많고 많은 미래 중 진솔의 미래를 봤던 비중이 가장 컸던 이유.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아주 본능적인 감각. 내가, 설윤아가 배진솔을. 미래를 보게 된 이래 실로 가장 커다란 나비효과였다. 나비의 날갯짓이 너무나 강렬하여 멈출 수조차 없는.

 

 

 

 

 

5.

 

5월이었다. 중간고사도 끝이 났고 날씨도 쾌청한 게 당장이라도 학교를 째고 어디라도 놀러 나가고 싶은 계절. 멀리 갈 필요 없이 학교 뒷산으로라도 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진솔과 함께 점심을 먹고 운동장이나 돌고 있었다. 운동장도 햇볕이 잘 내리쬐니 회전초밥처럼 그냥 돌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지만 어딘가 몇 % 부족한 것이.

진솔과 눈이 마주친다. 나가자. 움직이는 진솔의 입모양. OK 싸인을 해 보이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편으로 걸어가 담을 넘었다. 몇 번이고 스탬프를 다 채워 할인을 받아먹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단골인 학교 주변 프렌차이즈 카페를 향해.

카페에 도착해 각자의 음료수를 주문하고 여기에 담아 주세요, 담을 넘으면서도 다행히 아무런 손상이 없는 다회용 텀블러를 내밀었다.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위기를 조금이라도 대비하고자 구매한 텀블러였다. 이걸 사서 몇 번이나 쓰려나, 기껏 사서 방치하는 게 더 환경오염이 아닌가? 고민했지만 다행히 그 고민이 무색하게 이제는 거의 외출 필수품이 된. 문제가 있다면 저를 따라 들고 다니기 시작한 진솔의 텀블러가 디자인과 색상은 당연하고 구매처까지 완전히 겹친다는 점이려나. 진솔은 제가 산 게 아니라 우리 집에 돌아다니는 걸 집어 온 거니까 네가 따라 산 거라고 주장했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뭐든 상극이더니 이럴 때만 맞는 것이 참, 좋은 일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누가 보면 제 것인지 진솔의 것인지 알 수 없을 텀블러를 각자 받아들고 나왔던 길을 거슬러 들어가면서도 윤아는 그 날의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진솔 앞에서는 최대한 평소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그 날 이후로 줄곧 그랬다. 진솔이 좋은 건 숱한 부정 끝에 인정했지만 저와 진솔의 사이가 좋다고 해서 보통의 학원물 창작물 클리셰처럼 고백을 할 수 있는 사이인가, 묻는다면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진솔과는 가족만큼이나 오래 본 사이였다. 그런 진솔에게 고백을 하고 설사 진솔 또한 같은 마음이라서 사귄다고 해도 그 관계가 평생을 갈까? 생각하면 절로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됐다. 괜히 사귀다가 친구 한 명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물론 지금처럼 쭉 친구로 지내더라도 똑같이 후회하겠지. 그렇지만 그 마음 또한 극악의 확률을 뚫고 사귀게 된 이후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평생을 가지는 않을 테니 지금처럼 지내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모름지기 인생은 안전빵이었다.

 

“야, 설윤아 음료수!”

“뭐?”

 

안전빵은 무슨. 담을 넘으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못하다 하마터면 텀블러를 쏟을 뻔했다. 다행히 먼저 담을 넘은 진솔 덕에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휴, 숨을 고르며 진솔의 손에서 제 손으로 넘어온 텀블러를 받아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음료수를 놓쳐? 설윤아답지 않게. 라는 말과 함께. 내가 얘한테 이런 소리까지 듣는다고? 평소와는 180도 바뀐 역할에 괴로워져서 음료수를 한 번 빨아 마셨다. 역시 이 카페의 베스트 메뉴는 뭐니뭐니 해도 망고요구르트였다. 단전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에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운동장으로 돌아와 걷는 대신 진솔과 함께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았다. 웬일로 이 자리가 비어 있대? 그러게. 그래도 개인 자리도 아니고 비어 있으면 우리 자리지. 대화를 주고받으며. 벤치 근처에 심긴 나무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1년 내내 이런 날씨면 얼마나 좋아. 꼭 평소에 호감이 있거나 최소 불호는 아닌 사람이 고백을 한다면 기분 좋게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씨.

