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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주인] 시노노메 유한

2023 9월 합작 집사가 좋은 이유 N가지

Scarlet by 스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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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악마집사와 검은 고양이(아쿠네코) 한국 서버만 하는 유저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유의해주세요.

※ 해당 글은 유한 캐릭터의 퍼퓸 메모리 이벤트가 나오기 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해당 이벤트의 카드를 숙지하신 분과 캐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주인님이랑 진도 어디까지 나갔어, 유한 쨩?"

하나마루의 느닷없는 질문에 테이블에서 갓 볶은 커피콩을 갈던 테디의 손이 멎고, 유한의 손에 들려있던 흰 도자기 잔이 매끄러운 입술에 닿기 전에 멈췄다. 조금 전까지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하며 평화로웠던 별관에 때아닌 정적이 찾아왔다.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만이 간극을 메우는 것을 느끼며, 테디는 대체 무슨 작정으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하나마루에게 설명을 요구하듯 수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테디의 노력에도 무색하게 이미 늦었는지, 유한의 잿빛 눈동자는 광채를 잃고 차디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탁. 유한은 평소보다 큰 소리를 내며 흰 도자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걸 당신에게 말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뒤이어 톡 쏘는 유한의 한마디. 유한의 말꼬리가 저렇게 늘어지면 최소 한 시간은 설교에 돌입할 거란 신호인데. 오 제발, 테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하나마루도 순순히 긴 설교를 잠자코 들어줄 사내는 아니었는지라, 신속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 유한. 우리는 주인님의 집사잖아? 두 사람이 정식으로 교제하는 걸 알게 된 이상 주인님의 애정 전선에 아무 일도 없는지 '집사로서' 확인할 의무가 있다고?"

대체 그런 의무가 어디 있어요, 하나마루 씨. 그런 소리가 통할 것 같아요? 테디가 아픈 골을 짚었다. 신입 집사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베리언과 미야지가 옆에 있었더라면 아마 함께 이마를 짚었으리라. 그럴싸한 핑계를 갖다 댔어도 결국 조카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묻는 삼촌처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겠단 소리였으니까. 유한이 그런 말장난에 넘어갈 리 없지 않은가.

"... 일리 있군요."

그러나 테디의 예상보다 유한의 충성심은 깊었고, 주인을 위함이란 말 한마디에 설득이 된 그는 이미 진지한 자세로 하나마루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아무렇게나 던진 말에 생각지도 못했던 대어가 낚이자, 하나마루의 표정이 활짝 개였다.

"그치, 그치? 그래서, 주인님이랑 이건 언제 했어?"

하나마루가 우- 소리와 함께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며 두 엄지 손가락을 맞댔다. 하나마루의 능청스러운 농간에 테디는 시선을 피하며 유한의 눈치를 살폈다. 반면 유한은 두 엄지손가락이 마치 키스하는 연인의 머리처럼 좌로, 우로, 현란하고 야릇하게 맞대지는 모습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손가락 씨름... 말입니까?"

자신이 내린 답이 오답이란 사실을 직감했는지, 유한의 목소리엔 확신이 없었다. 별관에 다시 한번 침묵이 내려앉는다.

"... 아직 뽀뽀 안 했어 유한짱?"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가. 하나마루도 이젠 척하면 척, 유한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게 집사로서 할 말인가. 당신의 머리에는 왜 그런 생각밖에 들어있지 않은가. 인간으로서의 자질이 의심된다 등등. 유한의 비난이 실제로 귀에 못 박히듯 쏟아지기 전에 하나마루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주인님은 만족하고 계시는 거야?"

"무슨 말입니까? 그게."

"아니 뭐... 주인님도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과 손을 잡거나~ 그 이상의 이런저런 것도 하고 싶지 않을까~ 싶어서..."

어라.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었는데 이야기하고 보니 제법 그럴싸하지 않은가. 교제한 지 석 달이 다 되어가는데 연인이 전혀 진도를 빼지 않으면 보통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나? 물론 사람마다 연애의 속도는 다르지만...

