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카미 군 거짓말도 잘하시네

부조리의 열망

월드 트리거. <미즈카미 군 거짓말도 잘하시네> 외전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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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죽었대. 자기 대원을 지키다가.”

어느 때고 그 말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때고. 아무 말도.

제3차 미카도시 대규모 침공. 정규 대원 중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4월. 사망자는 대장급에서 유독 많이 발생하였고 그 이유도 다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무턱대고 무모하게 적에게 덤벼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정도 분별도 없이 대장 직위를 단 사람은 여기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무모하게 지키려 드는 면모가 있다 보니, 그것이 올가미가 되어 그들의 목을 졸랐을 뿐이었다. 그들은 시민을 지키려 했고, 동료를 지키려 했고, 부하를 지키려 했다. 트리온체가 아닌 상태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닌 상태인 그들을 위해, 더욱 무모하게. 따라서 무엇을 말하든 기만이 될까 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적이 많지 않은데, 머릿속에서 아무리 말을 고르게 골라내도 정녕 그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냐고 반박하는 자신과의 언쟁이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앞니로 꾹 깨물며 시간을 허비하고 그런 자신이 못내 한심해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고개를 돌려 그런 그를 본 남자가 그에게 말했다. 그는 대장이었다. 키토라가 속한 부대의.

“괜찮아, 키토라.”

“하지만.”

그제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온 단어는 고작 그것밖에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키토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의 ‘괜찮아’이기도 해. 마음은 이미 전해졌으니까, 자신을 너무 힘들게 몰아붙일 필요는 없어.”

“그래도요.”

사실은 사실이었다. 키토라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찾는 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것은 그 자신을 힘들게 했다. 키토라는 자신이 아직 어리숙한 탓인가 했지만, 이런 상황에 적절한 말을 찾는 것은 어리숙하지 않은 사람도, 어리지 않은 사람도 곤혹스러워할 난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괜찮아’는 키토라가 좀 더 숨을 편히 쉴 수 있도록, 숨을 틔우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그 말에 기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도 그러지 않는 것이 키토라이기도 했다. 그런 충동에 지지 않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고 굳건한 자세가 바로 키토라의 성정, 다른 말로 긍지였다. 긍지 어린 성격으로 말미암아 키토라는 타인의 긍지 역시 존중하기로 했다. 그가 인정한 상대의 긍지라면 능히 존중받을 필요가 있었다. ‘자리.’

“잠시 비켜드릴게요. 괜찮아지시면 불러주세요.”

“나 정말 괜찮아. 키토라.”

“제 판단을 존중해주세요. 그리고…… 괜찮지 않으세요, 지금.”

키토라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기 위해 몸을 돌리느라 드러난 얼굴은 예상대로였다. 예상대로, 엉망진창이라 사실 그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 맞았다. 대장이라서, 대원 앞에서 어느 정도로 동요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은지 감을 잡으려 한 것이라면 실패했다. 철저히. 키토라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친구셨잖아요.’

“슬퍼하셔도 돼요.”

그 뒤 제대로 된 대화는 나누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말이 도화선이 된 것처럼, 방아쇠라도 된 것처럼 그 말을 들은 그가 두 뺨 흥건히 적시는 눈물을 쏟아냈던 것만은 선명하다. 이윽고 그는 옷소매로 눈가를 가리며 미안, 하고 사과했지만 키토라는 그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는 이어 말했다. 시선은 조금 내린 채로. 자리, 비켜드린다고 했지만 곁에 있는 게 낫다면 곁에 있을게요. 그 말에 그는 무어라 대답했던가.

