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은 죽었다

김지우 배진솔 오해원

 

 

 

 

 

1.

 

그런 말이 있다. 오리는 태어나서 가장 처음 본 존재를 양육자로 생각한다고.

혹시 그 언니도 제게 그런 존재였을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워낙 오랫동안 봐 온 언니니까, 당연한 듯 좋아하게 된 거라고. 더 넓은 세상 밖으로 나간다면 그 언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사람을 만나 그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2.

 

지우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평생 어린이로만 존재할 수는 없을까. 하루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친구들의 말을 공감할 수가 없었다. 어른은 책임져야 할 것이 많으니까 최대한 그 책임을 미루고 싶다고, 점점 커지는 숫자에 짓눌리고 싶지 않다고.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했던 이야기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돌려 말했지만 애가 괜히 겉멋만 들어서 어른 같은 말이나 하는 거라고 여기는 말들이 너무나 미웠다. 한시의 사춘기도, 괜한 치기도 아닌 진심이었음에도 외면당하고 흩어지던 말씨의 잔해가 따가웠다.

 

 

 

 

 

3.

 

집 위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다락방이라고 하면 얼추 떠올리는 보통의 창고 이미지와는 달리 그곳은 엄연한 방이었다. 집 안에 놓인 계단을 타고 올라오면 다락방이 있었고, 다락방 베란다를 통해 밖으로 나오면 옥상이 펼쳐지는 구조였기에 어떻게 보자면 3층 방이나 옥탑방이라고도 할 수도 있었다. 어렸던 지우와 친언니의 실내 놀이터로 기능했던 그 방은 다 좋았지만 보일러가 반밖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래층에 방이 없던 것도 아니라서 보일러를 고치는 대신 지우가 커갈수록 반쯤 옷방이나 과거의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으로 기능하게 되었지만, 창고로 변모하지 않은 이유는 지우가 아직까지 그 방을 애용하기 때문이었다. 보일러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이 뭐 그렇게 좋냐는 가족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지우만의 공간. 그곳에서 방 안을 데우는 뜨거운 온도에 베란다 문을 열고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는 바닥에 옮겨 앉아 발을 까딱이며 진솔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영원히 어린 채로 살고 싶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공간이 확장된다. 김지우의 공간에서, 김지우와 배진솔의 공간으로.

 

“내가 보기에 어른들은 책임져야 할 게 너무 많은 것 같아. 우리도 책임질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어른들은 훨씬 더 많지.”

 

그렇게 말하던, 그때까지만 해도 저와 눈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던 어린 진솔의 얼굴과 목소리. 피터팬처럼 평생 어린아이일 수는 없을까? 확장하는 마음의 공간을 느끼며, 동화 속 이야기라는 것 정도는 스스로도 알고 있는 이야기를 했다. 상상은 자유였으니까. 내가 웬디고 언니가 피터팬이면 좋겠다.

언니가 나를 언니의 세상으로 데려왔으니까. 지금이었다면 그렇게 말했을까. 그때는 스스로도 이게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저도 웬디를 하고 싶다는 진솔에게 언니가 멋있는 걸 했으면 좋겠다고 미뤘지만. 아마 그때부터. 그때부터 이곳은 더는 평범한 다락방이 아니었다. 입시 스트레스에 지쳐 유달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마다 휴대폰도 저 멀리 치워둔 채 보일러가 드는 바닥 위에 요를 깔고 누워 있을 때면 진솔을 떠올렸다. 저 역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던 과거의 진솔과, 너무나 커버린 현재의 진솔을.

 

 

 

 

 

4.

 

“진솔 언….”

