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AU][당보청명] 그 의원.
* 커플링으로 쓰긴 했는데 걍 조합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합니다. 논컾으로 먹어두 대고, 커플링으로 먹어두 댑니다.
* 검수 당보와 의원 청명 if
반짝.
청명의 손에 들려있던 기다란 대침 하나가 서늘하게 빛났다. 당보는 차마 그것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린 체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기나긴 침묵. 깨끗한 천으로 대침을 닦아내던 청명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당보야."
"예……."
침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슬, 당보를 향했다. 그 안에 넘실대는 고요한 분노를 읽은 당보가 눈을 질끈, 내리 감았다.
"저번에 내가 뭐라 했는지 기억 나냐?"
"그……."
당보는 시간을 끄는 것이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왜냐고? 자신이 이 인간이랑 부대끼고 산 지가 얼마인가. 그를 잘 아는 건 천하제일(天下第一), 아니, 천하제이(天下第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금 그의 물음엔, 사실대로 말해도 뒈지고, 거짓을 고해도 뒈지고, 침묵해도 뒈지는 길이었다. 응? 선택지가 왜 이 모양이냐고? 별 수 있나. 저 의원 형님의 성격부터가 저 모양인 것을. 역시나 당보가 뜸을 들이는 시간이 길어지자 청명이 먼저 입을 떼었다.
"좋아.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니 다시 말해주마. 한 번 더 내가 붙여준 몸뚱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오는 날에는, 이 대침이 니 대가리에 꽂히던가, 아니면 내 주먹이 니 대가리에 꽂히던가, 둘 중에 하나라고 했지."
청명의 말투와 목소리 하나만큼은 저 깊은 산에 유유하게 흐르는 물처럼 잔잔하게 흘렀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다정하게 타이르는 듯한 조곤조곤한 음성이였으나, 저 목소리로 내뱉는 말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이렇게나 의원이 안 어울리는 자가 있을까. 청명의 의술을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이라면 그가 의원을 사칭하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을 소매로 훔쳐낸 당보가 달달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 의원 형님, 살려주십쇼."
청명이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당보는 절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청명이 들고 있던 대침을 원탁에 콱, 내리꽂았다. 그것 뿐인데, 대침의 반의 반절이 나무를 뚫고 박혀들었고, 그 주변으로 희미하게 금이 갔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당보의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렸다. 청명의 얼굴엔 아까와 같은 미소는 더 이상 없었다. 이 인간은 역시, 의원이 아니라 무인의 재질이 아닐까. 전공을 잘못 찾은 것 같은데.
"살고 싶긴 한 모양이지? 난 또……. 매번 몸뚱이를 이 지랄로 만들어 오기에 냅다 뒈지고 싶은 줄 알았다."
"그, 그럴리가…… 있겠소……."
"그래서……."
박혀있던 대침을 또 가볍게 쑥 뽑아낸 청명이 무서운 기세로 당보를 노려보았다. 아, 망했네. 흡사 맹수가 이를 드러내는 듯한 표정으로 으르렁대던 청명이 나즈막히 물었다.
"대침? 주먹?"
대침으로 맞고 싶은지, 주먹으로 맞고 싶은지 묻는 물음일터였다. 당보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곤 용기를 담아 그를 똑바로 마주보며 입을 연다.
"둘, 둘 다 싫……."
"둘 다 좋다고? 오냐, 소원대로 해주마."
청명이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당보는 식겁하며 몸을 물렸으나 청명이 그에게 달려드는 것이 더 빨랐다.
한 객잔에서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
쯧, 혀를 찬 청명이 두어번 손을 털었다. 그의 발 밑에는 머리에 혹 몇 개와 대침 몇 개를 주렁주렁 단 당보가 엎어진 체 꿈틀댔다.
"의원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니까, 더럽게 안 들어먹으니 이 꼬라지가 나는 거 아니냐."
이래서 무인들이란. 하고 덧붙인 청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이 꼬라지가 된 건 의원 형님 탓인데…….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킨 당보가 낮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당보를 엎어놓은 체로 주섬주섬 치료를 하기 시작한 청명의 모습에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치료를 해줄 거면 똑바로 눕혀주기라도 해야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당보는 여전히 찍 소리도 뱉지 못했다.
