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ristmas Miracle for Good Neighbors
AIWFC is JUchelle
어느덧 1년 전이 된 추억이 두 사람에게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실내 트리를 장식하던 주노가 문득 가벼운 마음으로 한마디 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내년에는 진짜 나무로 트리를 꾸며보고 싶어요.」
누림마을 본가에서는 늘 실제 전나무를 이용해서 트리를 꾸몄다고 했다. 누림이야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니 얼마든지 나무를 구할 수 있었겠지. 수확을 마친 헐벗은 과수원에 전구를 달아도 좋았다. 마당에 세워진 큰 나무, 작은 나무 할 것 없이 가랜드에 휘감기고 리본을 묶어 꽃과 베리, 겨우살이 가지와 열매 장식을 매달면 온 사방이 사람의 손으로 피어나 한겨울의 풍작이 따로 없었다.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 누림의 크리스마스 풍경이 어땠을지 가히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만큼.
반면 커다란 항구를 끼고 방파제를 겹겹이 세워, 시멘트로 온 도로와 바닥을 마감한 라이지방 제일의 도시를 고향으로 둔 에셸은 아무래도 진짜 나무보다 실내에서 트리 모형을 세우는 게 보다 일반적이었다. 이번만 하더라도 조립식 트리를 사서 연인의 집을 방문할 때까지도 어떤 의문도 갖지 않았다. 진짜 전나무로 세운 트리라면 마을 광장에 둔 커다란 것이 있기야 했지만 그것도 오며가며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 걸 집에 세운다는 건 꿈도 못 꿨다.
그렇게 실제 나무는 발상도 못했던 아가씨의 머리 위로 연인의 한마디가 느낌표처럼 디링, 하고 떠올랐다.
「그럼 내년에는 진짜 나무를 사올까요.」
그리고 보통이 아닌 아가씨의 스케일을 3년에 걸쳐 이미 파악한 연인은 서둘러 만류했다.
「지, 집보다 큰 나무는 참아주세요.」
「우.」
그리하여 아가씨의 원대한 야망은 말 그대로 꿈으로 끝나버렸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사소한 해프닝으로 지나갈 수도 있었으나 눈에 띄게 서운해하는 연인을 달랠 겸, 주노 자신도 원해서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다음날 바로 화원을 방문했다. 나무를 한 그루 사 왔는데 조그마한 전나무 묘묙을 주노의 집 앞마당에 심어 내년 크리스마스엔 이 나무를 직접 꾸미기로 한 것이다.
나무의 이름은 ‘트리링’. 종종 마당 벤치에 나란히 앉아 밤공기를 즐기던 두 사람의 시야에 새롭게 추가된 풍경이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한 해가 흘렀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건 참 느리게 느껴지는데, 1년이란 시간은 이렇게 쏜살같이 흐르다니 참 이상한 기분이에요.”
“정말요…. 나무, 매일 볼 때는 이렇게 자란 줄 몰랐는데.”
막 심은 날의 사진과 비교해보자 깜짝 놀랄 만큼 쑥 자라 있었다.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뛰는 마고의 불꽃이 모처럼의 전나무 잎을 태우지 않도록 서둘러 포켓몬을 집어 들면서 주노도 새삼스럽게 눈높이가 달라진 나무를 실감했다. 이런 것도 생명의, 또 시간의 경이로움이네요.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평일의 한가운데네요. 준비하는 데 시간이 조금 촉박할 수도 있겠어요.”
“저…,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이 시기엔 에셸도 많이 바쁘고…….”
“그렇게 말하면서 주노야말로 스튜를 끓인다고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냄비를 보는 게 아니고요?”
“그, 그건… 우. ……저도 조심할게요.”
첫해의 크리스마스는 어땠더라. 그 다음 해는. 어느새 성스러운 성탄절을 함께 보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의 시간이 되었다. 첫해만 하더라도 ‘저랑 보내도 괜찮아요?’, ‘정말로?’ 그런 퍽 조심스러운 질문을 했었다.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더, 얼마나 상대의 시간을 독점해도 좋을지 몰라서, 어디까지 욕심내도 괜찮을지 몰라서 서툴렀던 마음이다.
지금은, 여전히 때때로 ‘괜찮아요?’ 묻고 싶어지는 날도 있었다. 불신이나 의심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가령 1년 사이 전나무가 자라난 것처럼 개인에게도 관계에서도 변화란 피할 수 없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어떨 땐 상대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질문이 쏙 들어갔다. 시선에 깃든 애정을 읽으면 걱정도 주저도 눈처럼 녹아내렸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도 기대해주세요.”
일순이지만 반신반의,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던 것도 같았던 연인의 표정은 모른 척하고 에셸은 벌써부터 들떠 캐롤을 흥얼거렸다. 해가 짧아지면 부쩍 쓸쓸해지고 마는 이 시기에 크리스마스는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
──물론 에셸은 하나도 걱정이 안 돼요. 걱정되는 건 저 자신이지.
그렇다고 정말 걱정이 안 되진 않았다. 그의 사랑스럽고 기상천외한 연인이 또 어떤 놀라운 선물을 가져올지 약간은 두렵기도 했다. 이를테면 심해 8000m까지 러브다이브하는 어글리해파리스웨터라든지. 하지만 그런 연인마저도 사랑하는 법이 아닌가.