 

발걸음이 멎는다. 반사적으로 입을 막고, 혹여 숨소리가 저기까지 닿을까 숨을 죽이고 둘을 본다. 평생을 봐왔기에 너무나 익숙한 배진솔과 키스하고 있는, 작은 체구나 하얀 얼굴과는 달리 정말 어른 같아 보이는 낯선 사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귓가에 심연으로 내려앉는 심장 소리가 서라운드로 울린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진솔 언니가 저 언니한테 괴롭힘이라도 당하나? 생각도 해보았지만 알았다. 누가 봐도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이 같았던. 숨이 막혀왔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솔이 제게서 한없이 멀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하나의 트루먼쇼 같았다. 제가 알던 배진솔은 진짜 진솔 언니가 아니었던 걸까. 윤아 언니도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걸 알고 있을까. 한 번 물꼬를 트기 시작한 고민은 끝도 없이 순환한다. 정말로 사귀는 사이라면. 아주 만약에 언니가 날 두고 저 사람과 떠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5.

 

사실은 그 전부터 그랬다.

중학교 입학 초입 때까지만 해도 비슷했던 두 사람의 키는 진솔이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 크기 시작하며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는 그대로인데 진솔은 커진 키만큼이나 제게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저를 두고 혼자만 어른이 되겠다는 듯이. 진솔의 키를 따라잡기 위해 뭐라도 해보려 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멈춰버린 키는 좀체 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키는 크지 않으면서 몸만큼은 날로 달라지는 것이 이상했다. 그에 반해 진솔의 키는 무럭무럭 자라다 못해 171cm를 찍었다. 키도 10cm 안팎으로 벌어졌고, 커진 키만큼이나 외양도 점점 더 성숙해져서 정말로 언니처럼 보이는 진솔을 마주하는 것이 벅찼다. 겨우 한 살 차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분명히 눈높이가 비슷했던 언니가 어느 날 한참이나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걸 깨달은 순간 가슴이 덜컥였던 기억이 선했다.

그런 진솔은 다가올 스물을 기대하고 있었다. 마치 10의 자리가 1에서 2로 바뀌면 세상이 좋은 의미로 뒤집히기라도 할 것처럼. 뒤집힌 세상에서 정말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언니는 나이 먹는 게 좋아?”

 

스물을 기대하는 진솔을 볼 때마다 서운해지는 마음에 괜히 틱틱거렸던 멀지 않은 과거.

 

“당연히 좋지. 성인이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아지는데.”

 

설렘에 가득 차 마치 어린 날의 약속은 잊었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진솔이 너무나 야속했다. 진솔은 아마 기억도 못 할 것 같았다. 기억하더라도 어린 날의 추억 정도로 치부하고 말겠지.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진심이었음에도.

 

 

 

 

 

6.

 

낯선 사람과 키스하던 진솔을 보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한 살 차이라는 거 정말로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한 발자국 내디뎠을 때 진솔은 저 멀리 뛰어가고 있고 저는 황새 쫓는 뱁새처럼 그런 진솔의 그림자 끝도 못 쫓아갈 것 같았다. 진솔이 스무 살이 된 지금 지우는 19살이었다. 겨우 숫자 하나 차이일 뿐인데 앞자리부터가 달랐다. 제가 스물이 된다면 진솔은 스물하나. 제가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갈 때마다 진솔도 나이를 먹겠지.

스무 살이 되어 세상이 뒤집히지 않았음에도 하루하루가 행복해 보이는 진솔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 언니는 누구인지. 언니에게 나는 뭔지. 정작 물어보려고 입술을 달싹일 때면 꿀 먹은 곰이라도 된 것마냥 말이 나오지 않아 몇 번이고 꾹 삼켜냈던 질문들.

 

“언니는 계속 나랑 있을 거지?”

 

머릿속은 과부하가 걸리기 일보 직전임에도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오직 저것뿐이다.

 

“글쎄, 그건 가봐야 알지.”

“…….”

“그렇지만 몸은 떨어져 있어도 계속 연락할 거니까 그것도 같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예전 같았으면 흔쾌히 당연하다고 해줬을 진솔에게서 나오는 야속하기 짝이 없는 대답. 그것에 채 서운함을 느끼기도 전에 제 얼굴을 살핀 듯 급하게 태세전환을 하는 진솔을 보며 이 나이 먹고도 표정 관리 하나 못하는 제가 참으로 싫었다. 이러니까 네가 여기까지지 자책하면서도 알았다. 표정 관리는 못하면서 역설적으로 제 마음을 그대로 꺼내 보여줄 수는 없을 거라는 걸.

