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주인] 나는 집사고 당신은 주인
아쿠네코 하나마루x주인♀️
※ 해당 글은 마리님(@aknkmarie_777)의 글인 너는 집사고 나는 주인 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본문을 읽기 전에 마리님의 연성을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링크: https://posty.pe/92lcwb)
그날 밤, 하나마루가 제게 최선의 대답을 들려줬음은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였다면 그 만큼 어른스럽게 대처할 수 없었으리라. 그녀는 천사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악마 집사들의 주인이어야 했고, 하나마루는 악마 집사로 남아야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굴곡 없는 평행선 같은 관계로 남는 게 좋았다.
그러나 미련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마지막 부탁이라는 핑계를 대며 그와 잊을 수 없는 키스를 했던 밤, 그녀는 결국 왈칵 눈물이 차는 것을 느꼈다.
'방 앞에서 배웅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녀를 침실 앞까지 데려다준 하나마루에게 손을 여유롭게 흔들며 문을 닫는 순간 참았던 감정이 북받쳤다. 혹시라도 흐느끼는 자신의 소리를 누군가 들을까, 주인은 다급히 제 약지에서 반지를 뺐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 어지러운 감각이 덮치고, 둘러싸는 빛무리를 애써 무시하려 하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땐, 호화로운 데블 팔라스의 침실이 아닌 초라한 단칸방이었다.
그날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 사실을 들킬까 두려워 며칠 동안 저택을 찾지 않았다. 차이고 울다 걸리는 것과 차이고 며칠 동안 그 사람을 피해 다니는 것. 둘 다 상대방에게 ‘나 괜찮지 않습니다,’ 하고 광고하는 건 매한가지였으나, 그녀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후자를 선택했다.
며칠 후 저택에 다시 돌아왔을 때, 저택의 모든 집사들은 개미 떼처럼 우르르 달려 나와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못 본 사이 수척해졌다며 36첩 밥상을 내어오려던 로노와 바스티앙, 주인님이 기운을 차려야 한다며 개구리 칵테일을 만들어 오려던 라므리 덕분에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난리 통도 그런 난리 통이 없었다. 그래, 그래도 다들 돌아가며 자길 걱정해 주는 게 썩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딱 한 사람, 하나마루만 빼고.
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녀를 벽에 기대 멀찍이 바라보던 그는 그녀가 말을 걸어오기도 전에 도망치듯 자리를 떴으니까. 이젠 마음 정리 다 했다고, 괜찮다고 활짝 웃으면서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하나마루는 일말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그 후로도 둘만 남게 되는 순간을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담당 집사로 지명하려 하니 아예 먼 곳으로 의뢰를 가버리질 않나. 도박하러 가서 저택을 비우거나 (다음 날 매우 높은 확률로 유한에게 혼나는 그를 목격할 수 있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돌아오질 않나 (그다음 날도 높은 확률로 유한에게 혼나는 그를 목격할 수 있었다).
한번은 그를 벽으로 몰아세울 기회가 찾아왔는데, 진땀을 빼며 뒷걸음치던 하나마루는 냅다 모의전을 하자며 뒷마당에 있을 테디의 이름을 우렁차게 불렀다. 어디서 난 건지 목검을 든 채 잔뜩 흥분해서 달려온 테디에게 하나마루를 양보해달라고 하기도 미안해서, 결국 주인은 그날도 그를 놓아주어야 했다.
답답한 두 사람의 공방전이 계속되던 끝에, 그녀는 결국 극단적인 수를 꺼내 들었다.
"위장 연애... 말입니까?"
붉은 동백 꽃잎을 닮은 유한의 타원형 눈썹이 의아한 듯 치켜 올라갔다.
"유한은 연기를 잘하니까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오래는 안 할 거야. 아주 잠깐이면 되니까."
