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밤빵] 연재 타입

[일반] SAMPLE_012

NCP / 연재 타입 / 1만자

 

 

 

 

 

 

A의 일상은 그 자체로 평온하고도 안온했다.

적어도 자신이 그 ‘생물’을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A의 하루는 다른 동갑내기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듣곤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인 채 ‘학교 가기 싫어-’를 몇 번이나 생각한 뒤 어머니의 호통을 듣고서야 겨우 몸을 일으키는 것. 세상이 언제쯤 망하려나 싶어서 창 너머를 바라봤으나 야속한 태양은 여전히 찬란한 빛을 드리우기만 급급했다. 멍하니 햇볕을 받고 있노라면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이 그 따스함 아래에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A는 멍하니 창 너머를 응시했으며 한창 우수에 젖어 들 무렵에 다시 어머니의 호통을 마주해야만 했다.

 

“A! 밥 먹으라고!”

“네에, 네에…….”

 

흐름이 전부 끊긴 A는 곧장 어물쩍거리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거실로 나가려다가 문득, 이부자리를 정리해야 복이 찾아온다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린 A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지 방 정리 좀 제대로 하라는 잔소리에 지나지 않은 말이었으나 어차피 정리하지 않고 나온다면 한 소리 들을 게 뻔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한 A는 걸음을 돌리고선 침대 위에 놓인 이불과 베개를 가지런히 정리한 뒤 다시 거실로 향했다. 이불을 정리하던 중에도 어머니의 부름은 끊이질 않았다.

 

식탁에 앉아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른 채 씹어대다가 욕실로 들어가 세수와 양치를 시작했다. 그리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선 ‘오늘 좀 괜찮은데?’라는 생각을 곱씹은 뒤 갖가지 각도로 제 얼굴을 살펴보았다. 혹시라도 저 몰래 자신을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이제야 마음을 굳건히 먹고 고백해 온다면 어떤 식으로 멘트를 해야 할지. ‘미안,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난 이제부터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어’라는 말도 꺼내보고 ‘나보다도 더 좋은 남자가 있을 거야. 물론 날 잊긴 힘들겠지만.’ 같은 말도 떠올리며 거절할 말로만 수십 개를 만들어냈다.

 

고백을 거절하는 시뮬레이션만 쌓아 올리는 건 당연히 그게 더 멋있었기 때문이다. 고백 한 번 받았다고 신나 하면서 냉큼 받아들이는 건 멋있지 않았으니까. 아직 연애 경험이 전무하던 A는 제 첫 애인은 필시 마지막 애인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그만큼 애정을 쏟아부으며 최고로 잘 해주리라고 다짐하곤 했는데. 그렇게 따진다면 이번에 받을 고백은 거절하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그야 아직 제겐 그럴 만한 능력이 갖춰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 여학생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제 취향이라면 어쩐단 말인가? 아직 딱히 취향이랄 건 없긴 했으나 유명 아이돌의 얼굴을 떠올리던 A는 그런 사람이라면 퍽 곤란하다는 생각에 한껏 진지한 표정을 드리웠다. 그때도 과연 자신이 멋있게 보내줄 수 있을지. 이런저런 망상에 사로잡힌 채 욕실에서 10분 이상의 시간을 보내자 다시 어머니의 호통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A는 곧장 망상을 멈추곤 한숨과 함께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제게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며 곤란해하는 건 꽤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우리 아들, 오늘도 파이팅하고? 우산 챙기는 것 잊지 마!”

 

네에-. A는 시큰둥한 반응과 함께 큰 목소리로 대답하곤 자그마한 우산 하나를 손에 든 채 현관문을 닫았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졸음으로 인해 크게 하품하며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문득 하늘을 보니 평소보다 유난히 더 맑은 것만 같았다. 요근래 소나기가 자주 내리곤 하더라니, 오늘은 좀 멀쩡하려나? 어머니가 걱정하던 것과 다르게 비가 올 가능성은 없어 보였던지라 A는 제 손에 들린 우산을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다시 긴 하품을 이어 하며 버스를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버스가 도착하면 같이 기다리던 사람들과 함께 바구니 속 콩나물처럼 엉킨 채 학교까지 이동했다.

