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전설

추모

시계 by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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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밀밭에 다채롭게 세워진 허수아비.

아이가 조막손으로 가족과 함께 만든 엉성한 허수아비,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형을 잡은 멋쟁이 허수아비, 간간이 마을까지 내려오는 몬스터에 의해 여기저기 두들겨 맞은 흔적이 있는 애환 서린 허수아비들. 그중에서도 특별한 것 없어 보이지만 어딘가 기묘한 느낌이 드는 허수아비가 마을 입구 가까이에 세워져 있었다. 세월에 닳은 흔적이 역력한 누더기 천을 쓰고서, 하염없이 바깥을 멀리 내다보는 허수아비에겐 한 가지 전설이 내려왔다. 먼 옛날 타락한 마족 떼로부터 마을을 지켜준 한 용사님이 있었고, 동료였던 요정님이 죽기 직전까지 이곳을 걱정하던 용사의 마음을 어여삐 여겨 허수아비로 만들어 세워뒀다고.

아주 오래되어 빛바랜 구전이란 거짓 치부되기 십상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허수아비에 씌운 천을 오려내거나 낙서하며 논다. 어른들도 전설을 전해주긴 하지만 진지하게 믿진 않는다. 그만큼 지금이 위기감이 사라진 시대라는 뜻인 게지. 다시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위기가 닥치면 허수아비가 깨어날 거라는 말도 있지만, 이미 세계엔 평화가 깊이 뿌리박혀있다. 예전엔 그랬다는 이야기로 남아있다가 그마저도 언젠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터.

조용히 허수아비 옆에 앉았다. 포근한 흙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원한 바람이 한차례 휩쓸고 가자 금빛 파도가 노을 진 하늘에 뒤섞여간다. 뛰놀던 아이들은 서서히 집으로 돌아가고, 이삭을 쪼아먹으러 날아드는 작은 손님들의 지저귐이 들린다.

아아,

벗이여.

이 황금 들판은 아직까지 네게 만족스러운 풍경인가?

여전히 지킬 가치가 있다고 느끼나?

어디로도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을 후회하진 않나?

나를 원망하는 마음은 안 드나?

그래.

그거면 되었다.

너른 밀밭에 다채롭게 세워진 허수아비.

아이가 조막손으로 가족과 함께 만든 엉성한 허수아비,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형을 잡은 멋쟁이 허수아비, 간간이 마을까지 내려오는 몬스터에 의해 여기저기 두들겨 맞은 흔적이 있는 애환 서린 허수아비들. 그중에서도 특별한 것 없어 보이지만 어딘가 기묘한 느낌이 드는 허수아비가 마을 입구 가까이에 세워져 있었다. 세월에 닳은 흔적이 역력한 누더기 천을 쓰고서, 하염없이 바깥을 멀리 내다보는 허수아비 하나.

한때는 세상을 구하는 용사였던,

누군가의 소중한 동료였던,

그저 남들과 똑같이 평온한 시대가 찾아오길 바란 평범한 사람이었던 허수아비 하나.

이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것이 네가 원한 결말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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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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