처음에는 그저 제게 선을 긋는 하나마루에게 반응을 끌어내고 싶었다. 미련이 없다면 정말로 완전히 마음을 정리해 버린 건지, 아직 있다면 끝내 더 가까운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 그가 과연 안타까워할지, 그녀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부탁을 들어드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만...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유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꺼낸 질문에 주인은 입을 열었다가, 이내 어금니를 꽉 물며 입을 다물었다. 하나마루랑 키스를 했다. 실은 얼마 전, 며칠 동안 저택에 오지 않은 것도 하나마루 때문이었다. 그 뒤로 그가 날 피해 다니니까 그의 마음을 알고 싶다.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유한에게 할 수 있을리가.
‘게다가 유한은 충성심이 유독 강하니까...’
아마 집사와 주인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단 사실을 알았다간 하나마루를 속옷까지 발가벗겨서 별관에서 내쫓아 버릴지도. 머리를 싸맨 채 고민하다가 결국 자조하듯 이마를 손바닥으로 퍽 치는 주인님을 보며, 유한의 고개는 더욱 기울었다.
"뭐, 말씀하시기 곤란하다면 거두절미하죠. 그래서, 연인 행세는 오늘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응, 이왕이면 보란 듯이 손도 잔뜩 잡아주고! 한참 풋풋한 시기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티를 좀 팍팍 내줘!"
... 아니, 근데 너무 티를 내면 유한이 곤란하려나. 조금 전까지 기세 좋게 외치다 곧장 심각해진 그녀를 보며, 유한은 피식 웃었다.
"주인님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드리는 것이 제가 이 저택에 있는 이유니, 부탁해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주인님의 기대에 미치는 연기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 그, 목숨까진 바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럼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아니..."
- 씨. 유한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순식간에 달라진 목소리에 감탄을 채 뱉기도 전에, 그는 중앙 대륙의 귀족들이 예를 표할 때처럼 가슴에 우아하게 손을 얹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 그녀의 손을 맞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니, 실은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멈췄지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유한 때문에 화들짝 놀란 주인은 뒤로 펄쩍 뛰었지만, 유한은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머금었다.
꿀이 떨어질 듯한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주인은 깨달았다. 그는 이미 완벽한 연기자의 눈을 하고 사랑에 퐁당 빠진 남성의 탈을 뒤집어썼단 사실을.
목숨까지 바쳐 혼신의 연기를 펼치겠다는 그의 맹세는 빈말이 아니었는지, 그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판 듯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었다. 문제는 영혼을 팔면서 정신머리까지 같이 팔아버렸다는 점이겠지. 공과 사를 가리지 않고 쉼 없이 그녀를 유혹해 오는 유한 덕에, 얼마 가지 않아 저택의 사람들은 유한과 그녀가 함께 있을 때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곤 했다.
눈치가 빠른 하나마루도 분명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묘한 기류를 알아차렸으리라. 다만 심증을 확증으로 바꿀 상황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조금의 동요라도 보였으면 좋으련만,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사소한 것에도 너스레를 떨면서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며, 자신과 단둘이 남는 상황을 피해 다녔다.
별관의 집사들과 다 같이 술을 마시며 유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날은 무언가 반응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잔뜩 취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그는 그저 “히야,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먼.” 하고 유한의 연기에 추임새를 넣을 뿐이었다.
'그때는 정말 울컥했지.'
누구 때문에 남들 앞에서 이렇게 낯간지러운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저도 모르는 새 손에 힘이 들어갔던 건지, 제게 붙들려 있던 유한의 팔에는 다음날까지 새빨간 손자국이 남았다.
"에.... 이건 예상치 못했구먼."
하나마루는 당황한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바쁘다며 함께 낚시하러 가자는 권유를 늘 거절하던 유한이 웬일로 단둘이 낚시를 가자고 하길래 룰루랄라 즐겁게 나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더니, 유한 이놈이 주인님을 함께 모셔 온 게 아닌가. 하나마루는 진땀을 흘리며 당혹스러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유한, 분명 단둘이 낚시하자고 하지 않았어?"