그러니까 정말로 걱정되는 건 스스로뿐이다. 무슨 선물을 줘야 좋을까. 수많은 12월호의 잡지와 인터넷 쇼핑사이트, TV홈쇼핑 채널 따위를 틀어놓고 본가를 방문한 주노는 머리를 싸맸다. 연인은 길바닥에 구르던 돌을 선물한다고 해도 “주노가 준 걸요!”하고 기뻐하며 웃어줄 사람이지만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언제나 더 좋은 걸 주고 싶은 것이다.
연인을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청년은 연인을 위해 더 좋은 선물을 고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너무 어려웠다.
“어쩌지, 카리…….”
사귄 지 곧 1000일이 가까워진다고 하는데도 한결같은 파트너를 지혜로운 후딘은 흠, 하고 내려다보기만 했다. 사랑의 큐피드를 위해 순간이동을 써주는 것도 모자라 애인 선물까지 골라주다니 업무과다다. 눈빛을 느낀 듯 주노의 고개가 푹 꺾였다. 그, 그래. 내가 힘낼게. 의기소침해진 그를 구원한 것은 기적적이게도 여자 형제들이었다.
“주노, 이거 봐. 이 누나가 너를 위해 특급 정보를 가져왔다.”
“트, 특급 정보?”
“짠.”
건네진 건 전단지였다. 다만 다른 전단지들과 차별점이 있다면 구겨짐 하나 없이 빳빳한-가령 인쇄된 것을 바로 받아온 것 같은-종이라는 것과 그가 모아온 수많은 전단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휘황찬란한 전단지 가장 위에 [한정수량 200개]라고 박혀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뭘 파는 건데?
“올겨울 최고의 잇템이 될걸?”
“그래그래, 여기까지 오는 길에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이 전단지만 보고 있더라니까.”
“에셸은 여행도 좋아하고 귀여운 것도 좋아하잖아. 분명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와중에 은근히 남자친구인 저보다 더 또래 친구를 더 잘 안다는 듯 말하는 여동생을 잠시 뚱한 시선으로 보던 주노는 그제야 전단지 내용을 자세히 읽었다. 귀여운 디자인에 굉장히 따뜻해 보이는 어그부츠를 내일부터 5일간 매일 추첨권을 배부하여 한정 판매한다는 이야기였다.
한정 수량, 그것도 추첨 형식. 운이 따르지 않으면 얻을 수도 없다. 스스로의 운에 자신이 없는 주노에게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란 무척 절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에셸의 기뻐할 얼굴을 위해서.
“알려줘서 고마워…. 꼭 얻어올게.”
결의에 찬 형제의 대답에 돌아온 것은 싸늘한 외면이었다. 아무리 소중한 혈육이라고 해도 눈앞에서 애인을 떠올리며 뺨을 발그레 물들이거나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오든 이겨내겠다고 의지를 다지거나 아무튼 가족에게는 보이지 않을 얼굴을 하거든 기분이 참 요상해진다는 것을 방금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이제 하루이틀이 아니고, 금세 기분을 다잡은 자매들은 언제 준비했는지 셋이서 하나씩 형제의 품에 무언가를 안겨주었다.
“그럼 지금 당장 출발해.”
“자, 침낭. 이건 핫팩.”
“보온병에 차 담아놨어.”
“뭐? 지, 지금 당장?”
“설마 안일한 마음으로 선물을 얻어내려는 건 아니지?”
“이 라이지방 전역의 연인이 오빠의 적이야. 라이벌이라고.”
“그, 그렇게까지??”
“가서 꼭 이겨내고 와야 해-!”
“네 앞에 50명이 있든 100명이 있든 물리치고 와~!”
1명도 제대로 넘어설지 어떨지 모르는 청년에게 무슨 말인지. 그러나 이렇게 등이 떠밀려서야 못 하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주노는 눈물을 삼키고 쫓겨나듯 집을 나섰다.
과연 그는 라이지방 전역의 연인들이 노린다는 소문의 어그부츠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결과는 크리스마스 개봉 박두다.
*
한편 연인의 걱정은 꿈에도 모르는 채 에셸은 행복한 고민에 젖어 있었다. 트리 장식으로는 무엇을 준비할지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무슨 옷을 입고 입힐지, 음식은? 음악은? 천성이 파티 피플인 에셸에게 크리스마스는 가히 존재 자체로 한해의 선물일 만큼 중대사였다.
“마당에서 전나무를 꾸민다고 해도 역시 실내에 둘 미니트리가 있으면 좋겠어요. 오너먼트는 어떤 종류를 모아볼까요. 저번에 마고가 굉장히 양말에 들어가고 싶어 했는데 이번엔 마고도 들어갈 만한 큰 양말을 준비해서…… 아!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연습해야 해요. 당일에 실패하지 않으려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남았다. 주노의 머릿속에선 종잡을 수 없는 연인의 선물이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달고 뻗어가는 것 같았지만 에셀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상한 걸 준비할 생각은 없었다. 그야, 해파리 스웨터는 이상한 게 아니니까!
