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거짓과 음모의 벽 앞에서
2021.12.21.
붉은 방 (임철우 소설)
임철우는 다수의 서정 소설을 발표한 서정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오월 작가’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는 그가 해당 시기의 광주를 소설의 영역에서 처음으로 표현했으며, 폭력적 체험의 기억과 그로부터 비롯된 죄의식을 영원한 주제로 삼아 작품 속에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임철우의 시도는 오월 광주의 ‘그날’에 국한되지 않으며, 한국 역사에 있었던 수많은 ‘그날’로까지 확장되어 우리 민족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서사화하기에 이른다. 사건과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매번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임철우의 작품은 근현대사에 자리한 거대한 비극으로 인해 일상 한가운데에 깊게 새겨진 상처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하며, 폭력적 세태에 동요하는 개인의 모습을 집요하게 비춘다. 또한, 살아남은 이가 살아남지 못한 이에게 느끼는 죄책감, 그것에 동반되는 정신 병리적 반응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역시 그의 작품 세계가 가진 특징이다.
1988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80년대에 행해지던 국가 폭력의 한 모습을 담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오기섭은 수사 기관에 의해 납치되고, 그는 최달식을 비롯한 수사관들에게 고문을 겪은 끝에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작중에서 피수사자와 수사관의 일인칭 시점이 번갈아 배치되며, 현재 그들의 처지와 트라우마가 한국전쟁과 분단이라는 아버지 세대의 비극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다. 오기섭과 최달식은 그러한 역사의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이다. 임철우는 이 작품을 통해,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상처가 완치되지 않는 한 트라우마는 끝없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외친다.
악의 평범성: 수사관들 | 이 소설은 고문이라는 비인도적 행위의 문학적 형상화라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작품이다. 작중에서 오기섭에게 행해지는 고문은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마저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극단적인 악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이들의 모습은 사악하거나 흉악하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다. 수사관들이 피수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본성이 악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악한 행위가 특별한 악의 없이 발생한다면, 이때 문제 삼아 마땅한 것은 비열함이 아닌 무(無)사유성이다. 비주체적 순응과 길들여짐, 체념은 극단적인 악을 초래하며, 이 악은 판단력이 결핍된 현상이다. “이 분야에선 닳고 닳은 베테랑들”인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손안에서 굴리면서도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대화를 주고받는다. 국가와 상사가 시키는 일을 아무런 생각 없이 수행하며,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나 자부심을 품지도 않는다. 수사관들은 그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유하지 않기에 무감각할 수 있다. 그들의 폭력과 악행은 국가 권력의 이름 아래에서 정당화되어, 반복되고 기계화된다. 결국 남는 것은 진부한 평범성뿐이다.
트라우마의 재생산과 치유: 오기섭과 최달식 | 독자는 오기섭과 최달식의 모습을 통해, 아직 치유되지 못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의해 또 다른 트라우마가 생겨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인물은 한국전쟁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현재에 표출되는 그들의 의식 또한 그것에 큰 영향을 받았을 수밖에 없다. 큰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월북했다는 사실은 오기섭에게 큰 불안 요소이다. 분단 지배 질서는 가족 간의 유대도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검열하고 판단한다. 북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은 이 시기 의심과 사찰의 대상이 되었다. 오기섭은 큰아버지의 존재가 언급되자 “두 동강이 난 이 땅의 그 누구도 결코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함정”이라고 탄식한다. 이른바 빨갱이 낙인찍기의 대물림이다. 한편 최달식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온 가족을 잃은 피해자다. “그들을 다 처단해야 한다”는 입버릇을 가진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이후, 최달식은 “원한과 복수와 저주와 증오의 피”가 그의 몸에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그가 품은 개인적 원한의 감정은 빨갱이들을 향하고, 국가적 혼란을 막고자 하는 사명감의 껍질을 뒤집어쓴다. 잘못된 믿음을 내면화하고 그 믿음으로 인해 폭력이 정당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또한 최달식의 이러한 생각은 종교 교리와 결합하여 그의 안에서 절대적인 것이 된다. 폭력의 피해자였던 그는 가해자로 탈바꿈되어 이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표면적 면모이며, 결국 이 둘은 모두 이데올로기 대립의 희생자이다.
기억하기의 치유 | 임철우는 이 소설에서 역사적 상처가 개인 일상의 영역을 침범할 때 그 폭력적 여파가 어떤 형상과 실체로 나타나는지,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어떻게 트라우마가 되어 새로운 상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피수사자를 대상으로 한 비인도적인 고문을 주관하는 수사관들은 사유하지 않기에 지극히 평범하고도 극단적인 악을 행하며, 오기섭과 최달식은 그들 아버지 세대의 비극인 한국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에 영향을 받아 트라우마의 재생산을 겪는다. 모두가 역사의 희생자이며, 상처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치유는 외면과 회피에서 오는 망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정 망각해야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잠식될 뿐인 무력감이다. 기억에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성장과 트라우마 치유를 향한 첫걸음일 것이다.
임철우의 글은 일종의 ‘기억하기 위한 글쓰기’로, 그는 역사적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없는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됨을 글쓰기 그 자체를 통해 주장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진정으로 망각해야 한다;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과거를 잊지 않으며 그것을 비판하면서도, 그 괴로움이 우리를 훼손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것에 무력하게 휩쓸려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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