"아아, 변덕을 부려 죄송합니다. 역시 저는 주인님 곁에서 잠시라도 떨어져 있을 수 없어서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잘도 저런 거짓말을 잘도 하는구나. 주인은 유한의 멘트에 양팔 위로 오소소 돋는 닭살을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낚시가 될 줄 알고 낚시터로 이동하는 내내 잔뜩 긴장했건만. 계속 이야깃거리를 던지며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유한 덕에 그리 분위기가 나쁘지만은 았다. 동쪽 대륙의 소식이라던가. 생선회는 광어냐 연어냐. 진간장에 찍어 먹어야 하는가, 아니면 맛간장인가. 생강 절임이 더 어울리는가 염교가 더 어울리는가. 하나마루가 의뢰로 별관을 비웠던 사이 꽃병 아래 작게 접어 숨겨둔 술값 외상 청구서를 발견했단 이야기를 할 땐 언성이 조금 높아졌지만 (주로 언성을 높이는 건 유한 쪽이었다), 그런 쓸데없지만 진지한 대화가 몇 시간이고 심심치 않게 오갔다.
안타깝게도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슬슬 해가 넘어가려 하는데도 여전히 텅 빈 양동이를 내려다보며 유한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아무 것도 잡지 못하다니... 하나마루 씨, 분명 낚시엔 소질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분명 매운탕을 배불리 먹게 해주겠다고...”
“그, 글쎄... 왠지 오늘따라 고기가 미끼를 못 무는데...”
“하아... 뭐, 이런 일도 있을 것 같아 어제 미리 통발을 몇 군데 설치해 두긴 했습니다만."
통발에 뭔가 걸렸는지 확인 좀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유한이 홱 돌아서려 하자, 하나마루는 사색이 되어 다급히 유한의 소매를 붙잡았다.
"역시~ 유한쨩! 준비가 철저하네~ 같이 가서 확인해 줄까?"
"하나마루 씨는 남아서 주인님을 지켜주셔야죠."
"주인님을 다른 남자와 단둘이 남겨둬도 괜찮겠어? 내가 다녀올게."
"통발이 설치된 위치는 아시고요?"
"아~ 그건 말이지... 그럼, 다 같이 다녀오는 건..."
"그 근처는 바위가 울퉁불퉁해서 주인님이 다니긴 험난한 곳입니다. 주인님과 여기 계시죠."
이 이상 토를 다실 생각인가요, 하나마루 씨?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 계시죠. 싱글싱글 웃고 있는 유한의 얼굴에서 어쩐지 그리 말하는 듯한 무언의 압력이 느껴졌다.
"그... 그래, 잘 다녀와..."
하나마루가 부자연스레 웃으며 마지못해 수락하자, 유한은 주인님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하곤 강줄기가 내려오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치 느긋이 관광지의 경치를 즐기는 노인처럼 그보다 더 느릴 수 없는 걸음걸이로. 하나마루는 그런 유한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혀를 찼다. 완전히 당해버렸구먼. 저 녀석 돌아올 생각 전혀 없어 보이잖냐.
하나마루는 주인이 있는 방향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파악되지 않은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멀뚱히 멀어져가는 유한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주인님이 시킨 게 아니라 유한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인 모양이었다.
‘혹시 저 녀석 그날 밤 있었던 일을 아는건가...’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설령 그날의 일을 모르더라도, 유한 녀석은 눈치가 빨라 자신과 주인님 사이에서 흐르는 어색한 기류를 포착한 걸지도 모른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나마루는 한숨을 쉬며 다시 낚시용 간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낚싯대 앞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숲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만이 그 간극을 메웠다. 움직이지 않는 수면 위의 코르크 찌를 바라보며, 주인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안 도망가?"
“그래도 명색이 집사인데, 역시 주인님을 혼자 남겨두고 도망갈 순 없달까.”