그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인지 흙인지 모를 것이 날아오기에 텀블러를 벤치에 내려놓고 다른 쪽 팔로 눈 앞을 가렸다. 누구라도 했을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 어떤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려진 눈앞으로 다시금 어떠한 장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전 바람결에 흔들리던 사철나무 앞. 배진솔과 올해 입학하자마자 외모로 난리가 났다는 1학년 한 명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작년의 윤아가 그랬듯이. 주위에서 그 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반 애들을 볼 때마다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끼고는 했다. 진솔도 그 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귀엽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듯이 몇 번 했던 것도 같은데 당시에는 별로 중요한 화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진솔 선배.’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그 애가 진솔의 이름을 부른다. 조금 전 스치듯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에이, 설마.

 

‘입학식 때부터 좋아했어요.’

‘…….’

‘저랑 사귀어주세요.’

 

What The…!

 

눈을 떴다. 아직 1학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1분. 1분 안에 배진솔을 데리고 자리를 떠야 했다. 어떻게 해야 배진솔을 그 애와 못 만나게 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는 벌써부터 하얀 드레스를 똑같이 맞춰 입고 버진로드를 걸어가는 진솔과 1학년의 영상이 실시간으로 플레이되고 있었다. 하객석에서 박수나 치고 있을 저의 미래 또한 절로 그려졌다. 지금이야 100% 제 망상이었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제가 미래를 보게 된 것처럼. 그 미래 때문에 진솔을 좋아하게 되어버린 지금처럼. 그러니까 절대 둘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됐다. 좋아한다는 입모양을 보자마자 눈을 뜨는 바람에 진솔이 받아줬는지 거절했는지도 미처 보지 못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 윤아야. 진정하자. 이러다가는 시간만 흘러. 일단 음료수를 마시자. 단 게 들어가면 두뇌 회전이 잘 되니까. 오른손에 집히는 텀블러가 누구의 텀블러인지도 모른 채 들어 입에 빨대를 가져다 댔다. 이제 입안으로 망고요구르트 맛이 들어오고 해결책이 떠오를…

…….

진솔이 윤아를 잡아끌었다. 본관 1층 가장 구석 화장실을 향해. 숨이 찼다. 입안에 든 음식물을 넘기지 않기 위해 애쓰며 달리는 것이 힘에 부쳤지만 이걸 넘겼을 때 겪어야 할 고통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화장실 제일 첫번째 칸으로 떠밀리듯 들어와 문을 잠글 겨를도 없이 변기 뚜껑을 열고 입안에 든 음식물을 뱉어냈다. 정확히는 음식물보다는 액체와 그 사이에 드문드문 섞여 있는 건더기 조각 같은 것을.

 

“괜찮아?”

 

변기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와 세면대 수도꼭지를 올려 비누칠과 함께 손을 씻고 양손으로 물을 받아 입안을 헹궈내고 있자면 뒤에서 줄곧 저를 지켜보고 있던 진솔이 말을 건넨다. 얼굴 보니까 뭐가 올라오지는 않는 것 같은데. 휴지를 뽑아 손을 닦던 제 몸 이곳저곳을 살핀다. 다른 의미로 온몸이 붉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지금 나가서 새 걸로 다시 사줄까?”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고.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줘.”

 

진솔이 손에 들려 있던 텀블러에 든 액체를 빨대로 빨아당긴다. 조금 전 누구의 입술이 닿았는지 따위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헹구고 먹지,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말해봤자 얄짤도 없을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진솔이 제 손에 쥐여준 망고요구르트나 마셨다. 조금 전 입안에 들어왔던 피스타치오 밀크티 맛 따위는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망고 향을 깊게 음미하면서.

 

“그래서 왜 먹지도 못할 내 음료수를 마시셨어요 설윤아 씨? 하마터면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 알러지가 얼마나 무서운데.”

“네 텀블러랑 내 텀블러가 헷갈려서.”

 

완전히 똑같잖아. 전에도 말했지만 배진솔 왜 내 텀블러 따라 샀는데? 님이 따라 산 건 아니고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척 옥신각신하며 다시 운동장으로 걸어 나오면서 윤아는 진솔이 이렇게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견과류 알러지도 전혀 틀린 말도 아니었고, 어떻게 보면 그쪽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지만. 그걸 어떻게 솔직하게 말하겠어. 차라리 한 번 더 키스하고 절연을 하고 말지. 간접 키스도 키스라면 이미 해버리긴 했지만.