 

주택가 근처였기에 아침은 유난히 붐볐다. 처음엔 정장 차림이나 캐주얼한 복장의 사람들로 바글거렸던 버스 안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교복 입은 학생들로 버스 안이 가득 찼다. 근처에 저와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수가 많아지고 나면 학교가 가까워진다는 의미였다. A는 학생들 사이에 끼인 채 교통카드를 찍은 뒤 버스에서 내리고, 교문 앞에 선 학생 주임 선생님을 보곤 괜히 제 몸을 한 번 더듬어 검사했다. 그리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 자랑스럽게 등교하려다가 깜빡 잊고 명찰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잔소리를 두어 번 들은 뒤 씁쓸한 발걸음으로 교실에 돌아오던 그였다.

 

“야, A!”

 

교실에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노라면 곧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어, 하고 고개를 돌린 A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터지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곤 바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제 축구 봤냐던 친구의 말에 당연한 거 아니냐고 이야기한 그는 마지막 2분 30초 전에 이루어진 역전 골의 아름다움과 그 감격스러움으로 일장 연설을 토해냈다. 정말 조마조마한 상황인 만큼 바짝 긴장했다던 친구들의 말엔 고개를 끄덕였고 감독 욕을 하면서도 선수를 찬양한 뒤 만약 자신이었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모면했을지를 멋지게 늘어놓았다. 물론 말만 번지르르할 뿐, 실상은 며칠 전의 점심 맞이 축구 대결에서 3:0으로 완패했지만 말이다.

 

익숙한 종소리가 교내 전체에 울려 퍼지면 교사들은 유난히 분주해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고 말하던 교사들은 서둘러 아침 조례 준비를 시작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종소리가 들리면 학생들은 더 태평해졌다. 이제 슬슬 화장실에 가 볼까? 싶은 말이나 내뱉으며 여학생 대여섯 명이 주르륵 교실에서 나가기도 했다. A는 그들을 볼 때마다 왜 화장실에 저렇게 많이 가는 건지를 의아해했다. 그곳에 무언가 꿀단지라도 숨겨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예비 종소리를 완벽하게 무시한 채 이야기 나누고 있노라면 어느새 교실에 들어온 담임 교사가 일동 해체를 외쳤다.

 

“종소리 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렇게 시끄럽니- 다들 빨리 자리에 앉자-.”

“네에-.”

 

종소리가 언제 났던 거야?! A는 이야기와 생각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런 생각을 곱씹었다. 종소리가 정말로 난 게 맞냐고 옆자리 친구에게 물어보면 친구는 자신도 못 들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그 순간부터 A와 친구들은 교내 종소리가 고장이 났다며 투덜거리기도 했는데 공교롭게도 종소리에는 문제가 없었다. 단지 저들이 청춘에만 몰두한 나머지 이야기 나누는 것에만 사로잡힌 탓에 듣지 못했을 뿐이니까.

 

“중간고사 성적표 나왔으니까 번호대로 부르면 한 명씩 나와서 받아가. 알겠지?”

“아아-…….”

“무슨 ‘아아’야. 그러니까 평소에 공부 열심히 해두랬잖아. 자, 부른다- 1번, 강건우-.”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 담임 교사가 얇고 길게 잘라낸 종이를 하나씩 나누어줄 때 제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리던 A는 꽤 오래 지나고 나서야 성적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보다 앞번호인 친구들의 등수를 보며 키득거리던 그는 기어이 손안에 든 성적표의 숫자를 눈에 담기 시작했는데. 워낙에 준수한 성적을 자랑했던지라 아까 본 친구들의 성적표에 비하면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전 과목이 70점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니, 반에선 4등이었으나 그래도 전교 석차에선 12등이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같은 반에 전교 1, 2등이 있었기에 자연스레 밀려날 수밖에 없는 성적이었다. 이따금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도대체 반 배정을 어떻게 한 건가 하는 의문이 들어서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저 둘만 없었어도 제 반 석차는 2등이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아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시험 끝났다고 놀지만 말고 수행 대비 하자. 까딱하면 기말고사 온다-.”

“네에…….”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대답의 높낮이었다. 성적표를 받은 직후였으니 어쩔 수 없을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담임 교사의 경고 아닌 경고에도 학생들의 머릿속은 이미 꽃밭이었다. 비록 성적표가 나왔다는 건 절망스러운 일이긴 했으나 어쨌든 시험은 끝났고, 다음 기말고사까진 아직 두 달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교사로선 두 달도 금방인 시간이겠으나 학생들에겐 한참 멀게만 느껴졌으니. 담임 교사가 아침 조례를 끝나고 나가자마자 교실 안은 다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넘쳐났다.