하나마루는 힐끔 유한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평소처럼 차분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는 듯했다. 이거 이거, 조용한 걸 보니 심상치 않은데. 하나마루는 흠흠, 헛기침하곤 좋은 조언을 해주는 선배처럼 선심 쓰듯 말을 이어 나갔다.

"뭐... 주인님도 결국 평범하게 그 나이대 여자니까... 평범하게 스킨십하고 싶은 순간도 분명히 있을 테고, 내가 주인님이었다면 유한 쨩이 정말로 날 좋아하는 게 맞나 그런 생각도-"

그 말에 유한의 미간이 구겨진다. 이크, 화나게 했나. 쏟아질 설교를 각오하고 하나마루가 본능적으로 풀쩍 뒤로 물러났지만, 예상외로 유한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미간을 잔뜩 구긴채  책상을 내려다볼 뿐. 이거이거, 뭔가 유한 쨩도 맘 속에 걸리는 게 있는가 본데. 하나마루가 슬금슬금 다시 유한에게 다가가자, 유한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당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닙니다. 쓸데없는 얘길 했군요."

하나마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아니, 여기서부터 재밌어질 것 같은데 벌써 대화를 끝낼 순 없지. 조금만 더 캐물으면 다 털어놓을 거 같은데. 하나마루는 슬쩍 유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성큼 다가섰다.

"유한 쨩, 혹시 고민이 있는 거라면 술 한 잔 하면서 들어줄 수 있는데?"

가끔 남자끼리의 대화도 필요한 법이잖아. 그렇지, 테디쨩. 하나마루가 유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슬쩍 테디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하자 경청하던 테디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유한 씨. 유한 씨의 고민이라면 언제든 들어드릴테니까!"

"응? 어때, 유한 쨩."

하나마루가 친근하게 유한에게 어깨동무를 하자, 유한은 신경질적으로 그의 팔을 밀어냈다.


"곧 훈련 시간이니 뒷마당으로 나갈 준비나 하시죠."

훈련 시간. 네 글자에 방금 전 까지 여유로웠던 하나마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살살 배가 아픈거 같은데... 유한, 오늘 훈련은 힘들 것 같다고 하우레스에게 잘 말해주지 않을래?"

하나마루의 부탁에 유한은 요염한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런 꾀병은 통하지 않습니다. 테디 씨, 하나마루 씨 잡는 것 좀 도와주세요."

"네, 유한 씨."

"어... 테디. 우리 같은 편 아니었어?"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코 앞까지 다가온 두 청년을 보며, 하나마루는 진땀을 흘렸다.




"후..."

오랜 달리기 끝의 휴식은 달았다. 유한은 눅눅한 숲 공기를 마시며 숨을 깊게 뱉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쉴 때마다 그의 옷 아래서 가슴이 울룩불룩 솟았다 가라앉았다. 유한은 눈썹 사이로 흘러들어온 땀이 눈가를 따갑게 찌르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얼굴을 훔쳤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아직도 힘이 남아도는지 저 멀리 앞에서 하우레스와 함께 뛰어가는 테디의 살랑이는 주홍색 꽁지머리가 보였다. 평소라면 그의 뒤를 바싹 쫓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렸을 텐데.

'내가 주인님이었다면 유한 쨩이 정말로 날 좋아하는 게 맞나 그런 생각도-'

하나마루의 질문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반복된다. 유한은 질끈 눈을 감으며 나무에 기대었다. 지금까지 그 분께 애정을 부족하게 드린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연인관계란 본디 존재하지 않기에, 이를 누군가는 자만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님께 제 애정이 부족함 없었을 거란 유한의 확신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애초에 무덤까지 간직하려 했던 제 연심이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주인님을 향한 마음을 제대로 숨기지 못한 탓에 생긴 일이었으니까.




"유한은 내가 그렇게 좋아?"

태양 빛이 따사롭게 내리쬐던 석 달 전의 어느 날, 그가 받쳐 든 양산 아래서 차를 마시던 유한의 주인은 그리 물었다. 그날  특별히 유별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을 뿐. 사내답지 않게 감히 주인님을 사모한다. 당당히 밝히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유한은 결국 결례를 무릅쓰고 언제부터 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여쭤보았다.