 

 

 

 

 

6.

 

이제는 정말로 진지하게 진솔과의 미래를 고찰해야 할 때가 왔다, 고 생각했다.

고백을 해서 차이든가, 낮은 확률로 승낙을 받고 몇 년 혹은 몇 달 어쩌면 몇 주를 사귀고 헤어져서 17년간의 친구 관계까지 없었던 것으로 무르든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친구로 지내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진솔을 보며 축하해주고 유효기간이 얼마일지도 모르는 마음을 서서히 접든가. 세 가지 선택지가 윤아의 앞에 놓여 있었다. 셋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마지막 선택지를 뽑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생각해왔다. 그 선택지를 고를 때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드는 잡념도 사그라들었으니까. 어차피 가능하지 않다면 포기하는 것이 옳았으니 한 번도 세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한 적이 없었는데, 마지막 선택지의 절망편을 목도할 뻔하고 직접 키스에 이어 간접 키스까지 하고 나니 이제는 그냥 자포자기식의 생각밖에 안 떠올랐다. 차이거나 이후의 관계가 파탄난다고 해도 한 번이라도 고백을 해봐야겠다고.

자의적으로는 절대로 하지 않을, 예나 선정이 딸이에요 쇼를 선보이고, 진솔과 함께 화장실로 피신을 온 덕에 간발의 차로 바꾼 미래를 떠올리자면 비슷한 생각을 할 때면 결론짓고는 했던, 그래도 남자보다야 여자가 낫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남자고 여자고 논바이너리고 할 거 없이 진솔 옆에 누가 있을 생각만 해도 마음속에 불길이 일었다. 핵불닭볶음면이고 불족발이고 뭐고 먹을 필요도 없었다. 이 정도의 화기라면 다들 그렇다고 오해하지만 절대로 눈 설 자를 사용하지 않는 제 성씨 본관 지역에서 생산하는 고추장도 셀프로 담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때문에 진솔과 엇갈린 1학년이 진솔에게 다시 다가갔는지 윤아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직접 본 적이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진솔이 이제껏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고 수차례 보려 시도했던 미래에서도 진솔이 그 애와 만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긴 겨우 1분 후 그것도 대상을 멋대로 지정할 수도 없는 미래만 보여주는 능력에 무엇을 바라겠냐만.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남용하지 않으려던 능력을 평소보다 더 자주 사용하다 보니 오히려 평소에는 없던 두통까지 생겼다. SF 창작물 속 숱한 선례가 괜히 있던 게 아닌 셈이다. 어린 시절 방영했던, 그 희대의 막장성이 지금까지도 꿇릴 데가 없는 거로 유명하다는 사랑과 전쟁도 방송이 끝날 때마다 왜 저희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드냐는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하지 않던가. 뭐든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다. 그 덕에 별거 아닌 걸로 진솔과 한 차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그날 밤 바로 진솔에게 제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런 것 같다고 사과했고 진솔 또한 그럴 수도 있다고 흔쾌히 사과를 받아주어 다른 이유로 절연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래를 보게 할 거면 좀 제대로 된 미래나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누군지 모를 대상자를 향한 원망이 자꾸만 솟았다.

 