 

12등이라-. 그래도 고1 1학기 중간고사 성적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혼자 뿌듯하게 웃노라면 물매를 맞을 수도 있었기에 가급적 입꼬리에 힘을 줘서 웃음을 참아야 했다. 비록 얼마 전에 친구가 “고1 1학기 중간이 제일 잘 나온 성적일 거래.”라고 말했던 게 조금 걸리긴 했어도 자신이 열심히만 한다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한 A였다. 본인이 열심히 하는 만큼 다른 이들도 열심히 하겠으나 그건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던 그였는데, 교사가 교실을 나감과 동시에 A의 친구들은 각자의 성적표 띠를 들고선 A의 자리로 모였다. 유독 A의 자리로 모이던 이유는 그의 자리가 창가와 가까운 뒷자리였기에 공간이 제일 넓고 편했기 때문이다.

 

“야야, A 몇 등이냐? 봐봐. ……12등?!”

“와…… 미쳤다. 12등이라고? 이 새끼 공부 안 했다더니!”

“이야, 치사한 새끼! 어?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

“아…… 엄마가 백퍼 A 성적 물어볼 텐데…… 21등이라고 구라쳐야겠네.”

 

친구들이 A의 성적표 띠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이, A는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말하곤 괜히 제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이 아니라 이번 중간고사는 정말 별로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이 성적이었기에 꽤 자신만만한 얼굴을 드리울 수 있었다. 정말 공부 안 했다던 A의 말에 친구들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그의 목에 초크를 걸고 배에 가벼운 주먹을 날렸다. 솔직히 말해! 너 얼마나 공부했어! 범위도 모른다더니, 다 개구라였냐?! 친구들이 타박하듯 말하자 A는 그마저도 재밌다는 듯 깔깔 웃었다. 이들이 시끄럽긴 했으나 교실 안이 워낙 북적였기에 목소리가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야, 근데 시험도 끝난 김에 어디 놀러 갈까?”

“또 어딜 가. 피방이나 가자. 너 오면 5인팟이야.”

“아니- 쫌. 그런데 말고 멀리 나가자. 계곡이라던가.”

“이 날씨에 뭔 계곡이야. 얼어 뒤질 일 있냐?”

 

친구들의 말에 A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날이 좀 따뜻해지고 있다곤 하나 아직 5월도 채 되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계곡은 여름에 가야 딱 적당하게 좋았기에 친구들 몇은 고개를 저었고, 이에 가만히 생각해 보던 A는 “잠깐만.”하고 말하고선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 않다는 말을 읊었다.

 

“근데 여름에 가면 사람들 많지 않아? 오히려 지금이 나을 것 같기도 한데.”

“거 봐! A가 그렇다잖아! 역시 우리 12등!”

“오- 역시 12등이냐?”

“그래도 계곡은 좀 그렇긴 한데…….”

 

친구들은 고민하는 것 같았으나 A는 그들을 설득할 능력이 충분했다. 어차피 여름에 가려면 시험이 끝난 뒤에 가야 할 테고 그러려면 방학 때밖에 시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방학에 가려면 휴가철이랑 겹치면서 이래저래 복잡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 그렇다고 2학기가 시작하고 나서 가면 너무 늦어버릴 게 뻔했다.

 

따라서 지금이 가장 적기일 수밖에 없기도 했는데, 심지어 지금 가면 계곡을 거의 독차지하듯 쓸 수 있을 테니 썩 나쁘지만은 않으리란 제안이 그의 입에서 술술 쏟아져 나왔다. 마치 미리 준비해 놓기라도 한 듯 설득의 단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처음엔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보던 친구들이었으나 A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런가? 그럼 그러지, 뭐. 친구들은 사실 계곡에 가든 안 가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으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가장 중요한 건 단지 ‘우리’끼리 ‘재밌게’ 노는 것이었으니까. 이를 위한 장소나 시간 따위는 다만 부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때 무얼 하면서 놀지를 다시 말하려는데 애석한 시간이 1교시 시작 종소리를 알렸다. 결국 친구들은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고 A는 수업을 듣던 중간마다 계곡에서 벌어질 상황을 상상했다.