키토라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제 곁에 섰던 남자와 그날의 제가 비슷했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던 그는 그날의 죽음과 지나치게 가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합리적이지 못한 분노를 품고 있다 제가 말한 뒤에야 자리를 떠난 남자. 그날 이후 수년이 지날 때까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날은 하루도 없었다. 메시지도 용건을 주고받은 뒤로 끝이었다. 그 뒤 수년간 열린 추모회에서 정복 대신 정장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먼 자리에서 보았던 기억은 있었다. 시선, 자꾸만 엇나갔었지. 키토라는 관찰력이 좋았고, 과연 그날 그를 상대로 분노를 표출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했다. 차마 그래선 안 되는 상대에게 차마 그래선 안 되는 방식으로 되지도 않는 화풀이를 할 뻔하였다. 말 그대로 불합리한 분노를 터뜨릴 뻔했다고 키토라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키토라가 미즈카미와 다시 만나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날은 그래도 그날로부터 생각보다 더 멀리 떨어지지는 아니했다. 정장을 입지 않고 평상복을 입고 있는 그는 오랜만에 보았다. 일전에는 트리온체 변신만 풀면 바로 볼 수 있었던 차림새였지만 행동반경이나 생활이 여간 겹치지 아니하니 그가 보더를 은퇴한 이후론 모든 것이 멀어지고 낯설어졌다. 그러므로 현재는 그가 키토라의 행동반경에 접근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보더 본부 인근이었으므로 아무래도 그러했다. 키토라는 미즈카미가 내미는 테이크아웃 플라스틱 컵을 받아 들며 생각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여기.’ ‘감사합니다.’

이런 말이 적절한진 알지 못한다. 실제로 그 속은 어떤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이전보다는 괜찮아 보이는 그였다.

제3차 대침공도 어느덧 6년 전에 벌어진 일이 되었고, 반올림을 하면 0보단 10에 가까워진 세월을 보낸 지금이었다. 미즈카미와 키토라가 만나 마지막으로 직접 대화를 나눈 지도 그쯤 되었다. 5년 전쯤 사진과 관련해서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은 있으나 직접적인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으니, 서로의 목소리를 들은 지도 그만한 시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키토라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동안 키토라는 대외 활동을 계속했으므로 미즈카미는 TV나 라디오 같은 방송매체를 통해 키토라의 목소리를 들었을 수 있었다. 그보다도 몇 해 전 추모식 대표 연설을 키토라가 맡고 미즈카미 역시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가. 그때 그는 키토라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다른 소리에 귀 기울여 그 외의 소리를 몰아내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러나 이렇게까지 목소리에 집착해서 얻을 것은 하나 없기에 자꾸만 외딴 길로 흘러가는 생각을 차단하는 키토라다. 두 사람에게 다, 다신 듣지 못할 목소리가 있어서 그런가. 자료 기록실에 보관된 각종 기록, 녹음된 대화, 녹화된 영상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이긴 하지만, 특히나 더 대외 활동이 많았던 아라시야마 부대는 그 수가 상당하지만, 키토라가 그 시절의 영상을 모니터링하지 않게 된 지도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유는 대수롭지 않았으니 시간 위로 새로운 시간이 쌓였기 때문이다. 삶은 계속해서 누적되었다. 아픔 위로, 다시 말해 삶 위로.

키토라가 알기로 미즈카미는 그 뒤로 트리온 기관 이상 발현 증세로 긴 시간 곤욕을 치렀다는 듯했다. 그가 겪은 증상에 관하여 자세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많은 이가 고통을 호소한 이 이상 증상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보더 본부도 꽤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여야만 했다. 아니, 썩이는 중이었다. 애초에 쉽게 해결될 줄 알고 덤빈 문제가 아니긴 했지만, 완치되는 듯하다가도 재발하는 사례가 많아 주기적인 검사, 추적 관찰, 경과 확인 및 분석 등 모든 것이 수개월에 걸쳐 진행되었고, 환자에 따라선 수년에 걸쳐 증상을 완화해 나갔다. 미즈카미에 관해 말하자면 작년 즈음하여 트리오 수치 증감 증상에 관해선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보더에 주기적으로 데이터를 제공해 주기로 협조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간 보더 본부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이유에 관해선 본인에게서 직접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올해 3월에 졸업했거든, 나.”

그래서 그전까지는 본부 엔지니어가 학교로 직접 출장을 와주었지만, 소속이 없어진 지금은 본부로 직접 움직이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늦었지만 졸업 축하드려요.’ ‘고마워.’ 가볍게 전환하기 좋은 화제로 이후의 진로에 관해 물었다. 그러나 그리하여 듣게 된 대답에는 조금, 들키지 않을 만큼 동요했던 듯하다. 글쎄.