간간히 자신보다 무위가 약해보이는 청명을 왜 형님형님거리며 따르는지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있었다. 당보가 유독 그 의원에게 다정하기 때문이라는 둥의 말도 들려왔으나, 천만에 말씀이다. 이유야 간단하다. 청명이 자신보다 무위가 뛰어나니까. 당보도 한때 그런 청명의 무위를 우습게 봤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멍청한 생각이었지. 그렇게 우습게 보았다가, 정말 비 오는 날 먼지나도록 털리지 않았던가. 아직도 정확히 혈자리를 노리고 들어오던 대침의 고통을, 당보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분명 괴팍한 의원일거라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다른 이들의 감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강호를 떠돌며 사람들을 치료해주던 그 의원을 만난 이들은, 다들 비슷한 감상을 내어놓았다. 곧잘 틱틱대지만 잔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강호에서 철저히 약자인 양민들에겐 더더욱 그랬다. 외부인을 경계하던 이들은 그런 청명의 소소한 다정함에 금세 마음을 열었다. 특히 아이들은 더더욱 그랬다. 아이들에게 줄 당과를 꼭 품에 넣고 다니던 그를 싫어할 아이들은 없었다. 게다가 매번 돈도 받지 않고 사람을 치료해주었다던가……. 당보는 그런 청명에게 의원보단 도사같다 실없는 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말에 그는 퍽 실없이 웃었다. 아마 그즈음부터였나. 당보가 어느 새 청명의 곁을 쫄래쫄래 쫓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그리고 강호를 떠도는 의원과 검수의 이야기는 은근하게 퍼져가기 시작했다.
*
끄응, 소리를 흘린 당보가 제 머리를 문질거렸다. 아직도 주먹과 침이 쳐박혔던 머리가 욱씬거린다. 당보의 그런 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청명은 풀어놓았던 짐을 꾹꾹 싸맸다. 이 마을도 역시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던 모양이다. 청명은, 마을 사람들과 곧잘 어울리면서도 한 마을에 닷새 이상을 머무른 적이 없었다. 정말 길게 돌봐야할 위급한 환자가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는 그 기간을 넘긴 적이 없었다. 넌지시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그저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이 취향이 아니라고만 답했다.
"난 약방에서 살 것 좀 사올 테니까, 이거 들고 입구에서 기다려."
냅다 맡겨진 보따리를 품에 안은 당보가 나즈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깐 환자 취급하며 으르렁 대더니, 이젠 짐꾼마냥 부려먹는다. 하여간……. 장단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니까.
"다녀오시오."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보가, 청명이 보이지 않을 즈음에야 보따리를 등에 지고 걸음을 떼었다. 아니, 정확히는 떼려고 했다. 구석구석에서 슬그머니 존재감을 드러내는 살기가 아니였다면 분명 그리했을터다. 청명의 앞에서 늘 서글서글하게 풀려있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와중에 보따리를 소중히 내려둔 당보가 검 손잡이 위로 손을 얹고 주변을 훑었다.
"나와."
잠잠한 주변에 당보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한기가 서린 웃음이었다. 곧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날이 잔뜩 선 검이 당보의 손에 쥐어졌다. 길게 숨을 내뱉은 당보가 다시금 입을 떼었다.
"안 온다면 내가 갈까?"
그제서야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흉흉한 기세를 뿜어대는 그들의 손엔 피냄새가 짙은 무기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사파 놈들인가? 슬슬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니 별 잡것들이 꼬이는군. 낮게 혀를 찬 당보가 검끝을 늘어뜨렸다. 그 기세에 잠시 움찔하던 이가 금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거다."
마치 자신들이 우위를 선점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투였다. 저 볼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만 아니었다면 제법 그럴싸할 뻔했다만……. 그 건방진 태도에 당보의 눈썹이 꿈틀였다. 어디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보자는 태도였다. 하지만 당보의 그런 모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건지, 크게 웃어댄 그가 더욱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쥔 병장기를 까딱였다.
"무슨 소릴 하고 싶은게냐."
"우리에겐 인질이 있으니 함부로 까부는 건 좋지 않을거다."
인질? 당보의 머릿속에 마주쳤던 마을 사람들 몇몇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갔다. 비겁한 새끼들……. 당보가 살짝 이를 꽉 물었다. 어쩌면, 일이 조금 성가시게 될지도 몰랐…….