"그야 유한의 일이니까."

그때 그분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그리 말씀하셨다. 아아, 처음엔 아름답고 지혜롭기까지 한 그분께 제 마음이 보답받은 줄로만 알았건만.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밤잠을 설치는 바람에 결국 처음으로 그의 업무에 지장이 생겼다. 일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유한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유한은 고심 끝에 다른 집사들에게 주인님과 교제를 시작했단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선배 집사들에게 따끔한 책망을 들을 각오는 되어있었다. 허나 단단히 마음먹고 그 사실을 알렸을 때, 저택의 다른 집사들이 시큰둥하게 한결같이 '그럴 줄 알았다'라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다들 어떻게 눈치챈 걸까요. 하나마루 씨와 테디 씨는 저와 같이 있는 시간이 더 많으니 그렇다 쳐도 다른 집사님들은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건지."

딱히 테디에게 대답을 바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의문을 던졌을 뿐.

"그야... 유한 씨가 티를 많이 내는걸요. 이 저택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연애나 결혼이 뭔지 모르는 무우 씨 정도를 빼면... 유한씨 의외로 얼굴에 표정이 쉽게 드러나니까요."

아, 지금도요. 유한 씨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거든요. 테디가 자신의 눈가를 가리키며 말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테디도 자신의 발언이 무례하게 들릴 수 있단 사실을 깨달았는지,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잘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후부키 아래 있을 때도, 거짓말을 해도 티가 많이 나는 편이란 이야기를 누누이 듣곤 했으니까. 아마 후부키가 자신을 옆에 두고 있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터. 자신은 읽기 쉽고, 후부키는 쉽게 남을 믿지 않았으니까. 그 남자는 삐뚤어진 한쪽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믿는 사내였으니. 인정하긴 싫었지만, 유한에 한해서 만큼은 후부키가 옳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반증하듯 그는 자신이 배신할 낌새를 보이자마자 빠르게 숙청해버렸다.

"그래도 그런 점 때문에 저와 하나마루 씨는 유한 씨를 좀 더 빨리 신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주인님도 그래서 유한 씨를 선택하신 거겠죠."

유한의 눈썹이 의아하다는 듯 까딱인다.

"... 그건 칭찬입니까?"

"물론 칭찬이죠!"

일평생 섬기던 사르디스를 배신하고 온 남자에게 테디는 그리 말하며 미소 지었다. 유한은 기묘한 감정이 움트는 것을 느꼈다. 실패투성이였던 자신이 어쩌면 지금 제법 괜찮게 해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이.

그래서 해이해진 걸지도 모른다. 이미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교제하기 전까지 주인님을 부담스럽게 한 게 아닐까 스스로 걱정이 되어 제 행동을 억누르던 그였다. 애초에 자신은 가족과 주인님 이외의 여인과 손 한번 잡아본 적 없을 정도로 이런 관계에 문외한이었으니, 정도를 모르고 억눌러 버릴 걸지도.

이 문제는 주인님과 제대로 이야기해 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유한은 그리 생각하며 테디와 하우레스가 달려간 방향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미약하게 가라앉았던 그의 숨소리가 다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잘 준비를 마치고 파자마 차림으로 침대에 들어가려던 찰나, 누군가 주인의 침실의 문을 두드렸다. 악마 집사들의 주인은 벨벳 양탄자 위로 흰 슬리퍼를 사뿐히 내디디며 마호가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고리가 매끄럽게 돌아가자, 연지를 찍은 듯 붉은 꽃잎을 닮은 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담당 집사이자 사랑스러운 애인을 발견한 주인의 미소가 활짝 만개했다.

"유한, 왔어?"

그의 말에 유한의 얼굴이 사르르 녹았다. 보는 사람에게도 행복해 죽겠다는 감정이 전달되는 황홀한 미소.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이 표정에서부터 이미 넘쳐흘렀다. 아아,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주인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주인님."