 

다 같이 깊은 물에 점프도 하고 물살에 따라서 수영하는 상상. 오들오들 떨며 컵라면을 먹고 ‘그래도 재밌었다’라고 말하는 상황. 그 사이에 벌어질 남자들 간의 뜨거운 우정. 그런 것들을 상상하니 빨리 주말이 오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 마주할 운명이 이후의 제 삶을 완벽하게 바꿔 놓으리라는 건 감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리고 그 주 주말, A와 그의 친구들은 함께 지하철을 타고 버스에 오른 끝에 계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곡으로 향하던 중에도 어젯밤에 함께 했던 게임 이야기를 하며 누구 때문에 졌느니 이겼느니를 시시콜콜 따졌는데. 의가 상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나눔에도 결국 계곡에 도착해선 모든 서러움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지구온난화라고 얘기가 나온 게 정말인 건지 날씨는 의외로 조금 덥게 느껴졌고 그럼에도 계곡은 계곡인지라 물의 기운 덕에 다소 쌀쌀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오늘 비 온다더니 또 멀쩡하네? 친구의 말에 A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았다. 분명 일기예보를 봤을 땐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꽤 많은 양의 비가 올 거란 이야기가 있었다. 이 이야기를 접한 A와 친구들은 정말 계곡에 가도 될지를 고민했고 당연히 각 집안의 어른들은 위험하니 가지 말라며 말렸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역경이 더해지니 더더욱 가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가족들에겐 안 간다고 말해뒀으나 이들끼리는 ‘무조건 가자’라는 의견이 만들어졌는데. 놀랍게도 아침에 확인해 보니 비는커녕 하늘에 구름 한 점 보이질 않았다. 살짝 아쉽긴 했으나 오히려 잘된 일이었기에 신나 하며 지하철에 오른 이들이었다.

 

“근데 진짜 신기하다. 분명 비 내린다고 하지 않았냐?”

 

유난히 쾌청한 날씨를 두고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던 사이,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다른 친구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말하며 받아쳤다.

 

“용이라도 왔다 간 거 아냐? 저번에 들었는데 용은 비나 바람을 몰고 다닌대. 요즘 비가 많이 내린 것도 그것 때문이라던데.”

“뭐래. 누가 그딴 소릴 했냐? 또 인터넷에서 긁어왔지?”

“아니, 이거 우리 할아버지가 하신 얘긴데. 할아버지가 무당이셔서.”

“아, 어쩌지. 너무 좋은 이야기라 인터넷에서 본 이야긴가 했다. 건강하시지? 조만간 뵈러 가야겠네.”

 

두 친구의 만담 같은 이야기에 다른 이들은 모두 깔깔 웃기 바빴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며 후우, 하고 숨을 내쉬던 이들은 퍽 즐거운 눈치였으니. 이윽고 A와 친구들은 적당한 곳에 텐트를 쳤다. 아버지가 빌려준 텐트라던 친구의 말에 이들은 한 방향으로 꾸벅 고개를 숙여서 멀리서나마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별다른 준비 없이 계곡으로 뛰어들었다. 물은 상상 이상으로 차가웠고 맑았으며 주변엔 사람들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하기야 이런 날씨에 자신들이나 여기에 오지, 다른 이들이 여기에 올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러니까 우리가 전세 낸 것 같지 않냐?”

 

A의 말에 친구들은 정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물장구를 치기도 했고 서로에게 물을 뿌려가면서 잡고 잡히는 놀이를 이어 했다. 입시니 수능이니, 그런 이야기들을 이따금 듣긴 했어도 아직은 멀기만 한 이야기였다. 당장 오늘만큼은 초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시원하게 노는 게 전부였고, 적당히 놀고 난 뒤엔 물 바깥으로 나와서 오들오들 떠는 몸으로 컵라면을 먹었다. 하필 친구 한 명의 컵라면이 바닥에 엎어져 버린 탓에 그 이후부터 컵라면 쟁탈전이 펼쳐지기도 했으니, 끝내 남자 너덧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컵라면을 먹는 모습은 나이대에 맞는 순수함이 드러나기도 했다.