선물을 고르는 데 있어서 첫째는 받는 사람의 기쁨이오, 둘째는 주는 사람의 기쁨이며, 셋째는 이날 이때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란 지점에서 크리스마스 스웨터는 아주 훌륭한 선물인 것이다-같은 맥락으로 밸런타인 초콜릿도 대단히 좋다-. 그러나 다행히 이런 에셸의 눈에 신비로운 스웨터보다 더 좋은 것이 눈에 들어왔으니 그것으로 말하자면,
“[한정 수량 200개, 크리스마스 에디션 어그부츠]?”
사람들의 소비 욕망을 부추기는 카피라이터 혼신의 문구가 에셸의 가슴을 울렸다. 올해의 선물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얻을 수 있다면.
*
그러나 인생이란 셸링지수가 언제나 상승세만을 그리지 않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 주가가 상승하면 반드시 하락하는 것처럼 연말 특수성이라는 이름의 굴레가 두 사람의 발목을 덮쳐와 행복한 연인의 시간을 마구 방해하기에 이른다.
가령 남자에게는 그랬다. 출근 시간에 양해를 구하고 3일 연속 싸늘한 철야를 해도 추첨되지 않는 운이라든지, 혹은 추첨권을 넣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든지, 몰아치는 일거리에 퐁당 빠져서 꿈속에서만 벌써 몇 번째 당첨인지 모를 부츠를 손에 넣는 순간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다가 젖병을 놓칠 뻔한다든지, 그럴 때마다 양 어깨를 짓누르는 포켓몬의 칭얼거림에 허리가 휠 것 같다든지 마치 질투의 신이 연인을 저주하듯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주노, 너 괜찮냐?”
“헉, 네, 넷. 괜찮, 괜찮습니닷…! 으읏.”
“내일도 밤샘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다 몸 축난다.”
“저… 네. 이제 추첨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고… 이틀만 더 시도해보고….”
안 되면 그때부터 다시 새 선물을 고민해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눈앞의 기회에 매달리고 싶었다. 언제 이렇게 끈질긴 사람이 되고 만 걸까.
과거였다면 ‘어차피 난 안 될 거야.’ 생각하며 하루 만에 포기해버렸을 것이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게 두려워서 기대조차 갖지 않으려고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가짐이 달랐다. 기대를 안고 노력하는 게 더 이상 걱정스럽고 무섭지 않아졌다. 어떤 결과이든지 연인이 웃어줄 것을 알기에.
들뜬 마을 분위기에 영향을 받듯 한층 더 기운 넘치는 포켓몬들에게 마구잡이로 휘둘리면서 주노는 거뭇거뭇해진 눈가를 문질렀다. 아직 조금 더 힘낼 수 있었다.
여전히 요령은 없어도 끈기 하나만은 알아주게 된 청년은 길게 하품을 하고는 침낭을 햇볕에 말렸다. 퇴근하자마자 쓰러져 잠들었다가 새벽같이 나와서 혜성시티로 이동, 거기서 마고의 불로 끓인 차를 마시며 아침을 기다리다가 추첨권 결과를 받아 터덜터덜 출근. 벌써 며칠째 혜성시티 백화점 앞에서 3년 전의 캠프 때를 추억하듯 노숙 중이었다.
오늘 밤도 출석하겠지. 밀린 집안일을 보면 비명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남은 기회는 고작 이틀이었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그러니 딱 이틀만 더 저질러보자.
다만 끈기는 있어도 반드시 그것이 보답받지 못한다는 것만이 비극이었다.
[주노, 오늘도 힘내고 있나요? 연락을 못해서 미안해요. 많이 보고 싶어요.]
때마침 연인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눈물 스티커를 붙인 귀여운 사진과 함께. 보자마자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조금 전까지 축 내려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휴식시간은 앞으로 5분, 주노는 그 시간 전부를 써서 심혈을 기울인 답장을 했다.
선물을 생각하는 시간이 고되지 않았다. 무사히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불안했지만 선물을 받고 기뻐할 연인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어디선가 자꾸 힘이 솟았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힘이 나고 행복해지다니 참 이상하고 신기하지. 그런 기분을 몇 해째 느끼고 있는 것이야말로 말이다. 조금 감상적인 기분에 잠기던 그의 눈에 무언가 들어온 건 이 다음이었다.
*
달링무역상회는 라이지방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선박을 지닌 곳이다. [여러분의 행복을 운송해드려요~] 그 캐치프레이즈에 맞게 지방과 지방간의 도매업만 하지 않고 사람들의 개인 의뢰와 소매업도 겸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처음에야 그렇게 큰 회사가 아니었으니 소매업도 중요한 수입 중 하나였으나 지금 같은 규모가 되고 나서부터는 어느새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달링 상회가 개인 의뢰를 계속해서 받는 건 회사를 시작할 때 세운 운송의 책임감이었다.
쉽게 오갈 수 없는 거리, 개인이 구매하기 어려운 상품, 너무 많은 기회비용, 그런 것들을 회사가 약간의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으로 대신 이뤄줄 수 있다면 마땅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감히 타인의 행복을 운운한다면 품어야 할 각오다.