“그렇구나.”
“...”
"나 유한이랑 사귀기로 했어."
"오호. 난 벌써 둘이 만나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이젠 진지하게 만나보려고."
"그렇구나. 축하해, 주인님. 유한은 괜찮은 녀석이니까."
“그동안은 집사라 참았지만, 앞으론 당당히 손잡고 다니려고.”
"헤헤, 그거 좋겠네. 산책하기 좋은 곳 알려줄까?"
"같이 극장도 가서 요즘 유행하는 로맨스 연극도 볼 거야."
"좋겠네. 어땠는지 꼭 후기 들려줘."
"분위기를 타다 입이 맞을지도."
"그 녀석은 처음일 테니까 살살해, 주인님."
꽉 움켜쥔 그녀의 조그마한 주먹이 떨린다. 몇 번이고 거슬리게 돌멩이를 던져도 하나마루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파동 하나 일렁이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갈고 닦았던 칼을 뽑았다.
"하나마루는 아무렇지 않아?"
질투가 나지 않냐고 직접 물어보는 게 모양새 빠지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괴로워하면서 가슴을 쥐어뜯거나, 눈물을 한 움큼 쏟길 바란 것도 아니다. 최소한 얼굴을 찌푸리거나, 침묵을 지키거나, 아주 조금 흐트러지는 모양을 보여줬더라도 그녀는 그걸로 만족했을 텐데. 본디 사람의 표정이라는 건 아무리 감춰도 본색이 드러나기 마련이 아닌가. 평소에 그렇게나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줬으면서 오늘은 어째서 이리도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로 잔잔하고 평온한지.
나는 아직도 당신과 나눴던 달콤한 키스가 바로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한데.
그녀를 등진 채 강변에 걸터앉은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쩐지 침묵을 그대로 내버려뒀다간 두 사람 사이의 잠깐이나마 얄팍하게 놓인 다리가 깨져버릴 것만 같단 생각이 들어서, 주인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마루,"
"나 어디 안 가, 주인님."
마치 안심해도 된다는 듯,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저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
언제까지고 그녀를 피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그녀와의 관계가 나쁘게 될 것을 우려해 그녀를 거절했으니까.
"있지, 주인님. 나는 주인님이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던 며칠 동안, 다시는 주인님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어."
하나마루에게 그녀를 단칼에 거절할 수 있는 단호함은 없었다. 허나 그녀를 받아들일 용기도 없었다. 결국 그녀를 거부하면서 키스는 해주는 것으로 하나마루는 제 의사를 돌려 표현했다. 방황하는 그의 마음에 걸맞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형태의 대답이었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건가 싶은 불안감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와 혀를 섞는 순간에도 잔존했지만, 실제로 싹을 트기 시작한 건 그녀가 처음으로 저택에 오지 않은 날이었다.
“주인님은 나랑 다르게 성실해서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주 잠깐이라도 저택에 들리려 했으니까. 알고 싶지 않아도, 주인님이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챌 수밖에 없잖아?"
"그건 하나마루의 잘못이-"
"알아.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주인님의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바지 밑단과 다르게, 짦으면 덧대 붙이고 길면 싹둑 잘라내는 게 불가능하니까. 그렇지만 주인님, 나는 철이 들 무렵부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도 멋대로 책임을 느끼는 바보였어."
그녀와 입을 맞췄던 다음날 초침이 정각을 지나고 자정이 되었을 때, 하나마루에게 가장 먼저 엄습한 감정은 불안감이었다.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녀가 그러지 않을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의 상상력은 멋대로 가장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쭉쭉 시나리오를 써나갔다. 매분 매초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며. 하나마루는 아주 오랜만에 목이 바싹 타는 것을 느꼈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술뿐이었다.
“주인님이 오지 않은 다음 날, 오간만에 과음을 했어.”