예상한 대로 고백해오는 유한 때문에 결국 주인의 입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대답 대신 유한의 잘 관리된 부드럽고 매끄러운 손에 손깍지를 끼었다. 이렇게나 섬섬옥수면서도 막상 손을 가져가 대보면 자신의 손보다 한 뼘이나 더 크다. 주인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아까 베리언이 타온 티가 있는데 같이 마시지 않을래?"

그녀가 창가 쪽 테이블을 가리키자, 유한은 그녀의 초대에 순순히 응했다. 그를 끌어당기자, 전직 군인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유한은 쉽게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이끌려 왔다. 두 사람은 미끄러지듯 방을 우아하게 가로질러 와 창가의 테이블 앞에 함께 앉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연인이지만 아직 침실에 드나들 사이는 아니었기에, 그가 이런 시간에 자신을 찾아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행복하게 웃던 그의 얼굴에 일순간 그늘이 지자, 그녀는 대화가 길어질 것을 직감했다. 촛불을 켜는 게 좋겠네. 주인은 슬그머니 서랍에서 성냥갑을 꺼내 들었다.

"위험하니 제가 하겠습니다."

"너무 과보호하는 거 아냐? 고작 성냥인데."

"주인님에 관해서는 아무리 걱정해도 부족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타이르듯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손에서 성냥갑을 앗아가 미야지가 만든 보라색 아로마 캔들에 불을 붙였다. 방이 밝아지며 은은한 라벤더 향이 방안에 퍼진다. 유한은 주인에게 연기가 닿지 않도록 성냥 근처를 손으로 가리고 후, 숨을 불어 성냥불을 껐다.

그렇게 불을 끄면 연기가 전부 본인한테 갈 텐데. 주인은 걱정스레 유한을 바라보았지만, 유한은 개의치 않는 듯 코 앞에서 손을 휘휘 젓곤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차를 다시 데우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식어도 맛있더라."

"그러면 이대로 따르겠습니다."

유한은 베리언이 가져왔을 티포트를 조심스레 들어 주인 앞 도자기 컵에 따랐다. 컵을 채워가는 붉은 차에 그의 진중한 얼굴이 비쳤다. 그런 잔 속의 유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주인은 찻숟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건드렸다. 파동이 퍼지며 수면 위로 비치던 유한의 모습이 흐트러진다.

"무슨 고민이야. 그렇게 인상을 쓰고."

"그 정도로 제 표정은 읽기 쉬운 건가요."

유한이 어쩐지 풀이 죽은 듯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도 맞긴 하는데, 그녀 자신도 타인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진 않았다. 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유한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애인이니까."

그래서 아는 거야. 주인이 요염히 속삭인다. 그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보스키가 옆에 있었더라면 아마 눈꼴시다며 얼굴을 찌푸렸겠지. 그러나 다행히 방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기쁩니다."

순식간에 얼굴이 피는 유한을 보며 주인은 피식 웃었다. 정말 알기 쉬운 사내가 아닌가. 그녀는 그의 손가락을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그의 반응을 즐겼다.

유한은 그녀가 자기 손을 가지고 노는 것을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아아, 지금이면 딱 자신의 고민을 말하기 좋은 타이밍일 것 같았다.

"실은 최근, 제가 주인님의 그... 연인 역활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가 조심스레 털어놓은 말에 의아한 듯 주인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어떤 의미로?"

"그... 혹시 제 태도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셨다거나."

주인은 말없이 유한을 바라보았다. 평소 요물도 홀릴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내는 마치 버림받기 일보 직전의 강아지처럼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주인은 귀여운 애인의 불안을 종식시켜 주기로 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그녀는 이 이상 단호할 수 없을 정도로 딱 잘라 단언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태도가 되려 가식적으로 느껴졌는지 유한의 눈꺼풀은 불안한 듯 파르르 떨렸다.

"혹, 저를 생각해서 그리 말씀해 주시는 건 아닌가요?"