처음 상회를 연 증조부의 뒤를 이어 2대째, 조모의 세일즈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달링 상회의 중요한 근간이었다. 그러니까 즉, 이야기가 길어졌으나 결론은……
“바, 빠요….”
연말연시는 철야의 또 다른 이름이란 말이렷다.
연일 야근이었다. 주문서가 형광등을 가릴 만큼 빼곡히 쌓였고 발주서가 그 옆에 같은 높이로 쌓였다. 들어온 주문서를 리스트 업하고 각 판매처마다 연락을 돌려 물품을 확인했다. 단순히 운송만을 맡은 상품은 그보다 많았다. 창고별로 물건이 제대로 도착했는지 확인하다 보면 식사도 잊기 일쑤였다.
퇴근이 요원했다. 방치해둔 휴대폰이 차갑게 식어 방전된 줄도 모르고 창고를 순회하고 돌아오면 뺨도 손도 꽁꽁 얼어서 생각까지 마비되었는데 그렇게 돌아와서는 퇴근이 아니라 때를 놓친 식사를 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실무팀은 아예 퇴근도 않고 숙식을 회사에서 한다던가.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사람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퇴근시키고 급하게 아르바이트를 더 뽑았지만 물량을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
「내년부터는 주문서 받는 쪽을 분리해야겠어.」
「하지만 주문 대행도 운송 대행도 창고를 써야 합니다. 나눌 경우 창고 적재량 파악이 어려울지도……」
「아예 창고까지 따로 쓰는 건……」
「잠깐, 잠깐. 내년도 논의는 크리스마스 지나고 하자고요!!」
갑자기 작년의 2배가량으로 늘어난 주문량은 그만큼 경기가 호황이라는 좋은 의미였으나 상회의 준비가 미흡했다. 그야말로 나옹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겨우 집에 들어가선 씻고 옷만 갈아입고 다시 출근하거나, 새벽까지 일을 하다가 아침에 퇴근해서 잠깐 눈 붙이고 오후에 출근하거나, 휴대폰에는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가 쌓였고 오죽하면 달링하우스의 가족들이 연락도 안 되는 언니를 위해 도시락을 싸 들고 회사로 찾아올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게 참 속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대하던 날인데 신경을 도통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꺅……!”
“조심해요, 달링 씨! …어휴, 많이 피곤한가 봐.”
“발주 검토를 혼자 다 하고 있잖아. 눈 충혈된 거 어쩜 좋아.”
차 대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양손에 감싸 쥐고 걷던 중이었다. 발을 헛디딘 탓에 커피를 반쯤 쏟아 버린 에셸은 걱정해주는 동료들의 목소리에 힘없이 웃었다. 이참에 차가운 걸로 바꿀까. 정신이 더 번쩍 들도록.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 눈이 번뜩여 쇼윈도로 향했다. 전시된 트리가 너무 예뻤다. 눈 결정 모양이 새겨진 투명한 유리 오너먼트와 파스텔 톤의 꼬마전구, 진저 쿠키와 천사 장식, 하나같이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웠다. 유레카! 전구에 불이 들어온 건 에셸의 머리 위도 마찬가지였다.
“저 잠깐 다녀올게요!”
점심시간을 마치기 전 15분, 눈이라도 붙이려던 계획이 노선을 이탈하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데친 시금치처럼 시들시들해져 가던 마음이 멋지게 살아났으니까.
그렇게 종이 봉투를 품에 가득 안은 에셸의 눈에 지나칠 수 없는 일이 들어왔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크리스마스 집중 주간이 끝났다. 여전히 받아야 할 물류가 산처럼 남아 있었지만 적어도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들어가야 할 물건들은 다 들어 왔다. 남은 건 라이지방 안에서 힘내야 할 문제다.
“모쪼록 정말로 잘 부탁해요~”
수많은 딜리버드와 짝을 이루는 배달원들에게 산타 모자와 핫팩, 물품 리스트를 넘긴 에셸은 그들이 썰매를 끌고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작은 해방감을 느꼈다. 서리 산맥을 맨몸 등반한 기분이 이럴까. 그래도 끝나고 나자 뿌듯한 성취감이 있었다. 지금부터 집집마다 행복이 도착할 것을 상상하면 더욱 더.
일에 치이는 채로 12월을 보내고 나니 내일이 벌써 대망의 크리스마스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위해 오늘은 케이크를 구워야만 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없는 성탄절이란 팥 없는 찐빵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찐빵 표면의 하얀 막을 벗겨낸 것과 다름없다는 정도의 실감이 있다. 그만큼 필수불가결이란 의미다.
「음식은 제가 미리 해둘 테니까, 에셸은 저… 케이크를 부탁해요.」
주노도 며칠 전부터 비장의 야채스튜를 끓이고 파이지를 펴서 시몬파이를 굽고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을 테지. 이왕이면 에셸도 거들어도 좋았지만 어째서인지 거부당해-틀림없이 거부였다. 사양이 아니라-대신 케이크는 맡겨달라고 했다. 이럴 때 함께 사는 가족이 있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이었다. 전날까지도 야근으로 헤롱헤롱한 에셸을 대신해 귀여운 동생들이 케이크를 만들 밑 준비를 해두었다. 주방으로 오자 앞치마와 머리띠, 볼과 녹인 버터, 계량 저울에 밀가루 등 필요한 준비가 모두 끝난 풍경이 반겨주었다. 감동으로 벅찬 표정을 한 언니에게 두 동생이 뿌듯한 미소를 보낸다.
