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리온에게서 드림주 뺏기

드림 조각글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이 죽었다.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영웅도 결국에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삶이란 유한하기에 더욱 가치가 있고 빛난다. 다만 그것은 필멸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법칙일 뿐. 아름다운 이별, 눈물 젖은 안식도 결국 순간을 살다 가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영원을 강제당한 사내에게는 받아들이려야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인 셈이었다. 수 세기를 살아남은 아스타리온 안쿠닌은 이러한 현실이 모호하기만 했다. 차갑게 식은 이의 손을 잡아본다. 차고, 굳어 있었다. 당연했다. 타브는 이제 여기 없으니까.

그로부터 한 달가량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한껏 가라앉은 채 추모의 뜻을 담은 촛농을 키던 마을의 불빛도 금세 꺼진 채 활기가 넘치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나의 도시를 구한 전설의 죽음도, 이렇게 끔찍하리만치 순식간에 잊힌다.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적어도 한 세기 동안은 간간이 화자되며 그를 애도해야 하는 게 아니란 말인가? 허나 아스타리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죽음은 필연이요, 망각은 구원이다. 헤어짐을 통해 상실을 느끼지만, 곧 무뎌지고 서서히 잊어감으로써 그를 마음속에 평생토록 간직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당장 타브를 잃었다는 현실을, 그를 서서히 잊어가야만 한다는 잔혹한 진실을.

어둡고 퀴퀴한 언더다크에서 살림의 터전을 꾸렸던 아스타리온은 먼지가 쌓인 찬장을 둘러봤다. 언젠가 타브가 농담처럼만 말하곤 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나도 그리워지거든 살펴봐.' 라고 했던가. 응, 잊지 않았다. 낡디낡아 자물쇠의 걸쇠가 풍화되고 삐걱거리는 궤짝이 눈에 들어왔다. 잠금을 풀 도구도 필요 없을 정도로 낡은 이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안을 들여다본 아스타리온은 차마 떨군 고개를 들어 올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그와 함께 나누었던 소중한 추억 중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언젠가 저명한 화가가 그려주었던 초상화.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 그리고 그의 반려. 오스카 페브라스, 1492 DR. 캔버스에 유화.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강하고 올곧은 타브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 그림. 벅차오르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던 아스타리온은 캔버스를 품속에 끌어안았다. 애처로운 소리가 어둡고 어두운 지하 세계에 나지막이 새어 나간다. 적막만이 차오른 어둠 속 미성숙하고, 메마르고, 공허한 흐느낌. 마치 모든 지하가 그와 함께 구슬피 우는 듯했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흐른다. 얼마나 지났더라⋯. 사실 제대로 기억나는 건 없다. 아스타리온도 나름 건실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도시 사람들이 타브의 죽음을 받아들인 방식을 이제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사라졌음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아스타리온은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마음을 헛되이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타브는 이 모든 것을 예견하고 제게 마음을 준 듯했다. 마치 언젠가 저가 먼 길을 떠나더라도 그가 괜찮을 수 있도록. 그렇기에 아스타리온은 꾸준히 자연의 섭리로써 죽어가던 야생 동물의 피를 취하고, 언더다크에 정착시킨 스폰들의 마찰을 조율했다. 치안 판사로 살아왔던 옛 기억이 도움이 되리라고는 누가 예상이나 했었을까.

하지만 이따금 떠오르곤 했다. 언제나 저에게만 맑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던 그 모습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이정표가 되어주었던 그 목소리가. 다만 아스타리온은 그 기억들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왜, 언젠가 엘프송 여관에서 어떤 바드가 들려준 말이 있지 않던가. 정말이지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마음속 깊은 표층 의식에 녹아드는 순간, 그는 소중했던 존재로 충분해지는 셈일 뿐이라고. 망각은 저주이기도 하지만 축복이기도 하다. 조금씩 흐려지는 기억 속의 얼굴을 자각할 때마다 낡은 캔버스를 몇 번이고 들여다봤던 아스타리온은 헌 궤짝의 낡은 자물쇠를 버리고 새것을 달았다.

결단코 그를 억지로 잊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쯤이면 새로운 모습으로 이전과 같이 여행을 떠나고 있으리라. 그리고, 운명이라는 게 실제로 있다면. 아주 어쩌면 자신에게도 구원이라는 게 조금은 존재한다면. 망각 끝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한번, 그가 자신을 또 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괜한 생각 탓에. 새로이 단장한 그를 똑바로 눈에 새겨두려면 이전의 모습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선 안 되었으니까. 결심을 굳힌 아스타리온은 궤짝을 잠그고 밖으로 나와 공허한 어둠 속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언제나,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거야. 내 사랑. "

넓디넓은 어둠의 메아리를 타고, 조그마한 희망이 그리던 이에게 닿을 것을 바라고 또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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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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