그래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제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모름지기 고백을 하려면 그에 맞는 절차가 필요한 법이다. 아무리 봐온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긴 친구라고 할지라도. 진심이 있다면 어떠한 준비 공세 없이 언행만으로 그 마음이 전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진솔에게 그 정도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진솔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메모해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벌써부터 날이 더웠다. 앞으로 얼마나 더 더워질까. 커플 용품이고 간접 키스고 뭐고 텀블러를 산 건 정말로 잘한 일이다. 앞으로도 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사용할 예정이었다. 오늘도 혹시 몰라 깨끗이 씻어 가방에 넣어 둔 텀블러를 떠올렸다. 최대한 몰려오는 간접 키스 생각을 갈무리하려 노력한 채. 그러나 하필 또 멈춘 횡단보도가 그 횡단보도였다. 매일같이 건너는 횡단보도인데 왜 하필 지금 그 생각이 드는 건지. 다시금 괴로워졌지만 그 괴로움 때문에 온종일 잠만 자야 할 주말에 나온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였다.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도착한 카카오프렌즈 샵에서 선물을 골랐다. 인터넷으로 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 사고 싶었다. 이 날씨에 여기까지 와서 이걸 포장하는 걸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몇 달째 춘식이 노래를 부르던 진솔이라면 분명히 좋아할 것이었다. 폰케이스에 키링에 부족해 인형까지 노리다가도 용돈이 부족해 나중에 사겠노라 벼르던 진솔을 몇 번을 봐왔던가. 더워지고 있어도 아직 장마철은 아니니까 날씨도 OK. 이제 이걸 들고 집으로 돌아가서 단지 뒤 산책로로 진솔을 불러 고백과 함께 인형을 안겨준다면 성공이었다. 거절하려고 해도 품에 맞게 들어오는 부피에 정신이 팔려 한 번은 그 거절을 보류시킬 수 있는 일타쌍피의 플랜까지 커버가 가능한 최고의 선물. 끼고 있는 무선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 또한 이런 제 계획의 청신호를 알리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고백이 실패하더라도 아주 절망적인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

 

안고 있던 60cm짜리 춘식이 인형을 벤치에 내려놓고 더 살 게 있는지 메모 앱을 뒤적이다 고개를 들었는데 보이는 향수 가게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쟤가 저긴 왜? 아줌마 아저씨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인가? 친구 부모님의 기념일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 막연히 추측 정도나 했다. 그냥 다른 볼일로 지나가다가 향수가 신기해서 들렸을 수도 있었다. 그 이유가 뭐든 아직은 진솔을 마주칠 때가 아니었다. 시내 한복판에서 고백을 할 용기는 없었다. 한다고 해도 이렇게 인파가 많은 곳이라면 틱톡이나 유튜브 같은 곳에 저와 진솔이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박제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순간, 다시금 진솔 위로 새로운 영상이 덧씌워진다.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진솔과 정성스럽게 선물을 포장 중인 직원이 보였다. 단순 구경이나 스스로 뿌릴 향수를 산다는 선택지가 지워진다. 부모님 선물이라는 선택지 또한 함께 소거된다. 포장지나 향수나 하나같이 40대 후반을 겨냥했다고 하기에는 꽤 파격적이다. 오히려 제 나잇대나 조금 윗세대면 몰라도. 대상자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설마, 그때 그 1학년과 결국은 부딪힌 거냐는 불길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혹은 윤아가 모르는 또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친구라면서 이에 대해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 진솔이 야속해진다. 이미 친구를 능가해버린 제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러고 보면 요즘 따라 할 일이 있다고 혼자 집에 가겠다는 연락을 몇 번 받았던 것 같기도. 얼마 전 다투었던 것에도 그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포장물을 위로 올려 시야를 가렸다. 진솔과 마주치기 전에 자리를 떠야 했다. 메모장에 적어둔 플랜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오늘은 그냥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게 최선이었다. 내가 먼저 고백하려 했는데. 쟤는 누구한테 고백하려는 거야. 신나서 남에게 줄 향수를 포장 중인 애에게 고백을 할 용기 따위 제게는 없었다. 춘식이는 나중에 진솔에게 생일 선물로 주거나 설콩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거나 당근마켓에 파는 방향으로 순회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음이 너무나 허했다.

 

 

 

 

 

7.

 

“배진솔아.”

“엉?”

“아니야, 아무것도.”

“뭔데. 말을 해봐.”

“그냥.”

“…….”

 

답답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하려 몇 번이나 달싹이던 진솔의 입이 다물린다. 며칠 내내 이런 식이었다. 저번 주 토요일에 포장했던 향수 누구 주려고 산 거야? 적어도 올해 3월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진솔 또한 전혀 개의치 않으며 대답을 해줄 것이었다. 내가 향수 사러 나간 건 어떻게 알았어? 되물어본다면 나도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지나가다 봤다고 대답을 하면 됐고, 그러면 진솔 쪽에서도 그럼 나 부르지 아쉬운 듯 답하고 자연스럽게 향수의 수취인 이야기를 몇 차례 주고받다가 이야기의 주제를 다른 곳으로 넘기면 됐다. 윤아에게 진솔이 오직 친구였다면. 진솔은 몰라도 윤아는 이제 더 이상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깊고 넓은 강을 건너고 말았다. 제 방구석에 놓인 선물꾸러미가 떠올랐다. 그래, 이번 주말에는 그것도 팔아야지. 12월이면 진솔도 이미 똑같은 인형을 샀거나 질리고도 남을 시기였다. 구질구질하게 12월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누구에게라도 판다면 넘어간 인형처럼 제 마음 또한 저를 떠날 터였다.