“그럼 지금부터 렛츠 베이킹 타임이에요~”
“흠, 최선을 다하겠다!”
“렛츠 리본~”
머리카락이 쏟아지지 않도록 색색의 리본 머리띠를 쓴 달링 하우스의 세 식구는 그렇게 케이크 만들기에 돌입하였다.
이쯤에서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고백하자면 에셸은 요리도 좋아하고 과자 굽기도 좋아하지만 케이크를 만드는 대단한 취미까지 있진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보다 부의 순환에 앞장서는 이다. 아마추어가 만들기보다 사는 게 낫다는 주의로서 반죽을 조물조물하고 싶은 날이 아니라면 새로운 카페를 발견하는 쪽이 더 좋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조금씩, 직접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늘었다. 과정에서의 행복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서 만들었는데 이걸 받았을 때 기뻐할 얼굴,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 제게 돌아올 미소, 그런 것들을 생각하자 직접 만들고 싶어졌다. 조금 불순한 마음일까?
“시트가 아직 부드러울 때 살살 마는 거예요. 살살~”
“살살~”
올해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부쉬 드 노엘. 롤 케이크는 난이도가 아주 높았다. 부드러운 시트를 둥글게 말다가 찢어지거나 부서지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없는 시간을 쪼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다. 실패한 롤 케이크를 먹는 것도 지겹다고 바나링이 불만을 표할 만큼.
그러고도 아직 완벽히 말지 못해서 손끝에 긴장감을 매단 채 에셸은 크림을 바른 시트를 신중하게 말았다. 겨우겨우 끄트머리에 와서 조심스럽게 손을 떼고 세 사람은 숨죽여 시트의 추이를 살폈다. 이윽고,
“……휴!”
“성공이야, 에시!”
“후후, 멋지게 성공이에요.”
아직 방심하기엔 일렀지만 우선은 예쁘게 말렸다. 나선을 그리는 롤 케이크를 뚫어져라 보며 곤두서 있던 어깨의 긴장을 푼다. 이어서 크림에 코코아 가루를 섞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어서 그의 기뻐할 얼굴이 보고 싶었다. 동시에 그를 생각했다.
그 역시 제가 기뻐할 얼굴을 떠올리며 준비하고 있을까. 기대하고 있을까. 어서 연인을 보고 싶었다.
*
전날엔 일부러 일찍 잤다. 세 자매가 얼굴에 팩을 붙이고 깔깔대고 떠들다 거실에 모여 오순도순. 아침에 일어나서는 완벽하게 복장을 갖추고 리본이 예쁘게 묶였는지 체크를 하고 경쾌하게 집을 나왔다. 최고의 컨디션이었다.
어느 마을이나 그렇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살비 역시 집집마다 캐롤이 흐르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물씬이었다. 친구, 연인, 가족, 행복이 넘쳐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익숙한 녹색 대문 앞에 선 에셸은 놀라 탄성을 내뱉었다.
“세상에. 언제 이렇게 다 꾸민 거예요.”
“그래도 트리는 앗, 트리링은 남겨뒀어요. 에셸이랑 같이… 하고 싶어서요.”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부터 내내 현관 앞을 떠나지 못하던 주노가 냉큼 달려와 짐을 받았다. 밤 사이 새롭게 내린 눈 위를 뽀득뽀득 밟으며 에셸은 금세 크리스마스로 변모한 그의 집을 놀라며 둘러보았다. 꼭 마음이 통한 것처럼 에셸이 사온 트리 장식과 색감이 맞았다. 이건 셸링 지수가 상승할 조짐이에요. 신이 난 여자는 케이크만 냉장고에 잘 넣어둔 채 그를 당겼다. 어서 트리 장식 하러 가요. 어서요! 공기가 달콤했다.
“아, 그 전에.”
“그 전에?”
가장 중요한 걸 잊을 뻔했어요. 아니, 사실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데요. 기다렸어요. 이 말을 하기 가장 좋은 순간을. 재잘거리는 연인의 목소리에 일상감이 들었다. 에셸은 이런 사람이었지. 전화는 꾸준히 주고받았지만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유독 각별했다. 그래서 내용보다도 마치 노래하듯 운율감을 가진 목소리에 언뜻 빠지려던 주노에게 그녀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앗, 어엇, 무언가 반응하기 전에 달콤한 향이 코끝에 닿았다. 밀가루와 설탕, 버터 사이로 연인이 좋아하는 향수까지.
“보고 싶었어요, 주노.”
크리스마스 용의 도톰한 망토와 털장식이 꾹 눌리도록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쿵, 쿵, 심장 소리가 들렸다. 조금 빨라진 것 같아요. 점점 더 빨라져요. 잠시 굳어 있던 그의 두 팔이 에셸의 등을 감싸 안은 건 직후였다.