 

“지우 요즘 무슨 고민 있어?”

 

고민 있으면 언니한테 말해봐. 말하면 언니가 들어줄 수 있긴 한가. 괜한 심술만 차오른다. 진솔에게 저는 정말로 이웃사촌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만 같아서.

 

“없거든요.”

“진짜로?”

“없어. 네버.”

“언니가 지우랑 안 놀아줘서 섭섭해?”

“아니라니까.”

“대학 생활 이야기해줄까?”

“어?”

“내가 뭐 하고 지내는지 궁금한 거 아니야?”

“…….”

“지우도 내년이면 대학교도 갈 거고, 연애도 할 거니까.”

 

연애. 진솔의 입에서 뱉어지는 두 글자가 너무나 생경했다. 진솔과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이상해서. 연애 이야기야 친구들과도 몇 번이고 해온 이야기지만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진솔이니까.

진솔의 이야기를 듣는다. 진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하지도 않은 이야기. 그런 이야기 사이에서도 중간중간 유달리 말이 빨라지고 눈이 반짝이는 듯한 환시가 스치는 구간이 있었다. 최대한 직접적인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특정한 한 사람만을 향한 깊고 진한 애정. 부연설명을 위해 켠 휴대폰 갤러리 사이사이를 지나가는 낯설지만 구면인 하얗고 단정한 얼굴. 그 사이를 흐르는 낯선 사람에 관한 이야기들.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봤지만 그만큼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서 그게 정말 좋더라.”

 

지우도 그럴 거야. 말하며 미소짓는 진솔의 얼굴을 멍하니 본다. 분명히 제 앞에 있음에도 진솔이 아주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웃음. 좋은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누가 들어도 복수형이 아닌 단수형 같은 말씨. 정말로?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 좋은 사람, 이 아니라? 마치 제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내심 궁금했던 것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는 진솔에게 묻고 싶었다. 진솔이 이 마음을 읽어주기를 바랐다. 낯선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진솔을 향한 제 마음을.

 

 

 

 

 

7.

 

낯선 사람을 떠올린다. 진솔과 키스하던 얼굴과, 진솔이 아닌 척 흘리던 이야기와, 흔적들을.

그 사람은 진솔보다 한 살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보다는 두 살이 많겠지. 겨우 한 살 차이라고 생각했던 진솔도 어른 같아서 낯설 때가 종종 있었는데, 거기서 한 살이 더 벌어진 그 사람은 차원이 달랐다. 외양만 떠올려 보자면 진솔보다도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음에도 분위기나 풍기는 성숙함만을 떠올리자면 열 살은 많은 것 같은, 진짜 어른. 그래서 진솔도 그렇게 만들어버릴 것 같은 언니.

그래서 진솔이 그렇게 좋아하게 되어버린 걸까. 제 눈에는 충분히 언니고 어른이 되어버린 진솔의 눈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더 반짝여 보였을까. 그래서 진솔도 그 사람을 떠올리며 저처럼 한 살 차이의 벽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을까. 그 벽에 지쳐 한숨을 지어봤다면, 그렇다면 위험하고 철옹성 같은 벽을 뛰어넘는 대신 뒤를 돌아 안전한 평지를 걸어가면 안 되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다. 절벽 위로 밀어줄 수는 없어도 손을 맞잡고 함께 평지를 걸어갈 줄은 알았다. 그것이 저의 특기였다. 저는 한 번도 진솔이 없는 꿈을 꾼 적이 없으니까.

 

 

 

 

 

8.