말이 좋아 과음이지, 그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술을 마셨다. 그다음 날 하나마루는 뇌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깨어났다. 별관을 기어다니는 와중에도 유한에게 두 시간씩이나 설교를 듣느라 죽을 뻔했건만. 하나마루는 다시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태가 되자마자 술 창고로 비틀비틀 걸어가 어제 다 못 마신 소주를 속에 술을 털어 넣었다. 맨정신으로 있으면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단 두려움이 계속해서 그를 엄습했으니까.
다행히 그의 사랑스러운 주인은 며칠 만에 저택에 돌아왔다. 저택을 떠났던 날보다 아주 조금 수척해진 모습으로. 뭐,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그런 순간도 으레 있기 마련이건만. 허나 이번에 주인이 수척해진 이유는 누가 봐도 자명했다. 하나마루는 목숨보다 소중한 주인을 그렇게 만든 이가 자신이란 사실이 죽도록 싫었다.
"그래서 주인님을 피해 다녔어. 주인님 앞에서 온갖 폼은 다 잡아놓고."
우습지 않은가. 어차피 평생 그녀를 피해 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 달쯤이면 그녀도 완전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딱 한 달만 도망 다니다가 쓱 주인님의 문 틈새로 손을 내밀어 그녀와 화해의 악수를 나눌 생각이었다. 손에 방귀 풍선이라도 쥐고 있을까. 웃으면 조금 분위기가 풀어질 테니. 아이들에겐 제법 잘 먹혔는데, 주인님은 어떻게 반응하려나. 그리 생각하며 혼자 시시덕거리고 있었는데.
아마 그다음 날부터였나... 갑자기 유한 녀석이 넘어져서 머리를 잘못 부딪친 놈처럼 주인님께 마구 애정 표현을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 녀석이 주인님께 품고 있는 충성심이 유별나단 생각은 하고 있었만.
그래도 집사로서 해야 할 역할을 강조하는 녀석이니만큼 정도는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녀석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처럼 주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마구 들이밀었다. 그런 유한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부끄러운 듯 받아주는 주인을 보며, 하나마루는 심란함을 느꼈다.
"주인님, 새삼스럽지만 유한은 내게 자식 같은 녀석이야. 나는 자식을 떠나보냈고, 유한은 부모를 떠나보냈고. 우리 둘 다 동쪽 대륙 출신에, 똑같이 고향이 불탔고. 저택의 집사들 모두 소중한 동료지만 그 녀석은 유독 아픈 손가락이랄까. 그래서 나는…. 주인님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어. 왜 하필 유한이어야 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주인님이어야 했을까. 그런 생각이 멈추지 않아서.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인님 곁에 있는 녀석이 유한이 아닌 다른 녀석이었어도 변하는 건 없더라고."
술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혀가 술술 돌아간다. 요 몇 주간 가슴에 응어리졌던 감정은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멈출 줄을 모르고 쏟아져나왔다.
유한과 주인님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 든 감정이 그저 아릿함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분명 얼마 전에 나한테 좋다고 했으면서, 주인님은 어째서 그렇게 얼굴을 붉히는 건데. 그리 따져 묻고 싶단 추한 감정이 고개를 들이밀었을 때, 결국 하나마루는 인정해야 했다.
“그땐 정말 주인님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정말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이젠 유한이 아니더라도, 주인님 세계에 있는 이름도 모를, 평생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남성이 그녀를 데려간다는 생각만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뛴다. 부끄럽게도 그가 내세웠던 책임감은 이제 한오라기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주인님과 유한이 엉켜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장미 가시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흉통만 있을 뿐. 아무렇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죽도록 후회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져도 괜찮냐는 말에 ‘그렇게 해서 주인님이 행복하다면~’ 같은 말로 멋진 척하지나 말걸. 평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살겠다는 말에 그럴 거면 그냥 나랑 살자고 대답할걸. 지금이라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지만 이젠 다 마음 정리 끝났으니까.”