 

컵라면으로 배를 채운 뒤 조금의 대화를 나누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중, 마지막으로 계곡에 들어가서 놀자던 누군가의 제안에 친구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제일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텐트 정리를 해야 한다며 서둘러 계곡 안으로 점프하던 이들이었다. 공교롭게도 가장 늦게 들어온 사람은 A였으며 그는 아깝다는 듯한 표정을 드리우더라니 저 역시 계곡에 들어왔다. 텐트 정리는 텐트 정리였고 일단은 좀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자꾸 물 위로 비늘이 둥둥 떠내려오는 게 보였다.

 

‘이거 아까부터 계속 보이던데, 뭐지?’

 

A는 손에 비늘을 잡아 보았다. 얇은 막처럼 이루어진 비늘은 햇볕에 비춰보자 유난히 찬란한 빛을 드리웠다. 청록색 빛이 꽤 아름다우면서도 매혹적이었기에 손에 담긴 고운 빛에 시선이 홀릴 것 같던 차, 옆에 있던 친구가 A의 팔을 툭 건드린 탓에 A는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 하냐? 손에 뭔 쓰레기를 들고 있어?”

“이게 자꾸 내려오던데? 저쪽에서.”

“뭔데. 비늘? 어디 물고기 하나 죽은 거 아냐?”

 

친구의 말에 A는 ‘그런가’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치기엔 비늘이 너무 많이 눈에 보였다. 물고기 한 마리만 죽은 건 아닐 것 같았으니, 궁금증이 사그라지지 않던 A는 결국 원인을 찾겠다는 듯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다. 잠깐 위에 다녀온다던 그의 말에 친구들은 그러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으며 무리에서 혼자 빠져나온 A는 비늘이 떠내려온 곳을 찾아서 걸음을 내디뎠다.

 

‘갈수록 더 많아지네. 진짜 어디서 떼거리로 죽기라도 했나?’

 

계곡에 둥둥 떠진 비늘의 수는 이전보다도 더 많아졌다. 도대체 왜 비늘이 이렇게나 많은 건지. 정말 물고기가 대량으로 죽기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뭐가 있나 싶던 A의 얼굴엔 궁금증이 사라지질 않았다. 뭐든 간에 반드시 제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그였고 계속 올라가다 보니 이따금 바람이 A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 차가운 바람은 아니었기에 추위가 느껴지진 않았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더는 뒤를 돌아도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A 앞엔 거대한 동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계곡에 놀러 간 적이야 많았다만 끝까지 걸어가서 이런 큰 동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원래 계곡 끝엔 다 이런 동굴이 있는 건가? 의아해하던 A는 다소 오싹한 마음에 주춤거렸다. 돌아갈까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돌리려다가도 다시 비늘이 발에 채면 궁금증이 대폭 상승했다. 확실히 동굴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미심쩍은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궁금증을 무른 채 돌아갈 순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A는 침을 꿀꺽 삼켰다. 느릿한 타액이 목구멍 안으로 천천히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뭐…… 뭔 일이야 있겠어? 어차피 여긴 사람들도 자주 오는 곳이고 여차하면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그리 생각한 A는 조금씩 걸음을 내디뎠다. 동굴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니 안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둡고 거대했다. 밖에서 보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느끼던 A는 다시 한번 숨을 흡, 하고 들이마신 뒤 가슴에 힘을 최대한으로 준 채 걸어갔다. 그래도 기합이 있다면 어느 정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 발에 비늘이 계속해서 감기는 게 느껴졌으며 꽤 들어가 보니 비늘이 너무 많이 감겨서 앞으로 나아가기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무슨 비늘이 이렇게……. 의아해하던 A는 비늘의 모양새가 꼭 뱀의 껍질 같다고도 생각했다. 딱히 본 적은 없었다만 이따금 교과서에서 과학 시간에 뱀을 보긴 했으니까. 그것과 조금 비슷하려나 생각하던 A는 연신 제 발에 감긴 비늘을 떼어냈고, 이따금 바람이 불어오는 걸 맞으며 ‘역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떠올렸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뒤는 꽤 어둑어둑했다.

 

‘가만, 지금 이거…… 돌아갈 수 있는 건 맞겠지……?’