되묻는 유한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다. 거울이라도 보여주면 믿으려나. 그가 그녀를 바라볼 때 어떤 표정인지 직접 볼 수 있다면 단박에 납득할 텐데. 그렇지만 유한은 그 순간에도 날 바라보느라 자기 얼굴 같은 건 눈에 뵈지도 않겠지.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유한을 납득시키지 못 하리라. 그래서 주인은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어째서 유한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녀야말로 알고 싶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대체 왜 이런 고민을 밤까지 끌어안고 혼자 끙끙대고 있는 건지. 유한은 세심한 남자라서 좋았지만, 가끔 그의 섬세함은 안쪽으로 돋은 가시처럼 자신을 찔러 상처입히곤 했다. 주인은 유한이 지금 그런 상태가 아닌지 조금 걱정스러웠다.

유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이 말해야 할 타이밍인데.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막상 꺼내려니 어쩐지 하루빨리 살을 맞대고 싶어 조르는 철없는 사내가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혹시라도 주인님이 자신을 그런 파렴치한 놈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단 오해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라도 말을 해야 오해인지 아닌지 알지."

그건 그렇지만... 우물쭈물하는 유한을 주인은 참을성 있게 옆에서 기다렸다. 그는 현명한 남자니 이렇게 힘들게 말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믿으면서. 유한은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몇번 입을 열었지만, 이내 꾹 다물기를 반복하다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게.. 지난 세 달간... 저희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지 않았습니까."

유한이 조심스레 꺼낸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주인은 눈동자를 굴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기엔 우리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는데, 혹시 내가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있었나.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 달리 유한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사람처럼 귓가가 잔뜩 붉히고있었다. 아무래도 본인은 진지한 문제인 것 같았다.

주인은 다리를 꼬며 골똘히 생각했다. 대체 뭘 안 한 걸까. 손도 잡았어. 손깍지 끼고 데이트도 하고, 서로 음식도 떠먹여 주고. 우리 뽀뽀 빼고 할 거 다 하지 않았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생각하던 찰나,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아, 주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설마 뽀뽀 안 한 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오밤중에 찾아와서 고민이랍시고 고백하는 거야? 주인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미간을 꾹 눌렀다.

"정말이지 너는..."

"주인님?"

유한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읽지 못한 듯 불안하게 되물었다. 그마저도 주인의 눈에는 사랑스러울 따름이었지만. 어쩜 자신의 반응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이리도 순수하게 쫓는지. 이따금 그 열의를 느낄 때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터져 나올 것 같단 사실을 너는 알고 있을까. 내 충성스럽고 귀여운 집사. 사랑스러운 애인.

시노노메 유한.

주인은 손을 뻗어 유한의 오른쪽 눈을 설핏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귀 뒤로 말끔하게 넘겼다. 그녀의 행동을 채 읽지 못한 그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주인의 상체가 천천히 그에게로 기울었다. 그녀의 숨결이 뺨 근처에 느껴졌다고 생각한 순간, 그분의 말캉한 입술이 제 입술 끝에 닿는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선 채로 굳어버린 유한을, 주인의 입술은 서서히 탐해나갔다.

혀끝에선 포근한 복숭아향이, 코끝엔 유한의 어른스러운 헤어 오일 향이 감돈다.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남성과의 키스는 상상보다 더 향긋했다. 그가 여자 경험이 없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키스도 제가 이끌어갈 심산이었건만.

"아, 잠깐..."

흘러나가지 못한 주인의 말이 뭉개져 날숨의 비음으로 섞여 나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 허리를 감아오는 커다란 손과 그녀의 몸짓을 빠르게 모방해 가는 그에게 먹혀가는 자신을 느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유한이 그녀에게서 곧장 떨어져 나간다.

귀 바로 옆에서 울리듯 쿵쾅대는 심장 소리와 거친 숨소리 만이 두 사람의 귓가를 아득히 메운다. 대화는 없었지만, 평소보다 더욱 무겁게 가라앉다 못해 검게 보일 정도로 짙어진 유한의 눈동자에서 주인은 깊은 욕망을 읽었다. 주인은 삼키지 못했던 타액을 꿀꺽 삼켰다.

아, 오늘 우리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되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주인은 천천히 그와 다시 입술을 겹쳤다.

* 밑의 결제선은 채널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라지더라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글에 대한 간단한 해석과 합작 후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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