"내 수하들이 그 의원놈을 잡으러 갔다!"
"…… 어?"
늘어져 있던 검끝이 순간 삐끗했다.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흘린 당보가 아까와 같은 기세를 흐트러트린체로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의원? 다시금 그 단어를 곱씹은 당보가 입을 몇 번 뻐끔댔다.
"거…… 너희가 말하는 의원이, 방금까지 나랑 있던 그 의원을 말하는 거냐?"
가까운 이가 인질로 잡혀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도 그의 어투는 아무런 동요없이 떨떠름하게 들렸다. 생각과 다른 반응에 상대가 살짝 동요했다. 뭐지? 분명 다른 곳에서도 시도때도 없이 붙어다닐말큼 사이가 좋다고 했는데? 크흠, 헛기침을 뱉으며 당황스러움을 몰아낸 상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래! 그놈이 맞다! 그 의원이 다치거나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순순히……!"
사파의 말을 끊으려는 양 손을 휘휘 내저은 당보가 조금 연민이 서린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을 보는 표정에 상대가 어버버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거, 내가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다만……. 이쪽보단 그쪽을 더 신경써야할 걸? 그쪽으로 가보는 게 낫지 않……."
단 한치의 가식도 없이 온전한 걱정을 담아 말을 잇던 당보가 돌연 말을 멈췄다. 그리곤 사파 무리들의 너머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늦었네. 사파 무리를 앞에 둔 검수가 느릿느릿 검을 검집에 밀어넣었다. 그의 태도에 황당하다는 양 얼굴을 구긴 이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등판이 따끔거릴 정도로 오싹한 살기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리들의 고개가 돌아간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이 크게 띄인 눈들이 모조리 한 곳으로 몰려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격한 싸움이라도 있었다는 양 구겨진 옷자락의 한 남자가 느릿느릿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경악하게 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 붙들린 체 꿰인 굴비마냥 줄줄 딸려오는 것들은, 분명 자신이 보낸 수하들이었다. 사내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손에 쥔 것(?)들을 바닥으로 툭 던졌다. 몸 곳곳에 대침이 박힌 체 움찔움찔 떨고 있는 꼴을 내려다보던 그가 시선을 슬 올렸다.
"야."
"ㅇ, 예?"
사내, 청명의 어마어마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사용한 것을 자각도 못한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빤히 보던 청명이 턱짓으로 꿈틀대는 이들을 가리켰다.
"이거, 늬들 식구냐?"
"……."
아무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는 모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청명이 자신의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다.
"하여간, 이 새끼고 저 새끼고……. 의원을 왜 이리 우습게 보는 지 모르겠네. 인간의 급소를 제일 잘 아는 게 너희겠냐, 의원인 나겠냐."
매화빛 눈동자가 흉흉한 빛을 머금었다. 뭔가, 뭔가 단단히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건드려선 안 될 벌집을 건드린 사람처럼, 사파 무리들이 슬금슬금 뒤로 빠지여들었다. 어쭈, 이 새끼들 봐라? 삐딱하게 웃음을 지은 청명이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어쩐지 옛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한 묘한 기분에 당보가 작게 혀를 찼다.
"의원 형님, 거, 도와드립니까?"
"아서라. 뭘 너까지 나서."
저런 조무래기들은 내 한 손으로도 충분해. 청명의 품에서 긴 대침 몇 개가 딸려나왔다. 바닥에 쓰러져 꿈틀대는 이들과 청명을 번갈아보던 이들이 다시 한 걸음 물러났을 때,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청명이 그들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처절한 비명이 조금 길게 이어졌다.
곧 고슴도치가 몇 늘어서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이들을 보던 당보가 영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모습, 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손을 탈탈 털어내는 청명이 그런 당보를 가볍개 툭 쳤다.
"뭐해, 가자."
"…… 저대로 두실거요?"
"그럴건데? 도와줄 놈들이 있으면 도와주겠지. 없으면 뭐, 안타깝지만 길바닥에서 얼어 뒈지는 거고."
의원이란 인간이 저런 말을 툭툭 뱉어도 되는 건가. 미묘한 표정을 짓던 당보가 청명과 시선을 마주치자 냉큼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행이도 청명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가자."
"예……."
바닥에 엎어진 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파무리를 내버려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음을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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