 

핸드폰이라도 들고 올 걸. 자신이 너무 안일했던 걸까. A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뒤 일단 들어왔으니 끝까지는 가 보자며 다시 걸어갔다. 비늘을 헤치고 겨우 앞으로 나아가던 차, 저 앞으로 환한 빛이 보였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으나 마냥 어둡기만 한 동굴 속에서는 자그마한 빛조차 크게 여겨질 뿐이었다. 어? 설마 동굴 끝인가? A의 얼굴은 그 여느 때보다 밝아졌으며 그의 걸음 역시 빨라졌다. 그래도 빛이 보이니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들기도 했는데. 반가운 마음에 성큼성큼 달려가다 보니 그 빛의 정체를 생각보다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A의 발아래에서 밝게 빛나던 그 물건은 다름 아닌 구슬이었다.

 

“……구슬?”

 

A는 제 엄지 손톱만큼 자그마한 구슬 하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건가 싶을 무렵, 또 한 번 거대한 바람이 불더라니 물비린내가 흘러나왔다. 계곡이니 물비린내가 나는 건 당연했다지만 이전까진 나지 않았던 냄새였기에 조금 의아한 건 사실이었다. 쌀쌀해진 두 팔에 온기를 주고자 가볍게 쓸어 만진 뒤 다시 손에 들린 구슬을 살폈다. 문방구에서 팔던 구슬과 크게 다르진 않아 보였으나 어째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이었고 촉감도 딱딱하기보다는 부드러웠다. 게다가 평범한 구슬 같은데 스스로 빛을 내는 게 퍽 신기했다.

 

잠깐, 혹시 이거 비싼 구슬 아닐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든 A는 그럴지도 모른다며 일단 구슬을 제 옷에 닦았다. 잘은 모르겠으나 대충 이렇게 보기 드물고 반짝거리는 건 좋은 물건일 것만 같았다. 이런 건 어디에 가져가야 하지. 금은방 같은 곳에 가져가면 제값을 쳐주려나.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구슬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내려놔.”

 

“무, 머, 뭐, 뭐야?!”

 

목소리는 단지 제 귓가에 들리는 게 아닌, 동굴 전체에 울려 퍼지듯 메아리와 함께 맴돌았다. 저밖에 없을 동굴은 내내 조용했기에 A는 당연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고개를 휙휙 돌리며 두리번거리던 차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인가 생각도 했으나 그건 절대 환청이 아니었다.

 

“내려놔. 그건 네 것이 아니야.”

“히익……!”

 

A는 괜스레 소름이 돋는 것 같아서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대체 이 소린 어디서 들리는 거란 말인가. 의아해하던 그는 왠지 오한이 느껴져서 살짝 떨다가 분명 구슬이 원인이라는 생각에, 주머니에 있던 구슬을 도로 꺼냈다. 이, 이걸 말하는 거야? 그가 묻자 또 한 번 큰 바람이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맞는 건가? 싶던 A는 구슬을 바닥에 스리슬쩍 내려놓았다.

 

……이제 됐지? 하고 묻던 A가 두리번거렸으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소리가 들린 건진 모르겠으나 여기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이상으로 나아가선 안 될 것 같았는데. 평소 예감이 틀린 적이 별로 없던 A의 사고 판단은 확실히 옳은 듯했다. 괜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돌아가자며 몸을 돌리자, 그때 A의 얼굴이 무언가에 부딪혔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A가 고개를 들어 올리니 그의 앞에 놓인 건 다름 아닌 거대한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그게 A의 앞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이, 이건 또 뭐야……?!”

 

놀란 A는 가만히 제 앞을 가로막은 걸 확인해 보았다. 손으로 만져보니 조금 딱딱했다. 겉에 둘러싸인 건 여태 자신이 만졌던 비늘 같기도 했는데, 소름이 돋던 A의 시선은 그 고깃덩어리가 이어진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너무 긴장하고 두려운 나머지 눈동자는 열심히 흔들렸고 이에 따라 시야에 담기는 풍경도 함께 흔들리기 바빴다. 대체 지금 자신이 무슨 일에 휘말린 건지. 천천히 왼쪽으로 시선이 이동하고 나니 점점 그 고깃덩어리가 두꺼워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그때 A가 마주한 건 꼬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설마, 설마…….’