오늘도 결국은 물어보지 못했다. 물어볼 수는 있을까. 그 전에 진솔 옆에 누군가가 생기는 건 아닐까. 능력이 보여주는 미래는 여전히 비슷했다. 그나마 건진 거라고 해봤자 얼마 전 컴백한 아이돌 대면 팬싸인회 당첨 명단을 1분 일찍 열람한 정도? 굳이 창을 열지 않아도 눈앞을 스치는 설*아 0126에 이건 미래가 아니라 그냥 스포일러 아니야? 싶었다. 실제로 영화를 보다가 중요한 장면에서 1분 뒤 장면을 미리 봐서 김이 샌 경험을 몇 차례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최애 언니와의 영접은 진솔에 대한 생각과 팬싸 응모에 부족해 미공포를 사 모으느라 바닥난 통장 잔고 따위는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지만. 심지어 이번 팬싸에서는 최애 언니가 저를 알아봤다. 설씨라면 기본 한 번은 듣는 성씨가 너무 예쁘다는 말도 최애 언니 입에서 나오니 희귀 성씨에 대한 기만이 아닌 축복처럼 느껴졌다. 아, 행복했다. 집에 와서도 몇 번이고 제 이름을 부르는 최애 언니의 음성을 돌려 들었는지 몰랐다. 물론 그 이후에는 팬싸고 뭐고 지를 돈이 없어 다른 팬들의 후기나 보며 마음속으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시샘하기를 반복해야 했지만. 청소년인 저로서는 활동 당 한 번 응모하는 것이 최대였다. 대학교 올라가면 알바 뛰어서 열심히 다녀야지, 생각하면서도 책상에 앉는 대신 침대에 누워 휴대폰이나 만지고 있었다. 6월에 있을 모의고사고 기말고사고 뭐고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진솔과 같은 대학교에 갈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쌓이는 고민들에 괴로워졌다. 미래님, 조금 더 먼 미래는 보여줄 수 없나요. 대학은 갈 수 있는 건지, 배진솔이랑은 어떻게 되는 건지 같은 것들.

 

- 지금 뭐 해

 

그 순간 진솔에게 카톡이 왔다. 전화도 아니고 카톡. 평소에는 전화를 선호하는 윤아였지만 지금만큼은 전화가 아닌 카톡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왜?]

- 놀이터 앞으로 나올 수 있어?

 

뭐지, 갑자기? 싶었지만 딱히 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라서 간단히 양치를 한 후 외출복으로 환복하고 집을 나섰다. 놀이터라면 계획대로였으면 제가 진솔에게 고백했을 산책로 근처였다.

놀이터로 들어서니 누가 미취학 아동이고 청소년인지 모를 정도로 띠동갑을 능가하는 동네 애들과 어울려 놀고는 했던 평소와는 달리 얌전히 서 있는 진솔이 저를 반긴다. 손에는 예의 그 향수 포장을 든 채로.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놀이터를 종횡무진하는 아이들에게서 평소보다 텐션이 한 단계는 낮아 보이는 진솔로 시선을 옮기며 산책로로 갈까? 말을 꺼내자면, 그러자, 대답하며 저를 따라 걷는 진솔. 저번 주에 샀던 향수 주인에게 차인 걸까. 어쩌면 고백을 준비하기 위해 저를 불렀을지도 몰랐다. 놀이터를 벗어나 산책로를 걸으며 윤아는 진솔의 눈치를 살폈다. 용건이 뭐든 진솔이 입을 떼기 전에 제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봤자 별로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미래를 읽지 않아도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려 한 번 확인해야 했지만. 좋아하는 아이돌의 막방 기념 단체 유튜브 알림이었다.

 

“윤아야.”

 

나중에 봐야겠다, 생각하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멈춰 선 진솔이 제 이름을 부른다. 여전히 조금은 가라앉아 있는 얼굴. 저런 얼굴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생소한. 손에 땀이 찼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내가 생각을 조금, 아니 많이 해봤는데.”