 

진솔과 마주하는 빈도가 점점 더 줄어든다. 매일같이 통학하는 사람이 이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대학교 학사일정이라는 게 원래 이런가? 싶었지만 어제도 마주쳐 인사를 나눈 윤아를 생각하자면 진솔만 그런 것 같았다. 윤아는 외부 활동보다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내향형이고 진솔은 사람 만나는 걸 제일 좋아하는 외향형이니까 아무래도 다르겠지, 진솔의 과는 많은 외부 활동을 필요로 하는 곳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수없이 위로해도 공허해지는 마음. 저러한 위로들이 부질없음을 앎에도 세뇌하듯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자꾸만 짧아져만 가는 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여름이 깊어져 대학교 종강 시즌이 되었음에도 진솔의 모습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언니, 요즘 뭐 해? 종강했다면서 왜 이렇게 안 보여? 하루에 몇 번이고 진솔에게 연락하기 위해 연락처를 켜고 카카오톡을 열어 문장을 입력하다가도 접는 횟수가 늘어난다. 진솔의 인스타그램 계정 또한 학교 풍경 몇 개를 제외하고는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7월 말, 진솔이 돌아왔다. 독서실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마주 오는 익숙한 얼굴에 달려가 말을 걸었다. 언니,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여? 물으면 바빠서 매일 밤늦게 집에 왔었어. 말하는 얼굴이 평소와는 달리 초췌해 무슨 말을 더 건넬 수가 없었다. 정말로 살면서 처음 보는 어두운 낯빛이었으니까.

 

 

 

 

 

9.

 

집 앞인데 나올래? 수능을 100일 남겨둔 날 밤, 진솔에게서 문자가 온다. 간결한 세 단어와 문장 부호 하나로 이루어진 문장을 한참이고 응시했다. 초췌한 낯빛의 진솔을 보낸 후 둘이 만난 건 오며 가며 몇 번 인사하고 지나던 순간이 전부였다. 지우는 진솔에게 차마 먼저 말을 걸 용기가 없었고, 진솔도 고3인 저를 방해하지 않으려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거로 보였으니까. 만날 때마다 제 등에는 백팩이 매여 있었고 진솔이 매일같이 하던 말이 공부 열심히 해였으니 말은 다 했다.

집 밖으로 나오자 저를 보며 손짓하는 진솔이 보인다. 한 손에는 동네 마트 로고가 그려진 장바구니를 든 채.

 

“왜 불렀어?”

“왜 불렀긴. 마이쮸 백일주 사주려고 불렀지.”

 

백일주? 갑자기? 생각하다가 작년 이맘때 친구들과 함께 수능 백일주를 마시러 가는 길이라며, 내년에는 언니가 지우한테도 사줄게. 의기양양하게 말하던 진솔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은 날이었음에도 참으로 멀게만 느껴지던 과거의 단상.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사실 백일주 같은 건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같이 먹자던 친구들에게 너희들끼리 먹고 후기 말해줘, 말하고 집으로 돌아와 쉬던 차였다. 그렇지만 상대가 진솔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오로지 진솔과 둘이 무언가를 한다는 거에만 초점을 두고 한 약속이었다.

진솔과 함께 익숙한 밤의 거리를 걷는다. 밤이라고 해도 여름이라는 계절과 꺼지지 않고 빛을 발하는 가로등과 건물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덕에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그에 앞서 진솔이 곁에 있기도 했고. 몇 개의 건물과 거리를 지나 당도한 동네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장바구니에서 음식과 맥주캔을 하나씩 꺼내 중간 자리에 두었다.

 

“술 먹는 거 처음이지?”

 

청량한 캔 따는 소리에 이어 건네어지는 캔을 받아들었다. 아니, 아빠랑 언니가 줘서 먹어 봤어. 진실을 말할지 안 먹어 봤어. 거짓을 말할지 망설이다 첫번째 답을 했다. 가족 말고 규진과도 몰래 먹어봤지만 부러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진솔과 나란히 앉아 오랜만에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했다. 어렸을 때의 추억부터, 각자의 근황, 두 사람이 공유하는 주위 사람 이야기 등등. 맥주캔을 비우고 공원을 걸으면서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모처럼 열대야도 아니라서 아닌 척 자연스럽게 진솔의 손을 잡았다. 진솔이 먼저 놓는 건 아닐까, 내심 고민했지만 그런 제 생각을 비웃듯 힘주어 잡히는 손에 얼굴에 열이 몰린다. 이게 더워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랑 맞잡은 손, 그 사람과는 몇 번을 맞잡았을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걸음을 멈춰야 했지만.