“교수님이 추천서를 써주신다고 해서, 유학을 갈지도 모르겠네.”

미카도시를 떠난다고 한다. 미즈카미가.

어쩌면, 드디어 떠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르기는 했다. 제3차 미카도시 대규모 침공, 정규 대원 중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4월의 전쟁 이후, 5월, 미즈카미가 보더를 제대했을 때 그를 아는 많은 이는 곧 그가 대학을 자퇴하고 미카도시를 떠날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때 미카도시를 떠나지 아니했다. 6년이 지난 지금은 떠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물론,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이 모든 대화는 테이크아웃으로 뽑은 커피를 마시며, 나란히 미카도시의 시내를 걸으며 이루어졌다.

4월치고는 날이 더웠다. 이상고온일지도 모르는 기온을 견디며 그들은 보더 본부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간의 근황, 일상, TV에서 보았던 광고 등, 대외비에 속하지 않은 이야기가 두서없이, 다시 말해 생각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툭, 툭 입 밖으로 꺼내졌고, 키토라가 그 말을 꺼낸 것은 그들이 보더 정문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보더를 출입하는 출입구야 이곳저곳 여러 곳에 은밀히 있었으나 외부인인 미즈카미는 정문을 통해야만 하기에 여기까지 동행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가 아직 모든 입구를 암기하고 있다 하더라도 예외는 아무래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키토라가 꺼낸 말은 헤어질 때가 다 되었을 때 대화를 마무리하듯, 만남을 마무르듯 꺼내는 말과 같았고 실로 사실과 다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키토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즈카미에게.

“전보다 좋아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진심이었다. 비꼬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한때 그를 향했던, 아니, 그뿐만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모두를 향했던 불합리한 분노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그 말에 미즈카미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너도 그래 보이네, 키토라.”

“그런가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키토라가 멈출 차례였다. 따라서 순서는 다시 미즈카미에게 넘어갔고.

“응, 나는…….”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듯하다 긴 매듭을 남기고 짧게 묶였다.

“화를 냈더니 괜찮아지더라고.”

‘왜 그랬냐고!’

“화를 냈다고요?”

“응. 이코 씨에게. 그 뒤로도 화낼 일은 계속 생겼지만…….”

‘거짓말쟁이.’

이윽고 그가 말했다.

“그래서 그냥, 불합리한 인간으로 살아보려고.”

그날로 불합리한 인간이란 개념은 키토라 안에 그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도 더 오래도록 남을 예정이 되었다. 키토라에겐 진과 같은 사이드 이펙트가 없었으므로 그것을 예지라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런 그에게도 예상할 수 있는 앞날이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지 못한, 굴절되고 왜곡된 인간상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상정한 적도 없었다. 올곧게, 언제나 올곧은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까지? 멈춰야 하는 때를 알지 못한 것이 그의 패착이 되었다. 오래전 주었던 시선을 거두기 적절한 때를 찾는 것은 조금도 쉽지 않으니, 언제인가? 언제면 이 시선을 거두어도 괜찮은가. 괜찮은가. 그것은 오래전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했던 어떤 사람의 슬픔과 다르지 않았기에, 그의 고민과 같았기에, 키토라는 자신이 괜찮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하지 않아야 했다. 그래야지 자신은 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므로. 극복할 수 있게 되므로. 괜찮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한 것이 되므로.

지난 6년간 키토라는 한시도 노력하길 멈추지 않았으니 그의 삶은 곧 궤도에 올랐고 이를 이탈하거나 그리하여 추락하는 일 없이 항상 선로를 따라 내달릴 수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보더를 떠나는 와중에도 그는 보더에 계속 남아 있었고, 트리거를 사용했으며, 전투원으로서 그중에서도 에이스로서 전투에 임하고 네이버를 격퇴했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으니 어느 날에 이르러선 불합리한 분노마저 제 안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성과였다. 흡족하게 느껴지진 않았어도 분명한 성과. 그날 이후로 항시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룩해낸, 이상.

그러니 좋아 보여야 한다는 걸 알지만 거울 속 나는 왜 웃지 못하는지.