 

너무 긴장한 나머지 A는 차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눈빛으로 제 앞의 물체를 쫓으며 그에 따라 몸을 돌리는 게 전부였다. 제 의지로 움직인다기보다는 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듯했으니. 그런 와중에도 몸은 사시나무마냥 덜덜 떨리기 바빴다. 천천히 꼬리를 타고 올라가던 A의 몸은 다시 반대로 돌려졌고, 동시에 그의 눈동자 안으로 거대한 생명체 하나가 들어왔다. 어디서도 본 적 없던, 감히 마주한 적 없던 거대한 몸의 무언가였다.

 

“대체, 이게…….”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띄우던 A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고요한 공간 안에선 침 삼키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렸다. 벗어나고 싶었으나 사방이 고깃덩어리에 둘러싸인 탓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자신이 환각이라도 보는 걸까? 꿈이라도 꾸는 걸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기에 A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제발 이 모든 게 꿈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는데, 두려움이 극에 달하고 나니 오히려 그 감정은 기이한 형식으로 변이되어 또 다른 용기를 자아냈다. 언젠가 ‘두려움은 다만 상상일 뿐, 현실은 별거 아니다’라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이다.

 

그래, 어쩌면 자신이 지금 멀쩡한 무언가를 상상에만 의지한 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여기가 너무 어두운 게 문제는 아닐까? 그리 생각하던 A는 제 앞에 있는 생물체를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하고자 바닥에 놓인 빛나는 구슬을 들어 올렸다. 구슬을 집으려고 몸을 숙일 때도 그의 몸은 빠르게 떨렸다. 혹시 몸을 숙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여 잔뜩 긴장한 채 빠르게 구슬을 들어 올렸으니. 눈앞의 그 모습을 제대로 확인해 보자 아무래도 그건 어디서 본 듯 말 듯한 모습이었다.

 

아, 분명 본 것 같은데 뭐더라…… 이게 뭐지……. A는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질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젠간 이런 거대한 생명체의 존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몸통이 길고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저만한 사람은 한 번에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존재. 심지어 코끼리까지 삼킬 수 있다는 걸로 유명한 동화까지 존재하던 그 존재의 이름을 생각해 내려던 차, 유레카를 외치기라도 하듯 A의 머릿속에 어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아! 하고 소리낸 A는 바로 그 단어를 읊었다.

 

“……뱀……?”

“―――!!!”

 

A가 그 말을 읊던 순간, 놀랍게도 동굴 안이 짐승의 울음소리로 채워졌다. 뱃고동 소리처럼 길게 이어진 울음에 A는 제 양손으로 귀를 막아야만 했고,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는데, 두려움에 눈물이 찔끔 나오던 찰나에 A가 들고 있던 구슬은 그 빛이 조금씩 사라지는가 싶더라니 대뜸 A의 손바닥 안으로 흡수되었다. 이건 또 뭐야……!!! 놀란 A가 구슬의 묘연한 행방에 의아해하며 연신 떨고 있으니, 그가 ‘뱀’이라고 외친 생물이 괴로운 듯 몸을 뒤틀다가 이내 조금씩 사라졌다.

 

“허억, 헉…… 허억…….”

 

숨이 가쁘게 내쉬어져서 호흡 곤란이 올 것만 같았다. 지금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건지. 눈만 껌뻑이며 정면을 응시하는데, 생물체가 사라지고 난 뒤 A 앞에 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정확히는 소년에 가까웠으며 유독 어여쁘게 생긴 듯한 그 소년은 죽일 듯한 시선으로 A를 노려보았다. 두려움이 극에 달했던 A는 소년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고 와중에 그 소년이 저를 죽일 것처럼 쳐다봤기에 눈물은 물론이고 콧물까지 흘렀다. 그걸 차마 닦아내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던 그였다. 소년은 대뜸 A의 멱살을 붙잡았다.

 

“……‘뱀’이라고?”

“저, 저한테 왜 이러시는…… 잘못 했으니까 이것 좀, 허윽…….”

“내가 고작 그딴…….”

 

소년은 진심으로 화가 난 눈치였다. 하지만 A는 소년이 왜 화가 났는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를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이 기이한 것들이 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 떠올릴 따름이었으니. 소년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마주한 A는 그저 눈을 깜빡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눈가에서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와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으니. 그 눈물은 조금 전에 A의 손바닥으로 삼켜진 구슬처럼 영롱한 빛을 자아냈다.

카테고리
#기타
페어
#Non-CP
추가태그
#월정액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