“저, 도요. ……보고 싶었어요.”
감정을 눌러 담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캐롤과 섞여 피부 위로 다정하게 내려앉았다. 며칠간의 고된 마음에 따뜻한 위로였다.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마법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출장을 간 것도 아닌데 이렇게 오랫동안 못 보긴 처음이었죠. 정말요. 가까이 있는데도 쉽지 않아서……. 도란도란 근황을 나누었다. 감싼 팔을 풀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애틋한 해후를 마치고 두 사람은 전나무 앞으로 돌아왔다. 품에는 트리 장식이 담긴 묵직한 상자가 있었다. “트리링에 다 달긴… 저, 아직 나무가 작아서.” 주노의 현실적인 지적에 뒤늦게야 에셸도 아차했다. 마음이 앞섰던 모양이다.
“그래도 잘 보관하면… 내년에도, 후년에도 쓸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아, 주노. 저희 이것부터 달아요.”
“에, 에셸. 조심해요!”
저만 조심할 게 아니라 같이 달아야죠. 에셸이 빙긋 웃었다. 어떻게 같이요? 어리둥절한 주노의 옆에서 후딘과 몽얌나가 자신들의 트레이너를 염동력으로 들어 올렸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무의 높이란 것이. 그래도 이게 크리스마스 무드란 걸까? 두 발이 지상에서 멀어져 두둥실 떠오르자 고작해 한두 뼘 높이가 신이 나고 웃음이 났다. 마법을 체험하는 것 같았다. 함께 나무 꼭대기까지 올랐고 노랗고 큰 별을 세웠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얀 눈 결정의 오너먼트, 털이 복슬복슬 달린 녹색과 분홍색의 가랜드, 파트너를 닮은 불켜미 모양의 초와 금색의 숟가락도 트리 곳곳에 달렸다. 천사, 진저쿠키, 리본이 묶인 선물상자, 각양각색의 장식 사이로 종종 한 입 베어먹은 열매나 해파리 따위의 우스운 장식도 있었다.
“우와, 전구 모양이 리본이에요….”
“굉장하죠! 제가 주문한 게 아닌데 동료분들이 다 제가 주문했다고 놀리지 뭐예요~”
저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고 주노는 굳이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꼬마전구 모양이 리본이라니, 모르는 사이 세상이 한층 더 리본단에 점령당해 버린 걸까.
트리 꾸미기를 마치고 아래쪽엔 선물상자를 여럿 두었다. 포켓몬을 위한 것도 있었고 서로에게 주기 위한 것도 있었다. 크기를 볼 땐 이거랑 이거랑 자리를 바꿔서… 포장지 색이 이렇게 나란히 두면 더 돋보이고 예쁠 것 같아요. 앗, 여기 좀 구겨졌다. 배치까지 꼼꼼히 신경 쓰는 연인 옆에서 덩달아 저, 정말 이렇게 두는 편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굉장해요. 고개를 끄덕이던 주노가 문득 귀 끝을 발갛게 물들였다.
“응? 무슨 생각해요, 주노?”
“아, 저기 그게…….”
그것을 못 보고 지나칠 에셀이 아니기도 했다. 나란히 쪼그려 앉은 채 무릎 위로 고개가 살짝 기운다. 동그란 눈이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놓치지 않겠다고 주의 깊게 응시해 왔다. 밀려오는 파도 빛깔의 눈동자에 온전히 담긴 채 주노는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 크리스마스, 그…. 선물 고르는 것도 파티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정말 즐거웠어요. 에셸이 기뻐해 줄까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힘이 나서.”
저도 그랬어요! 연인이 활짝 웃으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 같은 마음이었네요. 기쁜 듯 그녀의 뺨도 전구 조명을 따라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주노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트리 장식도 사실 혼자, 다 할 수 있었는데. 그건 왠지 같이 하고 싶어서, ……집은 다 꾸며놓고선 이상, 하죠. 하하. 에셸이랑 같이 하고 싶어서 남겨놨는데. ……지금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져서.”
“알 것 같아져서?”
청년이 고민하듯 눈을 데룩 굴렸다. 고민은 짧았으나 행동은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사귀고 나서 벌써 네자릿수에 달하는 나날을 보내고도 이럴 때 수줍고 부끄러워하는 점은 연인의 변치 않는 부분이었다. 앞으로도 분명, 적어도 강산이 변하도록 거뜬히 변하지 않을 부분이 아닐까. 그래서 에셸은 얼굴이 잘 익은 당근처럼 벌게진 채로 고개를 가까이 해오는 그에게로 살풋 눈만 감았다. 그래도 이제는 물어보지 않아요. ‘해도 돼요?’ 하고.
쵹, 하는 보드라운 감촉이 아쉽지 않을 만큼 입술 위를 머물다 떠났다. 입꼬리가 말려 올랐다.
“……같이 준비하는 쪽도, 그, 무척… 기쁘다는 생각을, 했어요.”