실수로라도 웃음 짓지 않는 자신을 비추던 거울에서 눈을 뗀다. 역시 더 노력하지 않으면, 더 힘내지 않으면. 애쓰지 않으면.

애도하지 않으면…….

“괜찮아?”

미즈카미는 머리도, 요령도 좋은 청년이었지만 그 자신이 마음먹는다고 모든 걸 알아낼 수 있진 아니했다. 달리 말하면 모든 걸 알아내기 위해 마음먹을 이유가 그에겐 없었다. 이유야 간단하고 단순했다.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가지지 못한 4월은 오직 그 자신들의 것이었다.

타인은 그에 간섭할 수 없었다. 개입할 수 없었다. 관계할 수 없었다.

4월에는.

4월에는…….

4월을 넘어선 미즈카미는 이전보다 괜찮아 보였다. 이전보다 좋아 보였고, 그도 이전보다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짓말이 아니라 실로 그는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고 있기도 하였다. 한때의 그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삶을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살 줄 알았지만, 더는 바라보지도, 함께하지도 못하게 되었을 때도 그는 계속 살아야 했고 그런 삶과 함께해야만 했다. 형태는 달라져도 정체는 일관되어 연속되는 삶이란 거짓말 같지만 결국엔 같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삶에 거짓은 이제 없다. 적어도 그렇게 큰 거짓말은 이제 하지 않는다. 키토라가 알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알아야 할 이야기도.

“괜찮아요.”

“그래?”

그렇지만,

“아뇨.”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몰랐다.

충동적으로 튀어 나간 말을 조금이라도 수습하려면 입을 그만 다물어야만 했다. 키토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합리하고도 부조리한 충동이 몸을 일순 지배하니 키토라는 발을 멈춘 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단 한 순간도 입 밖으로 내리라 생각하지 못한 말을 뇌까리는 자신의 입을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끼며, 움직였다. 입을.

“실은 한 번도 괜찮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날부터.”

“4월부터.”

“한 번도.”

한 순간도…….

…….

결국 자리에 주저앉은 그를 미즈카미는 조용히 내려다본다. 언젠가의 자신을 보듯이.

다행히 그들 머리 위론 가로수의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여름 햇빛에서 그들을 가려주고 있었고 본부가 지척이었기에 근방엔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오래전 이곳에는 큰 슬픔과 큰 불합리가 있었고 그로 인한 슬픔이 모든 이에게 동등하거나 동일하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동감은 가능했더랬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던, 이제는 어디에도 없는 지난 시간에 그 역시 오래도록 붙잡혀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물길 가운데 물살에 잠긴 기분을. 물아래선 살 수 없는 사람일진대 밀려오는 파도에 덮쳐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을.

미즈카미는 제 기억에서 비롯되었던 무언가를 연상한다.

앞으로도, 그의 인생 전일에 함께할 기억을.

조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에게도 조심스럽게 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대답은 조금 늦게 작은 목소리로 들려왔다. 아뇨. 그래?

“그럼 뭘 하고 싶은지부터 찾아야겠네.”

“찾으면.”

찾아지나요?

그 말에는 그 역시 헛웃음을 지었다. 글쎄.

“그래도 찾았을 때가 찾지 못했을 때보다 나았어서, 나는.”

그래서 전보다 더 나아진 거겠지 싶어. 아마도.

“그런가요.”

그런가…….

본부 입구에서 미즈카미와 헤어진 후 키토라는 잠시 외벽에 기댄 채 숨을 골랐다. 눈을 감으면 오래전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발이 단숨에 뽑혀 나와 뛰쳐나가던 순간을 조금의 열화도 없이 선명하게 연상할 수 있었다. 그날 그 사람은 키토라를 등진 채 서 있었다. 전위에 서서 물러서지 않으니 그 뒤의 전개 역시 키토라는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불렀으면 좋았겠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입 모양만이 내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으니, 그날로 돌아가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 지금에 와서야 혀 아래에 고인다. 사이렌 소리 속 점차 일그러졌던 얼굴과 달리 더없이 평온한 얼굴로 그날을 회상하는 키토라는 자신이 지난날 빠뜨린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처음으로, 처음부터 다시금 그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예 그에겐 무엇이 차오르는가. 또한 시간을 두고 볼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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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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