멈춘 발걸음을 따라 진솔의 걸음 또한 멈춘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가로등 불빛이 눈을 찌른다. 마치, 인위적인 가로등 불이 아닌 자연적인 달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옆을 돌아보자면 여전히 제 손을 잡은 채 저를 내려다보는 진솔.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운동을 나왔거나 여러 이유로 공원에 상주 중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른 세상의 것처럼 아주 멀게 들린다. 저와 진솔을 지켜보는 것은 오로지 전봇대 위 가로등 불 하나뿐.

발 뒤꿈치를 들고 잡고 있지 않던 나머지 손을 들어 진솔의 손을 맞잡았다. 힘이 들어가는 손과 조금이나마 올라간 시야, 가까워지는 얼굴. 그리고, 맞닿는 입술.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저와는 달리 자연스럽게 눈을 감는 진솔의 얼굴이 눈썹 개수를 셀 수 있을 만큼 너무나 가까웠다. 입술에서는 맥주 맛과 안주로 먹은 젤리 맛과 진솔의 체향이 뒤섞인 맛이 났다. 그 순간만큼은 진솔의 곁에 누가 있는지 따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지금이 아니면 이런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에 따라 움직였을 뿐.

 

 

 

 

 

10.

 

진솔이 사라졌다. 사라지기보다는 두문불출하거나 저를 피하는 거에 가까운. 학기 중 진솔이 정말로 바빠서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은 누가 봐도 의도적인 잠적 같았다.

처음에야 진솔이 보이지 않아 좋았다. 진솔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지 여름 내내 머리카락 끝조차 보이지 않는 진솔에 애가 탔다. 여러 번의 망설임 끝에 결국은 연락하지 못했던 예전과는 달리 몇 차례나 연락을 했음에도 진솔은 답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건 전화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차라리 한두 번 신호가 가고 끊겼다면 차단이라도 했겠지, 위안할 수라도 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신호음 끝에 제 쪽에서 먼저 지쳐 전화를 끊을 때마다 진솔은 뭐였는지, 왜 저를 거부하지 않았는지 따위의 생각들이 연신 지우를 괴롭혔다. 이렇게 피할 거면 그때 그렇게 받아주지 말았어야지. 여자친구도 있는 사람이 왜.

몇 번인지 샐 수 없이 진솔의 집 앞을 서성였다. 평소 같으면 가족들이라도 보일 텐데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 요즘 진솔 언니네 못 봤어? 물어봤는데 엄마도 모른다더라. 모를 수가 없을 텐데도.

 

 

 

 

 

11.

 

아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깬 늦은 밤. 날씨가 더워 베란다 문을 열고 나오면 보이는 옆집은 진솔의 집이다. 지우네 집과 다른 듯 비슷한 집안 구조가 눈에 선했다. 모처럼 들어온 집안 불빛에 진솔이라도 있나 보고 싶었는데 여기서는 창문 너머 집안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방 안에서 한 명은 아닌 것 같은 그림자가 몇 번 아른거리더니 이윽고 아래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다른 건 구별할 수 없었지만 문을 열고 저 멀리 뛰어가는 뒷모습만큼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매일같이 그려왔던 뒷모습. 진솔을 쫓아 내려가고 싶었는데 뒤이어 따라 나오는 진솔네 가족들의 차마 내려갈 수는 없었다. 뒤따라 나오는가 싶더니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여기까지 울렸다.

 

 

 

 

 

12.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에…

전화를 끊었다. 보이지도 않고 급기야 휴대폰까지 꺼둔 진솔에 매일 애가 탔다. 고민하다 윤아에게 넌지시 물어봤더니 잠시간 표정이 굳나 싶다가 나도 모르겠어. 대답하는 것에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진솔의 집은 여전히 조용했다. 집에 찾아가고 싶었는데 그날 밤 목도했던 장면에 발도 들일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고, 제게는 그저 친절했던 그 집 어른들의 이면을 본 것 같아 현기증이 났다. 언젠가부터는 진솔이 그 집 안에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면 집에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으니까. 진솔 언니. 뭐라고 말이라도, 아니 부재중 전화나 문자 한 통이라도 좋으니 해줘. 최소 잘 살아 있는지라도 알 수 있게.