트리, 같이 꾸며줘서 고마워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겨우살이 오너먼트가 조명을 받고 반짝였다. 겨우살이 가지의 축복 아래에서 두 사람은 조금 더 머물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
짠 것처럼 웃음이 나는 기가 막힌 해프닝은 이 다음에 벌어졌다. 파이가 오븐에서 익어가는 동안 치러진 선물 교환식에서다. 꾸러미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짐작도 못한 일이다. 그런데 막상 포장을 열어보자 둘 중 하나는 메타몽이 변신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동일한 물건이 튀어나왔다.
“엑?”
“네에?”
2024 한정 에디션 어그부츠. 종아리 반까지 오는 길이로 입구에는 보드란 털이 복실거리고 귀여운 리본방울과 타탄체크로 마감을 한 디자인의 그것. 모든 라이지방 연인들이 노린다던 소문의 한정 200개 수량 말이다. 그게 어쩐 일인지 4/200 확률로 이곳에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세상에. 말도 안 돼요! 어쩜 이럴 수가.”
얼떨떨한 주노와 다르게 에셸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메르헨 대 폭주였다. 이게 바로 연인 간의 텔레파시라는 걸까요? 아니면 운명? 세상이 또 저희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조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정말 부정의 여지가 없어-다른 때라고 부정하던 건 아니지만-주노도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아득한 웃음을 흘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더욱 기가 막힐 만도 했다. 사실 이 부츠가 에셸의 손에 들어온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연일 철야로 인해 혜성시티까지 갈 시간이 없었던 에셸은 한정 수량 추첨권 마감이 오늘인지 내일인지도 모르는 채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점심, 막 트리 장식 오너먼트 쇼핑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던 에셸의 눈에 주소지 한 장만을 손에 든 채 길을 헤매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곤란한 사람을 절대 넘어가는 법이 없는 에셸은 당연히 말을 걸었다. 사정을 듣자 하니 겨울을 맞아 펜팔 친구를 직접 만나러 다른 지방에서부터 왔다는 모양이었다.
「지금 편지를 보내면 크리스마스까지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돕고자 하는 마음에 불이 붙지 않을 수 없다. 아이가 손에 든 주소지를 확인하자 왜 길을 헤맨 건지 이유도 찾을 수 있었다. 주소지의 철자가 틀렸던 것이다.
이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공중날기 택시를 부르고 택시비를 대신 지불해주고, 목적지인 마을에 도착한 다음에도 주소지까지 가는 약도를 그려주었다. 혹시라도 라이지방에서 머무는 동안 또 곤란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명함도 주었다.
「곤란한 일이 아니어도 연락해도 좋답니다.」
「고, 고맙습니다.」
그러다 지나가듯 이야기했다. 아이가 가는 지역에서 추첨하는 크리스마스 한정 상품을. 에셸의 의도는 ‘모처럼 멀리서 온 기념이니까 친구와 함께 추첨권에 응모해보세요.’였으나, ──아이는 에셸에게 받은 명함을 그곳에 넣었다.
이것이 갑작스럽게 당첨 연락을 받게 된 전말이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자신이 피로한 나머지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다. 그야 간 적도 없는데 당첨됐다니 말이다. 결국 에셸은 바쁜 업무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될 즈음 두 친구를 찾아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건 두 말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신기하죠. 다음엔 그 친구에게 저도 편지를 보내기로 했어요. 부츠 인증샷과 함께.”
“그건, 에셸이 좋은 일 해서 복 받은 거, 아닐까요. 아, …….”
“주노는요?”
“저, 저는……. ……그,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었는데 갑자기 에셸 말을 들으니까 생각이 나서, ……아무 연관은 없는데요.”
네에, 듣고 있어요. 이번에도 역시 경청해주는 자세에 주노도 쭈뼛거리며 당첨되기 전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특별한 일은 전혀 아니었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자리로 복귀하자 몇몇 포켓몬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주노가 다가가자 포켓몬들이 그를 어디론가 잡아당겼다. 곧잘 있던 일이기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간 곳에는 놀랍게도 다친 포켓몬이 있었다.
「깜지곰…! 아, 아니 그런데 깜지곰이 혼자 있을 리가…….」
어딘가에 링곰이 있는 건 아닐까 겁을 먹으면서도 다친 포켓몬을 그냥 둘 순 없었다. 황급히 가지고 있던 상처약으로 치료하고 기력이 쇠한 깜지곰에게 주먹밥을 나눠주자 다행히 왕성하게 먹어 치웠는데, 괜히 깜지곰을 데리고 이동했다가는 어미와 엇갈리거나 야생 포켓몬에게 인간의 냄새가 묻을까봐 걱정돼서 접촉은 최저한으로 했다는 설명도 덧붙었다.
“치료도 하고 기력도 회복해서, 깜지곰이 혼자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블리스와 같이 몰래 지켜봤는데 다행히 어미 링곰과 무사히 만났, 더라고요. 저도 안심하고 돌아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세꿀버리의 벌집을 하나 주웠다. 이것 때문에 깜지곰이 혼자 떨어져 있던 거구나. 벌집을 주우며 그것이 착한 일의 대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다음날, 칠전팔기(七顚八起), 아니 사전오기 끝에 추첨에 당첨된 것이다. 그때는 당첨된 게 믿기지 않아서 기뻐하기만 했는데 에셸의 이야기를 듣자 꼭 마치……, 마지막에 와서야 민망한 듯 우물거리며 말을 끝맺지 못하는 주노를 대신해 에셸이 방긋 웃었다.
