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개인작
은혜야, 뻗어진 손은 이도저도 아닌 곳에 멈춘다. 희게 질린 낯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 애는 지독하게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가 그랬잖아. 나를 좋아한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
은혜의 눈 밑이 별처럼 샛붉게 물들었다. 나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은혜야. 그때는 우리가 어렸잖아. 지금은 중요한 시기니까, 응?
달래는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내가 언제고 은혜 앞에서 이런 목소리를 낸 적이 있던가. 분명 그런 적은 없을 터였다. 나는 누구보다 그 애를 사랑했고, 사랑했기 때문에 내 모든 것을 쥐여주었다.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어 입을 다문다.
이제 그 애는 억울하다는 듯한 눈을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 같던 울분은 이내 차게 가라앉은 괴로움으로 모습을 달리한다. 내 기억 속의 은혜는, 그 애는 언제나 타오르는 혜성 같았다. 제 모든 것을 불살라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던 눈부신 아이.
나 역시 그런 그 애가 좋았다. 시원스래 휘어지는 입가, 햇빛 아래 이따금 갈색으로 물드는 머리카락, 언젠가의 해질녘 노을을 닮은 미소. 정말이지 그 애의 전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이 그 애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진부한 말이래도 좋았다.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으니까.
문제라면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나는 은혜를 사랑한만큼 나를 사랑했다. 빛나는 별과 같던 그 애는 제 모든 것을 불살라 빛나고자 했고, 그 모든 것에는 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 감당할 수 없는 미래. 누구의 시선으로 보나 나는 틀림없는 위선자일 테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애 안의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묻혀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나는 네게 쥐어주었던 것들을 다시 빼앗아 들었다. 한때 오롯이 내 것이었던 것들이었다.
너는 앞으로도 평생 나를 기억해야만 한다. 네가 결코 불사를 수 없던 나를, 영원토록 기억해야만 한다.
있지 은혜야. 그래도 우리 꽤 괜찮았지.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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