하지만 하나마루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결국 그는 또 한발 물러서길 택했다. 유한과의 관계도, 주인님과의 관계도, 여기서 더 어그러지길 원치 않기 때문에.
하나마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멈춰 세운 것은 등에 맞닿는 따스한 체온이었다. 그의 허리에는 어느새 가느다란 팔이 꼭허리띠처럼 둘려져 있었다.
하나마루는 돌처럼 굳었다. 밀어내야 하는데. 유한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날 밤의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려 했는데.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말을 듣지 않는 심장만 콩닥콩닥 뛸 뿐.
"주인님, 난 유한을 두고 이럴 순..."
"우리 아무 사이도 아냐."
"... 응?"
“전부 유한의 연기였어. 내가 부탁한 거야.”
하나마루가 자꾸 날 피해 다니니까... 괘씸하고, 화나고. 그리 말하는 동안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주인의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자, 잠깐 주인님..."
“그냥 대화 한번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열심히 의뢰하러 다니지 않나. 평소엔 그렇게나 농땡이를 치고 싶어 했으면서...”
이 웬수. 바보. 멍청이. 허리가 부러질 듯한 압박을 느끼며, 하나마루는 숨을 힘겹게 들이켰다. 대체 이 조그마한 체구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거람.
... 근데 그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다니. 진짜 미쳤군, 카와카미 하나마루.
"빨리 말하지. 진짜 최악이야..."
"미안해, 주인님... 울지 마."
"안 울거든?"
”하하, 미안...“
주인이 울고 있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사실 눈가가 시큰거리는 쪽은 그였으니까. 더 이상 슬퍼하며 흘릴 눈물은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으니, 아마 이 감정은 너무 기뻐서 스며 나오는 것이겠지. 하나마루는 제 허리 위로 감싸진 그녀의 손을 꼭 거머쥐며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아아, 나는 당신의 온기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주인님, 정말 늦은 것도 알고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 진부한 소리인 거 알지만... 이런 나라도 괜찮겠어?”
하나마루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소중한 이를 세 번이나 잃을지도 모를 미래까지 받아들이기로 한 남자의 각오는 목소리에 담기엔 너무나도 무거웠다. 주인은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키지 않고 눈물을 닦아내려는 듯한 그녀의 행동이 너무 귀여워서, 하나마루는 다시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하,.. 이런 말은 번쩍번쩍한 반지 하나라도 준비하고 해야 좀 분위기가 사는데."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 지지난달 청구서도 밀렸잖아?"
"윽... 유한이 그런 것까지 말해줬어?"
"그냥 던져본 말이었는데 진짜였구나...."
"주인님도 참~ 나를 너무 잘 안다니까."
“맞아, 이젠 하나마루를 너무 잘 알게 되어버렸어.”
그리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또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아아, 이젠 진짜로 못 참겠는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주인님."
"뭔데."
"등 뒤에서 안지 말고, 앞에서 안아주지 않을래. 실은 지금 주인님이 너무 보고 싶거든."
붉어진 그의 귀와 목덜미를 보며, 그녀는 대답 대신 쪽, 그의 목에 가벼운 버드 키스를 남겼다. 하나마루의 입에서 탄성 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 주인님. 물론 이것도 좋긴 한데,”
"입에다 하는 게 더 좋다고?"
"헤헤, 진짜로 날 너무 잘 알고 있잖아. 그래도 이번엔 내가 말하고 싶었는데."
차마 맺지 못한 말은 하나마루가 뒤로 돌아서자마자 부딪쳐 온 보드라운 입술에 삼켜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굳은 것도 잠시, 하나마루는 곧 익숙하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쌌다.
뭐... 상관 없으려나.
그도 그럴게
언제까지나
나는 당신을 사랑할 테고,
당신은 그런 내게 영원히 사랑스러울 주인님일 테니.
* 밑의 결제선은 채널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라지더라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글에 대한 간단한 해석과 후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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