“…….”

“나 더 이상 너랑 친구 못할 것 같아.”

 

저게 무슨 말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진솔이 윤아의 앞으로 무언가를 내민다. 저번 주에 봤던 포장된 선물.

 

“저번에 나 사고 날 뻔했을 때. 네가 나 구해줬을 때부터 네가 좋아졌어.”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귀는 외부의 파장을 소리로 변환하는 기관이니 파장을 인식한 뇌를 의심해야 하는 게 맞을지도. 진솔 몰래 제 팔을 꼬집어 봤다. 몰려오는 통증. 꿈이 아니었다.

 

“그 전부터 그랬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네가 자꾸 나타나니까.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럴 때마다 늘 네가 내 곁을 지켜주고 있더라.”

“…….”

“너는 그냥 친구로서 한 일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는 내가 너무 징그럽고 싫었는데.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더라고.”

“…….”

“좋아해. 우리 같은 마음 맞지?”

 

정신을 차리면 여긴 산책로가 아니라 제 방 침대 위고 널브러진 휴대폰을 들어 시계를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꿈도, 환청도 아닌 현실이었다. 저를 좋아한다고 먼저 말하는 배진솔이라니. 모든 문장이 대국민 깜짝카메라 같았다. 심지어 같은 마음이냐고 물어보는 진솔의 얼굴에는 저에게도 없는 확신까지 흘러넘쳤다. 울렁이기 시작하는 마음을 최대한 다독이며 입을 뗐다.

 

“언제부터 알았는데?”

“네가 나랑 횡단보도 앞에서 키스하고 나서부터? 그 전부터 긴가민가했는데 그 날 나보다 더 정신 빠진 너 보면서 생각했지. 일단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깨달으니까 다 보이더라고.”

 

지난 시간 동안 해온 삽질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아니, 그러면 나는 내가 배진솔을 좋아했던 걸 깨닫기 전부터 쟤를 좋아했다는 게 밖으로 티났다는 거 아니야. 정말 저고 진솔이고 너무 멀리 돌아왔다. 진솔이 저를 기다리는 동안 제 쪽에서 조금 더 일찍 용기를 냈다면 이 순간이 더 빨리 찾아왔을까?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진솔이 저를 좋아한 것부터가 능력의 나비효과가 아니었던가. 정신이 없다 보니 보려고 하지 않던 미래가 다시금 제 눈앞을 스친다. 진행 중인 라방에서 최애 언니가 차애 언니에게 뽀뽀를 하고 있었다. 앞뒤 맥락은 알 수 없었지만. 여러 의미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키스해도 돼?”

“…….”

“이제 우리 사귈 건데 그 날 했던 걸 첫키스로 남겨둘 수는 없잖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몰랐다. 시선이 자꾸만 진솔의 입술만을 좇고 있었다. 이럴 때까지 최애 손민수를 하다못해 응용 중인 스스로가 너무나 웃겼지만 이것조차 미래가 보여주는 일종의 계시 같았다. 난생 처음으로 보인 최애 언니의 미래에 저를 이 얼굴로 낳아준 엄마와 설씨 성을 물려준 아빠에게 감사하며 흥분해야 했지만 이건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자.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인생의 중대사가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습관적으로 양치질을 하고 나온 과거의 자신을 몇 번이고 칭찬해주고 싶었다. 고개를 살짝 들고 진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평소에는 활달하다가도 누가 저를 띄워주면 조용해지는 성미답게 눈동자만 굴리는 진솔의 얼굴이 바로 제 앞에 있었다. 입술이 맞닿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혀를 섞는 내내 나비 수십 마리가 제 주위를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윤아의 삶을 부채질했던 수십 마리의 나비효과들. 그것들이 형체가 되어 저와 진솔을 축복하고 있었다.

 

 

 

 

 

8.

