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스나이퍼를 위한 파반느

Pavane pour un tireur d'élite défunte

월드 트리거. 팬아트

비자림 by 비
3
0
0

* 팬아트입니다.

여든여덟 개의 건반 위를 막힘없이 흐르는 손가락은 오래전 당신이 일러준 대로 암기한 악보를 따라 움직인다. 마디와 마디 사이엔 음표와 쉼표, 조표가 그 안을 빈틈없이 채우고 이따금 이전과 다른 박자를 주문하는 박자표가 그 안에 있기도 한다. 그 외에 스타카토 같은 악상 기호가 주어진 음의 길이를 짧게 줄이기도 하는데, 그 뒤 페르마타가 오면 반대로 배로 길어지는 음을 연주해야 하므로 악보를 읽을 때는 주의 깊게 읽고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걸 엄격히 기억하여 연주하진 않아도 된다고 알려준 이는 당신이었다. 마디 하나하나가 우리 생의 한 분기, 또 한 분기를 의미한다면 수십 수백 마디 끝에 우리는 하나의 곡을 완주하는 것이라고 내게 가르쳐준 이 역시 당신이었다. 옷자락 뒷자락을 제비 꼬리처럼 길게 늘인 검은 연미복을 처음 장만해 준 사람 또한 당신이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여든여덟 개의 건반 위에 손을 동그랗게 올린 당신은 첫 번째 건반에서 마지막 건반까지 모든 음을 내게 들려주며 흰 건반과 검은 건반 위를 어떻게 올라타면 좋은지 알려주었다. 분에 겨워 건반을 쾅쾅 내리칠 줄만 알았던 내게 피아노 뚜껑을 열어 해머와 이와 부딪치는 현의 모양새를 보여준 당신은 그 스스로 능숙한 연주자이면서 조율과 조정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 곁에 없을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내 귀엔 가 닿는 바이올린 소리 있으니 오래전과 같이 연주하는 내게 제안하는 협주다. 독주 악기는 네가 되리라. 그리 말하며 이제는 소매를 걷지 않고 흰 셔츠 대신 검은 셔츠를 입고 한때는 동그랗게 말아 건반 위에 올려두었던 손에 활을 들고 현을 켜는 이가―당신의 얼굴을 한 이가 있다. 당신일 수 없지만 당신과 다르지 않은 당신이 피아노에 등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본다. 독주는 내 것이 되리라. 나는 후일에야 알 이야기를 전일까지 숨기는 자상하고도 자멸적인 나의 옛 아버지.

녹색 조끼가 잘 어울립니다. 당신에겐 언제나 녹색이 잘 어울렸어요.

보색은 어울리지 않아요. 보색은 두르지 마세요.

그러나 들어주지 않은 당신이었지. 흰 셔츠를 입고 피아노를 연주하던 당신은 알 이야기. 검은 셔츠를 입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당신은 모를 이야기.

모르지만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

그리하여 이제는 내 곁에 없을 사람이지만 여전히 내 곁에서 내가 아는 선율을 연주하는 당신이다. 기억하니. 네가 좋아하는 곡이었는데. 그렇지만 피아노로 연주해 주셨었죠. 바이올린이 아니라. 피아노는 이제 치지 않으시나요? 물으면.

멋쩍게 웃는 당신.

나는 후일에야 안 이야기를 전일까지도 모르는 체한 당신이 내 앞에서 웃고, 나는.

나는.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