 

 

 

 

 

13.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의 끝. 무거운 마음을 안으면서도 매일같이 출석했던 독서실에서 짐을 빼고, 마찬가지로 수능의 굴레에서 해방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던 12월 말의 저녁,

 

“지우야.”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언니!”

 

헛것이 아니다. 순식간에 달음박질쳐 진솔의 앞에 섰다. 그 전과는 달리 꽤 얼굴이 편 진솔이 저를 맞는다. 잘 지냈어? 왜 연락 안 받아. 수없이 되뇌었던 질문은 진솔을 보자마자 휘발된다. 그저 언니, 언니, 부르며 진솔의 팔을 붙잡을 뿐.

 

“잘 지냈어?”

“언니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선수 쳐 건넴에 되물었더니 말없이 웃기만 한다. 그 웃음만 보자면 말처럼 못 지낸 것 같지는 않았다.

 

“지우한테 인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

“합격 축하해.”

“…….”

“지우 대학교 가는 건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됐네.”

“…….”

“그래도 이제는 연락하면 받을게. 약속.”

 

어디 가? 묻고 싶었는데,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말과 함께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진솔에 눈앞이 흐려지고, 저 손가락에 제 손이 아닌 두 손가락을 잇는 실이라도 감아서 붙잡아 두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음을 아주 뒤늦게야 깨닫는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기류와 감각. 비로소 그러한 기류를 읽을 수 있게 된 스스로에 착잡해지는 마음.

 

“…그때는… 미안해.”

“…….”

“…….”

“미안해하지 마.”

“…….”

“내가 좋아서 한 거니까 그냥 언니도 좋았다고 해줘.”

 

그때만 해도 몰랐는데 진솔도 알았던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혹은 그 날에서야 알았거나. 뭐가 되었건 진솔이 제 오랜 마음을 알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어 기뻐해야 할지 그럼에도 끝내 저를 두고 떠나는 진솔에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까.

진솔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뒤로도 한참이고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언니, 행복해?”

 

몇 번이고 물어볼까 망설이다 꾹 삼켰던 질문을 응집해 입 밖으로 낸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응? 되묻던 진솔이 저와 눈을 맞춘다.

 

“행복한 것 같아.”

“…….”

“맞아, 행복해.”

 

마주 보이는 시선. 대답하는 진솔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 100%의 진심과 확신이 담긴 얼굴. 세상에 완전한 0%와 100%는 없다고 하는데 진솔에게서는 그 불가능하다는 완전함과 견고함이 보였다. 진솔을 이처럼 견고하게 만든 건 아마도.

그때 멀리서 낯선 차 한 대가 다가와 선다. 줄곧 저를 마주 보고 서 있던 진솔의 시선이 잠시간 그쪽을 향했다 돌아온다.

 

“지우야.”

“응.”

“좋아해 줘서 고마워.”

“…….”

“너한테도 분명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찾아올 거야.”

“…….”

“나 갈게.”

“…….”

“잘 지내고,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진솔이 제 손을 마주 잡았다 놓는다. 꼭 마주 잡았다 떼어지는 손이 허전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제게 손을 흔들며 차 쪽으로 뛰어가는 진솔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좇았다. 문을 열고 탑승하는 찰나 보인 얼굴이 익숙했다. 해원 언니, 아마도 낯선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참으로 선명했다. 그렇구나.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대신 진솔을 태우고 떠나가는 차의 뒤꽁무니나 한참이나 쳐다봤다. 더 이상 차의 흔적일랑 보이지 않을 때까지.

 

 

 

 

 

14.