 

진솔에게 역으로 고백을 듣고 제 쪽에서 키스를 한 그 날. 진솔과 한참을 걸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와 행복한 상상 속에서 잠자리에 들어 깨어난 이래로 윤아의 능력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눈에 뭐가 끼이기라도 한 것처럼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떠보아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생긴 것도 갑자기더니 없어지는 것도 갑자기였다. 맨날 쓸데없는 능력이라고 욕했었는데 뭐든 사라져야 알게 된다고 이 능력을 요긴하게 써먹었던 날들이 떠올라 아쉬움의 입맛을 다셔야 했다. 사실 이제는 마냥 쓸데없다고도 매도할 수가 없었다. 능력이 아니었다면 진솔과 이런 관계가 될 거라는 상상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평생 모르다가 아주 늦게서야 깨닫고 침울해졌겠지. 본디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 사이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안 보여.”

“뭐가 안 보이는데?”

 

그렇지만 미래를 보기 위해 하릴없이 눈을 굴리고 깜빡이는 습관만큼은 당분간은 없어지지 않을지도. 진솔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 기간을 넘어간다면 없어지려나. 품에 춘식이 인형을 껴안고 몇 번인지 모를 귀엽다거나 행복하다는 감탄사를 내뱉던 진솔이 고개를 든다. 아니야. 아무것도.

 

“내가 준 향수는 뿌리고 다녀?”

“너랑 데이트할 때 뿌리려고. 향 좋더라.”

 

춘식이를 만지작거리던 진솔의 행동이 멈추는가 싶더니 인형을 들어 달아올랐을 얼굴을 가린다. 얼굴을 가린다고 모를 줄 아는지.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뻔히 읽혔다. 귀엽네. 이제는 이런 생각을 해도 딱히 자학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해도 되는 사이였다. 입 밖으로 내는 건 아직 더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진솔아.”

“어?”

“내가 며칠 전에 꿈을 꿨거든.”

 

그러다 문득 떠올리게 되는 것. 진솔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풀었다. 사소한 것은 빼고 커다란 부분만.

 

“꿈은 무의식의 발현 아니야? 윤아 네가 그런 생각도 하고 의외다.”

“말 돌리지 말고.”

 

말과 함께 침대에 내려놓은 춘식이의 앞발인지 팔인지 모를 부분을 들어 진솔을 퍽퍽 쳤다. 당연히 아주 약하게. 그러니 우리 춘식이한테 이상한 거 시키지 마, 하며 다시금 제 무릎에 춘식이를 올려놓는다. 우리 춘식이 많이 아팠쪄요? 하는 주접은 덤. 고백할 때는 저 인형만한 선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보면 제가 낳은 것처럼 떨어뜨리려 하지 않는 걸 보니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나도 그냥 배진솔처럼 향수 같은 걸 샀어야 했는데. 과거의 제가 들었다면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도 남을 생각과 함께.

 

“이루어졌으니까 없어진 거 아니야?”

“…….”

“애초에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두 사람이 이루어지기 위한 빌드업인 거지. 결국 사귀었으니까 목적을 이룬 거고. 그에 따라 쓰임새를 잃은 능력은 자연스럽게 소멸된 거야.”

“…….”

“SF 영화 같은 데 보면 평행우주 같은 게 있잖아? 무한의 평행우주 너머 다른 세계 중 어디에서도 그 둘이 사귄 세계는 하나도 없는 거지. 비과학적인 이야기지만 그 사람들의 염원이 주인공들에게 닿았을 수도 있고 능력 자체가 한 세계에만 예외로 생겨서 변수가 될 수도 있고.”

“…….”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N이니까 하는 상상의 나래지. 그런데 이거 진짜 네 꿈 맞아? 설마 우리 얘기는 아닐 거고. 등단하는 거야?”

“야!”

 

웬일로 평소답지 않게 진지하게 가설을 늘어놓다가 정곡까지 찌르더니 끝에 가서는 또 산통을 깬다. 배진솔에게 진중함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겉으로는 진솔과 투덕거리면서도 윤아는 진솔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과연 그런 걸까. 정말로 평행우주 너머의 수많은 설윤아와 배진솔 중 이루어진 경우가 단 한 차례도 없었을까? 그래서 이루어지지 못한 세계의 염원들이 이곳에 닿아 제게 그런 능력이 생겼던 걸까. 아니었으면 좋겠다. 미래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닌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세계니까. 그 세계의 문을 여는 것은 오로지 제 손에 달린 것. 제가 그랬고, 진솔이 그랬던 것처럼. 평행우주라는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 때문에 제게 그런 능력이 생겼던 거라면. 모든 세계의 설윤아와 배진솔에게 이 마음이 닿기를 윤아는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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