“은혜 갚은 테일로 이야기네요!”
“그으, 러게요. 하하….”
타이밍 좋게 오븐의 알람이 울렸다. 주노가 벌떡 일어나 오븐을 황급히 열다가 뜨거움에 화들짝 놀랐다. 파이는 두말 할 것 없이 완벽했다.
파이의 김이 한 풀 식기 기다리는 동안 먼저 데운 스튜를 그릇에 담았다. 미트소스를 듬뿍 바른 라자냐와 버섯과 옥수수를 넣은 그라탕, 허브솔트를 뿌린 그릴드 스테이크에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를 겹쳐 올리는 산뜻한 카프레제 샐러드, 이날을 위해 준비한 샴페인과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은 부쉬 드 노엘까지 차례차례 접시에 담겼다. 테이블 한가운데는 크리스마스 로즈를 메인으로 한 꽃다발과 붉은 향초가 타올랐다. 은은한 향과 조명이 공간의 무드를 돋웠다.
접시를 나르는 동안 신이 난 듯 한 번도 바깥을 밟지 않은 부츠를 신은 에셸이 콩콩, 발을 맞춰 걸었다. 이러다 도로시처럼 날아갈까. 기분은 벌써 이미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너무너무 맘에 들어요. 걷기도 편한 것 같아요! 연인의 미소가 꽃처럼 활짝 피었다. 발 사이즈야 손가락 둘레를 알았을 적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서로 가져온 부츠의 사이즈가 동일하니 누구 것인지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 주노도 지금 신어볼래요? 결국 두 사람이서 나란히 실내에서 시착식을 열었다. 카메라 셔터음이 연이어 들렸다.
착한 일을 했더니 복이 내렸다. 크리스마스에 걸맞은 동화 같은 이야기다. 세상이 두 사람에게 지극히 상냥했다. 그만큼 세상에, 이웃에 더 상냥해지고 싶었다. 행복감에 젖어 샴페인을 따르고 유리가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케이크 무척 맛있어요. 주노가 먼저 감탄했고 스튜도 따뜻하고 다정한 맛이에요. 에셸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신발이 두 켤레나 돼서 어떻게 할까요.”
“음, 어쩌지…….”
“한 켤레는 보존용으로 남겨둔다거나? 우리의 멋진 운명을 기념해서요!”
“아, 그것도 좋을 것 같아요. 마고가 엄청 탐내고 있기는 한데…….”
보존용이라고 했지만 실내에 장식해두었다가 어린 불꽃숭이의 장난감이 될 미래가 눈에 훤히 그려졌다. 갓 태어났을 때에 비해 부쩍 자란 불꽃숭이는 에나비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굴뚝이며 냄비며 양말이며 구멍 같은 데 쑥 들어가길 좋아하는지. 에나비처럼 그 안에서 식빵이라도 구우려는 게 아니라 그저 몸이 딱 맞는 곳을 들락날락하고 싶어 하는 게 순 장난꾸러기가 따로 없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알아들은 포켓몬이 테이블 위로 튀어 오르려다 붙잡혔다. 말썽꾸러기의 입에 포핀이 쏙 들어간다.
“아니면… 기증할까요?”
“기증이요?”
“네. 마침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쿠키와 여러 가지를 이웃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했거든요. 거기 포함해서요. 저희의 특별한 인연으로 얻게 된 신발인 만큼 한 번 더 좋은 곳으로 순환하게 된다면 뜻깊을 것 같은데…… 어때요?”
“저, 좋아요. 좋은 생각 같아요…!”
크리스마스 다음날도 두 사람의 캐롤은 아직 끝나지 않을 모양이다. 눈이 마주친 연인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웃었다. 웃음이 2배가 되자 행복도 2배가 되었다. 깃털이 피부를 간질이듯 심장께가 간질거렸다. 혹은 마음에도 초가 켜진 것처럼 따뜻해졌다.
하얀 도화지 위를 수많은 색이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래전, 12색의 크레파스를 가지고 도화지 위에 알록달록한 트리를 그리던 풍경이 지났다. 행복이라고 적힌 도화지를 물들이는 것은 사랑, 벅차오르는 그 이름, 그리고 존중, 이해와 배려, 그리고 다시 사랑. 다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특별한 충족감.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건드리자 주노가 다급하게 그 손을 맞잡았다. 얽혀든 손가락 사이로 어느새 자국이 남을 만큼 오래 낀 반지가 작게 부딪치고 눌렸다. 벽난로가 타들어 가는 소리, 우디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향초의 불꽃, 어느새 또 내리기 시작한 눈이 창밖의 꼬마전구 위로 살금살금 쌓였다. 트리가 하얀 모자로 덮였다.
늦기 전에 트리 앞에서도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요. 부츠가 잘 보이도록요. 속삭이면서도 지금은 아직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요, 이번엔 그 말조차 않은 채 반지의 표면이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워질 때까지 오래도록 손을 잡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밤이 트리 아래로 발자국이 남기를 기다려주듯 느릿하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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