 

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정리할 건 크게 없었다. 가끔 방에 올라와 꺼내보던 과거의 흔적들만 정리하면 되었으니까. 가족들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필요하다고 해도 별로 원하지 않았다. 이건 온전히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붙박이장을 열고, 가장 아래 칸에 넣어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어려서부터 남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생각들을 적어 두던 일기장이 있다. 어릴 적 TV에서 봤는지 친구가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 쓴 건지도 모를 일기장만 해도 벌써 수십 권째였다. 날로 발전하는 기술에 따라 스캔이라도 해서 데이터로 보관해둘까 싶은 적이 없던 건 아니지만 결국에는 지금까지도 수기로 쓰고 있는 기록들. 그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자면 그 날의 일기가 있다. 언젠가, 진솔과 나누었던 이야기. 영원히 그 모습으로 반짝일 것만 같았던 진솔과, 그런 진솔이 저를 데리러 온 피터팬 같다고 생각했던 어린 날의 자신.

그러나 진솔은 어른이 되었고, 네버랜드를 떠났다. 진솔이 떠난 네버랜드에 남은 지우는 이제야 자신이 웬디가 아닌 팅커벨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마 웬디는 그 사람이겠지. 오해원. 이제는 이름을 알게 된, 낯선 사람. 네버랜드로 날아온 낯선 웬디는 혼자 돌아가지 않고 피터팬의 손을 잡고 현실 세계로 떠났다. 어쩌면 현실이 아닌 또 다른 유토피아일지도 몰랐다. 네버랜드를 탈출한 피터팬은 어엿한 어른이 되었겠지. 네버랜드를 돌며 기다리고 있는 팅커벨을 뒤로한 채.

다 알고 있는 주제에 끝까지 모르는 척을 하고 싶었다. 제게는 감당이 되지 않는 일련의 일들을 모르는 채 묻어두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다. 진솔이 두문불출했던 이유. 초췌했던 낯빛. 도망치듯 집을 박차고 나가던 뒷모습. 그 모습들을 보며 진솔의 옆을 지키는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닌 저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던 날들. 20살이 되어, 아니 그 전에 제가 먼저 고백을 했더라면. 진솔의 손을 잡고, 입맞추던 것이 저였다면. 그랬다면 진솔도 이 동네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것부터가 사실 제가 꿈꾸던 이상과는 전혀 반대임을 알았다. 아이는 결코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일기장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진솔을 보낼 때만 해도 나지 않던 눈물이 뒤늦게야 쏟아진다. 진솔 때문에 우는 제가 싫었지만 굳이 눈물을 닦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소리 내어 울기로 했다. 입 밖으로 여태껏 참아내었던 울음을 터트렸다. 속에서 역류하던 무언가가 어느 지점에서 울컥, 하고 걸려 저를 괴롭게 했다. 오늘만큼은 온전히 진솔을 원망하고 싶었다. 이렇게 원망하고, 또 원망하며 감정을 토해내면 제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진솔 또한 함께 흘러가겠지. 그렇다면 언젠가 진솔을 다시 만나더라도 원망하지도 울지도 않을 수 있을 거였다. 그에 더해 온전히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 수도 있겠지. 나는 언니도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때는 사념에 젖어 차마 하지 못했던 말도 웃으며 건넬 수 있을까.

 

가끔씩 혼자 떠올려 보던 질문을 다시금 상기한다. 어려서부터가 아닌 조금 더 커서 진솔을 알았다면, 그래도 저는 진솔을 지금과 똑같은 마음으로 좋아했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았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진솔을 만났더라도 결국은 진솔을 좋아하게 되었을 거라고. 그것이 김지우의 숙명이라고.

함께 있던 해원과 진솔을 떠올린다. 누가 봐도 서로가 전부인 것 같으면서도 어른 같았던 두 사람. 두 사람을 떠올리며, 진솔의 나이를 따라잡고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진솔의 눈에 지우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더 넓은 세상 밖으로 나가 누굴 만나더라도 진솔만큼 그 누군가를 온 마음 담아 좋아할 수는 없겠지.

김지우에게 배진솔은,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첫사랑이었으니까.

 

 

 

 

 

15.

 

김지우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죽어버린 피터팬을, 배진솔을 평생토록 가슴에 묻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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